종교개혁기념 주일을 앞두고 <김성로 목사, 부활교 사상 비판>(정이철 목사)이라는 귀한 신학 세미나에 논평자로 참여하게 된 것을 하나님께 감사드리며 종교개혁자들이 지키고자했던 “십자가 신앙”을 중심으로 “부활복음”의 5 가지 심각한 문제점에 대해 다음과 같이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1. 미숙한 신학의 참사 - 바른신학의 중요성

교회는 시작부터 늘 자신을 살피고 정통 기독교와 다른 주장과 미혹에 대해 바른 믿음을 수호하기 위한 끝없는 신앙의 길을 걸어왔다. 그 다른 믿음에 대항하는 대척의 중심에는 늘 하나님의 신학자들이 있었다. 바른 신학에 대응하는 신학에는 미숙한 신학과 나쁜 신학이 있다. 이단과 사이비들이 따르는 나쁜 신학도 문제이나 미숙한 신학도 그에 못지않게 교회 공동체에는 대단히 위험하다. 나쁜 신학은 지상에 노출되나 미숙한 신학은 잠재적 큰 위험을 내포하기 때문이다. 1986년, 우주왕복선 챌린저호가 발사 73초 만에 공중 폭파하여 승무원 7명이 먼지로 산화하였던 충격적 사건이 있었다. 당대 최고과학자들이 심혈을 기울여 만든 자신만만한 왕복선의 폭발 원인은 놀랍게도 수백만 부품 가운데 겨우(?) 탄력을 잃은 불량한(미숙한) 고무 링(O-ring)이 문제였다. 신앙과 신학도 마찬가지다. 선무당이 사람 잡듯 미숙한 신학이 가져오는 신앙적 참사는 챌린저호와 유사한 결과를 초래할 수 있음을 교회의 지도자들은 명심할 필요가 있다.

그동안 김성로목사에 대해 일부 호감을 가진 기독교이단대책협회(기이협)가 “많은 자료를 검토한 바, 신학적 착각에서 비롯된 내용과 잘못된 용어적인 표현과 시정해야 할 부분과 오해의 소지를 가진 부분들이 발견되어 그것에 대한 제언을 드린다”고 공문에서 표현했듯 김성로 목사의 설교와 글에서 미숙한 부분이 많다는 것을 기이협 스스로 일정부분 인정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런데 문제는 <바른믿음> 사이트를 통해 정이철, 림헌원, 이창모, 김대운 목사 그리고 권동우 대표 등의 최근 글들을 통해 볼 때 김성로 목사는 여전히 그 미숙한 주장들을 수정하지 않고 있다고 보여 진다. 미숙함이 나쁜 신학보다 더 악영향을 줄 수 있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2. 의인인 동시 죄인(simul justus et peccator)인 인간의 취약성 - 부활 아닌 오직 십자가가 살린다!

부활 구호가 절대로 인류를 살리지 못한다

인간은 대단히 취약한 존재다. 아담과 하와가 동산에 추방당하고 영원한 우주적 붕괴를 초래한 것은 겨우(?) 에덴동산에서 하나님과의 먹거리 언약을 지키지 못한데서 시작되었다. 그리고 그 결과는 참혹한 것이었다. 부활 구호가 인간을 살리는 게 아니다. 인간은 단순히 주문처럼 부활복음을 외친다고 변화되는 그런 존재가 아닌 것이다.

십자가가 살린다

개신교의 종교개혁신학이 ‘하나님의 의’를 ‘영광의 신학’(Theologia gloriae)이 아닌 사람 보기에 미련한 ‘십자가의 지혜’(Sapientia crucis)에서 찾으려 한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악과 시련과 핍박과 심지어 죽음조차 기꺼이 감당하려는 진정한 용기와 소망은 부활에서 오는 게 아니다. 참된 하나님 인식은 인간이 보기에 무기력하고 미련한 십자가에 있다는 “십자가 신학”에서 오는 것이다. 이것이 마르틴 루터와 칼빈의 종교개혁 신학이 고수해 온 참 신학이요 바른 신학이다. 성도는 부활이 아닌 십자가 지신 그 피묻은 그리스도의 손을 굳게 잡고 천국으로 가는 것이다. 부활이 아닌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담긴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의 인류의 무기력함과 비참함을 보라! 그리고 그 십자가에 작은 먹거리에도 넘어져버리는 비참한 모든 인류와 우주를 구원하시는 강력한 역설이 숨겨져 있음을 보라!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은 십자가 진노 아래 숨겨져 있는 하나님의 역설적 사랑 속에 눈물을 쏟고 감격하는 것이다.
 

3. 십자가를 냉소적으로 조롱하며 얻는 ‘부활복음’ 신앙(?)

그리스도로 시작하여 그리스도로 마치는 고린도전서

하나님은 십자가의 미련한 것으로 복음 전하기를 기뻐하신다. 그런데 김성로 목사는 “유튜브 설교”에서 “쓸데없이 십자가를 이야기한다”며 십자가를 냉소적으로 취급하며 부활 신앙을 강조한다. 하지만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다”(고전 2:2)고 했다. 놀랍게도 부활의 장인 고린도전서 15장조차 실은 부활이 중심은 아니다. 오히려 교만하고 은사를 자랑하고 미숙한 고린도교회 교인들을 향해 부활의 주가 되시는 그리스도를 소개하는 장이다.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가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었다(고전 1:24). 죄악이 만연하고 미숙한 고린도교인들에게 사도 바울은 부활의 장 고린도전서 15장을 통해 그리스도로 시작하여(1-4절 참조) 그리스도에 대한 증거(57절 참조)로 인도한다. 뿐만 아니라 고린도전서 전체도 부활이 아닌 그리스도로 시작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끝나는 책임을 기억하라!

부활의 심판대 앞에 무엇을 의지하고 설 것인가? 부활? 그리스도의 피!

부활은 그리스도인들에게만 적용되는 단어가 아니다. 모든 인류는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될 것이다. 그때 우리들은 무엇을, 누구를 의지할 것인가? 그때도 사람들은 부활을 의지하겠는가? 부활을 소망하지 않는 그리스도인은 없다. 그리스도인들에게 부활은 복 된 소망이다. 하지만 십자가를 우롱하듯이 냉소적으로 대하면서까지 부활을 강조하면 안 된다. 인간은 신앙의 유무를 떠나 누구나 부활하여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될 존재일 뿐이다. 그때 우리들은 십자가가 아니면 무엇을 의지할 것인가! 굳이 부활을 강조하려면 오히려 복음, 하나님 나라, 소망, 복 된 소망, 영원한 소망, 산 소망, 영원한 생명, 영원한 하나님 나라의 복음과 같은 더 복되고 포괄적인 용어가 얼마나 많은가. 더구나 부활의 중요성을 지나치게 강조하기 위해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너머 무리하게 그리스도의 이중제사론까지 나아간다면 단번에 드리신(히 9:26; 10:10)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심각하게 모독하는 아주 위험한 신학이 되는 것이다.
 

4. <낯선 신학용어>의 분별없는 사용(일명 ‘이중제사’(?), ‘부활복음’(?), ‘하나님의 피’)은 반드시 신학적 평가를 받아야 한다.

김성로 목사는 스스로 기이협의 제언에 대해 자신이 투박한 표현으로 오해의 소지가 있었다고 고백하였다. 그렇다. ‘하나님의 피’라는 용어 사용은 ‘성부의 십자가’나 ‘성부의 부활’, ‘성자의 열매’, ‘성령의 로고스’처럼 아주 낯설고 이상한 오해를 살 수 있는 말이다. 김성로 목사는 삼위일체의 전유(專有, appropriation) 개념을 잘 이해 못하는 듯하다. 더구나 ‘이중제사’, ‘부활복음’ 등의 문제가 현재까지 끊임없이 거론되는 것은 이 문제가 여전히 정리되지 않고 있음을 말하고 있다.

교회가 신앙 선배들이 이룩한 신조와 교리를 존중하는 것은 교회의 역사를 선하시고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의 섭리로 보기 때문이다. 따라서 새로운 신학적 용어를 사용할 시 신중에 신중을 기해야 한다. 낯선 신학적 단어를 빈번히 사용할 때 그 용어는 반드시 신학적 평가를 받아야 하는 것이다. 한국교회는 최근 미숙한 낯선 신학적 용어의 범람으로 심각한 교회적 파행과 위기를 경험하고 있다. 교회는 성경과 더불어 역사 속에서 새로운 신학적 용어에 대해 치열한 논쟁과 토의를 거쳐 성령의 인도하심 속에 바른 교리를 구성하여 왔다.

비록 과학과 기술의 발달 속에서 다양한 단어들이 탄생하였더라도 이것들을 새로운 신학적, 교리적 용어로 활용하는 것은 극히 조심해야 한다. 마리아의 염색체, DNA, 예수의 염색체 숫자, 마리아의 월경, 하늘 언어, 신사도, 빈야드 운동, 구도자 중심의 열린 예배(열린교회가 아님), 한민족 제 2 선민론, 제 2 히브리민족, 그리스도의 부활 후 또 다른 제사(일명 이중제사), 부활복음, 금가루현상, ‘신천지’의 제멋대로의 성경알레고리해석 등과 같은 성경적으로 낯선 단어들이 미숙한 신학이나 신비주의와 결합할 때 그것은 성령의 역사가 아닌 불순한 폭발력을 가지게 될 수도 있다. 따라서 신학 전개에 있어 이 같은 교회사 속의 낯선 용어의 사용은 성령의 사람들 가운데 치열한 신학적 논증 속에 달궈져서 그 진위(眞僞)를 평가 받은 다음 정금같이 나와야 하는 것이다.
 

5. 열심보다 중요한 <바른 믿음>

부흥이 전부는 아니다. 조나단 에드워드의 말처럼 마귀도 선한 부흥에 (미숙한 신학을 동원하여) 맞불을 놓는다. 작금의 일부 한국교회가 그렇다. 한국교회는 낯선 신학, 이상한 신학으로 양적 성장을 한 낯선 교회들의 도전 앞에 바른 신앙을 수호해야할 과제를 안고 있다. 김성로 목사도 자신이 스스로 건전한 교단 소속 목사임을 늘 표명하고 있기에 끊임없이 논란을 일으키고 있는 자신의 신학적 문제에 대해 특정 단체(기이협)가 아닌 한국교회 앞에 문제된 부분에 대한 솔직하고 진지한 해명이 필요하다고 본다. 하나님은 살리는 영이시다. 그리고 목사는 부흥이 아니라 바른 길을 제시해야 하는 사람이다. 이제 미숙한 신학을 계속 고집하지 말고 바른 길로 들어서는 것만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길일 것이다.

김성로 목사에게 드리는 마지막 권면은 이것이다. 김성로 목사가 좋아하는 히브리서는 부활복음이 아니라 예수도 자기 피로써 백성을 거룩하게 하려고 영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으니 그런즉 우리도 “그 능욕을 지고 영문 밖으로 그에게 나아가라”(히 13:13)고 한다. 그리고 ‘단번에 드리신 피 묻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없이 부활의 “산 소망”은 결코 없다!

조덕영 박사(창조신학연구소 소장, 창조론오픈포럼 공동대표, 김천대-평택대 겸임교수, 조직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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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덕영 박사는 환경화학공학과 조직신학을 전공한 신학자다. 강남대, 개신대학원, 건양대, 명지대, 서울신(예장 합동), 서울기독대학원, 백석대와 백석대학원, 피어선총신, 한세대신대원에서 가르쳤고, 안양대 겸임교수, 에일린신학연구원 신대원장을 역임했다. <과학으로 푸는 창조의 비밀>’(전 한동대총장 김영길 박사 공저), <기독교와 과학> 등 30여 권의 역저서를 발행했고, 다양한 창조론 이슈들을 다루는 '창조론 오픈포럼'을 주도한다. 창조론과 관련된 방대한 자료들을 비축하고 있는 인터넷 신학연구소'(www.kictnet.net)을 운영하며, 현재 참기쁜교회의 담임목사이며 김천대, 평택대의 겸임교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