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파이퍼가 톰 라이트의 견해에 대한 변호의 책 제목이 <칭의논쟁>(신호섭 역, 부흥과개혁사)이었다. 톰 라이트의 저술은 <칭의를 말하다>(에클레시아북스)에 근거한 것이다. 이에 대해서 이승구 교수와 박영돈 교수가 변론서를 펴냈다. 그럼에도 새관점학파의 기세를 잡을 수 없다. 이에 대해서 김세윤 교수도 <바울 신학과 새관점>(두란노, 2002)이라는 저술로 대응했지만, 결국 새관점 학파의 흐름을 막지 못하고 굴복된 듯하다.

최갑종 교수는 김세윤 교수를 지지하면서 ‘새관점’을 기준하여 ‘옛관점’이라고 했다. 옛관점과 새관점은 유대교(율법주의/언약적 신율주의)에 대한 이해, 다메섹 체험(회심과 소명/소명)에 대한 이해 등에서 결정적 차이가 있다. 당연히 예수의 지위에 대한 이해도 다르다. 우리에게 익숙한 유대교 이해인데, 왜 세계 석학들은 새관점을 옹호하는가? 그것은 주전 2세기부터 주후 1세기까지 문헌에 근거한다는 호소 때문이다. 문헌 이해에 약한 석학들이 그 문헌에 근거하여 주장하는 새관점 학파의 주장을 논박하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논쟁은 신학 아고라에서 너무나 쉽게 발생한다. 신학을 누가 할 수 있는가?에 대한 간단한 질문에 대해서 답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주전 2세기 문헌이나, 주후 1세기 문헌, 헬라어, 라틴어, 독일어를 못해도 신학 아고라에서 정당한 소리를 낼 수 있어야 하는데, 언어나 문헌 능력의 유무에 따라서 토론장에 입장할 자격을 제어하는 모습이 있다. 학문 아고라에 어린 아이와 같은 질문에 어린 아이처럼 순수하게 설명할 수 있어야 진정한 진리의 상아탑이다.

신학은 누가 하는가? 신(神)을 아는 사람, 믿는 사람이 할 것이다. 언어나 문헌 해독력이 있는 사람이 신학을 하는 것이 아니다. 자기가 믿는 신을 설명하거나 믿음의 과정을 제시하는 것이 좋은 신학이다. 장황한 문헌 해석을 늘어놓으면서 신학이라고 한다면 신학의 목적을 상실한 말장난에 불과하다. 신학은 신을 믿는 사람에게 신을 풍성하게 이해할 수 있도록 인도해야 한다. 그런데 신학이 미로(迷路)로 인도한다면, ‘그 신학’은 미혹이고 올무이다.

칭의 논쟁에서 신학 목적을 말하는 것은 칭의 논쟁의 방향을 상실한 진흙탕 싸움처럼 느끼기 때문이다. 칭의 논쟁에서 얻으려는 열매는 논쟁자의 정당성이 아니다. 교회와 성도의 유익을 구하는 것이며, 교회의 머리인 그리스도의 영광에 있다.

칭의 논쟁이 한국에서 시작되는 모습을 볼 때 기쁨이 있다. 좀 더 명확하게 칭의를 이해할 수 있는 기회가 왔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신칭의 교리 위에 한국 교회가 든든하게 설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이라 생각한다.

칭의 논쟁에서 가장 부각되어야 할 점은 ‘누가 백성(택자)를 의롭다고 선언하는가?’에 있다. 종교개혁신학은 영원에서 택함 받은 택자를 때가 차매 불러 중생케 하는(법정적 칭의) 역사이다. 그러나 김세윤은 유보적 칭의, 새관점 학파는 미래적 칭의 개념으로 현재 칭의가 없다. 연구자가 장황한 제시가 아니라 명료한 제시를 통해서 한국 교회에 성도들이 명확하게 이해할 수 있는 좋은 논쟁이 진행될 수 있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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