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수 교수 비판에 대한 반론(10)

성령의 은사로서의 방언은 오순절 날 예루살렘에서나 고린도 교회에서나 오늘날에도 동일하게 인간의 언어다. 그러나 현대 교회의 영음 방언은 인간의 언어가 아니다. 그러므로 현대 교회의 영음 방언은 성령이 초대 교회에 주셨던 방언의 은사와는 다른 것이다.

고린도전서 12장 10절의 은사 목록에 방언의 은사와 함께 통역의 은사가 있다는 것은, 방언이 외국인에게 하나님의 계시를 전하는 언어라는 사실을 웅변적으로 말해주는 것이다.1) 뿐만 아니라 고린도전서 14장 27절에서 방언을 말하고 그것을 통역하도록 바울이 명령하고 있는 것도, 방언이 언어라는 사실을 입증하는 분명한 증거이다.

그럼에도 김동수 교수는 “만약 실제 외국어였다면 방언을 하는 사람은 방언 통역하기를 기도하라는 바울의 권면은 앞뒤가 맞지 않는다. 바울은 그 언어를 배우라고 하든지 그 언어를 쓰는 사람을 초빙해서 방언 통역을 하라고 권면했을 것이다.”라고 말한다.2)

그러나 이것은 당시 고린도 교회의 사정을 모르는 무지에서 나온 말이다. 어쩌다가 고린도 교회의 예배에 들어오는 외국인들의 국적을 고린도 교회가 어떻게 미리 알아서 이들의 언어를 미리 배울 수 있겠는가? 또 외국인들이 언제 올지 어떻게 알아서 이들의 언어를 통역할 수 있는 자를 미리 초빙할 수 있겠는가?

▲ 김동수 교수(평택대)

김동수 교수는 “방언이 만약 실제 외국어였다면 실제 그 언어를 아는 사람이 있기 때문에 통역이 필요 없다. 통역의 은사를 통해서 통역되려면 실제 인간이 쓰는 언어가 아니어야 한다”라고 말한다.3) 그러나 외국어 방언을 말할 때, 거기에 그 언어를 아는 자가 있다고 어떻게 단정할 수 있는가? 아마 그는 방언의 은사가 예배에서 현지인 신자들이 아니라 현지어가 통하지 않는 외국인들을 위한 은사임을 몰랐기 때문에 이런 상상을 한 것 같다. 고린도 교회에서 방언이 행해질 때, 외국인들은 통역 없이 방언을 알아들을 수 있었다. 왜냐하면 그 방언은 자신들이 사용하는 언어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외국인과 함께 예배에 참석한 현지인 신자들은 그 방언이 자신이 사용하는 언어가 아니었기 때문에 알아들을 수 없었다. 그러므로 성령은 방언을 알아들을 수 없는 현지인 신자들이 외국어 방언을 알아들을 수 있도록 통역의 은사를 주신 것이다.

성령이 고린도 교회에 주신 방언의 은사는 예배에서 현지어를 모르는 외국인들을 위한 것이며, 통역의 은사는 외국어 방언을 알아듣지 못하는 현지인 신자들을 위한 것이었다. 만약 김동수 교수의 말대로 고린도 교회의 방언이 현대 교회의 방언처럼 영음이기 때문에 통역이 필요하다면, 오순절주의자들의 주장대로 영음 방언을 하는 이유가 ‘인간의 언어로 표현 불가능한 내용을 하늘 언어로 표현하는 것이며, 또한 마귀에게 비밀을 들키지 않기 위함’이라는 말과 모순된다. 왜냐하면 인간의 언어로 표현할 수 없어서 하늘 언어로 말한 것을 다시 인간의 언어로 통역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며, 또한 영음 방언을 하는 이유가 마귀에게 비밀을 들키지 않기 위함이라면, 그 영음 방언을 통역하는 것은 마귀에게 비밀을 알려주는 꼴이 되기 때문이다.

성령의 은사로서의 방언은 성령이 오순절 날 예루살렘에서 주의 제자들에게 주신 방언, 즉 외국인에게 하나님의 큰 일을 전할 수 있는 외국어 방언 외에는 없다. 그러므로 성령이 고린도 교회에 주신 방언의 은사도 당연히 외국인에게 하나님의 큰 일을 전할 수 있는 외국어 방언이었다. 성령의 은사로서의 방언이 외국어라는 사실은 다음 두 가지 언어적인 이유에서도 알 수 있다.

첫째, 누가가 기록한 사도행전에서 ‘방언을 말하다’(lale,w, 랄레오 + glw,ssaij, 글롯사이스)와 바울이 기록한 고린도전서에서 ‘방언을 말하다’(lale,w, 랄레오 + glw,ssh|, 글롯세)의 헬라어 문구는 거의 정확하게 일치한다.4) 그런데 헬라어에서 어구가 같은 표현은 같은 의미를 가진다.5) 그러므로 성령이 고린도 교회에 주신 방언의 은사도 사도행전에서와 마찬가지로 외국어를 구사할 수 있는 언어 능력임에 틀림없다.6)

둘째, 방언을 뜻하는 헬라어 ‘글롯사’(glw/ssa)라는 명사는 성경에서 단 두 가지의 의미, 즉 입 안에 있는 혀(tongue)와 언어(language) 외에 다른 의미로 사용된 적이 없다.7) 따라서 예언이 모든 교회에서 필요한 보편적인 은사라면8), 방언은 특수한 상황, 즉 고린도 교회와 같이 외국인들이 예배에 들어온 교회에서만 필요한 특별한 외국어 은사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방언의 은사는 오순절 날 아람어(또는 히브리어)가 통하지 않는 사람들이 많이 모여 있었던 예루살렘의 상황이나 고린도교회와 같이 외국인들이 예배 안에 들어온 상황에서만 필요한 초자연적인 외국어 능력이다. 그러므로 오늘날 오순절주의자들이 말하는 대로, 고전14:2을 근거로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로 하나님께 기도한다는 영음 방언(방언기도)은 인간이 만들어낸 거짓 은사이다.

----각 주----

1) 본문에서 ‘통역함’으로 번역한 헬라어 ‘에르메네이아’(e`rmhnei,a)의 동사 ‘디에르메뉴오’(diermhneu,w)는 언어를 번역하는 것을 의미한다. 존 R. W. 스토트, 오늘날의 성령의 사역, 조병수 옮김(서울: 한국기독교교육연구원, 1983), p.135.

2) 김동수, 방언은 고귀한 하늘의 언어(서울: 이레서원, 2008), p.116.

3) 앞의 책, p.116.

4) 김동수, 신약이 말하는 방언(서울: 킹덤북스, 2009), p.135; 존 R. W. 스토트, 오늘날의 성령의 사역, 조병수 옮김(서울: 한국기독교교육연구원, 1983), p.135; 김동수, 방언은 하늘의 고귀한 언어(서울: 이레서원, 2008), p.61.

5) 존 스토트, 오늘날의 성령의 사역, 조병수 옮김(서울: 한국기독교교육연구원, 1983), p.135.

6) 그러나 김동수 교수는 고린도 교회의 방언은 영음이라는 자신의 생각을 기준으로, 오히려 사도행전의 방언이 외국어라는데 의문을 제기하며 영음일 수 있다는 억지 주장을 한다. 김동수, 신약이 말하는 방언(서울: 킹덤북스, 2009), p.135.

7) 오늘날의 성령의 사역, 조병수 옮김(서울: 한국기독교교육연구원, 1983), p.135.

8) 롬12:6; 고전11:4,5; 살전5:20; 딤전1:18; 4:14; 벧후1:19-21; 계1:3; 10:11; 11:3,6 등을 살펴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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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창모 목사는 죽음에 이르는 병에 걸린 한국 교회를 신물 나게 체험하며 갈등하다 하나님을 향해 살아 있는 교회를 꿈꾸며 1999년 김천에서 ‘제자들 경배와 찬양교회’를 개척하였다. 이창모 목사는 한국교회를 죽음에 이르게 한 병이 단지 성공주의, 황금만능주의, 도덕적 윤리적 타락 등이 아니고 이미 한국교회에 만연된 잘못된 신학에 있음을 확신하고서 무엇이 바른믿음인지 신학적으로 깊이 고민하는 목사이다. 이창모 목사는 자신이 중2때 수련회에서 방언을 받았고, 대부분의 목사들이 그것을 ‘영의 기도의 언어’라고 가르치므로 의심없이 수 십년 동안 옹알거리는 방언현상으로 기도(?)하였던 대표적인 방언기도자였다. 김우현, 김동수 등이 저술한 거짓 방언을 미화하는 한심한 서적들을 접한 후 방언에 관한 깊은 신학적인 성찰을 시작하게 되었고, 결국 오늘 날 방언이라고 알려진 소리현상과 성경의 참된 방언은 무관하다는 사실을 확신하게되었다. 이전의 자신처럼 방언으로 기도한다고 착각하고 있는 다른 목회자들과 신자들을 진정한 복음으로 돌이키기 위해 <방언, 그 불편한 진실>(밴드오부퓨리탄,2014)을 출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