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창모 목사의 <방언, 그 불편한 진실>(21)

들어가는 말

성령의 은사는 중지되었는가? 아니면, 지금도 왕성하게 계속되고 있는가? 또 이것도 아니라면, 계속 소멸되고 있는가? 이 문제를 명확히 규명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일이다. 왜냐하면 현대교회에서 거의 합법적으로 무분별하게 난무하고 있는 방언기도의 거짓 여부를 가려낼 수 있는 또 하나의 결정적인 근거가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직도 이 문제가 규명되지 않은 채 논쟁을 계속하고 있는 이유는 이 부분에 대해 바울이 명확하게 말하고 있는 고전13:10-13을 바르게 해석하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은사 중지론자들은 고전13:10(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부분적으로 하던 것이 폐하리라)에서 “온전한 것”을 정경의 완성으로 해석함으로써, 성령의 은사는 이미 중단되었다고 주장한다. 반면에 오순절주의자들은 똑같이 고전13:10에서 “온전한 것”을 예수의 재림으로 해석함으로써, 지금도 성령의 은사는 지속되고 있다고 주장한다. 이들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지금은 말세이므로 성령께서 교회를 더욱 능력 있게 하시기 위하여 이전보다 더욱 풍성하게 은사들을 주시고 계시며, 이런 이유로 지금 성령 충만한 오순절주의를 중심으로 풍성한 은사들과 기적들이 일어나고 있다고 주장한다.

이제부터 3회에 걸쳐서 고전13:10 이하를 세심하게 주해함으로써 은사 중지론자들의 주장의 문제점과 오순절주의자들의 주장의 거짓됨을 규명해 보자.
 

성령의 은사는 유효 기간이 있다.

바울은 8절 이하에서 성령의 은사는 유효 기간이 있다고 말한다.

"사랑은 언제까지나 떨어지지 아니하되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하리라"(고전13:8).

고린도교회는 성령이 교회에 주신 은사의 목적을 놓침으로써, 성령의 은사를 개인의 덕을 세우는 수단으로 여겼다. 그래서 이들은 자신의 영적 우월을 드러내는 데 가장 유리한 방언에 더욱 집착했다. 그러나 성령이 교회에 주신 은사는 교회의 덕을 세우고(고전14:4) 교회를 유익하게(고전12:7) 하는 목적으로 주신 수단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은사보다 더 중요한 것은 교회의 유익을 위해 쓰도록 은사를 주신 성령의 뜻을 이루는 것이다. 그런데 성령의 뜻대로 은사를 쓰려면 필히 사랑이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사랑이 없으면 아무도 교회의 유익을 위해 은사를 사용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은사보다 더 중요한 것은, 교회의 유익을 위해 은사를 사용하도록 역사하는 사랑이다.

성령이 교회에 음식을 떠먹을 수 있는 숟가락을 선물로 주셨는데, 이 숟가락은 자신이 직접 떠먹을 수는 없으나 남에게는 떠먹일 수 있는 긴 숟가락이다. 성령이 이런 긴 숟가락을 교회에 주신 까닭은 긴 숟가락으로 서로 다른 지체들에게 음식을 떠먹여 줌으로써 교회에 사랑이 넘치도록 하기 위함이다. 그러므로 긴 숟가락을 가진 자는 다른 지체들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어야 하는 것은 필수적이다. 그런데 만약 어떤 지체에게 이런 사랑이 없다면, 그는 긴 숟가락으로 자신을 위해 음식을 떠먹으려고 할 것이다. 그러나 긴 숟가락으로는 자신을 위할 수 없음을 안다면, 그는 긴 숟가락을 버리고 직접 짧은 숟가락(슬프게도 고린도교회가 만들어낸 짧은 숟가락이 하나님께 비밀을 말한다는 개인용 방언이다!)을 만들어 자신을 위해 음식을 떠먹으려고 할 것이다. 반대로 그에게 지체를 사랑하는 마음이 있다면, 그는 긴 숟가락으로 자신이 아닌 다른 지체에게 음식을 떠먹여줄 것이다.

이렇게 사랑이 넘치는 교회야말로 은사를 주신 성령이 원하시는 교회의 모습이다. 그러므로 교회에서 긴 숟가락 같은 은사보다 더 중요한 것은 교회의 유익을 위해 은사를 쓰려고 하는 사랑이다. 그러므로 교회가 영원히 존재하는 한 교회를 위하는 지체들의 사랑도 영원히 존재할 것이다.

그러나 성령의 은사는 때가 되면 폐하게 된다. 왜냐하면 은사는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연약한 교회의 유익을 위하는 수단으로 주어졌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수의 재림 때 교회가 완성되면 연약한 교회를 세우고 유익하게 하는 데 필요했던 은사들은 저절로 사라지게 될 것이다.1)
 

성령의 은사는 언제까지 유효한가?

‘성령의 은사가 폐하는 시기’는 오순절주의자들과 은사 중지론자들 모두에게 아주 예민한 문제이다. 그러므로 고린도전서 13장 10절은 양쪽 모두에게 아주 중요한 본문이 될 것이다.

오순절주의자들은 고린도전서 13장 10절의 “온전한 것”을 ‘예수의 재림’으로 해석하므로 성령의 은사는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까지 유효하다고 본다. 또한 재림의 때가 가까이 올수록 사단의 역사가 더욱 강력해질 것이므로 교회가 이에 맞서 싸울 수 있도록 성령도 교회에 은사를 더욱 풍성하게 부어주실 것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20세기를 시작하면서 성령은 아주사 거리에서의 방언을 시작으로 현대 교회에 방언의 은사를 풍성히 부어 주셨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오늘날에 오순절주의와 신사도주의를 중심으로 기적적인 은사들과 함께 방언기도가 교회마다 홍수를 이루는 것은 고린도전서 13장 10절대로 이루어지고 있는 당연한 결과라고 말한다.

반면에 은사 중지론자들은 고린도전서 13장 10절의 “온전한 것”을 ‘성경의 완성’으로 해석하므로 성경이 완성된 시점 이후에는 성령의 은사가 폐했다고 주장한다.2) 그러므로 오늘날에는 방언의 은사뿐 아니라 다른 은사들도 모두 사라졌다는 것이다.3) 그러나 이 해석은 명백한 오석이다. 이렇게 은사 중지론자들이 고린도전서 13장 10절을 경솔하게 오석했기 때문에 오순절주의자들의 거짓 방언을 제대로 비판하지 못하고, 오히려 오순절주의자들의 주장에 힘을 실어주는 역효과를 낳고 말았다.4)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3장 8-11절에서 은사의 유효 기간에 대해 우리에게 중요한 정보를 제공해 준다. 이 정보는 거짓 은사의 정체를 밝히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할 것이다. 그러면 바울은 본문에서 은사의 유효 기간을 어떻게 설명하고 있는지 살펴보자(여기서도 전후 문맥을 염두에 두고 본문을 읽어야 하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하다).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부분적으로 하던 것이 폐하리라"(고전13:10).

본문에서 “온전한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좋은 주석에 의존하지 않더라도, 전후 문맥만 제대로 살피면 어렵지 않게 파악할 수 있다.

"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지금은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고전13:12).

바울이 여기서 “지금은”과 “그 때에는”을 동원해서 서로 비교하려고 하는 것은 희미한 상(像)과 선명한 상이 아니라, 비쳐진 상(간접적인 것)과 실물(직접적인 것)이다. 당시의 거울은 지금의 거울에 비해 희미하기는 했지만,5) 설령 지금의 거울처럼 사물을 실물과 똑같이 비춰 준다 할지라도, 그것과 상관없이 거울에 비친 사물은 어디까지나 실제가 아닌 ‘비쳐진 상’에 불과하다. 이 비쳐진 상은 아무리 선명하다 할지라도 실물을 마주 대하는 것과는 비교할 수 없다.

따라서 바울이 말하는 “온전한 것이 올 때”는, 아무리 정확 무오하다 할지라도 성경을 통해 간접적이고 부분적으로 하나님 나라를 보는 때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를 실제로 보는 때, 즉 예수 그리스도를 얼굴과 얼굴을 맞대고 보는 때를 의미한다. 이때 설령 시력이 나빠서 예수 그리스도가 좀 희미하게 보인다 할지라도 상관없다. 왜냐하면 눈앞에 계신 분이 실제로 예수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이다. 또 “온전히 알리라”(evpignw,somai, 에핑노소마이)는 헬라어로 ‘실제로 완벽하게 체험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온전한 것이 올 때”는 성경이 완성되는 때가 아니라, 예수님을 실제로 만나게 되는 때, 즉 예수님의 재림 때를 말하는 것이 틀림없다.6)

은사의 소멸, 특히 계시적 은사들(지식, 지혜, 예언, 방언)의 소멸은 방언 폐지자들의 주장대로 성경의 완성과 깊은 관련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계시적 은사의 소멸에 더 직접적으로 관련이 있는 것은 성경의 완성이 아니라 완성된 성경의 보급이다. 왜냐하면 아무리 성경이 완성되었다 할지라도 완성된 성경이 보급되지 않은 곳에서는 성경의 완성이 아무런 소용이 없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태양이 떴어도 태양 빛이 들어오지 않는 동굴 속에서는 여전히 촛불이 필요하듯, 성경이 완성되었어도 성경이 보급되지 않은 곳에서는 여전히 성령은 특별한 은사들(예언과 방언)을 통해서 사람들에게 계시를 전달하신다는 말이다. 특히 방언의 은사는 복음(성경)을 전하는 자와 복음을 듣는 자가 사용하는 언어와 깊은 관련이 있다. 다시 정리하면, 성경이 완성되었어도 완성된 성경이 보급되지 않은 곳에서는 여전히 예언의 은사는 존재할 것이며, 성경이 보급되었어도 그 성경에 사용된 언어로 의사소통이 되지 않는 곳에서는 여전히 방언의 은사는 존재할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는 복음이 땅 끝까지 전해진 후, 즉 성경이 모든 민족에게 전해진 후이다.7) 그러므로 이때가 되면 계시적 은사들은 당연히 소멸될 것이며, 다른 은사들도 더 이상 쓸모없을 것이므로 모두 소멸될 것이다.8)
 

--- 각주 ---

1) 어떤 이들은 본문 8절의 ‘폐하고’(katarge,w, 카타르게오)와 ‘그치고’(pau,w, 파위오)를 구별해서 설명하기도 하기도 한다. 로버트 토마스, 성령의 은사들, 김지찬 옮김(서울: 생명의말씀사, 1983), p.144; 옥성호, 방언 정말 하늘의 언어인가?(서울: 부흥과개혁사, 2008), p.147. 그러나 바울이 여기서 다른 단어들을 쓴 것은 중복을 피하기 위함이며 의미상의 차이는 없다.

2) 옥성호, 방언 정말 하늘의 언어인가(서울: 부흥과개혁사, 2008), pp.147이하, p.153; 아더 핑크는 “성경의 정경이 완성되었을 때 영감 받는 사람들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아더 핑크, 성령론, 지상우 옮김[서울: 엠마오, 1988], p.328)고 말함으로 궁극적으로 방언 폐지론자들과 동일한 주장을 한다.

3) 물론 모든 방언 폐지론자들이 고전13:10을 이렇게 해석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옥성호 형제를 비롯한 대부분의 방언 폐지론자들이 이 해석을 지지하고 있다. 그런데 이 해석의 가장 심각한 문제는 성경이 완성되기 전, 즉 방언이 중지되기 전에 고린도 교회에 있었던 고전14:2, 4의 거짓 방언을 성령의 은사로 인정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방언 폐지론자들은, 오순절주의자들이 자신의 방언을 고전14:2, 4의 방언과 같은 것으로 주장하는 것을 효과적으로 반박하지 못한다. 방언 폐지론자들의 주장과 본서의 결정적인 차이 중 하나가 바로 이것이다. 본서는 방옹자들과 마찬가지로 “온전한 것”을 예수의 재림으로 본다. 따라서 지금도 방언을 비롯한 모든 은사들은 바울의 가르침대로 아직 존재한다. 그럼에도 은사들은 시간이 흐를수록 현저히 소멸되고 있으며, 예수의 재림이 가까운 이 시대에는 마치 폐한 것처럼 보일 정도로 성령의 은사는 미미하다. 그러므로 지금도 특별한 곳, 예를 들면 오지에서 선교하는 선교사들의 보고에서 아주 드물기는 하지만 배우지도 않은 원주민의 말을 방언으로 말한 사례들을 볼 수 있다.

4) 필자가 특히 가슴 아팠던 것은 옥성호 형제가 이 본문을 가지고 ‘성경의 완성으로 완전한 것이 이미 왔으므로 방언의 은사는 끝났고, 그러므로 지금 하고 있는 방언은 모조리 가짜다’라고 결론 내린 것이다. 옥성호, 방언 정말 하늘의 언어인가?(서울: 부흥과개혁사, 2008), pp.146-154). 물론 이 해석이 사실이라면 손쉽게 오순절주의자들의 방언하는 입을 봉할 수 있다. 그러나 옥성호 형제는 너무 쉽게 오순절주의자들의 방언을 잠재우려고 했다. 그래서 ‘온전한 것’을 ‘정경의 완성’으로 경솔하게 단정 지음으로 오히려 오순절주의자들에게 유리한 고지를 제공해 버렸다. 옥성호 형제의 책이 나왔을 때 방언을 하는 많은 사람들이 고민하며 갈등에 빠졌던 것 사실이다. 그러나 바로 뒤이어 나온 김동수 교수의 책이 이 해석이 오석임을 명쾌하게 설명함으로써[김동수, 방언은 하늘의 고귀한 언어(서울: 이레서원, 2008), pp.117-118] 옥성호 형제의 책 때문에 방언으로 고민하던 대부분의 사람들을 설득하는 데 성공했다. 이것으로 김동수 교수는 옥성호가 주장하는 현대 방언의 다른 문제들까지도 손쉽게 잘못된 것으로 치부해 버리고, 자신이 주장하는 방언에 대한 잘못된 생각을 다수의 사람들에게 믿게 하는데 성공했다. 물론 이것 때문에 필자가 본서를 쓰려고 결심했으므로 옥성호 형제의 실수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일하심이 틀림없겠지만, 옥성호 형제의 실수로 말미암은 부정적인 여파는 걱정할 수밖에 없는 수준이다. 다른 방언 폐지론자들의 책에서도 “온전한 것”을 성경의 완성으로 보는 오석 때문에 방언 반대 입장의 설득력이 떨어져 오히려 방언하는 자들에게 거짓 방언에 대해 더 큰 신뢰를 주고 있는 것은 가슴 아픈 일이다. 또 이런 오순절주의자들의 승리 분위기에 편승하여 최근에는 방언을 찬양하는 책들이 봇물 터지듯 쏟아져 나오는 것도 가슴 답답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몇 줄 또는 한 두 페이지에 걸쳐 방언을 반대하는 책들은 더러 있어도 방언이라는 단일 주제로 방언을 반대하는 책은 한국 기독교 역사 100여년을 통틀어도 몇 권되지 않는다. 그러나 방언이라는 단일 주제로 방언을 찬양하는 책들은 휴지통을 가득 채운 휴지들처럼 널려 있다.

5) 바울 당시의 고린도의 청동 거울은, 물론 지금의 거울과는 비교할 수 없겠지만, 값비싼 것은 상당히 정교하게 제작되었기 때문에 사물을 거의 정확하게 비추어 볼 수 있었다고 한다.

6) 옥성호 형제도 “온전한 것”을 ‘예수의 재림’으로 보는 것이 더 낫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 같다. 옥성호, 방언 정말 하늘의 언어인가(서울: 부흥과개혁사, 2008), pp.148-9을 보라. 그러나 안타깝게도 오순절주의자들과의 논쟁에서 이기는데 열중한 나머지 “온전한 것”을 ‘성경의 완성’이라고 성급하게 해석한 것 같다.

7)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언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마24:14)>

8) 옥성호 형제는 “온전한 것”을 성경의 완성으로 보아야 하는 근거가, 본문에 언급되는 은사들이 계시적 은사이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옥성호, 방언 정말 하늘의 언어인가?(서울: 부흥과개혁사, 2008), pp.148 이하. 그러나 바울이 여기서 계시적 은사들만 언급하고 있는 이유는 온전한 것이 성경의 완성이므로 계시적 은사들만 사라질 것이기 때문이 아니라 특별히 이 은사들이 고린도 교회에서 문제가 되고 있었기 때문이며, 또 당시에 사라져 가는 은사들 중에서 계시적 은사들의 사라짐이 가장 두드러졌기 때문이다. 물론 성령의 은사들 모두가 예수님의 재림 때까지 존재하지는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은사의 존재 이유는 그 은사의 필요성과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고전13:11 참고). 따라서 예수의 재림 전이라도 교회에서 필요성이 완전히 끝난 은사가 있다면, 그 은사는 예수의 재림 때가 아니라 필요성이 끝난 그때 사라질 것이다. ‘사도와 선지자’(고전12:28)가 여기에 해당되는 좋은 사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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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창모 목사는 죽음에 이르는 병에 걸린 한국 교회를 신물 나게 체험하며 갈등하다 하나님을 향해 살아 있는 교회를 꿈꾸며 1999년 김천에서 ‘제자들 경배와 찬양교회’를 개척하였다. 이창모 목사는 한국교회를 죽음에 이르게 한 병이 단지 성공주의, 황금만능주의, 도덕적 윤리적 타락 등이 아니고 이미 한국교회에 만연된 잘못된 신학에 있음을 확신하고서 무엇이 바른믿음인지 신학적으로 깊이 고민하는 목사이다. 이창모 목사는 자신이 중2때 수련회에서 방언을 받았고, 대부분의 목사들이 그것을 ‘영의 기도의 언어’라고 가르치므로 의심없이 수 십년 동안 옹알거리는 방언현상으로 기도(?)하였던 대표적인 방언기도자였다. 김우현, 김동수 등이 저술한 거짓 방언을 미화하는 한심한 서적들을 접한 후 방언에 관한 깊은 신학적인 성찰을 시작하게 되었고, 결국 오늘 날 방언이라고 알려진 소리현상과 성경의 참된 방언은 무관하다는 사실을 확신하게되었다. 이전의 자신처럼 방언으로 기도한다고 착각하고 있는 다른 목회자들과 신자들을 진정한 복음으로 돌이키기 위해 <방언, 그 불편한 진실>(밴드오부퓨리탄,2014)을 출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