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의 위치에 대한 개혁신학자들의 성경해석과 너무 달라

흔히 20세기 최고의 신학자 가운데 한 사람으로 칼 바르트를 이야기하는 것은 그가 2,000년 동안 지켜온 기독교의 순수한 교리를 자신의 신학으로 재구성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고, 또한 그를 추종하는 신학자들과 교회가 많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가 사용하는 신학적 언어는 전통적인 기독교의 언어와 형식에 있어서는 같을지 몰라도 그 내용에 있어서는 분명 전제가 틀리다. 바르트의 신학을 언급하는 이유는 성경이 하나님의 영감으로 된 것으로 조금도 오류가 없다는 기독교 역사적 견해를 교리적으로 거부하기 때문이다.

성경에 대한 바르트의 태도는 하나님의 말씀은 성경 이외의 다른 근원을 통해서 사람에게 올 수 있으며, 기타의 종교적 문헌과 전연 종교적이 아닌 문헌도 하나님의 말씀의 근원이 될 수 있기 때문에 그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1) 이점에 관해서 라인홀트 니버가 교회의 직분에 있어서 여자들의 지위에 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어떤 근본주의 신학자들은 성경 본문을 인용하면서 여자에게 온당한 지위를 주지 않으려고 한다. 만일 교회가 기독교적 근거에 기초해서 그런 논쟁을 중단하고 종교 속에 숭고한 높음이 있듯이 일반 세속적인 관념에도 알려지지 않은 원시적 깊음이 있다는 것을 솔직히 인정하려면, 아마도 교회는 보다 과감하게 기독교 이하적인 표준들을 마땅히 극복해야 할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세속주의자가 되라고 설득시키는 것은 아니다. 다만 우리는 기꺼이 세속적인 관념주의가 이따금씩 경우에 따라 하나님의 말씀을 말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2)

이 같은 말을 바꾸어 말한다면 니버에게 있어서는 세속적인 관념주의가 성경이 우리에게 말해 주는 것보다도 더 잘 하나님의 말씀을 말해 줄 수 있는 때가 있다는 것이다. 프란시스 쉐퍼가 지적하고 있는 것처럼, 이제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는 이미 하나님의 말씀과 성경은 일치 할 수 도 있으나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고 주장하는 시대가 되었다.

최근 김세윤 교수도 성경 가운데 일부는 불안정한 사본이라고 말함으로 성경을 왜곡시키는 발언을 서슴지 않았다.3) 그는 이미 2004년도에 목회와 신학에서 자신의 위험스러운 성경해석을 한국교회에 보여주었다. 김세윤 교수의 신학적 주장은 여성이 교회 내에서 가르치고, 가르치지 않는 문제가 아니라 성경관의 문제라고 보아야 한다. 다시 말해 성경해석에 있어서 성경을 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보는 것인지, 그렇지 않는 것인지에 대한 문제인 것이다.

여기에 대해서 개혁주의 신학은 우리에게 분명히 말해 주고 있다. 성경은 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이며 앞으로 다가올 시대-문화가 쉽게 변화하는 시대-에 대하여 불변하는 진리임을 천명하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성경이 정확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이며, 특히 여성이 교회 내에서 가져야할 위치가 무엇인지 성경을 통해 배워야 할 것이다.

교회 내 여성 리더쉽에 대한 개혁신학자들의 성경 해석

1. 칼 빈

“또 이와 같이 여자들도 아담한 옷을 입으며 염치와 정절로 자기를 단장하고 땋은 머리와 금이나 진주나 값진 옷으로 하지 말고 오직 선행으로 하기를 원하라 이것이 하나님을 공경한다 하는 자들에게 마땅한 것이니라 여자는 일절 순종함으로 종용히 배우라 여자의 가르치는 것과 남자를 주관하는 것을 허락지 아니하노니 오직 종용할찌니라 이는 아담이 먼저 지음을 받고 이와가 그 후며 아담이 꾀임을 보지 아니하고 여자가 꾀임을 보아 죄에 빠졌음이니라 그러나 여자들이 만일 정절로써 믿음과 사랑과 거룩함에 거하면 그 해산함으로 구원을 얻으리라.”(딤전2:9-15)

칼빈은 이 말씀에서 여성은 바울의 가르침대로 종용하게 배울 것을 당부하고 있는데, 이 종용이란 침묵을 의미한다. 곧 그들이 공적인 장소에서 이야기하려고 나서지 말아야 한다는 뜻으로, 그는 당장 그들에게 가르치는 것을 금함으로써 이 점을 더욱 더 명백하게 하고 있다.

계속해서 칼빈은 바울이 여자에게서 자신의 가족들을 가르치는 임무를 빼앗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전적으로 남자에게 맡겨주신 가르치는 직분에서 그들을 제외시키고 있는 것이라고 한다. 혹 어떤 사람이 드보라와 그밖에 하나님께서 구약에서 백성을 다스리도록 지명하신 여자들의 경우를 들면서 이 원칙에 도전한다면 거기에 대한 답변은, 곧 하나님의 비상한 행위가 여자들을 그대로 두고자 하는 일상적인 원칙을 없애버리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말한다. 따라서 과거에 여자들이 선지자와 교사의 직무를 맡고 하나님의 영에 의해서 그렇게 하도록 이끌림을 받았다 하더라도 그것은 모든 법을 초월하는 하나님께서 하실 수 있는 일이요, 그것은 특이한 경우이므로 지속적이요, 습관적인 원칙에 위배되는 것이 아니다.

지금 바울은 가르치는 직분과 밀접하게 관련되는 것을 말한다. 곧 남자를 주관하는 문제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여자들이 가르치는 일에서 배제되는 이유는 여자가 먼저 타락하였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말은 여자가 남자보다 부족하거나 어리석기 때문이 아니다. 단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법도와 법을 먼저 어기고 타락하였기 때문에 처벌형식으로 금하고 있다는 말씀이다. 결국 사도바울은 교회 내에서 여성은 잠잠하고 종용히 배워야 한다는 것을 하나님의 창조질서를 통해서 정해놓으신 원칙이라고 우리들에게 가르쳐 주고 있다.

2. 윌럼 핸드릭슨

핸드릭슨은 딤전2:11-12절에서 사도는 지식을 얻는 것과 나누는 일(배우는 일과 가르치는일)에 대하여 몇 가지 지침들을 준다.

“여자는 일절 순종함으로 종용히 배우라 여자의 가르치는 것과 남자를 주관하는 것을 허락지 아니하노니 오직 종용할찌니라 이는 아담이 먼저 지음을 받고 이와가 그 후며 아담이 꾀임을 보지 아니하고 여자가 꾀임을 보아 죄에 빠졌음이니라 그러나 여자들이 만일 정절로써 믿음과 사랑과 거룩함에 거하면 그 해산함으로 구원을 얻으리라.”

핸드릭슨은 더 분명하고 확실하게 위 본문의 말씀을 다음과 같이 해석하고 있다.

“말씀들이 의미하는 바는, 하나님께서 여자를 창조하신 바로 그 목적에 비추어서 적합하지 않은 활동의 영역을 여자가 침범하지 말라는 것이다. 이는 마치 새가 물 밑에 둥우리를 지으려고 해서는 안 되는 것과 같으며, 또한 물고기가 육지에서 살려고 하지 말아야 하는 것과 같다. 여자는 공중예배에서 남자를 가르침으로 하여 남자를 주관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 여자 자신이나 교회의 영적 복리를 위하여 신적 권위를 거룩하지 않게 함부로 사용하려는 일을 금하는 것이다 ... 여자도 하나님의 모든 구원의 축복들에 참여함에 있어서 남자들과 영적으로 완전히 동등하다(갈3:28 "남자나 여자가 있을 수 없다“)

김세윤 교수는 이 구절의 해석을 신분뿐 아니라 기능까지도 하나라고 해석하고 있다. 이러한 해석은 자의적인 해석으로 성경을 완전히 왜곡하는 것이다.4) 그러나 이 사실은 여자로서의 그녀의 본질에 있어서 어떤 변화가 있는 것을 함의하거나 여자로서 행하도록 되어 있는 직무에 어떤 변화가 있음을 함의 하지 않는다. 여자는 여자이어야 한다. 그 외의 어떤 것도 바울은 허락할 수가 없는 것이다. 하나님의 거룩한 율법이 그것을 허락하지 않기 때문에 바울은 그것을 허락할 수가 없다(고전14:34). 그 하나님의 율법은 오경에 명시된 대로 하나님의 의지이다. 이로써, 가르치는 것 즉, 공적으로 설교하는 것, 그리고 공중 예배시 말씀을 선포함으로 해서 남자를 주관하는 것, 통치하는 것은 여자에게 옳지 못하다. 여자는 선생의 역할을 떠맡아서는 안 된다.

계속해서 핸드릭슨은 하나님의 창조질서를 통해 여자가 남자에게 순종하는 역할이 주어졌다고 말하고 있고, 인간의 범죄에 대하여서도 여자가 선도자이었고, 남자는 추종자이었음을 말한다. 하나님의 정해준 순서를 뒤바꿔서는 안 되며 그녀를 위해서 의도하지 않은 역할을 맡아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이와의 딸들은 가르치거나, 다스리거나, 지도하지 말고, 오직 배우고, 순복하고, 앞장서지 말아야한다고 언급한다.5)

3. 로버트 엘 레이몬드6)

바울은 여자들이 남자들에게 가르치거나 권위를 행사하는 것을 분명하게 금하고 있으며, 교회에서 조용히 하라고 한다(딤전2:12; 고전14:33-36). 장로들이 바로 그 기능을 수행하는 것이므로 여자들은 자연히 이 직분을 취하는 것이 금지 되는 것이다. 또한 디모데전서 3:2-7과 디도서1:6-9의 장로의 자격요건들은 장로들이 남자들이라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다. 장로는 ‘한 여자를 두는 남자’로서 ‘자기 집을 잘 다스려 자녀들로 모든 공손함으로 복종하게 하는 자’여야 한다.

특별한 예외가 있기는 하지만 (예컨대 드브라와 훌다), 일반적인 상황에서는 하나님의 백성 가운데 남자가 지도력을 취하는 것이 성경전체의 일관된 패턴이다. 예수님께서도 남자들만을 제자로 지명하셨다. 김세윤 교수는 예수님께서 남자들만을 제자로 지명한 것은 그 시대의 문화에 적응을 하기 위한 목적이었다고 한다.7) 하지만 이러한 주장 또한 사변적인 것이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남자로 성육신한 것도 사회적인 문화에 적응하기 위함인가? 여자를 장로로 임직시키는 교회는 성경의 일관성 있는 증언과 사실과 교회사 전체를 통틀어서 나타나는 교회의 한결같은 질서를 무시하는 것이다.
 

4. 결 론

우리는 더 많은 개혁주의 신학자들이 이 점에 있어서 한결 같은 주장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으나, 지면 관계상 자제하기로 한다. 오늘날 자유주의 신학자들과 성경비평학자들은 개혁주의 신학에 대하여 아주 폄하하고 있다. 그들은 개혁주의는 그 시대의 산물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개혁주의 신학을 공부하고 개혁신학자들의 신학을 연구하는 것은 오직 성경을 바르게 해석하기 위한 도구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훌륭하고 위대한 신학이라도 성경을 바르게 해석해주지 않거나 왜곡하는 것은 쓰레기나 다름없는 것이다.

우리가 이처럼 개혁주의 신학자들의 성경해석을 살펴본 이유는 오직 성경이 어떻게 말씀하고 있는가를 확인하기 위함이다. 성경해석을 사변으로 하면 결국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인간의 저작물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수많은 개혁주의 신학자들의 주장대로 교회 안에서 여자는 가르치는 일과 주관하는 일을 해서는 안 된다.

김세윤 교수는 종교개혁자 칼빈이 구약의 의식법이 더 이상 그리스도인들에게 구속력이 없다고 하는 것을 말하면서 남자와 여자의 차별이 없음을 주장하고 있지만, 칼빈은 그의 글에서 분명하고 명료하게 여자의 위치를 말해주고 있다.8) 김세윤 교수는 “구약의 의식법이 더 이상 그리스도인들에게 구속력이 없다”고한 칼빈을 인용하지만, 칼빈은 이 부분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구원과 관련해서 구약의 의식법이 효력이 없다는 것이지, 성경이 주장하는 남녀의 기능과 역할을 무효하게 하는 것으로 해석하지 않는다.

김세윤 교수의 성경 해석은 너무나 사변적이라고 하는 것을 알 수 있다. 성경의 문맥적인 의미를 파악하지 않고 단지 문자적으로만 시대와 상황을 해석하는 것은 결국 성경을 왜곡하는 것이다.
 

--- 각주 ---

1)프란시스 쉐퍼, <기독교 교회관-오늘날 교회의 사명>, 생명의 말씀사. 1996.p.184
2)앞의 책, p.184
3)김세윤, <성경은 남성과 여성에게 무엇을 말하고 있나>”목회와 신학, 두란노출판사. 2004년 5월호. p.66
4)목회와 신학 2004년 5월호. p. 59
5)핸드릭슨, <목회서신>, p.154
6)로버트 엘 레이몬드. 원광연 역, <바울의 생애와 신학>, 크리스천 다이제스트, 2003, pp. 619-620
7)목회와 신학, 2004년 5월호, p.63
8)목회와 신학, 2004년 5월호, p.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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