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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도 특별계시가 주어지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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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도 특별계시가 주어지는가?
  • 김대운
  • 승인 2016.07.27 09:20
  • 댓글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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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대운 목사

오늘날에도 특별계시가 주어질 수 있을까? 결코 그럴 수 없다는 것이 모든 개혁주의신학자들의 동일한 입장이다. 이 글을 통하여 성경이 완성되기 전 계시의 수단으로 주어졌던 기적과 현현, 직접적인 음성이나 예언에 대해서 고찰해보고자 한다. 

우선 특별계시의 수단이었던 기적에 대해서 먼저 생각해보자. 19세기 미국에서 최고의 칼빈주의 신학자로 불렸던 찰스하지는 기적을 이렇게 정의내린다. 

"이적이라는 말은 놀라다는 의미를 가진 miror라는 말로부터 유래되었고, 따라서 놀람을 자극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 어원적 의미를 통해서 놀람을 자극하고 주의를 환기시키기 위해 채택된 어떤 특별한 사건을 지칭하는 데 사용된다. 그런데 이적을 가리키는 성경에 사용된 용어들(페레, 아오트, 모파트, 게부라 등)은 대부분의 경우에 그것들이 적용되는 사건들의 본질보다는 그 의도(혹은 계획)를 나타낸다."(찰스하지) 

따라서 우리는 기적 그 자체보다는 기적이 베풀어졌던 목적과 의도가 어디에 있었는지를 살펴봐야 한다. 구약 시대에 베풀어진 기적들은 선지자들이나 사도들이 주님으로부터 보냄 받은 자임을 입증하는 의도를 갖고 베풀어졌다. 그들이 주님으로부터 보냄 받은 자임을 인식하고 그들이 전하는 하나님의 말씀에 청종케 하기 위함이었다. 자연법칙을 초월하는 예수님께서 행하셨던 기적들도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의 아들되심, 메시아되심을 입증하기 위한 것이었으며, 제자들에게 나타났던 기적들은 그들이 주님의 보냄 받은 자이며, 그들이 전하는 복음의 확증을 위하여 주어진 특별계시의 수단이었다.

기적과 함께 현현이나 직접적인 음성, 예언도 주의 뜻을 알려주시는 특별계시의 수단으로 성경의 완성과 함께 더 이상 나타나지 않았다. 기록된 말씀을 통하여 주의 뜻을 깨달을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B.B 워필드의 기독교기적론이 탁월한 답을 주고 있다. 

"기적의 은사들은 하나님께서 교회를 세우라고 권위를 부여하여 임명하신 대리인들로서의 사도들이 지닌 신임장의 일부였다. 그러므로 이같은 기능은 그 은사들을 분명히 사도들의 교회에 한정시켰으며, 당연히 사도들의 교회와 함께 사라졌다."(B.B 워필드) 

워필드는 성경의 완성과 함께 더 이상 기적의 은사가 나타나지 않았음을 역사적으로 신학적으로 증명해낸다.(이 책이 절판되었지만 구글에서 E-book으로 얼마든지 구매할 수 있다). 찰스하지도 그의 조직신학에서 기적을 명확하게 정의내리지 못한 예를 들면서, 이 용어 정립이 얼마나 중요한지 설명한다. 

"이적에 대한 이런 성경의 용어들이 정확히 정의 내려지지 않음으로 교회 안에서 매우 느슨하게(산만하게) 사용되는 것은 놀랄 일도 아니다. 예를 들면 루터는 '회심은 모든 이적가운데 최고의 이적이다.'라고 말한다. 또 그는 '매일 이적을 목격한다. 어느 마을이든 십만의 마귀들이 복음에 일제히 반대해도 복음을 고수하며, 진리가 이 악한 세상에서 지켜지는 것이야말로 계속되는 이적으로, 병자를 고치거나 죽은 자를 살리는 것은 가벼운 일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루터조차도 이적의 어원과 용법에 대한 명확한 개념을 갖지 못함으로 이런 말들을 듣고 배운 오늘날의 많은 신학자들과 목사들 역시 이적이라는 개념을 매우 광범위하게 사용하고 있다. 이적이라는 말의 정확한 정의를 내리기 위해서 성경에 기록된 이적들을 면밀하게 살펴봐야 한다. 왜냐하면 앞서 지적한대로 성경의 이적은 그 사건 자체보다는 이적을 주신 의도(계획)가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주께서 이적을 주신 의도를 파악할 때 이적이 어떤 것인지 제대로 알 수 있는 것이다."(찰스하지) 

만일 기적이 베풀어졌던 계시적 목적과 의도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면 오늘날 은사주의자들처럼 기적을 간구하게 되거나, 유사개혁주의자들처럼 오늘날에도 기적이 일어난다는 허황된 주장을 하게 된다.

하지는 계속하여 어떤 것이 이적(기적)이며 어떤 것이 아닌지를 명확하게  분류한다. 먼저 그는 우리 눈에 보기에 기적으로 여겨지는 것들은 신학적 의미에서 기적이 아님을 논증한다.

"하나님에 의해 지탱되고 인도되는 제2원인들의 일반작용에 기인하는 사건들로 자연의 통상적 과정들, 곧 식물과 동물의 성장, 천체들의 질서있는 운행, 그리고 아주 기이한 사건들, 지진, 화산폭발, 인간사회에서의 폭동과 혁명들이 이 부류에 속한다. 또 중생, 성화, 영적 조명과 같이 인간들의 마음에 미치는 성령의 역사에 기인한 사건들이 있으며, 이상의 부류들 가운데 어느 것에도 속하지 않는 사건들이 있는데, 인간이 관찰할 수 있는 것으로 하나님의 직접적인 개입에 의해서 나타나는 것으로, 제2원인들의 어떤 협력도 받지 않는 것(예-창세기 1장의 창조)이다.

이중 성경이 말하는 이적(기적)은 자연의 성장이나 우주의 신비, 중생이나 성화와 같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직접적 권능이나 단순한 의지에 의해 일어난 사건으로 정의될 수 있다. 예를 들면, 나사로의 부활이나 죽었던 야이로의 딸이 다시 살아난 것은 인간의 개입이나 협력 없이 하나님의 권능으로 나타난 사건이었다. 문둥병자의 치유와 오병이어 사건, 바람과 파도를 잠잠케 하신 것도 모든 물리적 원인들의 협력이 무시될 뿐 아니라 확실히 부정된다. 물에 빠졌던 도끼가 떠오는 것도 모든 물리법칙이 부인된다"(찰스하지)

칼빈은 기독교강요에서 더 이상의 새로운 복음이 없는 데도 기적을 간구하거나 찾아다니는 것의 불합리함을 "한 복음이 모든 땅, 모든 백성, 모든 시대를 위해 충분하듯이, 그 한 복음에 대한 기적의 입증도 모든 땅, 모든 시대를 위해 그만큼으로 충분하다. 따라서 더 이상의 기적들이 복음과 관련하여 기대되어질 수 없다."고 말했다.

헤르만바빙크는 그의 교의학에서 "특별계시는 하나의 역사의 과정의 형식으로 베풀어져 왔던 바, 그것은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 안에서 그 정점에 이르렀음"을 설명하면서 특별계시가 사도들에 의해서 성경기록으로 완성된 후에는 더 이상 보태질 수 없음을 분명히 밝혔다. 

"이제는 특별계시의 새로운 구성 요소들이 더 이상 보태질 수 없다. 이는 그리스도께서 오셨고, 그분의 사역이 이미 행해졌고, 따라서 그분의 말씀은 이제 완전하기 때문이다."(헤르만바빙크)

그는 이어지는 설명에서 만일 사도시대 이후에 어떤 기적이 우연히 발생했다는 가정 하에 기적이 계속 된다는 것은 납득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에 그 기적은 어떤 중요성이나 우주적인 의미를 전혀 갖고 있지 않음을 설명했다. '하나님의 큰 일(헤르만바빙크 저)'에서는 이렇게 설명했다. 

"이 목적이 달성되고 아버지께서 성령과 교통하심으로 아들 안에 계시하신 이런 계시를 믿고 고백하는 교회가 이 세상에 심어졌을 때 외적으로 볼 수 있는 이적들은 멈추고, 이방인의 충만함이 차고, 전 이스라엘이 구원받을 때까지 중생과 회심의 영적인 이적들이 교회 안에 계속된다. 성경의 증거에 따라, 세상 끝날에는 그리스도가 나타나시고 죽은 자의 부활, 심판, 새 하늘과 새 땅이 나타나는 미래의 이적들이 올 것이다. "(헤르만바빙크) 

그는 교회의 설립까지만 이런 이적이 베풀어졌음을 분명히 하고 있다. 시각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기적은 멈추었고, 찰스하지의 분류에 의하면 기적으로 볼 수 없는 영적 기적, 중생과 성화의 역사만 나타났다가 마지막 날 주의 재림 때 하나님의 직접적인 권능에 의해서 시각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이적이 나타날 것을 교훈하였다.

바빙크는 아브라함 카이퍼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나의 완성된 계시로부터 각 사람으로 하여금 모든 영적 양식을 얻게 하셨다."는 표현을 인용하면서 하나님의 계시의 수단이었던 기적을 계시가 완성 된 후에는 기대할 수 없도 없고 실지로 계속되지도 않았음을 논증했다(기독교기적론). L.벌코프 역시 동일한 신학적 입장을 그의 조직신학에서 밝혔다.

따라서 계시의 완성과 종결을 믿는 성도라면 이런 기적을 추구할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시는 주님의 섭리, 주권을 믿고 어떤 상황에서도 신앙이 흔들리지 않는 삶을 살아야 한다. 기적적인 주님의 개입을 구하는 기도를 하기보다는 주께서 우리의 삶을 최선의 길로 인도하신다는 사실을 늘 신뢰하며 다니엘과 세 친구처럼 신앙인으로서 거룩하고 구별된 삶을 살기를 기도해야 한다.

진실한 성도라면 비록 성경에 기록된 기적은 나타나지는 않을지라도 주님의 전능하심과 신실하심에 의해서 우리의 구원이 안전하게 보장되었다는 사실만으로 감격해야 하지 않겠는가? 물론 우리의 삶을 살아가다 보면 기적으로 부를만큼 놀라운 주님의 은혜들을 수 없이 경험하게 된다. 그러나 이는 앞서 찰스하지나 BB워필드가 설명한 신학적 의미에서의 기적, 자연법칙을 뛰어넘는 하나님의 권능의 현시는 아니다. 우리는 그런 것들을 가리켜 섭리라고 부른다. 주께서 미리 예비해 놓으신 은혜들을 우리에게 베풀어 주신 것이다. 공중의 새와 들의 풀과 꽃들도 돌보시는 아버지께서 우리를 돌보신다는 믿음을 갖고 살아간다면 비록 눈과 귀에 아무 증거가 없을지라도 우리는 완성된 계시인 성경만으로도 흔들리지 않는 삶을 살 수 있다. 

기적과 함께 성경이 완성되기 전 특별계시의 수단이었던 주님의 직접적인 음성이나 예언도 하나님의 백성에게 교훈을 주시고 책망하고 교정하기 위하여 주어진 계시의 수단이었다. 그런데 이런 성경적 특별계시(예언)에 대한 신학이 정립되지 않은 사람들은 오늘날에도 계시가 주어진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대부분 이런 주님의 계시를 단지 미래를 내다보는 무당 점치는 수준으로 격하시키고 있다.

가장 쉬운 예로 요나의 예언을 한 번 생각해보자. 요나는 회개하지 않으면 40일 후에 니느웨 성이 멸망한다고 예언했다. 이 부분만 보면 요나가 미래를 내다 본 것처럼 볼 수도 있지만 왕부터 시작해서 모든 백성들이 금식하며 회개하자 니느웨 성은 멸망하지 않았다. 그러면 이 예언은 불발된 것인가? 계시나 예언에 대한 성경적 정의가 내려지지 않은 사람, 그래서 점치는 수준으로 보는 사람에게는 불발로 보인다. 그러나 요나의 예언은 회개를 목적으로 주어진 것이었기에 이 말씀이 주어진 목적 그대로 성취된 것이다. 

바울은 고전14:31에서 예언을 통하여 “모든 사람으로 배우게 하고 모든 사람으로 권면을 받게 하기 위하여 하나씩 하나씩 예언할 수 있느니라”고 교훈함으로 성경이 완성되기 전 예언(계시)의 교육적 목적을 분명하게 교훈하고 있다. 행11:28의 “온 천하에 흉년이 들리라”는 아가보 선지자의 예언은 안디옥교회로 하여금 예루살렘의 성도들을 돕기 위한 헌금에 참여하게 하는 도덕적 결단을 내리게 했다.

바울이 밀레도의 에베소 장로들을 청하여 고별설교를 하면서 이런 말을 했다. “보라 이제 나는 심령에 매임을 받아 예루살렘으로 가는데 저기서 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거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라는 바울을 향한 성령의 계시를 생각해보자. 행21장에도 아가보 선지자가 “바울의 띠를 가져다가 자기 수족을 잡아 매고 성령이 말씀하시기를 예루살렘에서 유대인들이 이같이 이 띠 임자를 결박하여 이방인의 손에 넘겨주리라.”고 예언을 하자, 그 예언을 같이 들었던 사람들이 바울에게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지 말라고 권면하는 장면이 나온다.

왜 성령께서는 바울에게 이런 계시를 주신 것일까? 바울이 체포될 것이라는 예언을 들은 사람들의 반응처럼 바울에게 단지 미래의 위험을 미리 알려줌으로 피하게 하기 위한 의도였을까? 아니다. 결박과 환란이 기다리고 있으니 그 어려움 속에서도 복음을 전할 각오와 결연한 의지를 갖게 하기 위하여 이런 계시를 주신 것이었다. 행21:13을 보시면 저들의 만류를 뿌리치기 위하여 바울이 이렇게 대답한다. “바울이 대답하되 너희가 어찌하여 울어 내 마음을 상하게 하느냐 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을 받을 뿐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하였노라.” 바울은 이미 성령께서 주신 계시를 통하여 죽기까지 각오하고 복음을 전하기로 굳은 마음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성경이 완성되기 전 교육적 기능으로 주어졌던 계시(예언)는 성경의 완성과 함께 종결된 후에는 성경을 통하여 주의 뜻을 깨닫는 것으로 대체되었다. 딤후3:16,17을 보면,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 성경만으로 우리가 온전한 하나님의 사람,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될 수 있다. 우리로 온전한 하나님의 사람으로 세우게 했던 예언의 기능이 성경말씀을 읽고 배우는 것으로 대체된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더 나은 신앙인이 되기 위하여 또 다른 특별계시(방언, 예언, 기적)가 필요치 않고, 기록된 말씀을 깨닫고 생각나게 하시는 성령의 조명만 필요하게 되었다.

 그런데 오늘날 이런 성경적 계시관(예언관)이 정립되지 않은 사람들이 성경의 완성으로 더 이상 주어지지 않는 예언이 오늘날에도 주어진다고 주장함으로 많은 혼란을 초래하고 있다. 최근에 한반도에 전쟁이 일어난다는 예언으로 많은 사람들을 필리핀과 미국으로 이민을 가게 했던 홍혜선 전도사, IHOP, 하나님의 음성듣기 훈련을 하는 예수전도단의 예언도 다 무당 점치는 수준에 불과하다. 일례로 예수전도단에서는 예언은 모든 신자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 가르치고 있다. 그들은 기록된 성경을 깨닫는 것이 아닌 직접적인 음성을 듣거나 환상을 볼 수 있다고 가르치면서 자신이 듣고 본 것을 다른 사람에게 전해주는 것을 예언이라고 교육한다. 그래서 진로나 미래에 대해서 고민하던 사람들에게 계시(예언)를 받은 사역자들이 그를 위한 주님의 음성을 듣고 환상을 보았다고 하면서 그 계시를 전해준다. 

계시의 연속성을 주장하는 부류 중에 칼바르트도 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이 삶의 실존적인 계기 속에 있는 인간에게 성경과 설교나 어떤 매개를 통해서 오든지간에 그것은 언제나 위로부터 수직적으로 내려온, 인간에게 직접적으로 전달된 말씀으로 인정된다."고 주장했다. 루이스벌코프는 성경 전체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보지 않는 잘못된 전제에 근거한 칼바르트의 잘못된 계시관, 계시의 연속성을 비판하였다(조직신학 1권 229페이지).

바울은 고전14장에서 성경이 완성되기 전 예언이 주어졌던 당시에도 예언을 분별할 것을 명령했다. 그런데 오늘날에도 예언이 주어진다고 주장하는 사람들, 만일 그들의 주장대로 예언이 주어진다면 당연히 그 것이 주님으로부터 온 것인지 아닌지를 분별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냥 무시하고 있습니다. 계시(예언)에 대한 성경적 정의가 바르게 내려지지 않으니 계시를 받고 방언을 하며, 예언을 한다거나, 자기가 사도나 선지자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나타나면 그들의 말에 많은 사람들이 흔들리게 된다. 성경에 방언도 있고 예언도 있는 데 왜 잘못됐냐면서 오히려 반발한다.

그러나 성경의 완성으로 더 이상의 예언이 주어지지 않았다면, 이것이 신오순절운동이 일어나기 전까지의 교회사의 일관된 증언이라면 오늘날의 예언은 들어볼 필요도 없이 가짜다. 성경으로 검증할 필요도 없다. 오늘날에도 예언이 주어진다는 주장 자체가 성경적으로 용납될 수 없기때문이다. 설사 그들의 가르침이 아무리 은혜롭고 이웃 사랑을 실천하며 경건한 외형을 갖고 있다할지라도 이는 전부 다 광명한 천사로 가장하기 위한 위장술에 불과하다. 

 

 

 예를 들어서 몰몬교는 1823년에 요셉스미스가 숲에서 기도를 하다가 모로나이라는 천사의 계시를 받고 고대의 기록이 담긴 금판을 발견했는데 그 금판의 내용을 번역한 것이 몰몬경이다. 그들은 몰몬경이 성경과 동일한 권위를 갖고 있을 뿐 아니라 앞으로도 몰몬경과 같은 경전이 추가적으로 주어진다고 믿고 있다. 그런데 이들이 얼마나 헌신적인가? 우리 나라 주요 도시마다 전도하러 돌아다니는 몰몬교 선교사들을 보라. 몰몬교의 성가대는 굉장히 경건할 뿐 아니라 탁월한 실력을 갖고 있다. 몰몬의 타버나클 성가대 때문에 몰몬교에 가입하는 사람들도 많다고 한다. 그러나 이들이 아무리 경건해보이고 헌신적이고 봉사를 많이 해도 성경적 예언관에서 벗어났기에 이단으로 분류되는 것이다. 오순절운동이나 신사도운동, 오늘날에도 계시가 연속적으로 주어진다는 칼바르트의 주장은 성경적 계시론과 상반된 것이다. 그러나 이런 성경적 계시관이 정립되지 않으면 비성경적 계시관을 주장하는 자들에게 쉽게 미혹되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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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운 2016-10-30 16:31:16
네 맞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면 믿음이 없는 것으로 정죄해버리는 한국교회의 무속적 토양이 문제입니다. 믿음의 정의조차 제대로 내려지지 않으니 참 안타깝습니다.

한인신학교 2016-07-28 07:06:16
성경의 모든 이적들은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이 하나님 백성들을 위해 보내신 구원자이심을 하나님이 친히 선포하시는 특별계시를 드러내는 이적이었습니다. 단지 하나님의 능력이 많으심을 보여주시기 위한 쑈가 아니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구세주이심이 의심되지 않고 교회에서 받아들여지고 난 후에는 이러한 이적이나 은사가 나타나지 않습니다. 일례로 손기철 장로가 이적을 일으킨다고 하나, 제대로 된 이적은 거의 없고 대부분 심리적 현상들입니다. 이전의 오순절 부흥사들과 신사도 부흥사들이 일으키는 이적도 대부분 그랬습니다. 이제 하나님이 자기 백성들을 흥휼히 여기시어 병을 고쳐주시는 일이 없다고는 할 수 없으나, 대부분 병이 들면 현대 의학을 의지해야 합니다. 신장이 망가지면 이틀에 한번씩 투석을 하면서 남은 인생을 병원에 붙어서 살아야 하고, 심장박동에 불규칙이 오면 제세동기를 몸 안에 넣어야 하고, 심장 현관이 막이면 음식물을 주의해서 콜레스테롤을 낮추어야 하고 ... 이것이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하나님이 지금도 성경의 기적을 주시고 계시를 주신다는 말은 그렇게 쉽게 할 수 있는 말은 아닙니다. 많은 오해와 부작용을 일으킵니다.

김대운 2016-07-28 00:09:37
분별 다비드님의 지나친 과찬에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사실 저도 고등학생 때부터 CCM과 주여삼창, 통성기도와 같은 신오순절적인 분위기에서 신앙생활을 해왔습니다. 그래서 늘 호산나인테그레티, 두란노경배와 찬양, 베니힌, IHOP, 인터콥과 같은 신사도주의자들의 신들림에 푹 빠져 살았습니다. 총신 1학년 때는 실로 찬양팀원으로 2학년 때는 리더로 서철원교수님과 정일웅교수님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찬양을 인도했던 사람이었습니다. 이랬던 제가 신대원 3학년 때 지금 부목사로 사역하고 있는 경성교회에 와서 목사님을 통하여 개혁주의 신학으로 세뇌될 정도로 철저히 배웠고 지금도 배우고 있습니다. 춘천한마음교회 김성로목사의 부활관에 대한 몇 개의 글을 쓸 수 있었던 것이나, 지금 이인규권사의 문제점을 지적하며 교정하기 위한 글을 쓰는 것이나 다 저희 목사님을 통해서 배운 것을 나눌 뿐입니다. 그냥 Titus kim으로 활동하고 싶었는데, 페북에 올린 김성로목사에 대한 넋두리 글을 정이철목사님께서 바른 믿음으로 옮기시면서 이렇게 되었네요. 아직도 많이 부족하지만 격려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저도 바른 믿음을 통하여 많이 배우고 있습니다. 바른믿음은 아합의 궁내 대신이었던 오바댜가 주의 선지자를 숨겨 놓았던 은신처와 같은 곳 같습니다. 이시대에 진실한 하나님의 백성들을 지키며 진리의 말씀으로 살찌우는 바른 믿음을 통하여 바알의 단들이 훼파되며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들이 세워지길 기도할 뿐입니다

김대운 2016-07-27 23:40:58
야고보는 주께서 우리를 성화시키기 위하여 시련을 허락하시니까 시련을 만날 때 기쁨으로 인내할 것(약1:2-4)을 교훈했습니다. 4장에서는 정욕으로 구하는 기도를 정죄했습니다. 그랬던 사람이 인생을 살다가 어려운 일을 만나면 기도해봐라, 엘리야가 기도하니까 3년 6개월간 비가 오지 않았다가 다시 비가 왔으니까, 기도의 능력을 믿고 너도 시련을 피해보라는 가르침으로 야고보서를 마무리 졌겠습니까? 그런데 오늘날 한국교회는 그렇게 야고보서의 내용을 심각하게 왜곡하고 있습니다. 야고보는 신앙인의 시련은 성화를 위해서 피할 수 없는 것이기에 인내할 것을 명령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기도는 엘리야처럼 주님의 약속을 신뢰하며 흔들리지 않기 위한 기도여야 할 것입니다. 그 기도에 대해서 주께서 응답하시고 어떤 어려움이든 이겨낼 수 있는 힘을 주실 것입니다.

김대운 2016-07-27 23:40:27
질문하신 약5장의 본문과 현재 우리와는 2000년이라는 시간적 격차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계시가 성경으로 완성되기 전에는 사도들과 선지자들과 같은 계시의 통로 역할을 하는 자들이 있었을 뿐 아니라 고전12:9,10을 보시면, 병 고치는 은사와 능력 행함, 예언, 영분별, 각종 바언 말함, 방언통역함이 은사로 주어졌음을 알 수 있습니다. 물론 이런 은사들 역시 하나님의 계시의 수단들이었으며, 성경의 완성과 함께 사라진 것들입니다. 이런 은사가 존재했기에 야고보는 이런 명령을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초자연적인 역사가 일어났던 사도 시대라고 해도 모든 기도가 응답되지는 않았습니다. 약4:2,3을 보면, 기도하면 얻을 수 있지만 이기적인 기도는 응답받지 못함을 분명히 밝히고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본문을 이해하려면 당시가 사도시대라는 점도 고려해야 하지만 동시에 더 중요한 점은 야고보서가 기록된 목적입니다. 야고보서는 믿음과 행위의 일치를 통한 성화를 교훈하는 책입니다. 야고보서 1장부터 보시면, 야고보는 주께서 우리를 성화시키기 위하여 여러 가지 시련을 주시며, 그 시련을 온전히 인내할 것을 명령했습니다. 이어지는 말씀에서 우리가 온전히 성화되기 위하여 사람을 외모로 취하면 안 됨, 믿음과 행위의 일치, 반드시 어거해야 할 혀(언어), 정욕과 세속과 짝하지 않아야 함, 비방금지, 허탄한 자랑금지, 재물관에 대해서 차례로 교훈한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문제의 본문이 등장하게 됩니다. 따라서 본문을 이러한 흐름가운데 접근해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본문을 통하여 기도의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그러나 앞서 설명해 드린 기도의 관점에서 본문을 보면 그렇게 어렵지 않게 해결이 됩니다. 본문을 해석하는 키는 바로 17,18절입니다. 칼빈은 오늘날 설교자들이 가장 강조하는 이 부분을 이렇게 해석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확신한 그는 아합 왕에게 신중히 비를 약속한 후에, 무릎 사이에 머리를 넣고 마음 졸이며 기도했으며 사환을 보내 일곱 번이나 확인했는데(왕상 18:42), 이는 그가 자신의 예언을 믿지 못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신앙이 흐려지거나 나태해 지지 않도록 자신의 소원을 하나님 앞에 알리는 것을 의무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엘리야는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그가 기도한즉 3년 6개월간 비가 오지 않았다가 다시 기도한즉 비가 온 것이 아닙니다. 야고보의 기도는 주께서 주신 약속에 대한 신뢰를 잃지 않기 위한 기도였습니다. 왕상17:1을 보시면, 주께서 엘리야를 아합 왕에게 보내서 앞으로 주의 말씀이 있을 때까지 비가 오지 않을 것이라고 주님의 말씀을 대언했습니다. 그러자 실지로 비가 오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18:1을 보시면, “많은 날을 지내고 제 삼년에 여호와의 말씀이 엘리야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너는 가서 아합에게 보이라 내가 비를 지면에 내리리라.” 엘리야는 주님의 말씀을 믿고 아합에게 가서 비가 내릴 것이라고 대언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엘리야의 기도는 “아합의 죄가 극심함으로 비가 내리지 않게 하옵소서.”, “이제 비를 내려 주시옵소서.” 이런 식의 기도가 아니었다. 그는 단지 주의 말씀을 대언한 것 뿐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가 전한 말씀대로 주께서 비를 내려주시기를 기도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3년 6개월의 가뭄과 해갈은 엘리야의 기도의 결과가 아니라 주님의 말씀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뿐이었다. 야고보는 그 약속을 신뢰하고 기도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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