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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예지와 택함 - 아더 핑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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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예지와 택함 - 아더 핑크
  • 김완숙
  • 승인 2016.09.25 03:1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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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해가 많은 이 주제를 더 논하기 전에 잠시 멈취서 용어의 정의를 내려보자. ‘예지’란 무슨 뜻인가? ‘미리 안다’는 것이라고 누구나 쉽게 대답할 것이다. 그러나 너무 성급하게 결론을 내려서는 안 되겠다. 그렇다고 웹스터 사전을 뒤적이면서 최종 판단을 내려서도 안 되겠다.

왜냐하면 이것은 용어에 관한 어원학 차원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필요한 것은 그 단어가 성경에 어떻게 쓰여졌나를 알아내는 일이다. 성령의 언어 구사는 항상 그 단어의 의미와 범위를 설정해 준다. 많은 혼동과 오해를 일으키는 이 단순한 규칙을 적용함은 잘못이다.

많은 사람들은 자기들이 성경에 기록된 어떤 단어의 의미를 이미 알고 있다고 상상한 나머지 성구사전을 통하여 자신들의 상상을 시험해보려고 들지 않는다. 이점을 좀 더 확대해 보자. ‘육신’이란 단어를 살펴보자. 많은 사람들이 그 의미는 너무나도 분명하므로 성경에 기록된 여러 관련 성구들을 찾는 것은 시간낭비라고 생각한다. 사람들은 그 단어가 신체와 동의어라고 성급하게 결론을 내리고 더 이상 조사해 보려고 하지 않는다.

그러나 사실 성경에 자주 나타나는 ‘육신’이란 말은 신체 이상의 의미를 갖고 있다. 그 용어에 내포된 의미는 그 단어가 나타나는 모든 경우를 부지런히 비교 검토하고 각각의 문맥을 연구함으로써 얻어질 수 있다.

‘이상’이란 말을 예로 들자. 성경의 일반적 독자는 이 단어가 인류와 같은 뜻으로 쓰인다고 상상한다. 그 결과로 그 용어가 나타나는 많은 구절이 잘못 해석되고 있다. ‘불멸’이란 단어도 그렇다. 전혀 조사할 필요가 없다고들 한다. 분명히 그 단어는 도말되지 않는 영혼을 지칭한다고 생각한다.

독자여, 그러나 말씀에 관한 한 상상은 금물임을 알아야 한다. 만약 독자가 ‘멸함’과 ‘불멸’이 나타나는 구절들을 신중하게 검토한다면, 이 단어들이 영혼에 적용된 것이 아니요 항상 신체에 적용되었음을 발견할 것이다.

지금까지 ‘육신’ ‘세상’ ‘불멸’에 언급한 내용이 그대로 ‘앎’과 ‘예지’에 적용될 수 있다. 이 단어들이 단순한 인식일 것이라는 상상을 버리고 오히려 그 단어들이 사용된 서로 다른 구절들을 신중히 검토해야 한다. ‘예지’란 단어가 구약에서는 나오지 않는다. 그러나 ‘안다’는 자주 언급되고 있다. 그 용어가 신과 관련되어 나타날 때 그것은 종종 은총을 의미하며 단순한 인식이 아니라 대상을 향한 사랑을 표시한다.

“내가 이름으로도 너를 앎이니라”(출 33:17).

“내가 너를 알던 날부터 옴으로 너희가 항상 여호와를 거역하였느니라”(신 9:24).

“내가 너를 복중에 짓기 전에 너를 알았고”(호 8:4).

“내가 땅의 모든 족속 중에 너희만 알았나니”(암 3:2).

이 구절들에서 ‘안다’는 것은 사랑을 받거나 택함받음을 의미한다. ‘안다’는 단어는 또한 신약에서도 자주 쓰이고 있다. 그 의미는 구약과 동일하다.

“그 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마 7:23).

“나는 선한목자라 내가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요 10:14).

“또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면 이 사람은 하나님의 아시는 바 되었느니라”(고전 8:3).

“주께서 자기 백성을 아신다”(딤후 2:19).

신약에 사용된 ‘예지’란 단어는 단순히 ‘안다는 것’보다 덜 모호하다. 그것이 나타나는 모든 구절을 신중하게 검토한다면, 그것이 장차 발생할 사건에 관한 단순한 인지에 불과한 것인가 하는 것이 논점이 됨을 발견할 것이다. 사실은 그 ‘예지’란 단어는 성경에서 결코 사건이나 행위와 관련하여 사용된 적이 없고 대신에 항상 사람에 관련하여 사용되었다.

하나님이 “미리 아신”것은 사람이지 사람의 행위가 아니었다. 이를 증명키 위해 이 표현이 구사된 몇몇 구절을 인용해 보자. 처음 나타나는 곳은 사도행전 2:23이다.

“그가 하나님의 정하신 뜻과 미리 아신 대로 내어준 바 되었거늘 너희가 법 없는 자들의 손을 빌어 못 박아 죽였다”

이 구절을 조심스레 살펴보면 사도 베드로가 하나님이 미리 아신다고 말함은 십자가 처형 그 자체가 아니요 십자가에 못 박힌 그 인격을 뜻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스도가 내어준 바 되었거늘.”

두 번째 나타나는 곳은 로마서 8:29,30이다.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여기 사용된 대명사를 유념해 보라. 그가 미리 아신 것은 사물이 아니요 사람이다. 신이 미리 아신 것은 그들의 의지의 순복도 아니요 그들의 믿음도 아니요 바로 그들 자신들인 것이다.

“하나님이 그 미리 아신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아니하셨나니”(롬 11:2).

다시 한 번 그 용어가 단순히 인격을 지칭하여 쓰여졌다. 오직 사람들에게 사용된 것이다. 마지막 언급은 베드로전서 1:2에 나와 있다.

“곧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을 따라 ... 택하심을 입은 자.”

누가 “아버지의 미리 아심을 따라 택하심을” 입었는가? 바로 직전의 구절이 이를 설명해 준다. 즉 흩어진 나그네, 믿는 유대인들이다. 여기서도 또한 그 단어 사용의 대상이 인격들이지 그들의 나타난 행위가 아님을 보여주고 있다. 하나님의 “미리 아심”은 어떤 사람의 행위, 즉 그들의 ‘회개와 믿음’이며 그러한 행위로 인해 하나님은 그들을 택하여 구원시켰다고 주장함은 지금까지 살펴본 구절들을(더 이상은 없지만) 상고해 볼 때 그 영적 근거가 있다고 할 수 있을까?

그 대답은 전혀 ‘아니다’이다. 성경은 회개와 믿음이 하나님에 의해 미리 예견되고 미리 아신 바 되었다고 하지 않는다. 물론 하나님은 영원 전부터 누가 회개하고 누가 믿을 것인가를 안다. 그러나 이것이 성경에서 언급하는 하나님의 ‘예지’의 대상은 아닌 것이다. 그 단어는 한결같이 하나님이 미리 아신 바 된 인격을 지칭하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바른 말을 본받아 지켜야”(딤후 1:13) 하겠다.

우리가 특별히 주의를 기울이고자 하는 또 다른 점은 위에서 인용한 처음 두 구절이 평범하고도 명백하게 하나님의 “미리 아심”이 원인이 아님을 보여주고 있다. 그 대신 무엇인가 그 배경이 되고 있고 선행한다. 그 무엇은 바로 그의 주권의 뜻이다. 그리스도는 “①하나님의 정하신 뜻과 ②미리 아신 바대로 내어 준 바 되었다”(행 2:23). 그의 뜻은 그의 미리 아심에 대한 근거이다.

이 같은 사실은 로마서 8:29에 다시 언급된다. 그 구절은 “왜냐하면”으로 시작된다. 이것은 직전의 구절을 살펴보라는 뜻이다. 바로 직전의 구절은 무엇을 말하는가?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하나님의 “미리아심”은 그의 뜻에 기초하고 있다.(시 2:7) 하나님은 무엇이 일어날 것인가를 미리 아신다. 왜냐하면 그가 장래사를 결정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하나님이 인생을 미리 아셨기 때문에 택하셨다고 함은 성경의 순서를 뒤바꾸는 것이요 말 앞에 마차를 갖다 놓는 격이다.

진실로 그가 택하셨기 때문에 그는 “미리 아신다.” 이것은 선택의 원인이나 근거를 피조물이 아닌 하나님 자신의 주권적 의지에 설정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스스로 어떤 사람을 택하셨다. 그것은 그들에게 내재하는, 또는 그들로부터 발산되는 선행이나 예견된 선함이 아니라 단지 하나님 자신의 기쁘신 뜻에 기인한다.

그러면 왜 하나님은 어떤 사람은 택하고 어떤 자는 버렸는가? 우리는 모른다. 단지 “아버지가 당신의 기쁘신 뜻대로” 하셨다고 말할 수 있을 뿐이다. 로마서 8:29은 평범한 진리이다. 즉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기초가 놓이기 전에 어떤 죄인들을 택하여 구원받게 하셨다는 것이다(살후 2:13). 이것은 그 구절의 마지막에 분명히 언급되어 있다.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하나님께서는 그가 미리 아신 사람들이 본받도록 예정하신 것이 아니라, 도리어 그와 반대로 그가 “미리 아신”(즉 사랑하고 택한) 사람을 “본받도록” 예정하셨다. 그리스도를 본받음은 원인이 아니라 하나님의 미리 아심의 결과이다.

하나님은 어떤 죄인이 믿을 것이라고 예견했기 때문에 그를 구원한 것이 아니다. 거기에는 단순하지만 충분한 이유가 있다. 즉 어떤 죄인도 하나님이 그에게 믿음을 허락하기 전에는 믿을 수 없다는 사실이다. 마치 하나님이 그에게 시력을 주시기 전에 볼 수 없는 이치와 같다. 시력은 신의 선물이다. 본다는 것은 그의 선물을 사용한 결과이다. 마찬가지로 믿음은 신의 선물이며(엡 2:8,9), 믿는다는 것은 그의 선물을 사용한 결과이다.

어떤 사람이 때가 되면 믿을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택하셨다는 것은 믿음을 공로로 취급하게 되는 것이다. 이럴 경우 구원받은 죄인은 성경이 힘주어 부정하고 있는 ‘자랑’할 기회를 갖게 되는 것이다.

- “하나님의 신성”(아더 핑크 ) -

김완숙 집사는 한국 교회의 신앙의 현장에서 개혁신학이 세워지기를 위해 깊이 헌신하고 있는 평신도이다. 개혁주의 신앙을 사랑하는 많은 목회자들이 모여서 신앙을 토론하는 인터넷 싸이트 “개혁주의 마을”을 설립하여 운영하고 있다. 이화여대 및 이화여대교육대학원을 졸업했고, 아세아연합신학대학대학원(MA 졸업)과 총신대학원(기독교 교육 수학)에서 신학을 연구하였으며, 대구신학교(현 대신대학) 등에서 강사를 역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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