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민족이 셈족 욕단의 후손이라는 주장은 세대주의에 기초한 억지

▲ 조덕영 교수(조직신학 (평택대학교) / 창조신학연구소 소장, 창조론오픈포럼 공동대표)

성경은 역사적 계시이다. 그 어떤 책에서도 볼 수 없는 인류의 민족 분산에 대한 귀중한 정보를 제공한다. 성경은 하나님이 모든 인류를 한 혈통으로 만들었다 하였다(행17:26). 그런데 혈통에 대해 한국교회에는 이상한 세 가지 신화가 있다. 이것은 한국교회가 오랫동안 세대주의의 영향권에 있었음을 보여주는 씁쓸한 증거이기도 하다. 그 거짓 신화는 다음과 같다.

성경에 없는 민족 관련 이상한 신화 : 선민사상, 선민의식, 선민신화

첫째, ‘셈족’이 특별한‘선민’이고 특별한‘복’을 누린다는 신화는 허구이다.

셈족 선민 신화가 왜 허구일까? 성경 어디에도 그런 신화는 없다. 오늘날 셈족 후손들인 엘람(야벳 후손 메대와 함께 오늘날의 이란을 형성), 앗수르(현재의 이라크 모술 땅 중심의 국가), 아르박삿(주로 현재의 이스라엘과 일부 아랍민족을 형성), 룻(현재의 소아시아 터키의 일부 지역), 아람(현재의 시리아) 등의 어느 민족에게도 ‘선민’, '특별한 복’이 주어졌다는 성경적인 증거는 없다. 하나님께서 특별히 복을 주시는 대상은 혈통적 ‘셈족’이 아니다. 하나님의 특별한 복을 누리는 대상은 오직 우리의 죄를 대속해 주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주’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믿는 그리스도인들에게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특별한 복을 주시기 때문이다.

둘째‘셈족’이스라엘이 특별한‘복’을 누리는‘선민’이라함도 성경과 맞지 않다

이스라엘 선민 신화가 왜 거짓일까? 셈족 가운데 아르박삿의 여러 후손 중 이스라엘 민족이 말씀을 받은 것은 사실이다(롬 3:2). 그런데 아르박삿의 후손들은 여러 갈래가 있다. 아르박삿은 셀라를 낳고 셀라는 에벨을 낳았으며 에벨은 벨렉의 조상이며 벨렉은 아브라함의 5대조이며 아브라함의 여러 손자 가운데 한 사람이 바로 야곱(이스라엘)이었다. 야곱의 12 아들 가운데 한 사람인 유다에게서 유대인이라는 이름이 왔다. 일반적으로 아브람(아브라함)은 첫 번째 히브리인으로 지칭된다. 그런데 ‘에벨’에게서 ‘히브리’라는 이름이 왔다는 주장이 있다. 그렇다면 그 많은 히브리인 가운데 겨우 야곱 후손들만 특별한 복을 누린단 말인가? 그런 성경적 해석은 없다.

더구나 성경은 혈통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라고 말한다(롬 3:28). 뼈 속까지 철저한 유대인인 사도 바울은 할례나 무할례나 아무 것도 아니라고 말한다(갈 6:15). 그러므로 혈통적 이스라엘이 아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백성이 복 되다(갈 2:16).

‘온 이스라엘’이 구원 받지 않느냐고 항변하는 사람들이 가끔 있다(롬 11:26). 이스라엘은 이미 솔로몬의 아들 르호보암과 여로보암 때에 두 나라로 갈라져버렸다가 주전 722년(앗수르에 북이스라엘 멸망)과 주전 586년(바벨론에 남유다 멸망)에 망해버렸다. 우리 고조선이 망한 것보다도 근 500년 전이었다. 이후 남유다 왕국이 성경의 예언대로 70년 만에 귀향하기는 하였으나 10지파가 중심이 된 북이스라엘은 사마리아인화 되어 그 존재감이 사라져버렸다. 그리고 2,500여년이 지난 지금 혈통적으로 다양하게 뒤섞여 순수 유대인조차도 찾기가 어려워졌다. 그런데 ‘온 이스라엘’을 어떻게 구원한다는 것인가? 과연 오늘날 혈통 상 온전한 이스라엘이 존재할 수 있다는 말인가? 혈통상 온전한 이스라엘을 찾는다는 것은 사막에서 바늘을 찾는 격이다.

그래서 칼빈은 이들 ‘온 이스라엘’을 영적 이스라엘(유대인과 이방인 전부) 즉 구원의 대상 전부를 말한다고 보았다. 필자는‘온 이스라엘’이란 모든 시대, '선택된 모든 유대인'(무차별적인 모든 유대인이 아님을 명심할 것)이라고 보는 것이 맞을 것으로 본다. 즉 '온'이라는 말이 단하나 예외 없는 집단적이고, 전체적이며, 민족적이고, 국가적인 이스라엘 전체의 구원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세대주의자들은 주님 재림 직전에 좀 더 의미심장한 말투로 이스라엘의 충만한 수가 차게 되는 극적인 회심이 반드시 일어날 것이라고 주장한다. 도대체 예수님 재림 때까지 지상에 온전한(조금도 다른 종족이 피가 섞이지 않은) 유대인이 있을까? 결코 있을 수 없는 비성경적 거짓말이다. 또한 그들이 동시적으로 모두 돌아온다는 것이 성경이 말하는 구원관과 맞을까? 성경은 이런 구원에 대해 전혀 말하고 있지 않다.

세대주의는 ‘그리하여(롬 11: 26절)’를 ‘그리고 그 후’라고 해석하여 ‘그리고 그 후’ 모든 이스라엘이 구원 받는다고 하나, 헬라어 ‘후토스’는 우리 개역개정판처럼 ‘그리하여(이리하여)’로 보는 것이 옳다. 왜냐하면 ‘그리고 그 후’로 하면 특정한 어떤 시기에 모든 이스라엘이 구원 받는다는 뜻으로 왜곡 될 수 있기 때문에 이것은 억지 번역이 된다. 그러므로 마땅히 ‘그리하여’로 번역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오랫동안 믿음과 회개의 기회를 주셨음에도 대부분의 유대인들이 완강히 저항하고 십자가의 구속사역을 외면하고 심지어 예수 그리스도를 조롱하다가 재림 직전 어느 순간에만 집단적으로 회심하여 돌아온다는 사상은 성경적 바른 해석과 상식에 전혀 맞지 않는 미숙한 주장일 뿐이다.

따라서 모든 이스라엘 백성이 구원 받는다는 의미를 육체적 또는 민족적인 이스라엘 전체로 보려는 것은 성경과 동떨어진 거짓 주장이다.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이방인 전체가 아니듯이 온 이스라엘 역시 이스라엘 민족 전체가 아닌 것이다. 주후 2000 여 년 간의 역사 속에서 전체의 이스라엘 사람들로 예수를 모르게 하여 그냥 죽도록 외면해 놓고, 미래 어떤 시점의 시간대에 와서 따로 이스라엘 전체만 구원 받도록 한다는 특권 사상은 결코 성경적인 바른 사상이 아니다.

제2차 세계대전 이전과 1941-1945 사이 핍박받은 유대인들의 시련을 보여주는 유대인구 통계자료가 있다. 당시 러시아는 280만 명⇒120만 명으로 급격한 인구 축소가 있었고 루마니아(80만⇒35만), 폴란드(325만⇒300만), 헝가리(40만⇒30만), 불가리아(6만⇒1만 1천), 독일(23만⇒18만), 리투아니아(15만 5천⇒13만 5천), 라트비아(9만5천⇒8만 5천), 이탈리아(4만5천⇒7천5백), 체코(31만 5천⇒27만) 등 유럽 유대인구 증가 지역은 전무하였다.

이것은 당시 유대인들에게 커다란 시련이 있었음을 보여주는 결정적 통계다. 세대주의의 주장이 맞는다면 이때야 말로 주님이 오셔서 이들을 구원하셔야 되지 않았을까? 그런 일은 없었다. 신앙적으로나 육적으로나 이스라엘에게 별난 복은 없는 것이다. 오늘날 순수한 이스라엘 사람도 없을뿐더러 디아스포라 이후 유대교 신앙도 많이 달라졌다. 다양한 기독교파가 논쟁하듯 유대교도 종교적 색깔에 따라 하레디(극정통유대교인), 다티(종교적인 유대교인), 마소르티(전통적 유대교인), 힐로니(세속적 유대교인) 등으로 균열하였다. 이들 종교적 색깔조차 서로 다른 유대인을 어떻게 모두 구원한다는 것인가? 그러한 보편적인 성경적 진리는 없다. 그래서 쾨슬러는 <13 지파>(Arthur Koestler, The Thirteenth Tribe), 1976)라는 책에서 현재 이스라엘의 유대인은 아브라함의 혈통이 거의 없다고 제시하기도 했다.

체코 프라하에서 프란츠 카프카의 팜플렛 광고를 찍으려다 사진조차 찍지 못하게 막던 다혈질적이고 완고하고 신경질적이며 아주 인색한 정통 유대인 젊은이에게 크게 실망한 적이 있다. 필자의 장녀의 유대인 친구 안나가 있다. 안나는 서류상으로만 유대인 일뿐 유대교도 이스라엘도 신앙도 어떤 의미인지 모르고 산다. 안나는 자신이 유대인의 피가 몇 % 섞인 유대인인지도 모른다. 그러면서 오직 먹고 살기 위해(독일의 유대인 배려정책 덕으로) 러시아에서 독일로 이주하여 살다가, 유대인들에게 유난히 관심이 많은 필자 딸의 안내로 유대인들을 위한 무료 유대청년 이스라엘 관광 연수 프로그램이 있다는 것을 소개 받고 공짜 이스라엘 여행을 신나게 즐겼다. 안나가 더 유대인인지 아니면 늘 유대인 회당을 목사인 아빠보다도 훨씬 더 잘 알고 키부츠 유대공동체를 최소 5군데 이상 체험한 우리 딸이 더 유대인에 가까운 것인 지 ...

따라서 오늘날에 이르러 특별한 이스라엘은 결단코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이 필자의 견해이다. ‘온 이스라엘이 모두 구원을 받으리라’는 구절은 문자적 이스라엘 전체가 아니라 온 이스라엘의 남은 자(즉 믿는 자, Remnant), 즉 이방인의 충만한 수(믿는 이방인의 충만한 수)와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셈족’ 이스라엘이 특별한 ‘복’을 누리는 ‘선민’이라는 주장은 성경과는 전혀 다른 거짓이다.

셋째, 우리 한민족을 특별한 ‘제2의 선민’이라 함도 옳지 않다. 한민족을 제2의 히브리민족이라 함도 거짓이다. 특별하게 ‘모두 구원받을 이스라엘’이 없듯이 ‘제2의 선민’이란 말도 성경에 없다. ‘제1의 선민’도 없는데 하물며 우리 한민족이 무슨 ‘제2의 선민’이 될 수 있다는 말인가? 수천 년 동안 하나님을 모르고 우상에 찌들다 한반도에 복음이 들어온 것은 겨우 19세기 말이었다. 그리고 복음이 들어온 지 겨우 100여년 만에 한국의 기독교는 소망의 종교에서 세상의 질타와 조롱을 받으며 아울러 이단과 사이비들이 준동하면서 바른 신앙의 열정이 냄비처럼 식어가고 있어 안타까울 뿐이다. 과연 우리 민족이 ‘제2의 히브리 민족’이라 할 수 있을까? 그리고 ‘제2의 히브리 민족’이 그렇게 좋은 의미일까? 1세기에 복음이 들어가 4세기에는 최초의 기독교 국가가 되고 전 국민의 95% 이상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아르메니아나 조지아 공화국과 비교된다.

구약시대와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시던 시대 그리고 은혜 시대까지 여전히 완강한 이스라엘을 그토록 ‘선민’으로 받들어 주고 싶은가? 온전한 이스라엘이 온전하게 하나님을 섬긴 적이 언제 있었던가? 주님 이전, 희년을 제대로 선포한 적이 있는가? 가나안 족을 제대로 제거한 적이 있는가? 산당을 제대로 제거한 적이 있는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달아야 한다고 소리친 백성들은 누구였나? 그리고 우리 한국의 교회들은 과연 하나님 앞에 합당한 교회였던 적이 있었던가? 그렇게 ‘제2의 히브리민족’이 되고 싶은가? 마치 한민족이 중국 앞에서 ‘제2의 중국’인 것처럼 비굴하게 엎드리는 또 다른 의미의 중화사상 같아 씁쓸하다.

결국 ‘제1의 선민’이나 ‘제2의 선민’은 성경적으로 존재 할 수 없다. 이스라엘이나 이방 니느웨 땅이나 어디든지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백성 즉 남은 자(Remnant)가 있을 뿐이다. 오늘날에도 여전히 하나님께서는 모든 나라(열국)에 자신의 영광을 알리신다(겔 39:21). 그곳에서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택함 받은 백성만이 복 되다’ 라고 할 뿐이다. 할렐루야!

 

조덕영 목사 / 평택대학교 겸임교수, 조직신학 박사
               창조신학연구소 소장,
               창조론오픈포럼 공동대표

(상기의 글은 기독교진리수호연구협회(대표 림헌원목사-예장합동)의 2016년 5월31일 세미나에서 조덕영 박사가 발제한 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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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덕영 박사는 환경화학공학과 조직신학을 전공한 신학자다. 강남대, 개신대학원, 건양대, 명지대, 서울신(예장 합동), 서울기독대학원, 백석대와 백석대학원, 피어선총신, 한세대신대원에서 가르쳤고, 안양대 겸임교수, 에일린신학연구원 신대원장을 역임했다. <과학으로 푸는 창조의 비밀>’(전 한동대총장 김영길 박사 공저), <기독교와 과학> 등 30여 권의 역저서를 발행했고, 다양한 창조론 이슈들을 다루는 '창조론 오픈포럼'을 주도한다. 창조론과 관련된 방대한 자료들을 비축하고 있는 인터넷 신학연구소'(www.kictnet.net)을 운영하며, 현재 참기쁜교회의 담임목사이며 김천대, 평택대의 겸임교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