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창모 목사의 <방언, 그 불편한 진실>(19회)

고린도교회에는 왜 방언과 통역의 은사가 있었을까

고린도전서 12장 8-10절의 은사 목록에는 “방언 말함”의 은사와 함께 “방언들 통역함”의 은사가 나온다. 통역의 은사는 방언의 은사가 시행되었을 때 필요한 보조적인 은사이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방언의 은사가 있는 곳에 꼭 통역의 은사가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사도행전에 나타난 방언을 보면 오순절 날 예루살렘, 고넬료의 집, 에베소 지역에서 방언이 있었지만, 그 방언들이 통역된 적은 없었다. 만약 이 경우에 고린도전서 14장 28절의 바울의 가르침, 즉 통역하는 자가 없으면 사람들 앞에서는 잠잠하고 혼자서 하라는 가르침을 그대로 적용한다면, 사람들 앞에서 한 사도행전의 방언들은 통역이 없었으므로 적절하지 않은 것이 되고 만다. 그러나 이 경우에는 바울의 가르침을 적용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사도행전의 방언 현장과 고린도 교회의 방언 현장은 서로 상황이 다르기 때문이다.

사도행전에서 방언은, 방언을 알아들을 수 있는 자들을 대상로 행해졌다. 그러므로 방언을 따로 통역이 필요가 없었다. 그러나 고린도교회의 방언은 공적 예배에서(고전14:26에서 “너희가 모일 때에”라는 표현은 예배의 때를 의미한다) 방언을 알아들을 수 있는 외국인과 알아들을 수 없는 현지인 신자들, 즉 언어가 다른 자들이 섞여 있는 회중을 대상으로 행해졌다. 그러므로 성령은 예배 때 행해지는 방언을 모두가 알 수 있도록 고린도교회에 방언의 은사와 함께 통역의 은사도 주신 것이다.

따라서 방언과 통역은 반드시 함께 시행되는 것은 아니지만, 언어가 다른 자들이 함께 있는 예배에서 어떤 회중(현지 언어를 알아들을 수 없는 외국인)을 대상으로 방언이 시행될 때는 통역도 반드시 함께 시행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이때 현지인 신자들은 외국인들에게 들려주는 방언을 알아들을 수 없기 때문이다.

물론 현지인 신자들은 알아들을 수 있는 예언이 있기 때문에, 굳이 또 방언을 듣고 그 의미를 알아야 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외국인들이 방언을 듣고 때로 가슴을 치고 울며, 무어라고 말하면서 기뻐하는 모습(이것은 이들이 방언으로 복음을 듣고 회개하며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영접하는 모습이다)을 보면서 함께 있는 현지인들이 외국인들이 반응하고 있는 방언의 내용이 무엇인지 궁금해 하는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일일 것이다. 그런데 만약 그 궁금증을 그대로 방치한 채 예배가 진행된다면, 아마도 현지인 신자들은 그 궁금증 때문에 예배에 집중하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또 방언에 대해 알지 못하는 현지인 새신자들은 알아들을 수 없는 방언을 듣고는 방언을 날하는 자들을 “미쳤다”고 하면서 교회를 이방 신전 정도로 오해할 수도 있을 것이다(고전14:23 참고). 따라서 성령은 예배가 예배되게 하기 위해 방언과 함께 통역의 은사도 주신 것이다. 방언으로 주시는 하나님의 계시를 예배에 참석한 외국인들 뿐 아니라 현지인 신자들도 알아들을 수 있도록 말이다.

고린도교회의 방언은 예배에 들어온 외국인들, 즉 예배 때 사용하는 헬라어를 알아들을 수 없는 자들을 위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예배에 외국인이 참석하지 않았다면 당연히 방언도, 통역도 필요 없다. 따라서 예배에 외국인이 없는데도 현지인 신자들이 알아들을 수 없는 방언을 말하고 그 방언을 통역해서 이들에게 어떤 메시지를 전달하려고 한다면 그것은 우스꽝스러운 일이 될 것이다. 예를 들어, 의사소통이 되지 않는 미국인과 한국인의 대화에는 통역이 필요하다. 그러나 한국인은 영어를 모르지만 미국인이 한국말을 잘할 수 있다면, 이들은 한국말로 의사소통을 하면 된다. 그럼에도 미국인이 한국말 대신 한국인이 모르는 영어로 말하고, 누군가 영어를 한국말로 통역해서 의사소통 한다면 이 얼마나 우스꽝스러운 모습이겠는가?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고린도교회의 예배에서 이런 우스꽝스러운 일들이 발생했다. 외국인이 예배에 참석하지 않았는데도 방언의 은사를 가졌다고 하는 자들이 현지인 신자들만 있는 예배에서 알아들을 수 없는 거짓 방언으로 서로 경쟁하듯 떠들어댔다. 또 이런 분위기에 편승하여 거짓 예언을 하는 자들도 생겨났다. 이런 자들 때문에 고린도 교회의 예배는 난장판이 되기가 일쑤였다. 이렇게 심각하게 변해 버린 교회의 상황을 걱정하던 몇몇 신자들이 결국 이 문제를 바울에게 호소했고, 바울은 고린도전서 12-14장을 통해 고린도 교회에 문제가 된 거짓 방언의 정체와 폐해를 지적하고, 거짓 방언을 분별하는 방법을 제시하고, 분별한 거짓 방언의 퇴출을 명령하고 있다. 고전14:26-33이 바울이 제시한 거짓 방언의 분별법과 퇴출 명령이 기록된 본문이다.

거짓 방언은 통역의 은사로, 거짓 예언은 영분별 은사로 분별 한다

"그런즉 형제들아 어찌할까 너희가 모일 때에 각각 찬송시도 있으며 가르치는 말씀도 있으며 계시도 있으며 방언도 있으며 통역함도 있나니 모든 것을 덕을 세우기 위하여 하라"(고전14:26).

“그런즉”은 앞에서 언급한 내용, 즉 고린도교회가 예언을 무시하고 계속 방언만 한다면 그 방언이 하나님의 심판의 표적이 될 것이라는 것과 26절에 언급되는 내용이 직접 관련이 있음을 나타낸다. 즉 바울은 고린도 교회가 거짓 방언으로 말미암아 당하게 될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있는 방법을 26절 이하에서 제시하고 있다. 바울이 제시한, 고린도교회가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있는 해결책은 거짓 은사들을 분별해 고린도 교회에서 퇴출시키는 것이다.

바울은 먼저 고린도교회에서 거짓 은사들을 퇴출시킬 결정적인 방법을 제시하기에 앞서서 “모든 것을 덕을 세우기 위해 하라”고 말함으로써, 성령이 교회에 주신 은사의 목적이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함임을 또 한 번 분명히 한다. 왜냐하면 고린도 교회의 거짓 은사는 교회의 덕을 세우기는커녕 경쟁적으로 자신을 과시하는 데 사용함으로써 고린도교회의 예배가 심각한 무질서 상태에 빠져있었기 때문이다. 고린도교회에 이런 무질서가 있었음은, 14장 40절에서 “모든 것을 품위 있게 하고 질서 있게 하라”는 바울의 명령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따라서 26절은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하는 권면이라기보다는 책망으로 보는 것이 더 나을 것이다.1)

"만일 누가 방언으로 말하거든 두 사람이나 많아야 세 사람이 차례를 따라 하고 한 사람이 통역할 것이요 만일 통역하는 자가 없거든 교회에서는 잠잠하고 자기와 및 하나님께 말할 것이요 예언하는 자는 둘이나 셋이나 말하고 다른 이들은 분별할 것이요"(고전14:27-29).

본문에서 바울이 방언으로 말할 때 차례를 정하도록 명령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단지 예배가 무질서했기 때문일까? 오순절주의자들의 주장대로, 고린도교회의 방언이 하나님께 비밀을 말하는 것(고전14:2)이 사실이라면, 굳이 차례를 정해놓고 한 사람씩 말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왜냐하면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이시므로 아무리 많은 사람들이 한꺼번에 방언으로 말한다 해도 다 알아들을 수 있으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령의 은사로서의 방언은 하나님께 비밀을 말하는 은사가 아니라 외국인에게 하나님의 큰 일(복음)을 말하는 은사이다. 그러므로 외국인들이 알아들을 수 있도록, 또 통역의 은사자가 듣고 통역할 수 있도록, 그리고 통역한 것을 현지인 신자들이 들을 수 있도록 한 사람씩 차례대로 말해야 한다. 그래서 바울은 이들에게 억지로라도 차례를 정해 주고, 한 사람씩 방언이나 예언을 말하도록 명령하는 것이다.

그런데 바울이 이렇게 차례를 정해 주는 진짜 목적은 단순히 차례대로 방언을 말하게 함으로 예배의 무질서를 막자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통역자가 차례대로 행해지는 방언을 듣고(만약 차례대로 방언을 말하지 않으면 통역자가 제대로 들을 수 없으므로 통역할 수 없다) 통역 가능한 방언과 통역 불가능한 거짓 방언을 분별해 내도록하기 위함이다.

만일 고린도교회의 방언이 성령의 은사로서의 방언이라면, 인위적으로 순서를 정하지 않더라도 방언으로 말할 때 중복 없이 차례대로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질서의 하나님이신 성령께서 방언을 말하게 하실 때 두 사람 이상이 한꺼번에 말하도록 역사하지 않으시기 때문이다.2)

그러나 고린도 교회의 방언이 성령의 은사가 아닌, 거짓 방언이라면 서로 약속하지 않는 한 중복을 피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것은 마치 오케스트라에서 연주자들이 지휘자를 보지 않고 연주하는 것과 같다. 바울은 예배에서 성령의 지휘를 받지 않는 거짓 방언자들 때문에 억지로 차례를 정해 준 것이다. 그러므로 통역자는 순서대로 행해지는 방언을 듣고 통역할 수 있는 방언은 통역하고, 거짓 방언은 통역하지 않음으로(정확하게 말하면 통역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거짓 방언은 메시지가 없는 허튼 소리이기 때문에 통역 은사자라 할지라도 통역할 수 없다. 존 맥아더, 다른 불, 주계광 옮김[서울: 생명의말씀사, 2014], p.205) 거짓 방언을 가려내 예배에서 퇴출시키려는 것이다.

따라서 본문에서 바울이 제시한 통역은 예배에서 현지인 신자들에게 방언의 의미를 알게 하는 기능보다는 거짓 방언을 가려내는 리트머스 시험지 같은 기능으로 제시한 것이다. 여기서 바울이 제시한 통역의 역할이 무엇인지는 바울이 고린도 교회의 예배에서 거짓 방언과 거짓 예언을 퇴출시키려고 제시한 고린도전서 14장 26-33절의 방언-통역 그리고 바로 뒤에 병행된 예언-영분별의 구조에서, 영분별의 역할이 무엇인지 알면, 같은 목적으로 제시된 통역의 역할이 무엇인지는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

예언하는 자는 둘이나 셋이나 말하고 다른 이들은 분별할 것이요(고전14:29).

바울은 예언하는 자들이 예언할 때에 다른 이들, 즉 영을 분별하는 은사자들(고전12:10)에게 예언을 분별하라고 지시한다. 바울은 왜 예언을 분별하라고 지시했을까? 그것은 예배 때에 시행되는 예언들 중에 거짓 예언이 섞여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면 영분별의 은사자들이 거짓 예언을 분별하는 목적은 무엇일까? 거짓 예언을 분별해 거짓 예언자들에게 “당신의 예언은 회중 앞에서는 부적당하니 집에 가서 혼자 예언하는 것이 더 좋겠소.”라고 조언하기 위함일까? 그렇지 않다. 거짓 예언으로 판명된 예언자들을 교회의 예배에서 퇴출시키기 위함이다.

이것은 방언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여기서 바울이 방언을 통역하라는 것은, 예언을 영분별로 가려내는 것처럼 거짓 방언을 통역으로 가려내서 예배에서 퇴출시키려는 것이지, 통역이 되지 않는 방언은 회중 앞에서는 적당하지 않으므로 집에 가서 혼자 하는 것이 더 낫겠다고 말해주려는 것이 아니다. 즉 바울이 방언을 통역하라고 명령하는 까닭은 거짓 방언을 퇴출시키려는 것이지, 방언기도하기에 알맞은 장소를 알선해 주려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여기서 27절의 “두 사람이나 많아야 세 사람”은 하나님이 정해놓은 원칙이 아니라 바울의 경험상의 의견일 것이다. 한 종류의 언어를 쓰는 외국인들이 오면 한 가지 방언이면 되지만, 언어가 서로 다른 외국인들이 여럿이 온다면 더 많은 종류의 방언이 필요할 것이다. 그러나 보통은 한 예배에서 네 나라 이상의 외국인들이 참석하지는 않았다는 것이 바울의 경험인 것 같다. 또 한 가지 가능성은 한 종류의 방언이라 할지라도, 계시의 분량이 많아서 성령이 두세 명의 방언 은사자들에게 나누어서 말하게 하셨을 수도 있을 것이다. 이때도 두세 명을 넘지는 않았다는 것이 바울의 경험이었을 것이다.

한편, 30절의 “다른 이에게 계시가 있으면”을 보면, 예언은 성령의 계시가 있을 때만 할 수 있음이 분명하다(이것은 27절의 방언도 마찬가지다. 방언도 예언과 같이 성령의 은사이므로 성령이 방언으로 말하게 하실 때만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거짓 방언은 성령의 역사와 상관없이 자신이 하고 싶을 때 언제든지 할 수 있다. 왜냐하면 거짓 방언은 자신이 만들어낸 은사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예배에서 성령이 네 사람 이상에게 예언하게 하실 수도 있지 않을까? 충분히 그러실 수 있다. 그러나 그럼에도 바울이 이렇게 말하는 것은, 방언에서와 마찬가지로 성령은 한 번의 예배 때 두세 사람 정도(29절)에게 예언을 하게 하셨음을 염두에 두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면 방언이나 예언의 순서는 누가 정하는가? 사람들이 미리 순서를 정하고, 그 순서에 따라 성령의 은사를 시행할 수 있는가? 그럴 수는 없다. 왜냐하면 성령의 주권적인 역사(성령이 누구에게 먼저 방언이나 예언을 말하게 하실지)를 인간이 미리 알 수 없기 때문이다. 30절의 “만일 곁에 앉아 있는 다른 이에게 계시가 있으면 먼저 하던 자는 잠잠할지니라”에서 보듯이 예언하는 순서는 성령이 정하신다. 따라서 가장 먼저 성령의 계시를 받은 자가 첫 번째로 예언할 수 있다.

그러면 언제까지 예언할 수 있는가? 성령이 다음 사람에게 계시를 주셔서 예언하게 하실 때까지다. 이때 첫 번째 예언자는 예언하기를 멈춰야 한다. 32절에 “예언하는 자들의 영은 예언하는 자들에게 제재를 받나니”가 바로 이것을 말하는 것이다. 예언이 성령이 주신 계시가 사실이라면, 첫 번째 예언자는 자연스럽게 예언을 멈출 것이다. 왜냐하면 성령이 다음 사람에게 계시를 주실 때, 첫 번째 사람에게 주시던 계시를 멈추실 것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첫 번째 예언자가 예언을 멈추지 않는다면, 그는 처음부터 거짓 예언을 했음이 분명해진다.

따라서 “먼저 하던 자는 잠잠할지니라”는 바울의 명령은 거짓 예언자를 염두에 둔 말이라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성령이 계시를 주셔서 하는 예언은 사람이 스스로 시작할 수도 멈출 수도 없지만 사람이 만든 거짓 예언라면 스스로 시작할 수도 멈출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어서 바울은 사람이 만들어낸 거짓 예언이 아닌 성령의 의해서 제재를 받는 예언의 현장을 다음과 같이 말한다.

"예언하는 자들의 영은 예언하는 자들에게 제재를 받나니 하나님은 무질서의 하나님이 아니시요 오직 화평의 하나님이시니라"(고전14:32-33).

불행하게도 고린도 교회의 예배에서 어떤 자가 성령의 계시를 받지 않았는데도 거짓 예언을 말함으로 예언이 중복되는, 즉 “예언하는 자들의 영이 예언하는 자들에게 제재를 받”지 않는 일들이 벌어졌다. 이때 거짓 예언자들은 자신의 예언이 진짜라고 우기면서 계속 예언을 해댐으로, 고린도 교회의 예배는 엉망진창이 되어 버렸던 것이다.

바울은 이런 혼란을 막기 위해 고린도 교회의 예배에서 거짓 예언을 가려내는 장치를 고린도전서 14장 29-32절에 걸쳐 일러주고 있다. 그것은 어떤 이가 예언할 때 다른 이들은 영분별의 은사로 그 예언의 거짓 유무를 분별하라는 것이다(고전2:13 참고). 이 분별의 방식은 방언에서도 똑같이 적용된다. 차이점이 있다면 예언은 영분별의 은사로 거짓 예언을 가려내고, 방언은 통역의 은사로 거짓 방언을 가려낸다는 점이다(2부에서 계속).

 

--- 각 주 ---

1) 아더 핑크, 성령론, 지상우 옮김(서울: 엠마오, 1988), p.325.

2) 김세윤, 고린도전서 강해(서울: 두란노아카데미, 2007), p.3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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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창모 목사는 죽음에 이르는 병에 걸린 한국 교회를 신물 나게 체험하며 갈등하다 하나님을 향해 살아 있는 교회를 꿈꾸며 1999년 김천에서 ‘제자들 경배와 찬양교회’를 개척하였다. 이창모 목사는 한국교회를 죽음에 이르게 한 병이 단지 성공주의, 황금만능주의, 도덕적 윤리적 타락 등이 아니고 이미 한국교회에 만연된 잘못된 신학에 있음을 확신하고서 무엇이 바른믿음인지 신학적으로 깊이 고민하는 목사이다. 이창모 목사는 자신이 중2때 수련회에서 방언을 받았고, 대부분의 목사들이 그것을 ‘영의 기도의 언어’라고 가르치므로 의심없이 수 십년 동안 옹알거리는 방언현상으로 기도(?)하였던 대표적인 방언기도자였다. 김우현, 김동수 등이 저술한 거짓 방언을 미화하는 한심한 서적들을 접한 후 방언에 관한 깊은 신학적인 성찰을 시작하게 되었고, 결국 오늘 날 방언이라고 알려진 소리현상과 성경의 참된 방언은 무관하다는 사실을 확신하게되었다. 이전의 자신처럼 방언으로 기도한다고 착각하고 있는 다른 목회자들과 신자들을 진정한 복음으로 돌이키기 위해 <방언, 그 불편한 진실>(밴드오부퓨리탄,2014)을 출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