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인규 씨의 그릇된 주장에 대한 이창모 목사의 반박

▲ 매우 빈약한 신학논리를 동원하며 지속적으로 김성로 이단사상을 옹호하는 이인규 씨

이인규 씨는 ‘임헌원 목사와 정이철 목사에게 고하는 글’(9)에서 또 부활에 관한 여러 가지 글들을 주석에서 찾아 나열하고는, 자신이 나열한 글들에 언급된 부활을 정이철 목사님과 림훤원 목사님이 믿지 않는 것처럼 오도하고 있다. 그의 나쁜 버릇은 여전하며, 그의 무지도 여전한 것 같다. ‘임헌원 목사와 정이철 목사에게 고하는 글’(9)에서 그가 인용한 글 하나를 보자.

“웨인 그루뎀은 미국 일리노이즈의 Trinity Evangelical School의 조직신학교수로서, 그의 저서가 우리나라에 여러권 발행되었다. 웨인 그루뎀도 루이스 벌콥과 마찬가지로 부활이 우리의 중생과 칭의를 보장하여 주며, 우리의 부활을 보장하여 준다고 말한다.

- 부활 교리의 중요성
a. 그리스도의 부활은 우리의 중생을 보장해 준다 : 벧전 1:3
b. 그리스도의 부활은 우리의 칭의를 보장한다 : 롬 4:25
c. 그리스도의 부활은 우리도 완전한 부활의 육신을 받게될 것을 보장한다. 고전 6:14, 고후 4:14, 고전 15:20”(웨인그루뎀 조직신학 중권, 167-170쪽)

그러나 (사실은 아주 당연한 것이지만) 놀랍게도 이인규 씨가 인용한 위 글은 오히려 <바른믿음>의 주장을 지원하는 내용의 글이다. 왜냐하면 웨인 그루뎀은 부활이 중생, 칭의, 그리고 몸의 부활을 보장한다고 분명히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웨인 그루뎀은 이인규 씨나 김성로 목사처럼 부활이 중생, 칭의, 몸의 부활을 가져오는 능력이라고 말하지 않고 있다는 말이다.

이인규 씨가 인용한 웨인 그루뎀의 말은 옳다. 왜냐하면 구원의 능력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이 대속 제물로 죽으심으로 구속이 완성된 십자가에를 믿는 믿음에서 나오기 때문이며, 십자가의 능력으로 인한 부활은 십자가에 구속의 능력(중생, 칭의, 몸의 부활)이 있음을 보장해 주는 증거이다. 그런데도 이인규 씨는 이 글이 김성로의 부활을 지원하는 것으로 여기고 웨인 그루뎀의 글을 인용한 것을 보면, 그의 신학적 무지는 필자가 걱정한 수준이 분명한 것 같다.

아무튼 이인규 씨는 이렇게 원래는 그런 뜻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무지에서든 의도적이든 간에, 마치 그런 양 인용하여. 교묘하게 진리를 오도하고 있다. <바른믿음>이 김성로 목사가 ‘십자가는 구원의 완성이 아니고 부활이 구원의 완성’이라고 주장하는 것을 반박하기 위해 부활과 비교하며 십자가를 강조해 왔다. 그럼에도 이인규 씨는 여러 가지 주석들에서 부활에 관한 글들을 인용해 놓고, <바른믿음> 마치 주석에서 학자들이 설명한 부활을 무시하기라도 한 듯이 오도한다.

<바른믿음>은 이인규 씨가 인용한 저명한 학자들의 부활에 대한 의견을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인용한 이인규 씨의 나쁜 의도를 거부하는 것이다. <바른믿음>은 김성로의 부활을 믿지 않을 뿐이지 성경이 말하는 부활을 세상이 불타 없어진다 해도 믿는다. 다시 말하면, 김성로 부활복음이 말하는 ‘부활이 구원의 완성이다’를 거부하고, 오직 ‘십자가에서 이미 구원이 완성’되었음 주장한다. 그리고 완성된 구원의 능력인 십자가의 필연적인 결과로서의 부활임을 설명하고 주장한다.

이제 필자는 롬1:4의 바른 의미(이인규 씨는 여러 주석을 나열한 자신의 글의 제목을 롬1:3-4절의 올바른 해석이라고 했다)를 밝히기 위해 롬1:4을 주석할 것이다. 이인규 씨가 여러 주석을 나열하고 ‘부활논쟁을 하는 사람들에게 보내는 롬1:3-4절의 올바른 해석’이라는 제목을 붙인 글과 비교해 보라. 그리고 누구의 주장이 타당한 것인지 판단해 보라.

아래 글을 읽으면 누구라도 아마추어와 프로의 차이를 깨닫게 될 것이다. (필자가 프로와 아마추어라는 말을 쓰는 것은 필자의 실력이 뛰어남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필자도 평생을 공부해야 할 만큼 모자라는 소인이기 때문이다. 단지 필자가 그 동안 계속 지적했음에도 불구하고, 수준 이하의 글들로 정이철 목사님과 림헌원 목사님을 계속 비판하는 것이 너무 안스러워서, 이인규 씨의 현재 신학 수준은 이단을 다룰 만한 수준이거나 정 목사님이나 림 목사님을 비판할 수준이 아님을 말하려는 것이다. 그럼에도 점잖지 못한 표현을 사용한 것에 대해서는 독자들에게 넓은 양해를 부탁드리고 싶다)
 

롬1:4의 바른 해석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가운데서 부활하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김성로 목사의 ‘한마음 제자훈련 시리즈1’, p.13에서 인용한 롬1:4은 ‘개역한글’이다)

위 본문에서 “인정되셨으니”로 번역한 “호리스텐토스”(o`risqe,ntoj/앞으로는 편의상 헬라어는 생략하고 음역한 한글로만 표기하겠다)는 신적수동태로 보아야 한다. 그렇다면 본문에서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하는 주체는 하나님이 된다. 이것을 염두에 두고 롬1:4을 보면, 하나님은 예수를 자신의 아들로 인정하신 시점이 예수의 부활 이후가 되고 만다. 그래서 이 번역은 오역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예수의 부활 이전에도 예수를 자신의 아들로 여러 번 인정하셨기 때문이다.

"하늘로부터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마3:17)

말할 때에 홀연히 빛난 구름이 그들을 덮으며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서 이르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하시는지라(마17:5)

그럼에도 개역한글에서 이렇게 오역한 이유는 아마도 신적수동태를 염두에 두지 못한 채,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하는 주체를 인간으로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예수께서 세상에 계실 때에는 사람들로부터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받지 못하셨다. 그분의 제자들에게까지도 말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았고, 제자들은 십자가에 도망갔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죽으신 예수님을 그의 능력으로 다시 살리심으로, 예수님은 그의 제자들은 물론이고, 예수님을 죽인 자들에게까지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다.’

위의 진술은 내용상으로는 하등의 문제가 없다. 그러나 이 진술이 롬1:4을 설명하는 것으로는 부적당하다. 왜냐하면 “호리스텐토스”는 신적수동태로써, ‘인정’의 주체가 하나님이셔야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해석에 문제가 있음을 감지하고 개역개정에서는 “선포되셨으니”(was declared)로 번역했다(이 해석은 대부분의 영어 성경에서는 물론이고 루터, 크리소스톰까지 올라간다).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롬1:4, 개역개정)

과거 대부분의 주석들이 이 해석을 선호하며(이인규 씨가 나열한 주석 뱅겔, 톰슨, 호크마 등도 동일한 해석을 내어 놓는다), 대부분의 영어성경에서도 “호리스텐토스”를 “was declared”로 번역한다.

(NIV) and who through the Spirit of holiness was declared with power to be the Son of God by his resurrection from the dead: Jesus Christ our Lord.

그러나 이 번역도 ‘인정되셨으니’와 다르지 않게, 오역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예수의 부활 이전에도 예수를 자신의 아들로 여러 번 선포하셨기 때문이다. 이미 “인정되셨으니”에서 제시한 마3:17과 마17:5은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자신의 아들로 인정하심과 동시에 사람들 앞에서 예수를 자신의 아들로 선포하신 것이다. 하물며 하나님은 여러 사람들 앞에서 이방인의 입을 통해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를 자신의 아들로 선포하셨다.

“예수를 향하여 섰던 백부장이 그렇게 숨지심을 보고 이르되 이 사람은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 하더라”(막15:39)

이런 이유로 오늘날 거의 대부분의 학자들도 “호리조”를 “선포하다”로 해석하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또 다른 이유는 신약성경에서 이 단어(호리조)는 일관성 있게 “임명하다”, “정하다”의 의미(영어로는 ‘appoint’)로 사용되기 때문이다(눅22:22; 행2:23; 10:42; 11:29; 17:26, 31; 히4:7 등을 찾아보라).

이렇게 헬라어 ‘호리조’는 성경 밖에서나 성경 안에서나, 어디에서도 ‘선포하다’의 의미로 사용되지 않는다. 하물며 70인역에서도 ‘호리조’가 ‘선포하다’의 의미로 사용된 곳은 찾아볼 수 없다. 그러면 “호리조”의 바른 의미를 행10:41-42과 행17:31을 통해 살펴보자.

“모든 백성에게 하신 것이 아니요 오직 미리 택하신 증인 곧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신 후 그를 모시고 음식을 먹은 우리에게 하신 것이라 우리에게 명하사 백성에게 전도하되 하나님이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의 재판장으로 정하신(호리스메노스/원형:호리조) 자가(the one whom God appointed as judge of the living and the dead) 곧 이 사람인 것을 증언하게 하셨고”(행10:41-42)

“이는 정하신(호리센/원형:호리조) 사람으로(by the man he has appointed) 하여금 천하를 공의로 심판할 날을 작정하시고 이에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것으로 모든 사람에게 믿을 만한 증거를 주셨음이니라 하니라”(행17:31)

이렇게 롬1:4의 “호리스텐토스”는 예수가 영원한 하나님의 아들이었다는 것이 부활 때 ‘인정되거나 선포되었다’는 의미가 아니다. 오히려 예수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셨을 때, 영원 전부터 하나님의 아들이셨던 예수님이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임명되셨다”는 것이 “호리스텐토스”의 요점이다. 여기서 한 가지 덧붙여 설명할 것은 “능력으로”(엔 뒤나메이)이다. 지금 대부분의 학자들은 “능력으로”가 “하나님의 아들”(휘우 데우)을 수식하는 것으로 이해한다. 이렇게 “휘우 데우 엔 뒤나메스”를 “능력의 하나님의 아들”로 해석하면, 예수가 부활했을 때, 하나님의 아들이나 메시아가 되지 않았음이 분명해진다.

▲ 이창모 목사

예수는 지상에 계셨을 때, 다윗의 씨로서 하나님의 아들이셨다(롬1:3). 그럼에도 예수님은 지상에서는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영광의 권좌를 누리는 대신에 하나님의 구원 계획에 순종하여 십자가에서 힘없이 죽으셨다. 하나님은 이런 예수를 죽음에서 다시 살리심으로 메시아적 왕의 보좌에 앉히신 것이다. 다시 말하면, 부활을 기점으로 다윗의 아들인 예수가 실제적으로 왕권을 행사할 수 있는 만왕의 왕으로 임명되신 것이다. 또 다시 말하면, 여기서 예수님의 위치가 성육신 때 포기하셨던 하나님의 아들의 능력과 권위의 자리에서 성육신 이전의 수준으로 높아지신 것이다.

이 상황을 가장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성경 구절이 빌2:6-11절이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빌2:6-11)

바울은 행13:33에서도 시2:7을 인용함으로써, 예수의 부활과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로 임명(취임)하신 것을 관련시키고 있다.

따라서 롬1:4에 언급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십자가의 불완전한 구속을 완성시키는(이인규 씨와 김성로 목사의 표현을 빌리면 ‘부활은 구속의 완성이다) 그 무엇이 아니라, 십자가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통해 완성된 하나님의 구속을, 죄인들에게 적용시켜 궁극적인 구원의 완성(신자들의 몸의 부활)을 위한 시작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일을 위해 하나님은 예수를 다시 살리셔서 하나님의 아들로, 특별히 마지막 날의 심판주로 임명하신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예수의 부활은 새 시대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라고 할 수 있다. 하나님은 이렇게 새 시대를 다스리는 왕으로, 그리고 궁극적인 심판주로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임명하셔서 높이신 것이다.

이런 사상은 리차드 게핀의 [부활과 구속]에서도 그대로 나타난다. 게핀은 그의 책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십자가 구속의 완성으로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이인규 씨는 마치 게핀이 그렇게 주장한 것처럼 오도했다), 성도의 몸의 부활과 관련시켜 예수 그리스도와 성도의 연합을 강조했다(게핀의 책의 극히 일부에서, 필자가 받아들일 수 없는 애매한 표현들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책 전체의 기조는 앞에서 필자가 언급한 대로이다).

그럼에도 이인규 씨는 자신의 주장을 지원하는 것처럼 보이기 위하여, 이 책의 추천사를 쓴 박형용 박사의 글을 자신에게 유리한 부분만 잘라서 인용하므로 많은 사람들을 우롱했다. 아래는 이인규 씨가 정이철 목사님과 림헌원 목사님을 비판하기 위해 “임헌원목사와 정이철목사에 대한 반박’(2): 부활과 십자가는 모두 구속적 사건이다!”에서 게핀의 [부활과 구속]에 대한 박형용 박사의 추천의 글을 인용한 것이다.

“그러나 서방 교회에서는 성도들의 구원 문제를 논할 때 예수님의 죽음을 그의 부활보다 더 강조하여 다루었다. 예수님의 죽음을 속죄(atonement)의 성취로 강조하여 생각하는 태도 때문에 예수님의 부활은 큰 관심의 대상이 되지 못한 것이다. 물론 예수님의 죽음은 아무리 강조해도 잘못이 없는 것이다. 그러나 바울 서신에는 부활에 대한 강조가 명백하게 나타나 있다.

바울에게 있어서 예수님의 부활은 구속의 완성, 구속의 종결로서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예수님의 죽음보다도 예수님의 부활에서 구속의 성취를 찾을 수 있는 것이다. 예수님의 죽음과 예수님의 부활을 대치시켜서는 안된다. 그러나 구속의 완성은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해서 더 결정적으로 성취된 것이다. (Gaffin 박사는 바울 신학의 중심주체인 부활을 성도들의 구원과 결부시켜 다룬 다음 예수님의 부활 자체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제공한다.”

그런데 사실은 필자가 괄호로 묶은 글 앞에, 이인규 씨가 생략해 버린 중요한 글이 있다. 생략된 글이 사실상 게핀의 주된 주장임에도 불구하고, 이인규 씨는 그것을 생략해 버림으로써 박형용 박사의 의견 전체를 자신의 주장에 맞게 왜곡시켜 버렸다. 지면 관계상 다 소개하지 못하고 이인규 씨가 생략한 글의 일부만 소개하면 아래와 같다.

“게핀 박사는 [부활과 구속]에서 그리스도의 부활과 성도들의 부활의 연합을 강조한다. 고전15:20의 “첫 열매” 개념이나 골1:18의 “먼저 나신 자” 등의 표현 속에 그리스도의 부활과 성도들의 부활의 연합이 명백하게 나타나 있다. 바울의 이 연합 개념을 근거로 미래에 있을 성도들의 육체 부활을 설명하는 것이다. 게핀 박사는 과거에 발생한 그리스도의 역사적 부활을 명백히 하면서도 엡2:5-6과 골2:12-13; 3:1, 그리고 롬6:3 이하의 구절은 성도들의 현재 경험, 즉 그리스도와 성도들의 실존적인 관계를 설명하고 있음을 천명한다. 이것이 가능한 것은 그리스도와 성도들이 부활에 있어서 유기적으로 연합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와 성도들의 유기적인 연합은 무덤에서의 예수님의 부활과 성도들의 최초의 중생 경험, 그리고 성도들의 미래 육체 부활의 전반적인 관계에서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리차드 게핀, 부활과 구속, pp.7-8)

이렇게 이인규 씨의 편집된 인용은 게핀이나 박형용 박사의 의견에 대한 실로 어처구니없는 왜곡이다.
 

글을 맺으며

이인규 씨는 김성로 목사의 부활복음의 이단성을 전혀 알지 못할 만큼 신학적으로 연약하다. 그러니 정이철 목사님이 부활의 능력을 강조하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의 자신의 십자가의 피의 완전한 속죄의 혜택을 가장 먼저 적용받으심이다.”라고 한 말의 심오한 의미를 이해할 수는 없을 것이다 (단지 여기에 대해 이인규 씨는 성경적인 근거를 대며 비판하지 못하고, 그냥 ‘놀랐다’다고 하면서 비아냥거리듯이 비난했을 뿐이다.

그의 신학적 수준으로 볼 때 이런 비난은 아주 당연해 보인다). 아마도 그는 정 목사님과 같은 견해를 피력한 김균진 교수의 “십자가가 예수가 모든 인간을 대신하여 하나님의 분노의 심판을 받은 사건이라면, 부활은 심판을 받은 예수를 하나님이 의롭다 인정하는 사건이다”라는 말도 이해하기는 불가능할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이인규 씨와 김성로 목사는 다음 필자의 말을 귀담아 듣는다면, 자신들의 부활 주장이 얼마나 허황된 것인가를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의 승부수, 부활!>이라는 김성로 목사의 책 제목은 그의 부활복음의 특징을 너무나 잘 보여준다. 왜냐하면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대한 그들의 잘못된 이해를 너무나도 투명하게 보여주는 책 제목이기 때문이다.

이 제목에 의하면, 십자가의 예수의 죽음은 사탄에게 패색이 짙어진 위기인데 하나님께서는 갑자가 예수의 부활이라는 승부수를 날려서 사탄에게 승리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십자가는 예수님이 다 이루었다고 말씀하셨지만 무엇인가 모자란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십자가의 죽음을 지나가서 부활로 가야한다고 말한다. 그래야지 부활하신 예수님이 하늘 성소에 올라가서 영원한 제사를 드림으로 완성된 구원을, 믿을 수 있고, 그래야지 초대교회에서 일어난 성령의 역사가 다시 부활을 믿는 자들에게 일어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야말로 위험하기 짝이 없는 “죽음의 복음”이다. 왜냐하면 죄인의 구속이 예수의 부활로부터 시작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죄인의 구속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의 죽음에서부터 시작되고 완성되었다. 그래서 그 십자가의 구원의 능력이 부활로 나타난 것이다. 다시 말하면, 예수의 십자가가 사탄에게 진 실패의 사건이 아니다. 부활 이전에 하나님은 십자가에서 예수님이 대속 제물로 죽으시는 순간에 사탄의 세력을 깨뜨리시고 승리하셨다. 예수의 부활은 실패처럼 보였던 십자가의 하나님의 승리가 무지한 인간의 눈에 비로소 승리의 사건으로 보이게 한 사건이다.

그러므로 믿음 없이 무지함으로 십자가를 보면, 하나님의 아들이 힘없이 죽으신 십자가는 실패의 사건으로 보일 수밖에 없다. 그것은 별 의미를 가지지 않으며, 단지 죽음이 승리한 사건으로 보일 따름이다. 그래서 믿음이 없으므로 무지한 자들에게는 눈에 보이는 승리 같은 “부활”을 붙잡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여기에는 구원이 없다. 단지 신바람 나는 부활복음으로 인한 파멸만이 있을 뿐이다.

“율법을 따라 거의 모든 물건이 피로써 정결하게 되나니 피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히9:22)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롬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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