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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의 이적은 특별계시를 확증하는 하나님의 방법
김대운  |  2127432@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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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6.07.30  21:09: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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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대운 목사

오늘날 치유의 은사를 받았다면서 모든 병을 고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예수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다.”는 주님의 속성의 동일성(불변성)을 교훈한 말씀을 그의 계시 방법의 동일성으로 오해하여 오늘날에도 과거에 계시하시던 방법대로 기적을 일으키신다는 어리석은 주장을 하고 있다.

만일 주께서 과거에 계시하시던 방법대로 오늘날에도 자신의 뜻을 나타내신다면 주님과 사도들을 통하여 나타났던 병자의 치유와 죽은 자들이 살아나는 역사가 동일하게 나타나야 한다. 그러나 오늘날 이런 역사가 일어난다고 주장하는 자들이 고쳤다는 병 목록을 살펴보면 유치하기 짝이 없다. 우리가 이런 거짓 기적에 미혹되지 않으려면 예수님과 사도들이 고친 병이 어떤 것이었는지 살펴봐야 한다. 예수님과 사도들이 고쳤던 병들은 하나같이 다 신체의 구조나 물리적 변화로 발생한 기질성질병으로 손, 발, 다리가 절단되거나 특정기능 자체가 아예 상실된 질환들이었다. 예를 들면, 나면서부터 앉은뱅이 된 사람, 손 마른 사람, 문둥병, 18년 동안 꼬부라져 허리를 펴지 못하던 여인, 9년 동안 중풍으로 고생하던 애니아, 심지어 죽었던 야이로의 딸과 도르가, 죽은 지 사흘이나 되었던 나사로를 살린 일까지 포함한다. 예수님과 사도들은 오늘날 은사주의자들처럼 암시나 최면을 이용하지 않고 즉시로 완전히 고쳤다.

그러나 오늘날 은사주의자들이나 신사도들이 고치는 병은 이런 기질성질환이 아닌 기능성질환이거나 심인성질환들이다. 존 맥아더 목사는 이런 예를 들어 이 3가지의 차이를 설명했다. “팔이 아픈 것은 기능성 질환이고, 팔이 오그라들었거나 아예 없는 것은 기질성 질환이며, 아무 이상이 없는 데 팔이 아프다고 생각하는 것은 심인성 질환이다.” 은사주의자들은 기질성질환은 고칠 수가 없고 언제나 그들이 고쳤다고 주장하는 것은 기능성질환이며, 거의 다 일시적으로 증상이 완화된 것들에 불과하다.

그런데 환자들은 잠시 증상이 호전된 것뿐인데도 자신의 질병이 완전히 나았다고 믿고 고침 받은 사람은 나와서 간증하라고 하면 앞에 나가서 자신의 질병이 떠나갔다고 간증을 한다. 여기에 한 가지 더 고려해야 할 사안이 있는 데 바로 병의 자연사이다. 감기는 2주면 거의 낫고, 아토피나 중이염 같은 경우 성인이 되거나 면역력이 좋아지면서 저절로 없어진다. 또 오랫동안 누워 있던 사람은 다리 근육에 힘이 없어서 일시적으로 걷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분명히 X-ray 상으로는 아무 이상이 없는 데도 걷지 못하지만, 운동치료나 걷기 운동만으로 근력이 회복되면서 정상적인 삶으로 돌아오게 된다. 이 모든 것이 병의 자연사에 해당하는 경우로, 결코 치유 기적이 아니다.

그런데 왜 이런 일시적인 증상의 완화만을 보고 사람들은 자신이 완전히 치유되었다고 믿는 것일까? 그것이 바로 암시의 힘이다. 의사들도 환자들의 치료에 이 암시를 자주 사용한다. 위약효과로 알려진 플라시보 효과가 바로 의사들이 사용하는 가장 대표적인 암시다. 실제로 의사들은 플라시보효과를 이용하여 환자들의 병을 치료하기도 한다. 은사주의자들은 바로 이런 암시와 최면을 통한 일시적인 호전현상을 치유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2013년 10월에 그래이스커뮤니티 교회에서 진행했던 Strange Fire 컨퍼런스에서 Joni Eareckson Tada가 'Deeper Healing'이라는 강의에서 자신의 경험담을 들려줬다. Joni는 다이빙사고로 사지가 마비가 된 기질성질환자였다. 그녀는 베데스다 연못의 38년 된 병자처럼 주께서 자신을 고쳐주시기를 간절히 기다리던 차에 유명한 은사주의자였던 캐더린쿨만의 집회에 참여하게 되었다. 그런데 안내원들이 자신을 비롯한 휠체어에 탄 중환자들은 일반 환자들과 달리 특별한 구역으로 인도하더니, 집회가 끝나기 전 밖으로 나가게 했다. 온갖 질병을 고친다던 캐더린쿨만도 기질성질환자들은 고칠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미국에서 유명한 신사도인 타드 벤틀리는 자신이 사도들처럼 기질성 질병을 고칠 수 있다고 주장하면서 자신의 집회에 온 교통사고로 장애가 되어 늘 휠체어와 목발을 의지하던 한 소년의 목발을 집어던지고 걷게 했다. 그러나 아주 잠깐 무대 위를 걸었지만 집회가 끝난 후 다시 휠체어를 타고 절망가운데 집으로 돌아가야만 했다. 이들은 신유의 은사를 받았다고 주장하지만, 사도적인 신유와 같이 기질성 질병을 고칠 순 없다. 그래서 수많은 기질성 질환자들이 기대감을 잔뜩 갖고 이들의 집회에 왔다가 깊은 절망가운데 집으로 돌아가고 있다. 차라리 그들에게 그런 병을 주신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에 대해서 가르쳐주면 그 병을 하나님의 뜻으로 받아들이고 그 뜻 안에서 생활하게 하면 훨씬 그들의 삶의 질이 좋아질 수 있을 텐데 고치지도 못하면서 헛된 기대감만 불어넣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간간이 기질성 질병을 고쳤다고 주장하는 경우가 있으나 대부분이 의학적으로 입증할 수 없는 경우이며, 설사 그런 기적이 일어났다고 해도 그것은 성경의 증거대로 성도들을 속이기 위한 사단의 거짓 표적에 불과하다. 수많은 사람들이 아직도 조용기 목사의 부활 사기극을 기억하고 있지 않은가? 그들이 신유의 은사를 받았다면 예수님과 사도들처럼 모든 기질성질환자들 뿐 아니라 죽은 자도 살려내야 한다. 하지만 그들이 고쳤다고 주장하는 질환들은 기능성질병이거나 대부분이 암시와 최면에 의해서 일시적으로 증상이 완화된 것에 불과하다. 이 정도의 치유는 무당들이나 민간 신앙의 치유 수준에 불과하다.

그러면 왜 이들의 치유기적이 가짜일 수밖에 없는지 신학적으로 점검해보자. 이들은 주께서 이런 기적을 베푸신 목적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주님이나 제자들은 병자들이 불쌍하거나 믿음을 보고 병을 고쳐주신 것이 아니었다. 예를 들어서 성전 미문에서 구걸하던 앉은뱅이를 고친 사건을 생각해보면, 우선 베드로는 그의 믿음을 보고 병을 고친 것이 아니다. 그는 단지 몇 푼 얻을 기대만 갖고 있었지 자신의 병이 고쳐질 것은 상상조차 못했다. 그러나 베드로는 그를 일으켰고, 이 일로 자신에게 몰려든 군중들에게 복음을 전함으로 오천 명이 주 앞에 돌아오게 된다.

이때 베드로가 증거했던 복음은 유대인들이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예수님이 바로 우리의 메시아가 되신다는 것이었다. 원래 유대인들이 갖고 있던 메시아관은 로마의 압제에서 해방할 정치적인 메시아였다. 그래서 예수님이 기적을 행하시는 능력을 보고 이 분이야말로 우리를 해방시킬 수 있는 메시아라고 믿고 따르다가 그 기대가 충족되지 않자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사람들이 바로 이 복음을 듣고 있던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그들이 메시아일 수 없다고 죽인 그 나사렛 출신 예수의 이름으로 나면서부터 앉은뱅이 된 사람이 완전히 치료된 표적으로 인하여 사람들은 베드로가 증거한 복음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만일 앉은뱅이의 치유가 일어나지 않은 상태에서 성전에서 복음이 증거 되었다면 아마도 베드로와 요한은 돌에 맞아 죽었을지도 모른다.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를 받은 자’라는 율법적 가치관을 갖고 있는 사람들에게 십자가에 달린 분이 메시아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병자의 치유를 통해서 베드로가 증거한 것이 확증되었기에 오천 명이나 이 복음을 받아들였던 것이다. 사도적 은사로 주어졌던 치유는 사도들이 증거한 복음이 주님으로부터 온 것임을 확증시켜주는 표였다. 복음을 확증시켜줌으로 교회의 기초를 세우고자 주신 일시적인 은사였기에 교회의 기초가 놓인 뒤에는 더 이상 이런 은사가 나타나지 않았다. 그러므로 치유와 같은 사도적 은사는 복음의 확증을 통한 교회의 기초를 놓는 목적을 갖고 있었기에 다른 개인적인 목적으로는 사용할 수 없었다.

예를 들어 고후12장에서 바울은 자신의 육체의 가시를 가리켜서 사단의 사자라고까지 말했지만 사도적 은사를 통하여 제거하지 않았다. 빌립보서 2장을 보면, 복음을 위하여 희생적으로 수고한 에바브로디도가 병들어 죽게 생겼을 때도 그는 사도적 은사로 그의 병을 고쳐주지 않았다. 그가 사도적 은사로 병을 고쳐주면 온 빌립보교회 교인들이 위로를 받고 자신의 사역에 더욱 많은 도움을 받을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이 은사를 활용하지 않았다. 심지어 사랑하는 아들이라고 부르는 디모데에게도 자주 나는 병으로 포도주를 쓰라고만 했지 그의 사도적 은사로 병을 고쳐주진 않았다. 사도적 은사는 오직 복음의 확증을 위해서만 주어졌으므로 개인적인 문제 해결용으로는 주어진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또한 그러했기에 교회의 기초가 놓이면서 사도적 은사는 더 이상 나타나지 않게 되었고, 사도시대가 끝나면서 함께 사라져버렸다.

그러나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주님은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는 분이라고 하면서 모든 문제가 주님의 능력으로 해결될 수 있다고 가르친다. 은사주의자들만 그렇게 말하는 것이 아니고 많은 목회자들이 그렇게 가르침으로 많은 성도들이 주님의 능력이 나타나는 성경 본문을 대할 때마다 주님의 능력으로 자신의 문제가 해결될 것이란 잘못된 믿음을 더욱 강화시킴으로 성경의 가르침에서 점점 멀어지게 하고 있다.

주님이 행하신 기적은 주님의 메시아되심을 확증시켜 주는 표적이었고, 사도들이 행한 기적은 그들이 증거한 복음에 대한 확증을 위하여 주어졌지 그들의 개인적인 문제 해결용이 아니었다. 만일 주께서 동정심 때문에 병자들과 죽은 자들을 살리셨다면 당시의 모든 병자와 죽은 자를 살려내셔야 했다. 사도들도 그들에게 주어진 능력으로 모든 병든 자들을 다 고쳐야 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 이런 치유의 기적은 특별한 목적, 기적을 통한 예수님의 메시아되심과 사도들이 주님으로부터 보냄 받았음을 확증하기 위하여 베풀어진 것이었다. 그래서 요한은 기적을 가리켜 표적(Sign)이라고 말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런 본문을 대할 때마다 주님의 능력으로 우리의 문제가 해결될 것을 기대하면 안 된다. 우리는 이런 이미 1세기에 사라져 버린 은사들을 추구할 것이 아니라 이 시대에 복음의 확증을 위하여 우리의 삶이 변화되는 일에 힘 써야 한다. 우리의 변화된 삶으로 예수님의 그리스도되심을 전파해야 한다. 그리고 모든 질병에 대해서는 우리의 삶을 최선으로 인도하시는 주님의 주권과 섭리에 맡겨야 된다. 물론 인간은 종교적 본성을 갖고 있기에 일단 아프면 당연히 병의 치유를 위해서 기도하게 된다. 그러나 우리가 기도하고 소망한 대로 병이 고쳐질 수도 있으나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다. 많은 경우에 여기서 시험에 빠지게 된다. 병의 치유 여부에 따라 우리의 신앙이 흔들리지 않으려면 “여호와께서는 그 모든 행위에 의로우시며 그 모든 행사에 은혜로우신 분(시145:17)”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지금 당장은 이해할 수 없어도 주님의 주권, 주님의 인도는 언제나 최선임을 믿는 자세를 가질 때 치유 여부와 상관없이 주님을 경외하는 삶을 살 수 있다.

성경에 기록된 치유는 기질성 질병이었지 오늘날 은사주의자들이 고쳤다고 주장하는 기능성질병이나 심인성질환이 아니었다. 성경의 치유 기적은 전부 다 복음의 확증을 위한 것이었지 은사주의자들의 주장처럼 성도들의 건강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그리고 이런 치유는 성경의 완성과 함께 종결되었다. 장로교의 표준문서인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는 이렇게 교훈한다. “주님은 여러 시대에, 그리고 여러 가지 방식으로 자신을 계시하시고 자기의 교회에 자신의 뜻을 선포하시기를 기뻐하셨으며, 그 후에는 진리를 더 잘 보존하고, 전파하기 위해서, 그리고 육신의 부패와 사탄과 세상의 악에 대비하여 교회를 더욱 견고하게 하며, 위로하시기 위해서 바로 그 진리를 온전히 기록해 두시는 것을 기뻐하셨다. 이 같은 이유로 성경이 절대적으로 필요하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에게 자신의 뜻을 직접 계시해 주시던 과거의 방식들은 이제 중단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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