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경태 목사

20세기 초 미국 아주사에서 시작한 오순절주의는 ‘방언’을 성령받음의 표징을 주장한 것이 문제가 아니었다. 오순절주의의 문제는 ‘계시’ 이해의 큰 틀을 완전히 무너뜨리는 일이었다. 그래서 100여년 후 세계 교회, 한국 교회는 계시에 대해서 도대체 가닥을 잡을 수 없을 정도로 혼란한 상태로 전락했다. 바른 가르침이 없으면 교회 권위도 당연히 추락한다. 교회는 바른 가르침을 해야 하며, 바른 가르침을 수호해야 한다.

한국 교회 안에서 발표되는 목회프로그램의 대부분은 마치 ‘꿩 잡는 게 매’라식이다. 단지 교회 구성원의 숫자를 증가시킬 목적뿐이기 때문이다. 설교를 잘하는 목적은 교인들을 많이 모으기 위해서이고, 좋은 프로그램을 운용하는 것도 교인들을 잃지 않기 위해서나 모으기 위한 방편에 불과하다. 그럼 어떤 프로그램이 목회를 안정적으로 하고 숫자를 많이 모을 수 있을까? 그것은 사람들에 입맛에 맞게 하며 격려하는 것이다.

초기 한국 교회에서는 방언을 하지 못하게 명확하게 규제를 했었다. 그러나 언제부터가 방언을 못하는 목사는 청빙 대상에서 제외되는 일까지 발생하고 있다. 한국 교회가 대격변을 한 것이다. 그럼 목사는 목사직을 유지하기 위해서 방언을 규제할 수 없거나 독려해야 하는 상황이다.

‘방언’이 은사냐? 은사가 아니냐? 는 논쟁은 무의미하다. 방언이 준 유익이 무엇인가? 에 중점을 두자. 어떤 사람들은 방언의 유익이 ‘긴 기도 시간’이라고 한다. 그런데 깨닫지 못한 일만 마디 방언보다 깨닫는 말 한마디가 더 유익하다는 것에는 성경 가르침(고전 14:19)에 대해서는 침묵한다.

성경은 그리스도를 구주로 부정하지 않는 한 특별한 거부나 제재를 하지 않는다. 그러한 부분은 각자가 영적분별을 하여서 자기 유익과 교회 유익을 위한 선택을 해야 한다. 방언 문제가 은사냐? 이런 소란한 상황에서 슬그머니 들어온 것이 계시 문제의 혼선이다.

계시 이해는 현대 신학에서 계시연속주의 사상을 확립한 상태였다(칼 바르트). 바르트와 브루너의 계시논쟁이 있는데, 바르트가 특별계시를 주장했다고 생각한다. 브루너는 모든 계시를 동일한 계시로 이해했다면, 바르트는 구분한 것이 차이일 뿐 둘에서 차이는 없다. 바르트는 성경, 죽은 개, 오페라 연주 등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즉 특별계시가 성경, 죽은 개, 오페라 연주 모든 상황에서 발생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한국교회(합동 교단(총신대학교)를 중심으로)는 바르트의 이러한 주장이 성경의 권위를 훼손한다고 바르게 이해했기 때문에 전적으로 거부했다. 그러나 바르트 신학의 거대한 움직임을 지금은 누구도 막지 못하고 있다. 그렇다면 특별계시가 성경 밖에서 계속된다는 견해가 팽배할 것은 자명한 것이다.

한국교회는 계시계속주의의 양방향 - 방언, 축복설교, 신사도 운동 등의 서민적 신앙과 신비주의적이고 철학적 신앙(현대신학) - 에 함몰되기 일보직전에 있다. 마지막 보루가 ‘성경의 권위’를 굳건하게 붙드는 것이다. 그런데 성경의 권위를 주장한다면서 특별계시가 있음을 주장하는 부류들이 있다. 이러한 구도가 바르트적 애매한 주장이다. 바르트는 성경의 권위를 부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특별계시의 연속도 부정하지 않는다. 하나님이 기뻐하면 언제나 어느 방법으로도 자기의 뜻을 자기가 원하는 종(어떤 사람, 어떤 상황)을 통해서 전할 수 있다는 것이다. 만약 성경 66권만을 주장하면 하나님의 자유를 억압한다고 주장한다.

지금은 성경의 권위를 주장하면서 특별계시가 연속됨을 주장할 수 있는 시대이다. 그런데 우리 믿음의 선진들은 17세기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1장 1-10)를 작성할 때 성경의 권위, 성경목록, 범위 등을 확정했다. 성경의 권위라고 했을 때에 성경을 구약과 신약 66권으로 한정한 것이다(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 1장 2절). 이것을 벗어나면 죄사함과 영생의 가르침을 이룰 수 없는 상황에 이르는 것이다.

성경 66권의 확정적 권위를 믿고 고백하면, 방언은 의미 없는 소리에 불과하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성경 66권을 해석하는 선포자(목사)를 통해서 말씀하기 때문이다. 중세로마교회는 복음선포가 없는 형태의 미사로 성경 가르침을 질식시켰다. 종교개혁에서 성경 본문에 입각한 복음 선포로 개혁했다. 그런데 독일에서 발흥한 경건주의에서는 선포된 복음에서 ‘개인 해석’으로 전환하였고, 영국과 미국에서 부흥(대각성집회)라는 명목으로 ‘교회 밖 대형집회’를 통해서 교회에서 선포한 복음을 약화시켰다.

결국 20세기 초에 발생한 방언이 세계 교회가 성경에서 떠나도록 했다. 세계 교회에서 방언을 빼면 형태가 무너질 정도이다. 그러나 방언은 성경 66권의 가르침을 약화, 무력화시키는 방편이다. 강화한다고 주장하지만 신사도 운동까지 비약했다.

선포된 복음 외에 다른 요소를 첨가하려는 것은 도움이 아니라 사족(蛇足)이다. 성경 외에 어떤 다른 계시로 하나님께서 성도나 교회에 말씀하실 수 있다는 견해는 하나님의 구원 경륜에 대한 무지이다. 그리스도의 교회는 사도의 가르침 위에 세우는 것이다. 로마 카톨릭 교회는 사도의 직분의 연속을 주장하지만, 개혁한 교회는 사도의 가르침의 연속을 주장한다. 사도의 가르침은 성경 66권으로 제한된다. 신약성경의 마지막 저자인 요한 사도에서 성경은 종결된다. 많은 위경(僞經)들이 있지만 교회는 27권을 정경으로 받았다. 그래서 성경 외에 다른 계시가 있다는 주장은 하나님의 구원 경륜에 대한 무지이고 교회를 혼란에 빠뜨리고 훼방하기 위한 술책에 불과하다.

간혹, 성경 66권을 주장하는 교회는 성장하지 않고 자유로운 교회가 성장한다고 조롱하기도 한다. 그러나 자유로운 교회는 시대의 산물이지 역사적 정통성은 없다. 자유로운 교회는 시대에 적합하게 거짓 가르침을 유연하고 매혹적으로 선전한다. 그래서 많은 교회들이 따르고 시대에 숫자와 인가에서 소득을 내기도 한다. 그러나 영원한 프로그램은 없다.

반면 성경의 절대 권위를 주장하는 것은 교부들에서 지금까지 변하지 않고 가르침을 유지하고 주장하고 가르치는 교회가 있다. 성경의 절대 권위는 교회에 불변한 진리이다. 오순절주의 방언 운동은 지금은 신사도 운동의 계시계속주의 체제로 전환하여 유지하고 있다. 오순절주의는 방언과 함께 성경 권위는 인정했었다. 그러나 신사도 운동에서는 방언은 갖고 있지만 성경에 부가한 계시가 가능하다고 부끄러움 없이 주장하는 시대가 되었다.

‘성경 외에도 특별계시가 있다’는 주장은 ‘계시계속주의’이다. 신사도 운동의 주장이기도 하다. 신사도 운동을 비판하면서 특별계시 계속운동을 찬성하는 것은 자기 독단에 빠져 자기가 한 말은 모두가 옳다는 식이 될 수밖에 없다. 특별계시의 가능성을 주장하면 신사도 운동이 바람직한 사상이라고 해야 한다. 신사도 운동 계열을 비판하려면 반드시 성경 66권으로 특별계시를 제한해야 한다. 성경은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교회가 보존한 유일한 특별계시의 보고이다. 성경의 권위를 폄훼하는 것은 성경의 저자이신 성령을 훼방하는 죄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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