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수 교수 비판에 대한 반론(9)

▲ 김동수 교수(평택대학교)

김동수 교수는, “방언은 처음 체험한 이후 계속 변(발전)하며, 한 가지 방언만이 아니라 여러 가지 방언을 하게 된다”1)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것은 스스로 자신의 방언이 성령의 은사가 아니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왜냐하면 김동수 교수가 설명한 일련의 현상들이야말로 자신의 방언이 성령의 은사가 아니라는 명백한 증거들이기 때문이다.

오순절주의자들이 받았다고 하는 방언의 은사는 인간이 노력하면 얼마든지 할 수 있는 ‘기묘한 소리내기’로서 인간의 노력에 따라 발전하기도 하고 퇴보하기도 한다. 또 개인의 창의력에 따라서 여러 가지 소리들을 만들어낼 수도 있고, 그날 기분에 따라 소리가 들쭉날쭉 변하기도 한다. 이런 까닭에 방언에는 고수도 있고 하수도 있으며, 상황에 따라 방언이 녹슬었다고 여기기도 하고, 성령이 방언을 거두어 가셨다고 생각하기도 한다.2)

그러나 성령의 은사로서의 방언은 하수나 고수가 따로 있을 수 없다(이것은 예언의 은사나 신유의 은사에서도 마찬가지다). 성령이 방언의 은사를 주시면 누구든지 처음부터 성령이 전하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계시를 완벽하게 외국인에게 전할 수 있다. 왜냐하면 방언의 은사는 전능하신 성령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며, 또 방언을 말할 때 전능하신 성령 하나님이 친히 역사하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순절주의자들의 방언은 인위적인 거짓 방언이기 때문에, 방언을 할 수 있는 최적의 환경들(요령, 분위기 등)이 제공되면 대부분 할 수 있게 된다. 또 누구든지 방언을 열심히 갈고 닦으면 방언의 고수가 될 수도 있다. 왜 그럴까? 오순절주의자들의 방언은 성령이 주시는 은사로서의 방언이 아니기 때문이다.
 

성령의 은사는 비상시(일시, 단회)적인 능력이다

인간이 가지고 있는 선천적인 능력이나 인위적으로 터득한 능력은 인간의 의지에 따라 언제 어디서든지 사용할 수 있는 상시적인 능력이다. 그러나 성령의 은사는 성령이 역사하실 때만 사용할 수 있는 비상시적인 능력이다. 다시 말하면 인간이 언제 어디서나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는 성령의 은사는 없다는 말이다. 이것은 피조물인 인간이 성령 하나님을 마음대로 부릴 수 없는 것과 같다.

그러나 오순절주의자들은 성령의 은사가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라는 표현 때문에 은사를 마치 선물 꾸러미처럼 여기는 것 같다. 그래서 은사가 한 번 주어지면 주머니에 물건을 넣어 두었다가 필요할 때마다 다시 꺼내어 사용하는 것처럼, 은사자가 원하기만 하면, 언제 어디서든지 자신의 은사를 사용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성령의 은사를 언제 어디서든지 마음대로 쓸 수 있는 성능 좋은 물건처럼 생각하는 사람들은, 성령의 의지와 상관없이 자신의 의지대로 은사를 사용하다가 기대했던 결과가 나타나지 않으면, 자신의 은사가 녹슬었다고 생각하거나(이런 생각은 성령의 은사를 녹슬지 않는 플라스틱 물건보다도 못한 것으로 취급하는 코미디다) 성령이 은사를 거두어 가셨다고 생각하기도 한다(이것은 성령 하나님을, 선물을 주었다 빼앗았다 하는 변덕스러운 분으로 여기는 코미디이다).3)

그러나 성령의 은사는 비상시적인 능력이다. 여기서 ‘비상시적’이라는 말은 교회에 은사가 주어졌을 때, 교회가 그 은사로 어떤 일을 수행해 그 일을 완수하면 은사도 자연히 사라진다는 말이다. 그리고 다음에 교회에 그 은사가 또 필요해지면, 성령은 그 교회에 그 은사를 또 주실 것이다. 이것은 은사의 소멸(고전13:11)과도 일맥상통한다.

주님이 재림하시면 교회는 완성될 것이므로 교회는 더 이상 성령의 은사가 필요 없게 된다. 그러므로 완성된 교회에는 어떤 은사도 다시 주어지지 않기 때문에, ‘주님이 재림하시면 성령의 은사는 완전히 소멸된다’라고 말할 수 있다. 고린도전서 12장 28절의 은사 목록에 나오는 사도의 은사는 교회를 세우며, 성경을 기록하기 위한 목적으로 주어진 일시적인 은사이며 직분(이것을 신학 용어로 비상직원이라고 한다)이다. 그러므로 이 은사의 목적이 달성된 후 사도의 은사는 교회에서 사라졌다. 그러므로 교회에 성령의 은사자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성령은 “그의 뜻대로” 교회에 필요한 은사를 그때그때 가장 적절한 사람을 선택해서 주신다.4)

초대 교회 당시에는 교회가 소규모여서 성령의 도구로 쓰임 받을 만한 사람도 소수였을 것이다. 그래서 성령이 같은 사람에게 같은 은사를 반복적으로 주셨을 가능성이 아주 크다. 바로 이런 까닭에 어떤 은사가 한 사람에게 지속적으로 존재한다고 착각할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성령의 은사는 필요할 때마다 사람에게 반복적으로 주어지는 능력이지 지속적으로 존재하는 능력이 아님을 놓쳐서는 안 된다.(밑줄 친 부분을 비교하면서 다시 한 번 읽어 보라).

신약 성경에서 기적을 베푸는 은사를 받은 사람들이 자신들이 원할 때마다 기적을 행할 수 있었다는 어떤 증거가 있는가? 물론 전혀 없다.5) 사도행전을 살펴보라. 사도들은 기적이 일어날지 않을지 염려하면서 누군가를 고치려고 시도하거나 실험하지 않았다. 더구나 이들은 사람들 앞에서 어떤 기적을 행하겠다고 공포한 적도 없었다. 사도들은 결코 “제가 오늘 모인 여러분 모두에게 방언을 받게 해 주겠습니다.”라고 말 한 적이 없다. 왜냐하면 사도들은 성령이 기적을 언제 일으키실지 몰랐기 때문이다. 단지 하나님의 때에 성령이 “그의 뜻대로” 사도들에게 기적의 은사를 주심으로 그들에게 그때그때 주의 사명을 감당하게 하셨을 뿐이다.6)

사도행전에서 기적을 여러 번 일으켰던 사도들의 예를 몇 가지 살펴보자. 사도행전 3장에는 베드로와 요한이 제구시 기도 시간에 성전에 올라가다가 나면서 못 걷게 된 이를 일으켜 세우는 초대 교회 최초의 신유 사건이 기록되어 있다. 나면서 못 걷게 된 이는, 어떤 이들이 ‘성전에 들어가는 사람들에게 구걸하기 위하여 날마다 미문이라는 성전 문에 두는 자’였다(행3:2). 그리고 베드로와 요한도 날마다 정해진 기도 시간이 되면 성전에 올라가 기도하던 자들이었다.

그러므로 베드로와 요한은 어제도 그저께도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다가, 어제도 그저께도 성전 미문에 앉아 구걸하는 그 사람을 보았을 것이다. 만약 신유의 은사자가 자신이 원할 때 언제든지 신유의 능력을 행할 수 있는 것이 사실이라면, 베드로와 요한은 사도행전 3장의 치유 사건 이전 어느 날에 벌써 그 사람을 일으켜 세웠을 것이다. 그러나 베드로와 요한은 날마다 기도 시간에 성전에 올라가면서, 날마다 그 사람을 만났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일으켜 세우려고 하지 않았다. 왜 그랬을까? 그것은 성령이 베드로와 요한에게 나면서 못 걷게 된 이를 일으켜 세울 수 있는 신유의 은사를, 그날 이전에는 주시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도행전 16장에는 바울이 귀신 들린 여종을 고쳐 주는 사건이 나온다. 귀신들린 여종 하나가 여러 날을 바울과 그 무리를 따라다니며 괴롭혔고, 그 때문에 바울은 심히 괴로워했다. 드디어 사도행전 16장 18절의 그날에 바울은 여종 안에 있는 귀신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내가 네게 명하노니 그에게서 나오라”고 명하므로 그 여종에게서 귀신을 쫓아냈다.

만약 바울에게 오늘날 아주 용한 신유의 은사자나 신사도라 자칭하는 자들처럼 언제든지 귀신을 쫓아 낼을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면, 바울은 귀신들린 여종 때문에 여러 날 괴로움을 당하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바울이 여러 날 괴로움을 당한 것은 사도행전 16장 18절의 그날 이전에는 축귀 능력(신유의 은사)이 바울에게 주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7)

바울은 나면서부터 못 걷게 된 이를 일으켰다(행14:10). 귀신들린 소녀에게서 귀신을 쫓아냈다(행16:18). 바울의 손수건이나 앞치마를 통해서도 사람의 병이 떠나고 악귀가 나갔다(행19:12). 심지어 그는 죽은 자를 살리는 기적까지 행했다(행20:10). 바울은 많은 “표적과 기사와 능력” 행하며 사역했다(롬15:19; 고후12:12).

그러나 바울은 에바브로디도가 병들어 죽게 되었을 때 그를 낫게 하지 못했다. 오히려 그가 죽을까봐 근심까지 했다(빌2:27). 디모데의 위장병에 대해서도 바울은 ‘신유의 은사자’를 불러다가 기도하라거나, 내가 나중에 가서 기도해서 낫게 해 줄 테니 조금만 참으라거나 하지 않고 단지 디모데에게 포도주(포도주는 당시 소금, 올리브유와 함께 가장 보편적인 치료약이었다)를 조금씩 쓰라고 권했을 뿐이다(딤전5:23).8) 뿐만 아니라 바울은 병든 드로비모를 낫게 하기는커녕 밀레도에 그냥 두고 떠나기까지 했다(딤후4:20).

바울은 죽은 자를 살릴 만큼 능력자였음에도 불구하고, 왜 어떤 자들에게는 병조차 낫게 해주지 못했을까? 특별히 자신의 사랑하는 동역자들이었던 에바브로디도와 디모데, 드로비모에게마저도 신유의 역사를 베풀지 못했을까?

심지어 선교 사역에 지장을 줄 만큼 병약했던 바울(고후12:12; 갈4:12-13)은 자신의 병 때문에 세 번씩이나 주께 기도했음(고후12:8)에도 불구하고 왜 자신의 병을 고치지 못했을까?(고후12:9-10). 바울에게 믿음이 부족했기 때문일까? 아니면 그의 신유의 은사가 녹슬었거나 성령이 은사를 거두어 가셨기 때문일까? 아니다. 바울이 아무 때나 신유의 역사를 행할 수 없었던 까닭은 은사의 비상시성 때문이었다. 성령의 은사는 한 번 받으면, 필요할 때마다 끄집어내어 마음대로 쓸 수 있는 도깨비 방망이 같은 것이 아니다.

초대 교회의 사도들은 성령이 신유의 은사를 주실 때만 병자들을 위해 기도했기 때문에 병자들을 100% 낫게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오늘날 신유의 은사자의 치료율은 거의 자연 치료율 수준에 불과하다. 그 이유는 이들은 성령이 반복적으로 주시는 신유의 은사로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 내키는 대로 기도하기 때문이다.9) 이런 자들의 기도는 성령의 은사와 상관없이 이루어지는 자의적인 기도이기 때문에 신적인 치유의 능력은 없고, 단지 심리적인 효과와 기도하지 않았어도 시간이 지나면 자연적으로 낫는 자연 치유만 있을 뿐이다.

그런데 바울은 사역 거의 끝부분에, 로마로 가는 여정의 멜리데 섬에서 열병과 이질에 걸린 보블리오의 부친을 안수하여 낫게 했다(행28:8). 성령은 한 동안 바울을 통해서 신유의 역사를 베풀지 않으셨지만, 멜리데 섬에서는 특별히 바울에게 신유의 은사를 주셔서 보블리오의 부친을 치료하게 하신 것이다. 이 사건이야말로 성령의 은사의 비상시성을 입증하는 좋은 사례가 될 것이다.

바울 서신에서, 은사와 관련해서 사용된 ‘주다’라는 동사는 모두 다 현재 시제이다.10) 헬라어에서 현재 시제의 동사는 현재 시점에서 어떤 행동이 계속적으로 반복되는 동작을 나타낸다.11) 즉, ‘은사를 주다’에서 ‘주다’라는 동사의 행위는 한 번으로 끝나지 않고 반복적으로 주어진다는 뜻이다. 실제로 성령은 교회가 어떤 일을 하기 위해 은사를 필요로 할 때마다 그때그때 필요한 은사를 반복적으로 주셨다. 그런데 초대 교회 당시에는 성령이 반복적으로 주시는 은사의 횟수가 아주 빈번했기 때문에 교회에 은사가 지속적으로 존재하는 것처럼 보였을 뿐이다.

▲ 이창모 목사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그 횟수가 점점 줄어들어 오늘날 어떤 은사(예를 들면 방언이나 예언)는 교회에 거의 주어지지 않기 때문에 마치 소멸된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결국 이런 현상은 고린도전서 13장 10절 이하에서 말하는 은사의 소멸 과정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은사의 소멸은 교회가 가지고 있는 은사의 능력이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점점 약해지는 것이 아니라 성령이 주시는 은사의 횟수가 점점 줄어들다가 주의 재림 때는 교회가 완성될 것이므로 완전히 멈추어지는 것이다.

성령의 은사는 어떤 은사를 막론하고 성령이 “그의 뜻대로” 주시는 역사가 없으면, 사람이 결코 시행할 수 없다. 앞에서 살펴 본 신유의 은사가 그러하며 예언의 은사도 마찬가지다. 아무리 위대한 예언의 은사자라 할지라도 오직 성령이 계시하실 때만 예언할 수 있다(고전14:30; 행11:27-28; 13:1-2; 21:10-11 등 참고). 구약 시대의 선지자들도 하나님이 계시를 주실 때만 예언할 수 있었다.

그런데 이것이 방언의 은사에서만 예외가 될 수 있을까? 없다. 그럼에도 방옹자들은 방언의 은사만은 예외라고 말한다. 방언만은 언제든지 원할 때 할 수 있고, 멈추고 싶을 때 멈출 수 있는 은사라고 말한다. 그런데 거짓방언자들 중에서도 방언의 은사를 이렇게 이해하는 자들이 있기는 하다.12) 그러나 이런 이해는 자신이 하는 방언을 스스로 성령의 은사가 아니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그래서 제임스 페커도 현대 교회의 방언은 인위적으로 습득된 것이라고 주장한다.13)

오순절 날 예루살렘에서 방언으로 하나님의 큰 일을 전했던 제자들이 그 후에 방언을 했다는 기록이 없는 것도 은사의 비상시성 때문이다. 성령이 방언의 은사를 주셔서 역사할 때는 배우지 않은 외국어를 완벽하게 구사할 수 있었지만, 그 사역이 끝난 뒤 일상에서는 성령이 제자들에게 방언의 은사를 주시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은 방언으로 말하지 않았고, 또 말할 수도 없었다.14)

이제 앞에서 살핀 방언의 은사의 비상시성을 고린도전서 14장 18절에서, 다시 한 번 확인해 보자.

"내가 너희 모든 사람보다 방언을 더 말하므로 하나님께 감사하노라"(고전14:18).

은사의 비상시성을 염두에 두지 않으면, 위 본문에서 바울이 하나님께 감사한 이유를 제대로 이해하기란 불가능하다. 본문은 오순절주의자들의 주장처럼 바울이 자신의 의지적 노력으로 다른 사람들보다 방언기도를 더 많이 했으며, 그래서 누구보다도 방언기도에 능통한 것을 하나님께 감사한 것이 아니다.15)

만약 방언만큼은 자신이 하고 싶을 때 언제든지 할 수 있는 은사라면, 오히려 바울은 ‘내가 너희 모든 사람보다 방언을 더 말하므로 하나님께 감사한다.’고 말하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왜냐하면 당시 넓은 지중해 연안 지역에서 바울 자신보다 개인적으로 방언기도를 더 많이 한 사람이 단 명도 없다고 단정하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다른 모든 사람들이 바울보다 방언을 더 많이 말하지 못한 이유는 이들에게 방언에 대한 열심이 바울보다 모자라서가 아니라, 방언의 은사도 예언의 은사 등과 마찬가지로 자신이 하고 싶을 때 언제든지 할 수 있는 은사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성령의 은사들은 항상 성령에 의해 통제된다.16) 그러므로 본문은 바울이 “성령이 나를 택하셔서 다른 모든 사람들보다 나에게 더 많이 방언을 말하게 하심으로, 말이 통하지 않는 외국인(이방인)들에게 더 많이 복음을 전할 수 있도록 역사하신 하나님께 감사한다.”는 말이다. 따라서 이 본문은 방언이 인간의 의지와 열정으로 할 수 있는 은사가 아니라는 것을 말해 주는 또 하나의 좋은 사례가 될 것이다.
 

방언기도는 성령의 은사가 아니다

방언기도는 성령의 은사가 아니기 때문에 성령의 주권적인 의지와 상관없이 얼마든지 인간의 선택과 노력으로 할 수 있다. 또 방언기도는 인간의 노력으로 발전시킬 수도 있어서 처음보다는 시간이 좀 지나면 더욱 능숙하게 방언을 구사할 수 있다. 따라서 이런 방언기도의 세계에서는 하수와 고수가 있게 마련이다.

1971년에 방언을 시작했던 필자도 오랜 경력을 쌓은 만큼 방언에 관한 한 상당한 고수 축에 속했다. 김우현 PD도 “나의 경우 이제 방언으로 기도하기 시작하면 곧바로 깊은 임재로 들어간다. 그동안 방언의 양이 그만큼 쌓였기 때문이다.”17)라고 말하는 것을 보면, 자신을 상당한 방언의 고수로 여기고 있음이 분명하다.

거짓방언자들은 말한다. 방언을 받으면, 처음에는 서툴러서 갓난아이처럼 옹알이 같은 아기방언을 하다가, 자꾸 방언을 하게 되면 아이들이 자라면서 점점 말을 잘하게 되듯이,18) 나중에는 유창하게 방언을 할 수 있고,19) 또 하면 할수록 방언에 엄청난 능력도 생긴다고 한다.20) 그런데 갓난아이들은 알아듣지 못할 옹알이를 하다가도 시간이 지나면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을 하는데, 거짓방언자들은 시간이 지날수록 알아듣지 못할 옹알이를 더욱 능숙하게 하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이것이 바로 그들이 하는 방언이 성령의 은사로서의 방언이 아니라, 인간이 만들어 낸 ‘기묘한 소리’에 불과한 거짓방언이라는 명백한 증거다.
 

----각 주----
1) 김동수, 방언은 고귀한 하늘의 언어(서울: 이레서원, 2008), p.56.
2) 앞의 책, p.75.
3) 빌 해몬, 방언을 해야 하는 70가지 이유, pp.103-104.
4) 고전14:27에서 바울이 “만일 누가 방언으로 말하거든”이라고 말하는 것에서 방언의 은사자가 따로 없음을 추측할 수 있다. 만약 방언의 은사자가 교회에 따로 있었다면 바울은 “만일 누가” 대신에 “만일 방언의 은사자가”라고 말했을 것이다. 그러나 성령이 예배의 현장에서 누구에게 방언의 은사를 주실지 아무도 모르기 때문에 바울도 “만약 누가”라고 말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5) 로이드 존즈, 성령의 주권적 사역, 정원태 옮김(서울: 기독교문서선교회, 1994), p.188.
6) 앞의 책, p.189.
7) 앞의 책, p.191.
8) 김세윤, 탐욕의 복음을 버려라(서울: 새물결플러스, 2011), pp.38-39.
9) 옥성호, 방언 과연 하늘의 언어인가?(서울: 부흥과개혁사, 2008), p.210 각주 106 참고할 것.
10) 고전12:7, 10, 28, 29, 30 등 고린도전서에서 은사와 관련된 동사는 모두 현재 시제다. 엡5:8과 살전5:19에서도 역시 현재 시제다.권성수, 헬라어 구문론(서울: 선교횃불, 2001), p.40.
11) 권성수, 헬라어 구문론(서울: 선교횃불, 2001), p.40.
12) 옥성호, 방언 정말 하늘의 언어인가?(서울: 부흥과개혁사, 2008), p.194.
13) 제임스 페커, 성령을 아는 지식, 홍종락 옮김(서울: 홍성사, 2003), p.299.
14) 중세 때 성 프란시스 싸비어(St. Francis Xavier, 1506-1552)는 놀라운 방언의 은사로 인하여 그가 전에 배워본 적이 없는 인도와 중국과 일본의 언어로 그곳 사람들에게 선교할 수 있었다고 보고했다. 그러나 그 후 싸비어는 일본어를 배우느라고 굉장히 고생했으며 다른 언어들도 공부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안토니 훼케마, 방언 연구, 정정숙 옮김(서울: 신망애출판사, 1972), p.32.
이것이 사실이라면 싸비어가 받은 방언의 은사가 비상시적인 것임을 보여주는 좋은 사례가 될 것이다. 이런 현상은 피터 와그너의 책에서도 발견된다. 아르헨티나 선교사였던 제임스에게서 현지인들의 언어가 저절로 구사되는 성령의 역사가 나타났다고 한다. 그러나 그 후 제임스 선교사는 아르헨티나에서 선교하면서 현지어를 배웠다고 한다. 정이철, 신사도 운동에 빠진 교회(서울: 새물결플러스, 2013), p.166 에서 재인용. 로버트 파함도 방언을 외국어로 이해했다. 배덕만, 성령을 받으라(서울: 대장간, 2012), p.64 각주 3 재인용. 그러나 불행하게도 파함은 방언의 은사를 상시적인 능력으로 오해했다. 그래서 그는 선교사들에게 이제 더 이상은 언어 교육을 받지 않고 선교지로 가도 된다고 가르쳤고, 그 가르침을 따랐던 자들은 보기 좋게 실패했다. 행크 헤너그라프, 빈야드와 신사도의 가짜 부흥운동, 이선숙 옮김(서울: 부흥과개혁사, 2009), p.204; 정이철, 신사도 운동에 빠진 교회(서울: 새물결플러스, 2013), p.167.
15) 로이드 존즈, 성령의 주권적 사역, 정원태 옮김(서울: 기독교문서선교회, 1994), p.187.
16) 앞의 책, p.192.
17) 김우현, 하늘의 언어(서울: 규장, 2007), p.167. 김우현 PD는 어떤 여전도사에게 실제로 ‘방언의 고수’라는 호칭을 붙인다. 앞의 책, p.166.
18) 로버츠 리어든, 이용복 옮김(서울: 규장, 2009), p.83.
19) 리어든은 사28:11의 “더듬거리는 입술”이 방언이 아직 영적으로 완전히 유창한 단계에 이르지 못한 사람들을 가리킨다고 말한다. 또한 그는 방언을 계속 말하고 사용하면 더듬거리는 방언이 유창하게 된다고도 말한다. 앞의 책, pp84-75. 이것이 사실이라면 오순절 날 예루살렘에서의 주의 제자들은 처음 방언을 했을 때는 틀림없이 방언이 서툴렀을 것이다. 그러면 제자들은 그날 옹알이 수준의 아기방언을 할 수밖에 없었을 텐데, 그런 옹알이 같은 아기방언을 듣고 어떻게 많은 사람들이 신자가 될 수 있었을까?
20) 김우현 PD은 방언기도에 영의 능력이 나타나려면 하루에 30분에서 1시간 정도는 방언을 해야 한다고 말한다. 김우현, 하늘의 언어(서울: 규장, 2007), p.141. 정 원 목사도 충분히 방언을 할 때 역사가 일어난다고 말한다. 정 원, 방언기도의 은혜와 능력 1(서울: 영성의 숲, 2012), p.102. 그러나 이것은 대단히 위험한 생각이다. 왜냐하면 이들의 기도의 능력은 하나님의 은혜에 있지 않고 인간의 노력으로 쌓은 기도의 양에 달려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이방 종교에서나 볼 수 있는 신앙 행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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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창모 목사는 죽음에 이르는 병에 걸린 한국 교회를 신물 나게 체험하며 갈등하다 하나님을 향해 살아 있는 교회를 꿈꾸며 1999년 김천에서 ‘제자들 경배와 찬양교회’를 개척하였다. 이창모 목사는 한국교회를 죽음에 이르게 한 병이 단지 성공주의, 황금만능주의, 도덕적 윤리적 타락 등이 아니고 이미 한국교회에 만연된 잘못된 신학에 있음을 확신하고서 무엇이 바른믿음인지 신학적으로 깊이 고민하는 목사이다. 이창모 목사는 자신이 중2때 수련회에서 방언을 받았고, 대부분의 목사들이 그것을 ‘영의 기도의 언어’라고 가르치므로 의심없이 수 십년 동안 옹알거리는 방언현상으로 기도(?)하였던 대표적인 방언기도자였다. 김우현, 김동수 등이 저술한 거짓 방언을 미화하는 한심한 서적들을 접한 후 방언에 관한 깊은 신학적인 성찰을 시작하게 되었고, 결국 오늘 날 방언이라고 알려진 소리현상과 성경의 참된 방언은 무관하다는 사실을 확신하게되었다. 이전의 자신처럼 방언으로 기도한다고 착각하고 있는 다른 목회자들과 신자들을 진정한 복음으로 돌이키기 위해 <방언, 그 불편한 진실>(밴드오부퓨리탄,2014)을 출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