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뉴스앤조이 "이찬수 목사 '우물만 파지 말고 생각의 지경을 넓혀라'"에서 소개된 이찬수 목사의 신앙생활에 있어 교리가 중요하지 않다는 위험스러운 주장에 대해 림헌원 목사가 반박하는 내용의 글이다.)

▲ 이찬수 목사(분당 우리교회 담임)

필그림하우스에서 이찬수 목사가 행 2장 몇 절을 가지고 초대교회의 생활을 스케치한 내용만 보면서 초대교회공동체에 교리가 없었다는 견해를 말하지만 그것은 옳지 않다. 사막에서 모래언덕 하나만 바라보고 지구촌에 사람이 어디 있느냐?고 말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행 2장 44절부터 47절까지 읽어 보시면 알겠지만 여기에 교리가 어디 있나?"(이찬수 목사)

신약교회가 구약의 율법적 교리를 버린 것이 아니다. 로마서를 비롯한 바울서신과 요한서신 그리고 사복음서로부터 오늘 우리가 배우고 있는 교리가 초대교회공동체에 없다고 하겠는가? 초대교회 공동체가 나누는 사랑의 근저에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교리들이, 특히 십계명의 교리와 예수님의 십자가 구속의 교리, 부활의 소망, 재림과 심판, 새 하늘과 새 땅 등의 교리가 근저를 이루고 있는 사랑의 공동체였다.

이찬수 목사는 왜 갑자기 교리 무용론을 주장하고 나왔을까? 우선 주최 측의 성향과 세미나 장소가 어디냐를 주목해야 한다. 필그림하우스! 그곳은 이교도의 영성 관상기도의 핵심 ‘침묵훈련’(관상기도는 예장합동교단총회에서 수년전 철저히 배격하고 교류를 금지하라고 결의한 교리이다)을 하는 비성경적인 교리를 가르치는 장소라는 점에서 그 이유를 찾아야한다.

일찍이 이동원목사가 이교도의 영성훈련을 하는 성공회 소속 미국 샬렘연구소에서 불교의 승들과 힌두교명상가들 수녀와 신부들이 함께하는 자리에서 영성신학 관상기도의 침묵훈련을 배운 것들을 기초로 하여 만든 것이 필그림하우스가 아니더냐!

경기도 가평에 소재한 필그림하우스의 새벽기도에서는 호흡기도(숨기도)를 하면서 들숨과 날숨을 번갈아 쉬게 하고 들숨에서 성령을 마신다는 표현을 사용한다고 최근 3월 중 필그림하우스에 다녀온 서울의 중대형교회 모ㄱㄹ 담임목사 한 분은 참 이해 할 수 없는 일을 하고 있다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수 만 명을 대상으로 목회하고 한국교회에 참신한 영향력을 끼치고 있다고 소문이 자자한 이찬수 목사는 오해될 장소에는 왜 찾아가서 또 오해될 설교까지 왜 했는지 그 사상체계가 심히 우려가 된다. 결국 이찬수목사 본인이 속한 예장합동교단총회가 관상기도 침묵훈련을 하는 자들과는 교류를 금지하고 철저히 배격해야한다는 수년 전 결의 내용을 자의든 타의든 무시한 처사가 되었다.

또 주최 측은 예장합동교단총회에서 역시 참여금지 및 교류금지 명령을 내린 유사신사도운동가 손기철 장로와 한동안 자신의 교회당을 빌려주면서까지 협력한 바 있었던 유기성 목사가 아니더냐!

이찬수목사 자신이 속한 교단총회가 신학교교수들과 그 분야에 전문가인 목사들을 초청하여 신학대회까지 열며 땀 흘려 연구해 비성경적 교리들을 따르는 무리들과 교류를 금지하고 배격하라고 바른 신학을 제시한 것이 수년 전 일이다. 교회의 덩치가 커지고 이름이 높아지고 나면 이러한 식으로 교단총회신학부가 바른 신학을 세워 지시한 일까지 이렇게 무시해도 되는 것인가? 바른 신학을 무시한 것은 결국 성경말씀을 무시한 것이 되는데 말이다.

이찬수목사가 비성경적 침묵훈련을 하는 ‘이교도의 영성훈련장’에 가서 ‘영성’이라는 용어를 3가지 주제 중에 하나로 사용하여 설교했다는 것도 그들과 같은 생각을 하고 그러한 사상에 직.간접적으로 동의를 하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라는 의혹을 충분히 불러온다.

성경에는 ‘영성’이라는 말이 없다. 오히려 더 확실한 전인적 신앙인의 삶인 ‘경건’이 행10장에 버젓이 존재하는데 ‘경건’이란 용어가 ‘영성’이란 용어에 비해 촌스러워서 내어버리고 ‘영성’이란 용어를 선택한 것일까? 아니면 포스트모더니즘시대에 성경적 바른 신학이 말하는 성경말씀보다는 보다 세련되며 새로워 보이는 ‘영성훈련’이라는 도구로 수많은 영혼들을 휘어잡고 이끌어갈 수 있는 신종 무기라고 생각하여 그 이교도의 영성신학 관상기도 침묵영성훈련을 이용해 보려는 미혹에 빠져서일까?

영성신학의 정점은 ‘관상’이요 그 ‘관상’의 정점은 ‘침묵’이다. ‘관상기도’에는 ‘기도’가 없어진다. 그리고 ‘침묵’하는 순간에는 성경말씀이 가르치는 다양한 ‘교리’가 불필요하다. 이성적으로 분별해야 하는 ‘교리’조차도 하나님의 임재를 방해하기 때문에 ‘교리’조차 거리적 거리니 비우고 버려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교리를 무용지물로 여기는 것이다.

심지어 하나님의 임재를 방해하는 모든 감정, 잡념 같은 생각까지도 비우고 버리고 오직 신과의 일치를 위해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의 임재만 바라봄이라는 것이 침묵훈련이다. 흔히 현대판 목사들이 설교와 찬양과 간증퍼포먼스만 가지고 수많은 교인들을 리드해 가기에는 역부족과 한계의 벽을 느낄 때 그 해결을 위한 대체 수단으로서 슬며시 다가오는 또 다른 무서운 미혹일 수 있다.

“영성”이라는 용어는 종교다원주의로 이끌어가는 통로 구실을 하는 용어임을 주시해야 한다. “영성”이라는 용어는 로마 가톨릭 천주교 토마스 머튼 신부가 베트남의 선승 틱낫한과 티벳의 달라이 라마를 친구삼아 교제하면서 선승들의 명상행위를 보고 처음에는 “마음 다스리기”라는 이름을 붙였다가 보다 신학적인 냄새를 내기 위해 “영성신학”이라고 시작한 것이며 그로인해 바티칸공회의에서 결의가 되어 “영성”이란 말이 퍼져 나가기 시작했다. 그래서 소위 앞서간다는 진보 목사들이 그토록 좋아하는 로마 가톨릭 천주교 헨리 나우엔 신부, 쾌이커교도 리처드포스터, 미국 침례교회 릭 워렌목사 등이 이교도의 영성 ‘관상기도’, ‘침묵훈련’을 하면서 즐겨 사용하는 용어이다.

지금으로부터 약 십 여 년 전 쾌이커교도 리처드포스터가 한국의 레노바레운동을 통해서 주로 개신교 대형교회목회자와 개신교 엘리트 진보세력들에게 영성신학관상기도의 핵심인 침묵훈련에 관한 교리를 심어주었던 일을 기억한다. 그리고 필립 얀시도 필그림하우스 등에 드나들며 침묵훈련을 돕는데 관여했다. 그 당시 즈음에 예장합동교단 총회와 합신교단 총회에서 영성신학관상기도의 침묵훈련을 하는 자들과의 교류를 금지하며 철저히 배격한다고 결의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영성훈련의 1단계와 2단계 묵상까지는 말씀이 조금씩 들어간다. 그것도 필요한 말씀만 부분적으로 조금씩 끌어와 집중해서 사용한다. 그렇게 하는 이유는 마치 성경적인 것처럼 기독교적인 것처럼 위장하기 위해서다. 성경이 말하는 묵상조차 그들은 왜곡하고 있다. 영성훈련 선생들이 말하는 묵상은 구약성경의 히브리어가 뜻하는 묵상과는 전혀 다르다.

3단계에서는 인도 명상가들이 하듯 만트라식으로 간단한 문장의 말씀을 외마디소리로 수없이 반복 또 반복 중언부언하는데 그 때 그 말씀이 마 6:7-8절이 지적하듯이 빈말 즉, 공허한 말로 무용지물이 되는 순간이며 최면에 걸리는 기회가 되기도 하고 정신이상현상이 나타나 위기를 겪는 일도 발생한다.

그리고 4단계는 모든 것을 비우고 버리는 침묵가운데 하나님의 임재 안에서 사랑으로 합일 또는 일치가 되는 감격의 순간(소위 황홀한 순간, 어떤 자들은 이것을 입신의 경지라고도 한다)이 되기 때문에 묵상과 기도도 없어지며 말씀과 교리는 전혀 존재할 수 없게 된다. 교리나 이성이나 감정 그리고 어떤 상상까지도 하나님께서 임재하시는 일을 방해하는 것이라 해서 모두 비우고 버리어야만 하는 순간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때 임재한다는 신이 과연 하나님일까? 아니면 악한 영일까? 그것을 분별할 수 있는 기준이 없다. 그 누구도 임재 한다는 영들을 헤아려 판단해 줄 수 없다.

이렇게 침묵하는 영성훈련은 잘못하다 보면 매우 무서운 지경으로 빠질 수가 있으니 조심해야 한다고 쾌이커교도 리처드포스터가 자신의 책 500여 쪽에서 밝히고 있다. 그런데 그 무서운 위험을 감수해 가면서 영성훈련을 할 이유가 구태여 있을까?

말씀이 가는 곳에 늘 함께 역사하시는 성령하나님의 역사는 인간에게 해를 가하지 않는다. 성령의 역사는 오직 말씀 즉 기독론을 따라서만 역사하신다. 말씀의 교리가 없는 곳에서 하나가 되며 통용하는 사랑행위는 성령의 역사가 아닌 인본주의적 사랑의 행위일 수 있으며 악한 영들에게 놀아날 수가 있으니 조심해야 한다.

사도행전 2장이 말하는 초대교회 공동체는 모세 오경 십계명의 교리뿐 아니라 예수그리스도에 대한 기독론의 튼튼한 말씀의 교리를 기초로 하는 성령 충만한 역사 가운데 하나님의 사랑을 서로 나누는 냉철하고도 분명한 공동체였다.

만약 이찬수목사가 필그림하우스가 운영하는 이교도의 영성신학관상기도 침묵훈련에 동의하는 마음을 따라서 행2장의 말씀을 배경으로 이러한 교리무용론의 설교를 했다면 큰 일중에 큰일이다. 그러지 않으리라고 보고 싶지만 한국교회에 지대한 영향력을 끼치는 분의 처신과 메시지 전.후 문맥의 정황들이 심히 우려되고 걱정되어 글을 쓰는 이유는 마치 이찬수목사가 잘한 것인 양 뉴스를 타기 때문에 그 잘못된 영향력으로 흔들리는 한국교회를 깨우기 위해서이다.

이제부터라도 한국교회는 ‘경건’이란 용어 대신 ‘영성’이란 용어를 즐겨 쓰는 일부 대형교회 목사들이나 신학교수들 그리고 소위 진보적이라 하며 쓸데없이 성경 밖에 이교도의 것들을 끌어들여 새로운 것인 양 그럴싸하게 포장하여 내세우려는 목사나 교인들을 예의 주시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나아가서 대형교회의 유명한 목사 한마디 한마디가 하나님의 말씀과 동등하거나 그 이상일 수 없음을 분명히 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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