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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의 중보기도와 영원한 새 언약
정이철  |  cantoncrc@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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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6.09.22  04:2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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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보기도 사상를 가지고 있고 중보기도라는 용어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여전히 많다. 어떠한 경우에도 중보기도 사상을 수용하지 않아야 하고, 우리의 기도를 중보기도라고 부르는 것도 배격해야 한다. 왜 중보기도 사상과 용어를 철저하게 분별해야 하는지 이전과 다른 관점에서 다시 설명해 보고자 한다. 이번에는 언약의 관점에서 중보기도 사상과 그 용어 사용의 문제를 다루어 보고 싶다.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은혜의 원리를 이해하기 위해 반드시 알아야 할 것이 ‘언약’ 개념이다. 구원을 주시기 위한 하나님의 특별계시의 완성인 성경 내용의 핵심은 두 개의 언약, ‘옛 언약’(행위언약)과 ‘새 언약’(은혜언약)이다. 옛 언약은 하나님이 아담을 지으시고 난 후 아담에게 주신 언약이다. 아담을 지으시고 에덴동산에 살게하면서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아담에게 언약을 반포하셨다. 고대 세계에서 국가 간, 군신 간의 언약은 쌍방이 조곤 조곤 이야기하는 모양새로 이루어지지 않고 우월한 위치에 있는 자가 낮은 위치에 있는 자에게 일방적으로 언약의 내용을 제시하는 모양새로 이루어졌던 것처럼, 하나님은 자기 백성인 피조물 아담에게 임의로 언약을 제시하셨다.

“너 이제부터 내 백성으로서의 신실한 삶을 살아보겠느냐? 그러면 내가 너에게 영생과 행복을 보장할 것이다”

하나님은 아담과 언약을 체결하기 위해 이와 같이 대화를 걸고 언약의 내용을 조율할 필요가 없었다. 아담은 이미 하나님을 즐거워하고 사랑하고 경배해야 할 하나님 백성으로 창조되었기 때문이다. 만일 아담이 하나님 백성으로 창조되지 않았다면 “너 이제부터 나를 경배하는 나의 백성으로 살기를 약속하겠느냐? 그러면 너에게 영생을 줄 것이다”라고 조건을 제시하시면서 아담의 동의를 구한 후 언약을 수립하였을 것이다.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이르시되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창 2:16,17)

아담이 선악과를 범하면 반드시 죽을 것이라는 하나님의 경고는 이미 하나님의 언약을 받은 아담이 만일 그 언약을 파기하면 어떠한 결과가 따를 것인지를 경고하신 내용이다. 아담이 준수해야 할 언약이 계속 유지되는지, 파기되는지를 보여주는 증거로서 선악과가 제시되었다. 하나님은 에덴동산의 가장 잘 보이는 위치에 선악과를 두시고 아담이 원하면 쉽게 언약을 파기하고 그 증거로서 선악과를 먹을 수 있게하셨다. 하나님은 아담이 언약을 파기할 수 없는 운명적 존재로 살게하시지 않고, 아담이 원하면 쉽게 언약을 파기하고 선악과를 먹을 수 있는 자율적 능력과 의지를 주셨다. 이는 아담이 스스로 즐거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참된 언약 백성으로 살기를 바라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아담처럼 언약을 어기고 거기서 나를 배신하였다”(호 6:7)

하나님과 아담 사이에 언약 관계가 존재하였다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호세아 선지자가 그 시대의 타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아담처럼 언약을 배반하였다고 책망하였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아담은 하나님이 제시하시는 언약을 받았고, 그 언약을 지키는 것이 자신의 마땅한 본분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네게 먹지 말라 한 나무의 열매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 너는 네 평생에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창 3:17)

아담은 선악과를 범한 직후 이와 같이 하나님으로부터 저주를 선고받았다. 단순히 과일 하나를 먹었다고 저주를 받은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언약 백성의 길을 거부하고 스스로 하나님처럼 되어 자율적인 삶의 행복을 누리고자 작심하였음이 선악과를 범하는 행동으로 나타났기 때문이다. 아담의 선택은 하나님에 대한 명백한 반역이었다.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창 3:5)

아담이 선악과를 범하는 과정에서 마귀의 유혹이 크게 작용하였을지라도 언약을 파기한 아담의 죄가 마귀에게로 미루어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언약 백성의 길에서 벗어나 스스로 하나님과 같이 되려는 욕망을 품지 않았다면, 아담이 그와 같은 마귀의 유혹을 수용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기독교 신앙에 대한 올바른 이해와 성경 해석을 위해 창세기 초반부의 내용은 반드시 언약, 언약파기의 관점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언약적 관점을 가지지 못하면 결코 창세기 초반의 너무도 중요한 이 내용을 바르게 해석할 수가 없다. 또한 먼 훗날 예수 그리스도가 오시어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이루어진 신약의 '새 언약'의 필요성과 중요성도 알 수가 없다. 창세기 2,3장의 내용은 필히 언약적 관점에서 설명되어져야 예수 그리스도의 피 흘리심으로 성립된 신약의 영원한 '새 언약'도 이해할 수 있다.


언약적 관점을 거부한 영지주의 신학

초대교회를 공격했던 영지주의는 언약적 관점을 거부하며 복음 자체를 와해시켰다. 영지주의는 아담에게 영생과 행복을 주시기 위해 언약을 제시한 하나님을 아담의 존재의 가능성을 감추고 억압한 악신으로 왜곡하였다. 하나님이 아담에게 언약을 파기하면 죽을 것이라고 경고한 내용을 아담이 선악과를 먹어 자신과 같은 신적 존재로 격상되는 것을 시샘하여 아담에게 진실을 말하지 않고 속인 악신이라고 매도하였다. 또한 영지주의는 아담을 유혹하여 언약을 파기하고 선악과를 먹도록 유혹한 뱀을 아담이 구원의 깨달음으로 나아가서 신적 지혜를 가지도록 도왔던 지혜의 화신으로 미화시켰다. 영지주의의 산물인 힌두교와 모든 이방종교에서 뱀이 행운의 길조로 여겨지고, 신적인 영물로 여기지는 이유는 모든 이방 종교의 뿌리가 아담으로 하여금 언약을 배반하도록 미혹한 마귀에게 있기 때문이다.

영지주의는 창세기 2,3장의 내용은 언약 개념으로 보지 않았으므로 새 언약을 수립하여 우리에게 하나님 백성의 신분을 회복하게 하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해석도 당연히 비틀어 질 수밖에 없었다. 영지주의 사상에서 십자가에서 피 흘리고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는 창세기의 옛 언약을 파기하여 영원히 저주받고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를 대신하여 죄 값을 지불하신 분이 아니다. 영지주의의 예수는 우리를 죄에 대한 책임과 형벌로부터 구원하기 위해 대속의 죽으심을 당하신 것이 아니고 우리를 육신의 한계에서 벗어나 처음부터 우리 속에 잠재되어 있는 신성의 불꽃을 각성시키는 스승이고 선생이다.

영지주의는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공로를 전가받음으로 우리가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영적인 스승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도움으로 깨달음을 얻어 열반과 해탈에 이름으로 영적도약을 얻어 구원에 이른다고 가르쳤다. 오늘 날 불교, 힌두교, 도교, 뉴에이지 ... 등의 모든 이방 종교들이 이와 유사한 구원관을 가지고 있다. 모든 이방 종교들 속에는 영지주의의 인간을 깨달음으로 인도하는 영적인 선생 예수 그리스도와 비슷한 스승들, 즉 불교의 부처와 같은 존재들을 다 가지고 있다. 

창세기 2,3장을 언약적 관점에서 해석하지 못하면 기독교의 탈을 쓰고 있을지라도 구원종교가 되지 못하고, 더 나아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의 의미까지도 전혀 다르게 변질시키게 된다. 창세기 2,3장의 내용을 ‘옛 언약’의 관점으로 해석해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구원의 길로 나아가는 참 기독교 신앙을 소유할 수 있다.

 

옛 언약을 파기한 죄의 형벌을 대신 감당하신 예수 그리스도 

우리 모두는 옛 언약을 파기하여 저주받고 영원히 죽게 된 아담으로부터 언약을 파기한 죄에 대한 책임, 죄에 대한 형벌을 물려받은 존재로 태어났다. 동시에 죄로 말미암아 발생한 인격과 마음의 오염과 부패를 아담에게서 영적으로 물려받았다. 그러므로 인간은 누구나 일평생 하나님을 거역하고 범죄로 일관하며 살다가 죽어 영원한 흑암에 빠지게 되는 불쌍한 인생이 되었다.

영원한 저주에 빠진 우리를 위해 하나님께서 구원의 길을 여셨다. 성부와 성자 사이에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한 특별한 계획과 협약이 이루어졌음을 성령의 여러 내용을 통해 추론할 수 있다. 그것은 성자께서 우리와 같은 인간으로 성육신하시어 친히 옛 언약을 파기한 아담으로부터 유래한 죄에 대한 책임과 형벌을 당하시고, 또한 죄로 말미암은 오염과 부패를 치료하심으로 우리를 다시 하나님 백성으로 회복시키시는 것이었다.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기 전 날 새로운 영적인류의 대표인 제자들과 마지막 식사를 나누시면서 ‘새 언약’을 제정하셨다. 예수 그리스도가 오시여 파기되어 버린 옛 언약을 대체하게 될 ‘새 언약’은 이미 구약에서 예언되었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새 언약을 맺으리라”(렘 31:31)

예수 그리스도가 에덴동산의 아담과 체결된 옛 언약으로 말미암아 죽게 된 우리 모두를 살리기 위해 스스로 옛 언약을 파기 죄의 형벌을 친히 십자가에서 감당하셨고, 대신 우리를 다시 살리는 새 언약을 세우셨다. 십자가에서 친히 자신의 몸으로 옛 언약 파기로 말미암은 형벌을 다 당하셨으므로,  그리스도는 속죄의 제물이 된 자신의 피와 살을 증거삼아 성부로부터 우리의 구원을 위한 새 언약을 받아 주셨다.

“저녁 먹은 후에 잔도 그와 같이 하여 이르시되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니 곧 너희를 위하여 붓는 것이라”(눅 22:20)


그리스도는 새 언약의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가 없었다면 성부께서 우리에게 새 언약을 주시지 않았다.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죄 값을 대신 치르시고 난 후 그 피를 증거삼아 우리를 다시 하나님 백성으로 복귀시켜 달라고 요청하셨으므로 하나님이 우리의 영원한 구약을 약속하신는 새 언약을 주신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새 언약의 중보자'이시다.

“그러므로 그분은 새 언약의 중보자이시니, 이는 첫 언약 아래에서 저지른 범죄들을 대속하기 위해 죽으심으로써, 부르심을 받은 자들로 영원한 유업의 약속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히 9:15, 바른성경)

“새 언약의 중보자이신 예수님과 아벨의 피보다 더 나은 것을 말하는 뿌려진 피이다”(히 12:24, 바른성경)

새 언약은 친히 사람이 되시어 아담의 옛 언약을 파기한 죄의 형벌을 당하신 유일한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가 죄인을 위해 하나님께 나아가 중재하셨으므로 이루어졌다. 예수 그리스도라는 중보자가 없었으면 새 언약은 나타나지 못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유일한 중보자가 친힌 십자가에 달려 중보를 완성하시고 하나님께 새 언약을 제정하시도록 요청하지 않았으면 새 언약을 이루어지지 못했다.


그리스도의 중보기도와 새 언약 영구성

더욱 더 중요한 사실은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의 천상에서의 중보기도로 말미암아 새 언약의 효력이 영구하게 보장된다는 사실이다. 중보자의 피를 증거로 새 언약이 우리에게 주어졌을지라도 여전이 죄의 오염과 부패가 남아있으므로 우리는 죽기 전까지 모든 종류의 죄에 빠질 수 있고, 다시 하나님을 배반하고 세상으로 나갈 수도 있다. 그러면 또 다시 하나님이 주신 새 언약이 파기되어 버릴 수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자기의 흘리신 피를 성부께 보이시면서 다음과 같이 합법적으로 지속적인 은혜를 부어주시라고 당당하게 요청하여 주신다. 하나님은 중보자의 요청을 물리치시지 못하신다.

“제가 십자가를 지고 저 사람을 대신하여 이미 형벌을 받았고, 나의 십자가의 피를 증거삼아 저 사람에게 새 언약이 주어졌습니다. 연약한 저 사람이 새 언약에 합당치 못할지라도 버리거나 외면하실 수 없습니다. 새 언약을 저 사람에게 주신 근거는 저 사람의 믿음이나 행실이 아니고, 제가 십자가에서 저 사람을 위해 대신 흘린 피입니다. 그러므로 아버지께서는 저 사람을 외면하시거나 버리실 수 없습니다”

이것이 하나님 보좌 우편에서 우리를 위해 하나님께 간구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중보기도이다. 아담이 옛 언약을 파기했을 때에는 대신 그 책임을 대신 감당해 주신 중보자가 없었으므로 아담은 죽음과 저주의 형벌을 받아야만 했다. 그러나 지금 우리에게는 완전한 중보자가 계신다. 그가 이미 우리를 위해 하나님의 저주를 다 받았고, 또한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에서 멀어지지 않도록 십자가의 피를 증거삼아 하나님께 중보기도 하신다. 그러므로 하나님 백성으로서 우리의 신분과 구원은 영원하다.

“나의 자녀들아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 너희로 죄를 범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만일 누가 죄를 범하여도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요일 2:1)

그래서 우리는 인간이 중보기도를 한다는 사상 자체를 용납할 수가 없고, 또한 남을 위해서 기도한다는 관점에서도 중보기도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것도 인정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중보기도라는 용어는 반드시 사람으로 오시어 십자가상에서 피 흘리시는 중보사역을 이루신 예수 그리스도가 중재자가 되어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새 언약의 효력을 영구하게 보장하여 주시는 수단이기 때문이다. 중보기도 사상을 전파하는 사람들은 필연적으로 하나님의 심판에 이르게 된다. 중보기도라는 용어를 사람의 기도에 적용하며 남발하는 사람들도 하나님의 책망을 받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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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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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은 자 2016-09-22 17:50:38

    좋은 글입니다.

    엣 언약과 새 언약의 개념을 잘 설명해 주신 글이며
    그리스도의 중보사역도 잘 설명해 주신 글입니다.

    자신들이 중보자라며 중보기도를 외치는 자들은
    그리스도의 중보자 되심과 사역을 부정하는 자들입니다.
    중보란 하나님과 죄인사이의 중보를 맡으신 그리스도의 사역인데
    자신들이 중보자를 자처하고 중보기도 한다는 자들은
    그리스도를 자처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들은 구속의 원리와 중보의 원리에 무지한 자들입니다.신고 | 삭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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