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님은 어떤 영적 체험이 있으신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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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사님은 어떤 영적 체험이 있으신가요?
  • 정양호
  • 승인 2016.05.21 0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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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양호 선교사(우간다)

지난 겨울 휴가를 지나며 동료 선교사들과 이러저런 대화 끝에 “현대 방언이 비성경적, 비진리” 라는 이야기를 하자 한 선교사님은 대뜸, “선교사님은 어떤 영적인 체험이 있으신가요?”라고 질문을 하였다. “체험이 없기 때문에 그런 이야기를 하지 않느냐?“ 는 식의 논지였었다.

사실 예수를 믿고 체험이 없는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여기 질문의 요지는 방언같은 영적 카리스마틱 직접 체험을 묻는 것이었다. 소위 옹알이 기도방언을 한다는 분들은 이것이 성경적이 아니라고 하면, 대부분 뭔가 다른 의견에 대해 배우려는 것 보다는 “체험도 없고, 신앙도 없이 머리로만 판단하여 성령을 모독하는 자들, 마귀의 도구, 너나 잘 믿어라! 빨리 성령님께 회개 해라!” 라고 단죄하고 역공하기에 급급함을 본다.

새로운 사역지 우간다에 도착하여 한 주 정도 수도인 캄팔아에 머물며 여러 기관에 인사도 하고 리써치를 하였다. 그런데 밤마다 인근 교회에서 앰프의 보륨을 최대로한 앰프소리, 찬송 소리와 기도 소리가 진동을 하였다. 물론 모든 교회가 그러리라고 보지 않지만, 가는 곳곳마다 비슷한 현상이 많았다. 성령 충만한 예배 현장에서 치유, 방언의 역사가 일어난다고 말한다. 도대체 성령 충만이란 무엇인가? 과연 성령 충만한 예배 현장이라면 남들이 불편해하든 말든 잠을 자든 말든 상식 밖의 행동이나 소리를 맘대로 질러도 되는가? 성경 어디에도 그런 성령님을 찾을 수 없다.

모든 종교에 나름대로 치유가 있고 방언 현상이 있다. WCC에서도 성령을 통해 연합을 강조하고 카톨릭에서도 방언, 성령쇄신운동을하고 카리스마틱 기독교 목사들과 연합하여 함께 피정을 하고, 이슬람이나 불교도들도 치유를 하고 방언을 하고, 조상숭배와 기독교를 섞은 아프리카 독립교회도 황홀경에 들어가 몸의 떨림, 알아들을 수 없는 Babbling 옹알이 방언기도가 기본이다.

최근 방언을 잘 하는 한 동료 선교사가 "선교사님은 기도를 얼마나 오랫동안 하세요?" 라고 물었다. 실제 내 삶에 기도 생활이 약점이 나에게 정곡을 찌르는 질문이었다. 도대체 기도가 무엇인가? 기도를 얼마나 오랫동안 해야만 하는가? 예수님이 뭐라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던가?

“예수께서는 기도할 때에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 저희는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 줄 생각하느니라.”(마6:7)

여기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고 쐐기를 박으시고는 “저희는, 이방인들은,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은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모르기 때문에 그럴 수 밖에 없는데, 말을 많이 오랫동안 해야 들을 것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너희는) 저희를 본 받지 말라 구하기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마6:8)라고 하셨다. 예수님께서 다시 한번 “ 그러므로 하나님을 아버지로 믿는 너희는 저희를 본 받지 말라!” 라고 아주 강한 톤으로 확실하게 쐐기를 박으신 것은 예수님의 제자들일 지라도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meaningless Babbling,옹알이) 방언에 빠질 수 있고, 본받을 가능성을 우려하고 철저히 경계한 말씀이다.

현재 고신, 총신, 합신, 통합등 보수 교단 교회와 교수들이 너나 할 것 없이 대부분 다 인정하고 받아 들이는 이 Babbling 을 일반 방언 기도로 정당화하고 전혀 문제가 없는 것처럼 교육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이것은 고린도교회를 초토화시켰던 동일한 영적 진리 문제로, 성경의 진리를 왜곡하고 있음을 분명히 깨달아야 한다. 고린도 교회에 침투하여 하나님의 기도 방언 은사라며 혼란에 빠뜨렸고 현대 교회에 침투하여 하나의 은사로 자리 잡은 Babbling방언기도가 바로 예수님이 친히 제자들에게 경계하신 그것이 아닌가? 방언의 바른 진리를 찾기 위해 노심초사 37년 간의 노우호 목사의 연구나 바른 믿음(Good-Faith)에 귀한 글을 계속 기고하시는 여러분들의 노력은 참으로 위대하고 귀한 일이다.

I. 주석 설교를 통해 방언기도가 비성경적임을 발견하다.

나는 20대 때 이 방언 기도를 못하면 구원받지 못한 것이다라는 설교에 문제를 제기하고 그 문제로 정들었던 교회를 떠나야만 했던 아픔이 있다. 이 정답을 찾기 위해 오랫동안 이 문제와 씨름을 하였지만 찾지 못하다가 사도행전부터 시작한 전장 주석 설교를 하면서 나름대로 그 해답을 발견하였다.

사도행전 스데반 집사의 설교에 충격을 받은 후로 좀 벅차지만 매 주일마다 성경을 한 장씩 첫 절부터 끝 절까지 주석 설교를 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어느 주일 고린도전서 13장 14장을 이르러서 우리 말 성경의 “방언“이라고 일률적으로 번역한 용어에 문제점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성경에서 방언의 은사는 문자 그대로 일상 언어의 은사이지 어떤 다른 의미를 부여할 필요가 전혀 없다.

사도 바울이 전도여행을 할 때 당시 공용어라 할 수 있었던 헬라어나 로마어 등을 제외한 약 4000여 다른 방언을 가진 미전도 종족들이 있었다고 한다. 오늘날 선교사들이 복음을 전하기 위해 방언의 은사를 받아 그 방언의 은사를 사용하여 선교하는 것이 아니라, Language School이든 유학이든 선교지의 종족 언어를 공부하여 선교지로 떠나는 것이 사실이다. 신약 정경(Cannon) 계시가 완성되기 이전인 사도바울 당시에는 성령이 필요에 따라 방언과 통역의 은사를 직접 주셔서 공동체에서나 필드에서 복음을 증거했다고 보는 것이다.( 고전14:18,26,39)

그런데 고린도 교회에 침투하여 혼란을 야기했던 것은 통역을 세우면 얼마든지 의사소통이 가능했던 방언(Languages)이 아니라 알아듣지 못하고 통역도 안되는 Babbling 기도 방언, 즉 이방 종교에서도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는 동일한 기도 현상으로 하나님과 기도자만이 직통한다는 아주 신비한 Babbling 방언기도라는 것이었다. 이것은 바로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 기도를 하지 말고 본받지 말라” 경계하셨던 이방 기도의 행태가 고린도교회에 침투하여 참 방언(Languages)의 진리를 혼란에 빠뜨렸던 것이다.

II. 그러면 이방인들의 Babbling 방언 기도는 어떠한가?

불교의 문화권에 있는 한국 교회는 타종교의 영성이 어떠한지에 대한 상식을 공부해 볼 필요가 있다. 저들은 기도라는 말보다는 "진언(眞言), 주문(呪文), 신주(神呪), 밀언(密言)...“등으로 불리운다. 의미가 있지만 그 뜻을 중요시 여기지 않고 그냥 염송(염불, 특정 단어를 반복)할 경우 그 소리의 신비한 파장이 있다고 믿는다. 그 파장, 즉 에너지를 몸과 마음으로 느끼면 그것이 주력, 뛰어난 위신력이 있어 자성불이 되어 신비하고 영적인 공덕, 능력을 가져온다고 믿는다. 간추려 말한다면 현실의 액란(液卵)을 소멸하고 수행 중의 장애를 극복하며 마음을 잘 조복하고 계율을 능히 지키며 佛法을 잘 받들어 우주정신과 합일, 무장무애, 신심견고, 구경열반, 해탈의 경지인 열반(涅槃)에 이른다는 것이다.

원래 “주문(呪文)”이란 주술적인 힘을 가진 글귀를 이르는 말로 불교 외에도 각 종교마다 특정한 효력을 발휘한다고 여겨지는 독특한 주문이 있다. 그러나 불교의 진언은 근본적으로 무명을 타파하고 열반을 증득하기 때문에 다른 종교의 주술적 주문과는 격을 달리하여 명주(明呪)라고 명명한다. 자주 드라마 같은데서 등장하기 때문에 한국 사람이라면 초등생도 다 알고 흉내를 낸다. 예컨데,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염불), “수리수리마하수리수수리사바하”(요술주문)인데, 방언역시 알아 들을 수 없는 말을 계속 반복하는 것이기에 동일한 부류라고 볼 수도 있다는 것이다.

성경에는 “진언자나 신접자나 박수나 초혼자를 너희 가운데에 용납하지 말라”(신18:11) 복술자, 무당, 신접자, 초혼자 등 주술적인 직업을 가진 자들을 가리킨다. 하나님은 이들의 가증스런 행위를 본받지 말 것을 말씀하셨다. 고린도전서 14장 설교를 준비하면서 방언을 하던 우리 전도사에게 방언을 한 번 해보라고 하였다. 마침 토요일이었고 창고에서 자전거 타이어를 고치는 중이었다. 주절주절 숨도 안쉬고 자랑스럽게 잘했다. 그 다음 주일 날 강단에서 고린도교회의 방언을 설명하기위해 “마이클전도사!, 어제 했던 Babbling다시 해봐라.”고 하였다. 똑같은 소리로 방언의 은사라며 주절거렸다. 아마 오래전부터 카리스마틱 교회에서 학습한 방언이었다.

“방언하기 전에 자신의 마음을 다 비우고 다 쫒아내라. 그리고 100번 할렐루야를 시작하라.”

방언을 학습하는 자들도 이방종교인들과 비슷한 이런 행태가 엿보인다. 어떤 분의 간증에는 이런 내용이 있었다.

“100번도 하기 전에 육체는 이 땅에 있지만 눈에 보이는 것은 이 땅이 아닌 구름 위를 날아가고 있고 광명한 빛이 저를 감싸고 있으며 주변에서 들리는 소리가 한 박자 늦게 들리고 하울링이나 소리가 늘어지게 들리는 현상을 경험했습니다. 그러고 일어나서 주변을 걷는데 바닥을 걷는 느낌이 아닌 구름 위를 걷는 느낌이고 뭔가 새로운 촉감과 황홀함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관상기도나 명상을 하는 사람들이 황홀경에 들어간다는 것이 이것으로 보입니다. 이 광명하고 아름다운 현상을 내면으로 볼수 있다는 것이 엄청 신기했지요. 그리고 이 현상은 1시간 정도 계속 이어지고 끝나갈 무렵 온몸에서 주최할 수 없는 진동과 온몸에 꿈틀거림이 생기기 시작합니다. 쿤달리니 현상을 말하는데요. 이때 이상한 말을 하거나 계속 웃거나 울거나 하는 것 같은데 저는 계속 웃었습니다. 아마도 토론토 블레싱도 이 비슷한 현상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정리하면 마음을 비우고, 할렐루야 100번하고, 황홀경에 들어가고, 황홀경을 통해 새로운 세계를 체험하고, 그것이 1시간 정도 지속되고, 그러면서 온몸이 떨리고, 계속 웃음 나오고. 황홀경이 끝이 나면서 온몸이 춥고 떨고 그랬습니다...”

그러면 방언기도 학습도 안했는데 어느 날 기도 하는 가운데 이상한 Babbling이 튀어 나온 경우는 어떻게 볼 것인가? 이런 경우도 역시 그 마음과 영 속에 동기가 Babbling이 어떤 형태로든 이미 자리 잡을 수 있는 동기 유발이 되어 있기 때문이라 할 수 있다. 방언의 해석에는 두 관점이 팽팽하게 맞서 있다. 방언의 참 진리를 찾아가는 것은 주님 오실 때까지 끝없는 논쟁이 계속될 것이다. 선택은 분명하게 각자의 몫이다.

III.성령의 방언, 방언기도가 아닌 언어(Languages)은사가 계속되는가?

과연 이 시대에도 초대교회에 일어났던 성령의 방언, 언어(Languages)은사가 계속되는가? 아니면 중단 되었는가? 이것은 고린도전서 13장의 해석 이슈인데 역시 두 관점으로 여기서는 생략한다. 어느 날 이 방언 문제로 이야기하는 중 한 선교사님이 말하기를 “어떤 교포가 자기는 한국 말을 모르는데 한 목사님이 한국말 설교를 하는데 영어로 잘 알아들었다”는 간증이 있다는 데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다. “그렇다면 종족 언어를 공부 하지 않고 현재 선교 필드에서 선교하고 있는 선교사가 과연 몇 명이라도, 한 명이라도 있는가?” 되물었다. 그런 통계가 전혀 없다. 방언의 은사가 있다면 선교사들이 언어 공부한다고 시간과 정력을 낭비할 필요 없이 얼마나 좋겠는가?

그렇다면 소위 Babbling(옹알이)기도 방언을 어떻게 봐야하는가?

나는 하나님께 직통한다는 신비적인 Babbling 기도가 기독교 영성이 아닌 이방 종교 영성의 침투 가능성이 충분히 있다고 우려 한 바 있었고, 노우호 목사는 그의 37년간 임상 검증에서 Babbling 방언은 100% 거짓이라는 결론을 내렸다고 한다. 총신 이상원, 서철원 두 교수는 "오순절 방언은 단회적 표적방언이고, 길흉을 점치는 예언은 구약의 가르침에 위배되고 소위 지금 일어나는 Babbling 방언기도, 방언들 중에 성령에 의한 방언이 전혀 없다고 일방적으로 단정할 수는 없다. 아직 그런 경우들을 만나지 못하였을 뿐이라고 할 것이다."라고 아주 조심스런 평가를 한다. (참조: “성령사역의 연속성과 불연속성”, http://reformednews.co.kr) 고린도교회의 영적 혼란과 현대 교회의 영적 혼란의 상관성을 살피기 위해서는 먼저 고린도교회의 지리적, 역사적 형편을 고찰하는 것이 순서이다.

IV. 고린도교회의 지리적, 역사적 배경

고린도는 올림픽게임(Olympic Games)과 이스미안게임( Isthmian game)발상지로 유명한 도시이다. B.C.146년에 파괴되었고 AD 100년경 로마의 씨져(Caesar)에 의해 재건되었고 그후 로마로부터 많은 로마의 자유민이 정착하였다. 이에 그들의 노예들, 그리스인들이 들어왔고 유대인들은 비지니스의 붐을 타고 이곳에 들어왔다. 고린도라는 뜻 자체가 “방탕과 부도덕” ( Corinthianize"means drunken debauchery and immorality)의 대명사였을 정도로 죄악이 팽배한 도시였다. 사람들은 아프로디테(Aphrodite, 로마의 美의 여신 Vinus에 해당) 신전에서 사랑의 여신을 숭배하였고 남녀가 서로 어울려서 광란의 섹스 파티(Sex party)를 벌리는 예식도 있었다고 한다. 이런 사회 상황에 처한 고린도교회 교인들은 예수를 믿음으로 거듭났다고 하지만 옛 생활은 믿음에 따라 거듭나지 못하였고 그만 영적 혼란 속에 성장을 멈추고 있었다.

“ 너희는 불의를 행하고 속이는구나. 그는 너희 형제로다. 불의한 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줄을 알지 못하느냐? 미혹을 받 지 말라 음행하는 자나 우상 숭배하는 자나 간음하는 자나 탐색하는 자나 남색하는 자나 도적이나 탐욕을 부리는 자나 술 취하는 자나 모 욕하는 자나 속여 빼앗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 리라.” 라고 (고전 6:8-10) 라고 바울은 지적한다.

바울은 이런 도시에 1년6개월 머물면서 목숨을 걸고 개척하여 첫 고린도교회가 탄생하였다. 바울이 다른 도시에 복음 전도를 위해 떠나면서 에베소에서 만났던, 학문의 도시 알렉산드리아 출신, 성경에 탁월한 웅변가요 설교자인 유대인 아볼로가 제 2대 목회자로 부임하였다.(행 18:24) 아마 바울의 시원찮은 설교에 졸리고 갈증을 느꼈을 교인들은 가슴을 후련하게 하는 아볼로의 웅변에 매료되었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크게 성장하던 이 교회에 아볼로파, 게바파, 바울파, 그리스도파로 파당이 일어났다. 아볼로는 이런 분쟁을 수습하지 못하고 깊은 상처를 안고 고린도교회를 사임한다. 그후 바울이 아볼로에게 고린도교회에 다시 돌아갈 것을 강청하였지만 결국 사양한 것으로 보인다.(고전16:12) 고린도전서를 쓰기 전에 고린도 첫 서신을 먼저 한번 보냈었는데 그 첫 서신은 없어졌고(고전5:9), 후서까지 3편을 그 교회의 여러 가지 문제를 수습할 목적으로 썼는데 바울의 심정을 묘사한 대목을 보면,

“너희가 무엇을 원하느냐? 내가 매를 가지고 너희에게 나아가랴? 사랑과 온유한 마음으로 나아가랴?”(고전4:21)라고 하는 대목에 그 교회의 심각성이 잘 반영되어 있다. 고린도전서를 통해본 이 교회의 문제점은 분열(1:10-4:21) 부도덕( 5:1-6:20). 결혼 오류(7:)자유의 남용과 오류(8:-11:)성찬오류( 11:) 은사의 오류(12:-14:) 부활의 오류(15:) 금전에 대한 오류( 16:)라고 할 수 있다. 다른 것은 별 문제가 없는데 방언 은사에 대한 번역상의 오류와 아직도 해석상의 문제를 안고 있으며 아마 주님 오실 때까지 평행선을 달릴 것 같다. 소위 Babbling 신비 방언기도 옹호론과 무용론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고린도 전서의 역사적 상황과 집필 이유를 생각한다면 성경 관찰자는 성경을 읽을 때 평면적인 시각으로 읽는 것보다 상황적 시각으로 드라마틱한 톤을 바꿔 읽을 때 더 잘 실감나게 내용을 파지 할 수 있다.

V.상황적 문체적 시각으로 성경읽기

고전14:5, 과장법(hyperbole). “나는 너희가 전부 다 방언 말하기를 원하나” ... 여기보소! 바울이 다 방언 말하기를 원하지 않소?“ 그러나 고전12:30,” 다 방언을 말하겠느냐?“라고 하였다. 여기 서두에 이 말을 꺼낸 것은 진정한 은사를 강조하고 다른 것(Babbling 기도방언)에 대항하기 위해 꺼낸 표현이다.

고전14:7~8, 유추적 비유법. “혹 피리나 거문고와 같이 생명 없는 것이 소리를 낼 때에 그의 분별을 나타내지 아니하면, 피리 부는 것인지 거문고 타는 것인지 어찌 알게 되리요? 만일 나팔이 분명하지 못한 소리를 내면 누가 전투를 준비하리요? ” 당신이 누가 방언을 한다고 할 때, 참 언어 방언이라할 지라도 의미를 이해 못한다면 무슨 유익이 있느냐? 하물며 의미없는 Babbling 방언이라고??? 생각 좀 해봐라!

고전14:9, 유추적 비유법. “이와 같이 너희도 혀로써 알아듣기 쉬운 말을 하지 아니하면 그 말하는 것을 어찌 알리요 이는 허공에다 말하는 것이라.” “Babbling방언한다? 어디에? 허공(虛空)에.” “Babbling신비 직통 기도한다? 어디에 어떻게?” 얼마나 위험한 말인지도 모르고 아마도 반복적으로 "Jesus is anathema!" (1Cor.12:3)를 했을 것이다. 바울은 고린도교인들이 가졌던 무지, 감정, 미신의 장벽 때려 부수기를 계속 시도하고 있다. 신자는 성령 은사의 목적이 하나님의 백성들을 진리로 인도하고 구원의 복음을 선포하는데 그 목적이 있음을 바르게 깨닫고 인식해야한다.

고전14:13, 풍자법. “그러므로 방언을 말하는 자는 통역하기를 기도할지니” 통역이란 두 다른 언어 사이에 의사 소통을 말하는 것인데, Babbling 기도방언은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하는 것으로 통역이 필요 없는 데도 불구하고 사도바울께서는 “통역해봐라!!!”고 명령하신 이유가 뭘까? 그것은 통역을 세워 검증하라는 것이라기보다는 Babbling기도방언은 기도도 아니고 언어 방언의 왜곡임을 신랄하게 꼬집는 대목이다.

고전 14:14-15, 가정법 조건절. “내가 만일 방언으로 기도하면 나의 영이 기도하거니와 나의 마음은 열매를 맺지 못하리라.” "For if I pray in an unknown tongue, my spirit prayeth, but my understanding is unfruitful." (KJV) 영문법의 “If"는 가정법 조건절로 의심스럽거나 사실이 아닌 것을 표현한다. 여기 ”my spirit“은 'spirit,' 'breath,' or 'wind, the inner feelings 을 뜻할 뿐 결코 성령(Holy Spirit)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러나 카리스마틱 해석자들은 여기 "My spirit prays” =“The Holy Spirit prays” 로 해석한다. 이 구절을 이런 식으로 해석하기 때문에 기도 방언 예찬자인 한 고신 목사는 내 펫북 칼럼에 코멘트하기를,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다 안다면 방언 기도는 필요 없을 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는 기도할 줄을 모릅니다. 그러므로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이 탄식하시면서 우리와 함께 부르짖는 것입니다. 방언기도는 우리가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지 그 기도가 의미 없는 소리나 음향인 것은 아닙니다. 다만 내가 영으로 하는 그 기도를 내 마음이 하게 되기를 원하시므로 영으로 기도하고 마음으로 기도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마음을 제대로 깨닫게 될 그날 천국에서는 방언도 예언도 그칠 것입니다.”

부언하자면 보통 방언기도 주창자들이 공식처럼 흔히 하는 말인데, 성령님께서 우리에게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할 때 가르쳐 주시는 기도가 바로 방언기도라고 정의한다. “마땅히 빌 바를 모르면 무엇을 기도해야 할지 알 때까지 계속 방언 기도만 해라. 방언 기도는 성령 자신이 말할 수 없는 탄식의 기도이다. 주님의 마음을 제대로 깨닫게 될 그날 천국까지 방언 기도 이상무!” 라고 말한다. Babbling 신비 기도 방언 옹호의 정당성을 위한 그럴 듯한 변명이지만, 그렇다면 방언 기도 못하는 사람은 영으로 기도도 못하는 불쌍한 자들이 되고 만다. 그런 불쌍한 처지를 벗어나려고 기를 쓰고 Babbling기도 방언 이든 귀신 방언이든 뭐든 받으려고 환장하게 만드는지도 모른다.

본문으로 되돌아가 그렇다면 “My spirit” 이라는 의미가 “ The Holy Spirit”이란 말인가? 그것은 얼토당토않은 난센스요, 거짓을 참인 것처럼 정당화시키려는 궤변일 뿐이다. 왜냐하면 계속 이어지는 가정법의 결과를 보면 도무지 앞뒤가 맞지 않는다. 성령님이 기도를 하는데도 불구하고 그 결과 “내 마음은 열매가 없다!”( “but my mind is unfruitful."). 결코 그럴 수는 없는 것이다. 성령이 탄식하며 기도하는 데 열매가 없다는 것은 그의 속성 면에서 논리가 전혀 맞지 않는다. 결국 이 말씀은 Babbling 기도가 신비적 성령의 기도가 아니라, 소위 신비적 기도 방언의 치명적인 약점을 분명하게 노출시키고 있음을 극명하게 보여준다고 봐야 한다.

고전14:15, 결론, “그러면 어떻게 할까 내가 영으로 기도하고 또 마음으로 기도하며 내가 영으로 찬송하고 또 마음으로 찬송하리라.” "I will pray with my spirit, but I will also pray with my mind" I will pray with the spirit , and I will pray with the understanding also." 직역하면, “내가 하나님께 기도(말)를 할 때 그것은 나의 속(내 영, 내 속사람)으로부터 시작 한다. 역시 나는 나의 두뇌 (마음)를 사용하여 이해하면서 기도한다. 내 영(inner being)으로 노래할 것이며 역시 마음(understanding)으로 노래한다.“ 라고 번역할 수 있다. 현대 기도방언 주창자들이 그러는 것처럼 당시 고린도교인들 중에 황홀경에 빠져 Babbling 신비 노래를 하곤 하였지만 바울은 단호하게 옳지 않다고 꼬집는다. 신자가 자기가 아는 익숙한 (한국)말로 진심으로 기도하고 말하고 찬양하는 그것 자체가 바로 주님께 영으로 기도하고, 영으로 괴로워하고, 영으로 노래하고, 영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영으로 하나님께 경배하는 것이다.

고전4:19, 냉소법. “그러나 교회에서 네가 남을 가르치기 위하여 깨달은 마음으로 5마디 말을 하는 것이 10000 마디 Babbling 방언으로 말하는 것보다 나으니라.” (왕상 18:27-29, 시 2:1-12)5>10000그리스 수학에서 가장 큰수. (USA, 《10¹⁸》; Europe 《10³⁰》無量大壽, "그래도 아쉬운 뭔가 가 있다고? 산수의 기본이라도 안다면 이제 Babbling 방언 게임 그만두셔!" 고전14:20, “형제들아 지혜에는 아이가 되지 말고 악에는 어린 아이가 되라 지혜에는 장성한 사람이 되라.”( "Brothers, Stop Being Children In Understanding; Grow Up.") "제발 어린 아이짓 그만해! " "예수 처음믿을 때, 몰랐을 때는 그럴 수 있지." "해가 가고 달이 가는데도 이방인들이 하는 영성을 흉내내? 이젠 그만해!"라고 한탄하며 꾸짓는 사도의 절규를 이 장에서 발견해야 한다. 그 후 사도 바울은 아마 직접 고린도교회를 찾아가 영적 혼란 수습의 일환으로 검증 절차를 했을 것으로 보이는데 고린도전서14장 26절 이하에 그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고전 14:27~28, 냉소와 풍자.

여기서 방언 검증의 원칙을 말하는데 상당한 냉소와 풍자가 있는 표현방식이다. 여기서 바울은 정경이 완성되기 전 당시 상황에서 "통역"의 여부를 아주 중요한 방언 분별 및 시행의 기준으로 삼고 있는데 통역 은사가 없다면, 만일 통역하는 자가 없다면, 만일 모니터링 시스템이 없다면, 아무도 자기 방언을 통역할 수 없는 방언 즉 Babbling기도방언이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 “Keep silent in church and speak to himself and to God!!!”(풍자) 즉 Babbling 기도방언이라면 교회에서 잠잠하라! “그런 방언을 하지 말라!"고 책망한 것이며, ”내 자신에게 또는 하나님에게 말하라“는 것은 권장이 아니라 풍자적으로 아주 강한 부정을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사도바울은 당시 고린도 교회의 방언 현상에 대해 유독 방언 (languages)에 대해 통역(Translator)을 세워 검증(verification) 절차를 밟으라고 명령한다. 그 만큼 그 교회를 어지럽게 했던 것이다. Babbling방언기도는 본래 의미가 없으니 통역 할 필요도 없고, 검증할 필요도 없이 방언이 아니지만 실제 바른 언어 방언(Languages)의 은사라도 할지라도 교회 공동체의 질서와 건덕을 위해 통역 은사자를 세워 검증하라고 하였다. 아마 바울은 방언의 은사뿐만 아니라 통역의 은사까지 다 소유한자로서 고린도교회의 방언 현상을 정확하게 통찰한 것으로 보인다. 예컨데 항간에 어떤 교인들이 “예수를 저주할 자”라고 방언을 말하였지만 그것이 마귀의 방언인지, 성령께서 주시는 방언인지 아무도 분별하지 못했던 상황을 바울은 꼬집는다.(고전12:3)

결론적으로,

개인적으로 이 은사와 구원 문제는 사실상 별개로 결부 시킬 필요가 없다. 기본적으로 Babbling을 "방언"이라는 단어로 번역한 그 자체가 오류이고, 착각은 자유이지만 신비한 Babbling을 한다고 더 영적 깊이가 있는 것이 결코 아니다. 오히려 아직도 하나님 아버지의 속성을 잘 이해하지 못하고 뭔가 이상한 떼를 쓰는 영적 어린 아이 짓이 아닌지, 마음을 오푼하고 주관적인 체험을 객관적인 말씀의 검증을 통해 분별하는 것이 성숙한 지혜이다. 문제는 바른 방언인지 아닌지 통역 은사를 받은 사람을 세워 모니터링을 해서 분별해야 하는데 과연 오늘날 그런 바른 통역 은사자들을 어디에서 찾을 수 있단 말인가? Google 번역(translate)에 들어 가면 단어는 물론 문장까지 100개국 정도의 언어 번역이 가능한데 아마 머지 않은 장래에 지구촌의 모든 언어가 인터넷상에서 통역이 될 날도 멀지 않았다. 신자의 영적 성숙은 말씀과 기도의 경건 생활을 축으로 하지만 반지성주의(反知性主義)는 결코 아니다. 자신의 Babbling 신비 기도라는 것을 성령께서 직접 선물로 주신 양 옹호하려고만 하지 말고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면 바울이 고린도교회에 명했던 것처럼 그 말씀의 명령에 순종, 어찌하든 검증하여 영을 분별하는 은혜를 덧입기를 힘써야한다. (요일4:1-2)

사도바울이 고린도교회를 비판하고 아주 강하게 책망했던 것처럼 현재 Babbling 방언 기도에 대한 본질적 진실을 정직하게 탐구하고 성경이 가르치는 방언 (Languages) 은사의 진리가 얼마만큼 왜곡되어 있는지, 그 해석이나 문제점에 대한 비판과 논쟁은 건강한 교회를 만드는데 크게 기여할 것이라고 믿는다. 이런 탐구는 이제 본격적으로 교단별로 연구위원회가 설치되어 정리를 할 필요가 있고, 각 신학교에서 보다 더 깊고 활발한 탐구가 불타오르기를 바란다. 아무튼 Babbling 신비기도의 강력한 효과로 인해 방언의 잘못된 번역의 오류와 왜곡된 해석을 바로 직시한다는 것은 결코 만만치 않은 일이다. Babbling( a unknown tongue) 신비 기도라는 것은 분명히 언어 (방언, tongues)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방언의 은사라고 명명하고 마치 방언의 은사인 것처럼 행세를 하는 것은 두말할 여지없이 하나님 말씀의 왜곡이며 구태여 은사라 말하고 싶다면 방언의 은사로 볼 것이 아니라 “Babbling 신비 기도 은사”로 따로 분류할 필요가 있다. 특히 오늘날 이 Babbling 신비 기도가 이방 종교의 영성과 동일한 맥락을 가지고 있거나 건강치 못한 은사주의, 다원주의, 에큐메니즘의 종교 통합의 한 전략적 도구로 사용되고 있음도 간파해야 한다. 

정양호 선교사는 고신에서 공부하고 안수받았으며, 현재 KPM(고신총회세계선교회)와 NGO Good Partners(김인중 목사, 이사장)의 파송을 받아 우간다에서 복음을 전하고 있다. 천주교와 오순절 운동 신학 류에 오염되지 않은 순결한 성경적 복음을 우간다의 원주민들에게 전하고자 애쓴다. 우간다의 낙후된 여러 지역들을 순회하면서 복음과 함께 의료 봉사로 영혼들을 섬기고 있고, 늘 기독교의 세계적 동향을 살피고 연구하는 일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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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gnpost 2016-05-24 01:20:20
" Kap Oh, 아주 잘 지적해 주셨네요....대부분 그 분들의 심리, 생각 그리고 자세도 정확히 묘사해 주셨구요....어쩌다, 대부분(보수적인 신학교의 많은 교수들 까지도)그렇게 쉽게(좀 연구해 보지도 않고) 넘어 가는지....어쩌면, '성령의 은사(?)'를 부정하는 사람으로 몰리지 않으려고? '성령훼방죄'를 범하느냐?는 협박(?)에 굴복해서? 자신은 모든 사람을 품을수 있는 넓은 신앙인이라서? 제가 보기에는 현재,50대 정도 이하의 젊은 신학자들이나 목사님들도 청소년 시절에 '수양회'를 가거나 '기도원'에 몰려가서(?) 각종 은혜을 받는다고(이런 집회의 강사는 주로 '방언전파자들'이 많았던것 같고, 그 고조된 분위기가 쉽게, 자신들을 '무아지경'에 몰입토록 하는 경향이 있었기에 쉽게 '현대방언'을 접한듯 보임) '방언'에 접하다 보니, 그것을 나중에 '신학자'가 되고,'목사'가 되어도 별다른 비판적 능력이 없이 그대로 받아 드리게 되어 그런 것이 아닐까? 생각됩니다만..또한, 제 개인적으로는 대부분의 경우는 '다른 영'에 오염되어서 스스로는 쉽게 그 속을 빠져 나오기 어렵지 않을까? 라고 생각됩니다.기독교 전문 상담자였던 '쿠르트 코흐'박사의 견해를 인용한다면,어쩌면, 일종의 '현대방언'에 접한 이후에 그들은 '영적속박 장애증'을 앓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합니다.성경에 몇 번 기록된 '표적(sign)방언'이 아니고,사도바울이 그 '거짓 방언'에 대하여, 에둘러서 마지막으로 '(그것이 그리 하고 싶으면?)집에가서 '네 자신의 영'과 '하나님'께 하라고 빈정(?)대는 투로 결론을 맺었을까요? 대 사도인 '바울'이 '기도란 하나님께만 하는 것'이란 사실을 모를리는 없을텐데, 오직하면, 그것을 '네 영'에게도 함께 하라고 했을까?곰곰히 성경 말씀을 묵상하고, 생각하면, 당장 멀리해야할 것입니다. 그렇게 바울이 추방하고자 노력했던 '언어로 통역이 안되는 '고린도교회'에 '궤휼의 역군들(?)'이 들여온 '이교적 (어쩌면, 고린도 city에 소재한 이방신전의 여 사제들이 주로 행하던(?)방언' 이후 초대교회 이단'인 '몬타누스'의 'unknown tongue'이후 거의 1800년 동안이나 교회사에 나타나지 않았던 것(힌두교나 불교,그리고 각종 토속신앙의 접신자들에게눈 역사속에서 계속 나타났었지만 )을 그리고, '이단사상'을 가졌던 사람들에 의해서 도입(?)된 그것을, 별다른 검토없이 받아 드리는 것을 보며, 안타까운 마음을 금할수가 없네요. 진정 그들이 주님의 제자들이라면,만의 하나라도 이 '현대방언'이 귀신의 장난일수도 있지 않을까? 라고 왜,생각해보지 않을까요?정말, 다른 영의 장난이라면, 온통 주님의 교회에서 '이방신'의 '굿판'을 대행하고 있을수도 있는데...숫한 부정적 사례도 무지 많이 있는데,,,그냥,헛소리를 평생하고 있다해도,신실하신 하나님 앞에서 '중언부언'하는 것도 죄송한데, 혹시, 하나님께 '쌍욕'을 해대고, 교회를 '저주'하는 말을 '다른 영'을 대신해서 평생 '교회'에서 그 많은 교인들이 밤낮으로 주절댄다면....아 ! 이를 어이한단 말인가요?이'엄청난 현대적인 ( 옹아림)의 쓰나미 '를 어떻게 해야 하나요?오직, 주님의 가호를 기도드립니다. 샬롬"
from림헌원 목사님 펫북에서 발췌하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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