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세윤 교수는 자신의 책에서, 그리고 인터넷 매체에서 성도의 구원이 종말에 유보 되었다고 하는 것을 주장하는 신학자들이 자신의 책을 읽지 않고 바르게 이해하지 못한 결과에서 비판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또한 자신을 비판하는 사람들에 대하여 인격적인 비하를 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오히려 학자로서 자신이 무례한자임을 나타내보였다.

김세윤 교수는 자신의 유보적 종말론을 독자들에게 이해시키기 위해 “유보 (留保)”라는 말을 “예약 (豫約)”이라는 용어로 이해하면 된다고 말한다. 유보와 예약은 영어에서 같은 말로 사용된다고 언급하고 있다. 그렇다면 김세윤 교수가 유보와 예약이 영어로 reservation 이기 때문에 정말 같은 의미의 단어인가? 미국에 살면서 reservation이 유보와 예약이 같은 의미라고 하는 김세윤의 주장은 참으로 어리석을 뿐 아니라 그는 한국어에 대한 바른 의미도 잘 알지 못하는 사람이다. 어떻게 유보와 예약이 같은 의미인가?

영어에서 유보와 예약은 reservation이지만 이 단어가 사용되는 문맥에서는 다른 의미를 부여한다. 예를 들어 take reservation이라고 하면 ‘예약을 받는다’ 이지만 reserve the right to make changes later 라고 하면 ‘권리를 행사하는 것을 미루었다’ 고 하는 의미가 된다. 김세윤 교수는 성도가 의롭다고 하는 것이 종말에 유보되었다고 한다. 그 말은 하나님께서 의롭다고 하는 것을 선언하는 그 주권을 미루었다고 하는 것이다. 그런데 김세윤 교수가 이렇게 유보와 예약을 같은 의미로 말하는 것을 보면서 개인적으로 부끄럽고 수치스러움을 느낀다. 어떻게 이런 사람이 세계적인 신학자라는 타이틀을 가졌는지 다시 한 번 의심이 든다. 결국 광고를 통해 만들어진 사람도 세계적인 사람이 되는 시대이다.

또한 김세윤 교수는 종교개혁자들이 바울을 바르게 이해하지 못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김세윤 교수는 자신은 종교개혁자들의 칭의론을 자세히 공부하지 않았다고 인터뷰 가운데 말하고 있다(“종교개혁자들의 칭의론을 자세히 공부한 것은 아니지만”- 인터뷰 내용).

이러한 모습은 학자의 모습이 아니다. 그렇다면 김세윤 교수는 더더욱 종교개혁자들의 칭의론을 비판해서는 안 된다. 자세히 공부도 안한 사람이 어떻게 종교개혁자들의 신학을 비판할 수 있는가? 어불 성설이다. 타인이 자신의 신학을 비판하면 책도 안 읽은 자들이라고 하면서 인격적인 폄하를 하지만 정작 김세윤 자신은 종교개혁자들의 신학을 제대로 이해하지 않고 비판하는 것이다. 신학자로서 기본이 되어 있지 않은 사람이 과연 신학을 말할 수 있는가? 혹자는 이렇게 물을 수 있다. 그렇다면 당신은 김세윤 교수의 책을 읽고 이렇게 김세윤 교수를 비판하고 있는지를? 그렇다. 김세윤 교수가 쓴 책을 거의 다 읽고 비판하고 있으며, 지금도 김세윤 교수의 책을 읽고 있다.

김세윤 교수의 칭의는 한마디로 말해 성화를 통해 부여되는 칭의이다. 그래서 종말에 가서 구원이 유보되는 것이다. 이것을 주장하기 위해 독특한 수사학적인 표현을 한다. 그러나 성경은 아주 분명하고 확실하며 명확하게 말한다. 모든 인간은 다 죄인이라고 말씀한다. 의인은 아무도 없다. 그러므로 죄인을 하나님 앞에 설 수 있게 해줄 수 있는 권능은 칭의에 있지 성화에 있는 것이 아니라고 가르친다.

성화는 칭의 안에 있다. 과연 “하나님의 진노의 날에” 구원을 얻게 해줄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오직 칭의이다. 죄인은 의의 옷을 입지 못한 벌거숭이다. 그래서 예수를 믿으면 예수 그리스도의 의의 옷을 입니다. 주님이 주는 의이다. 이것이 칭의이다. 성화는 이 의의 옷에 향기를 내는 것이다. 그러면 무엇이 문제인가? 향기가(성화) 없는 옷이라고 해서 의인이 아닌가? 아니다. 의의 옷을 입고 있기 때문에 의인인 것이다. 의롭다고 선언하여 주신 칭의로 성도는 삶을 살아간다. 이것이 구원이다. 성도는 삶의 여정에서 의의 옷을 입고 향기를 내기 위해 산다. 향기가 없다고 구원이 유보된 것이 아니다. 이미 구원 받아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오히려 김세윤 교수는 성도의 종말에 대한 의미를 바르게 이해 못하고 있다. 성도는 의롭다고 칭함 받는 것을 유보된 상태에서 종말에 이르지 않고, 오히려 종말에 자신이 의인이라고 하는 것을 확증 받는 것이다. 의롭다고 하는 것을 유보된 상태에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의인이라고 하는 신분을 취득하여 살아간다. 그래서 종말에 확증 받는다. 그러므로 죄인이 주 예수를 자신의 구주로 믿는 순간부터 신분이 변화되어 의인으로 살고 의인으로 죽는다. 이것이 종교개혁자들의 칭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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