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을 열며

필자는 이전의 글 "이인규, 여전히 무지하고 용감한 평신도 이단연구가"에서 십자가와 부활에 대한 이인규 씨의 무지를 깨우쳐 주기 위하여 “구속”과 “구속적”의 차이를 가지고 친절하게 설명해 주었다. 그럼에도 이인규 씨는 "정이철 목사와 림헌원 목사에 대한 반박(5)"이란 제목의 글을 써서 “구속과 구속적”이 무엇이 다르냐고 하면서 시비를 걸었다. 물론 그의 시비는 또 한 번 자신의 신학적 무지를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추태에 불과했지만 말이다. 이인규 씨는 "정이철 목사와 림헌원 목사에 대한 반박(5)"에서 이렇게 질문했다.

"정이철 목사는 현재 자신의 주장에 대한 심각성과 위험성을 제대로 인지하지 못하는 것 같다. 게다가 “구속”과 “구속적”이 다르다는 이상한 변명으로서, 자신의 문제점을 피하려고 있다. 그렇다면 정이철 목사는 십자가는 “구속”이고 부활은 “구속적”이라는 뜻인가?"(이인규)

구속’은 명사로써 ‘구속’ 그 자체를 의미하고, ‘구속적’은 형용사로써 ‘구속 자체는 아니더라도 구속의 성격을 가지고 있는’을 의미한다. 그런데 이인규 씨는 어째서 이렇게 쉬운 단어들의 의미를 구별하지 못하는 것일까? 참으로 불가사의한 일이 아닐 수 없다(뒤에 이 불가사의한 이 일이 불가사의한 일이 아님을 밝힐 것이다).

또 다시 말하지만, 십자가만 하나님의 구속 사건이다. 그러므로 그 십자가에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만이 죽으실 수 있으며, 우리는 누구라도 예수님처럼 십자가에서 구속의 죽음을 죽을 수 없다. 그러나 부활은 하나님의 구속 사건인 십자가로 말미암아 결과된 구속적 사건이다. 그러므로 구속 사건을 주도하신 하나님은 무덤에 내려가신 예수님을 다시 살리셨고, 그 십자가를 하나님의 구속 사건으로 믿는 우리들도 마지막 날에 무덤에서 다시 살리실 것이다. 우리는 예수님처럼 십자가에서 구속의 죽음을 죽을 수 없지만, 믿음으로 예수님처럼 무덤에서 다시 사는 구속적 부활의 은총을 누릴 수 있다. 아멘!은은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롬8:11)


이인규의 신학적 무지와 실독증

필자는 이인규 씨가 "정이철 목사와 림헌원 목사에 대한 반박(4)"에서 인용한 로이드 존즈, 황승룡 박사의 “구속의 완성”이라는 표현은, 종말론적인 전망에서 나온 표현임을 “이미 그러나 아직 아니”까지 동원해서 충분히 설명했다. 그럼에도 이인규 씨는 “그렇다면 박형용 박사는 부활이 구속의 완성이며 종결이라고 말한다. 박형룡 박사도 이단인가? 마틴 로이드 존스 목사는 구원은 몸의 부활이 없이는 완성되지 않는다고 말하였다. 그분도 이단인가? 황승룡 박사는 종말이 우리의 구속을 완성시킨다고 말한다, 이분도 이단인가?”라고 하면서 자신의 네번째 반박문이라는 글에서 했던 말을 다섯번째 반박문이라는 글에서 또 다시 반복했다. 이인규 씨 자신과 김성로 목사의 그릇된 신앙이론을 옹호하는 근거와 논리가 이 정도로 궁색하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그들이 말하는 “부활이 구속의 완성이며 종결”이라는 표현은 종말론적인 전망에서 나온 “완성과 종결”의 의미이지, 김성로 목사가 설명하듯이 구속 능력이 모자라는 십자가를 부활이 완성시킨다는 의미가 아님이 분명하다(김성로 목사의 이런 설명은, 신학을 인간 이성의 범주 내로 제한시키려고 했던, 볼프하르트 판넨베르크의 인본적 신학의 찌꺼기에 불과하다).

만약 이 사실이 의심된다면, 그들에게 다음과 같이 질문해 보라. “당신들이 말하는 ‘부활이 구속의 완성’이라는 표현이 김성로가 말하는 부활복음, 즉 모자라는 십자가를 지나 부활을 통해 하늘 성소에서 영원한 제사를 드림으로써 완성되는 구속을 말하는 것입니까?” 아마도 그들은 너무나도 어이가 없어서 이 질문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의 그리스도 되심은 그의 부활로부터 시작하지 않는다. 예수님은 부활 이전에도 하나님의 아들이셨으며 그리스도셨다. 다시 말하면, 부활 이전에도 그의 십자가의 죽음은 구속의 완성이었다는 말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다 이루었다(It is finished)”고 말씀하셨고, 그때 하나님은 지성소의 휘장을 위에서 아래로 찢으셨다.

이로써 십자가 사건은 부활 사건 이전에 이미 완전한 하나님의 구속 사건이었음이 드러났다. 다르게 말하면, 십자가는 하나님의 실패의 사건이 아니라 승리의 사건이라는 말이다. 그러나 김성로 목사나 이인규 씨가 보기에는, 십자가는 모자라는, 즉 실패의 사건처럼 보였을 것이다. 이들에게 십자가는 하나님의 완전한 구속의 의미보다는 오히려 실패처럼 보이는 죽음의 의미로만 보였을 것이다. 그래서 이들은 십자가의 죽음에 머물러 있으면 안 되고, 죽음의 십자가를 지나 부활로 나아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십자가에는, 믿음 없는 자에게 항상 그렇듯이, 하나님의 승리는 숨겨져 있다. 하나님은 예수를 다시 살리심으로, 십자가가 단순히 한 인간의 죽음 사건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의 구속 사건이요, 죄와 죽음에서 승리한 사건임을 밝히 드러내셨음에도 불구하고, 믿음이 없는 이인규 씨나 김성로 목사에게는 여전히 십자가에 숨겨져 있는 하나님의 승리는 보이지 않는다.

이런 사실들로 비추어 볼 때, 이인규 씨는 ‘믿음 없음’과 ‘신학적 무지’뿐 아니라, 실독증(dyslexia/글을 읽을 수 없는 난독증과는 조금 다르게, 다른 지적인 기능은 정상인데도 특별히 글을 읽거나 판독하는 것을 잘 못하는 장애)을 의심해야 할 정도로, 글을 읽고 이해하는 능력이 대단히 떨어진다고 판단된다. 왜냐하면 중학생 수준의 이해력 정도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필자의 친절한 “구속과 구속적, 십자가와 부활”의 설명들을 도무지 이해하지 못하고 있으니 말이다.

또 이인규 씨는 자신의 다섯번째 반박문에서 결정적인 약점이라도 잡은 듯 회심의 미소를 띠며, 붉은색의 글에다 밑줄까지 쳐가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정이철 목사의 주장 : 성경에 무식하여 부활을 모르면 구원받지 못할까? 아니다 십자가를 믿으면 구원받는다. 설령 의심이 많아 부활을 믿지 못한다 해도 십자가의 죄사함을 확실히 믿으면 구원받는다."

(사실 이 내용은 정이철 목사님이 쓴 글이 아니고 '오직 십자가'라는 닉을 사용하시는 분이 <독자마당>에 올리신 글이다. 이 글을 쓰신 분은 자신의 본 뜻을 일부러 곡해하여 트집을 잡는 사람들이 있어 이미 다음과 같이 수정하였다. "성경에 무식하여 부활을 모르면 구원받지 못할까? 아니다 십자가를 믿으면 구원받는다. 설령 그 사람이 혹 부활에는 관심을 두지 않는다고 해도 해도 십자가의 죄 사함을 확실히 믿으면 구원받을 뿐아니라 영생과 부활을 십자가의 신앙으로 인해 누리게 되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라고 수정하였다. 그러나 수년간 빤한 이단들을 상대하면서 성품이 단련된 이인규 씨는 한번 잡은 트집거리를 끝까지 써먹는 교활함을 보이고 있다. 그렇다 할지라도 크게 문제될 내용은 없다)  

그리고 이인규 씨는 아래와 같이 자신만만하게 정이철 목사님을 비판하였다.

"김성로 목사는 십자가와 부활이 동전의 양면이라고 하였다. 과연 복음을 몰라서 이런 이야기를 한 것인가? 반면에 정이철 목사는 십자가만 믿으면 부활을 믿지 않아도 구원을 받는다고 말하였다."(이인규)

김성로 목사와 이인규 씨는 학자들이 자주 쓰는 “십자가와 부활이 동전의 양면”이라는 표현을, 십자가와 부활이 동일한 무게의 하나님의 구속 사건으로 이해하고 있을 정도로 복음을 잘 모르고 있는 것 같다. 이것도 실독증으로 인한 몰이해이다. 아니면 어떻게 해서라도 김성로 목사의 심각한 이단성에 대한 논쟁을 희석시키려는 수명이 다한 이단연구가의 추한 발악으로 보여지기도 한다. 사실 “십자가와 부활이 동전의 양면”이라는 표현은 이인규 씨나 김성로 목사가 생각하는 그런 의미가 아니다. 왜냐하면 결코 십자가와 부활은 동일한 무게의 하나님의 구속 사건이 아니기 때문이다.

“십자가와 부활이 동전의 양면”이라는 표현은, 동전에 앞면이 있으면 반드시 뒷면이 있듯이 십자가가 있으면 반드시 부활이 있다는 의미이다. 다시 말하면 십자가는 하나님의 아들이 대속 제물로 죽으신 하나님의 구속 사건이기 때문에 반드시 하나님이 그의 아들을 다시 살리시는 부활이 결과 된다는 말이다.

또 이인규 씨는 정이철 목사님(사실은 '오직 십자가'이 쓴 글)의 “설령 의심이 많아 부활을 믿지 못한다 해도 십자가의 죄 사함을 확실히 믿으면 구원 받는다”를 읽고, “정이철 목사는 십자가만 믿으면 부활을 믿지 않아도 구원을 받는다고 말하였다”로 이해하고 있다. 여기서 다시 한 번 이인규 씨에게 있는 중증의 실독증을 확인할 수 있다.

이인규 씨가 인용한 예문에서 정이철 목사님은 “설령~ 부활을 믿지 못한다 해도”라는 가정법을 사용해서 십자가의 구속 능력의 완전함을 강조하고 있다. 가정법이 무엇인가? 그것은 불가능한 사실을 마치 가능한 것처럼 표현해서 어떤 사실을 더욱 강조하는 표현 기법이다.

왜 여기서 정이철 목사님이 가정법을 사용하고 있는가? 그것은 ‘부활을 믿지 못한다’는 것이 정이철 목사님 자신에게는 도저히 있을 수 없는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정이철 목사님의 “설령~ 부활을 믿지 못한다 해도”라는 가정법의 표현은, 부활을 믿지 못하기 때문에 나온 말이 아니라, 오히려 확고한 부활신앙에서 나온 말이다.

그럼에도 이인규 씨는 “정이철 목사는 십자가만 믿으면 부활을 믿지 않아도 구원을 받는다고 말하였다”고 말하면서 “정이철 목사는 현재 자신의 주장에 대한 심각성과 위험성을 제대로 인지하지 못하는 것 같다”며 혼자 잘난 척하였다. 이 어찌 실독증 환자의 중증 증상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는 신학적 무지에다 중증 실독증까지 앓고 있음이 틀림없다. 이런 이인규 씨에게 필자는 다음 성경 한 구절을 제시하고 싶다. 제대로 이해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서 티를 빼리라"(마7:5)

이인규 씨, 김성로 목사의 부활복음과 함께 침몰하다

이인규 씨는 자신의 여선번째 반박문 "정이철 목사와 림헌원 목사에 대한 반박(6)"에서, 여러 종류의 주석들(IVP, WBC, 메튜 헨리, 호크마, 그랜드)과 최세창, 로이드 존즈, 권성수 목사님까지 들먹이며, 김성로 목사의 부활복음의 근거인 히9장, 12장 등의 주석들을 지루하게 나열하고 있다. 그런데 그가 나열한 모든 주석들은 하나같이 예수님이 대속 제물이 되신 십자가를 하늘 성소에서 단번에 드려진 영원한 제사로 설명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그가 나열한 주석들은 김성로가 말하는 부활복음과는 거리가 먼 설명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인규 씨가 이런 주석의 내용들을 자신 있게 나열하고 있는 것은, 아마도 그 내용들이 김성로의 부활복음을 설명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이인규 씨가 소개한 주석들의 내용들이 궁금한 독자들은 이인규 씨가 운영하는 '무엇이든 물어보세요'라는 카페의 "정이철 목사와 림헌원 목사에 대한 반박(6)"에서 읽어보기 바란다. 여기에서도 어김없이 그의 중증 실독증이 여실히 드러난다).

아무튼 이인규 씨는 여러 주석들을 나열한 뒤에 다음과 같은 내용으로 자신의 부활복음에 대한 이해를 결론적으로 피력하였다. 

"필자는 호크마 주석, 그리고 WBC 주석과 권성수교수가 말하는 해석에 대해서 지지를 한다. 십자가에서 드려진 예수님의 피는 곧 하늘성소에서 드려진 피이며 이것은 분리된 별개의 사건이 아니며, 히브리서 기자는 율법의 제사와 복음의 제사를 땅의 성소와 하늘의 성소로 비교하고 있으며, 곧 모형과 실체로 비교하고 있는 것이다.

히브리서 9장에 대하며 많은 견해가 있지만, 하늘의 성소에서 드려진 예수님의 피는 십자가 죽음으로 완료된 것이 아니라, 부활하여 승천하시어 하늘성소에 단번에 들어가심으로서 종말적인 구속이 완전하게 성취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이인규)

위의 앞 단락에서 이인규 씨는 “십자가에서 드려진 예수님의 피는 곧 하늘성소에서 드려진 피이며 이것은 분리된 별개의 사건이 아니며....”라고 말한다. 이것으로 보아 그는 자신이 나열한 주석들의 내용들을 제대로 이해하는 듯하다.

그러나 놀랍게도 이인규 씨는 뒤 단락에서는 전혀 다른 소리를 하고 있다. 앞 단락에서는 십자가와 하늘 성소의 제사가 별개의 것이 아니라고 말해 놓고, 뒤 단락에서는 “하늘의 성소에서 드려진 예수님의 피는 십자가 죽음으로 완료된 것이 아니라, 부활하여 승천하시어 하늘성소에 단번에 들어가심으로서 종말적인 구속이 완전하게 성취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라고 말하므로, 김성로와 마찬가지로, 십자가와 하늘 성소에서의 제사를 별개의 것으로 말하고 있다. 앞 문장에서 김성로 목사의 이단성을 비판하고 바로 다음 문장에서는 김성로 목사의 이단적인 부활사상을 두둔하였다. 계보없는 신학을 독학하여 이단연구가로 이름을 떨친 이인규 씨는 김성로 목사의 부활복음 이단성을 (알아보지 못하여) 옹호하다 그만 사탄의 올무에 걸리고 말았다.    

이렇게 앞뒤가 맞지 않는 그의 모순된 표현은, 그가 앓고 있는 중증의 실독증으로 인한 것으로밖에는 설명할 길이 없다(여기서도 이인규 씨는 “~성취되었다”라고 단정적으로 말하지 않고, “~성취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라고 모호하게 말하므로, 이전에도 그랬듯이, 불리하면 언제든지 빠져나갈 구멍을 만들어 놓는 그의 모습에서, 서글프기 짝이 없는 이인규 씨의 진면모를 만난다).

아무튼 이인규 씨는 지금까지 김성로 목사가 말하는 부활복음의 심각한 문제를, 사소한 표현상의 문제로 계속 축소, 은폐해 왔다. 그러나 계속되는 바른믿음의 집요한 추궁으로 부활복음의 치부가 적나라하게 드러나고 있음에 당황한 듯, 이제는 정면 돌파로 이 문제를 해결하려고 이인규 씨는 결심한 듯하다. 그래서 그는 그동안 사소한 표현상의 문제로 치부해 온 김성로 목사의 부활복음을 이제는 노골적으로 지지하기에 이르렀다. 이인규 씨는 이제 이단연구가로서 수명이 다해버린것 같다.  

그래도 과거 김성로의 부활복음을 ‘사소한 표현상의 문제’라고 말했을 때에는 미미한 희망이라도 그에게 있었는데, 이제는 아무런 소망 없는 그의 검은 얼굴이 김성로 목사가 파놓은 부활복음의 늪에서 미소 짓고 있다. 그의 깨달음을 소망했던 필자로서는 소망 없는 이인규 씨의 검은 얼굴이 낙심천만일 수밖에 없다.

어쨌든 이인규 씨는, 김성로 목사의 부활복음을 노골적으로 지지한 이상, 지금까지 바른믿음을 공격하기 위해 사용했던 성경 구절들과 주석들, 그리고 신학교 교수들의 글들을 가지고, 이제는 김성로 목사의 부활복음, 즉 이인규 씨가 말한 대로 “하늘의 성소에서 드려진 예수님의 피는 십자가 죽음으로 완료된 것이 아니라, 부활하여 승천하시어 하늘성소에 단번에 들어가심으로서 종말적인 구속이 완전하게 성취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로 대변되는 김성로 목사의 부활복음을 설명해야 할 것이다.

만약에 이인규 씨가 필자의 제안대로 지금까지 자신이 인용한 글들로 김성로 목사의 부활복음을 제대로 설명하지 못한다면, 그때라도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회개하고 십자가의 품으로 돌아오기를 바란다. 반대로 이인규 씨가 지금까지 자신이 인용한 글들로 김성로 목사의 부활복음을 제대로 설명을 한다면, 필자는 재를 무릎 쓰고 회개하며, 김성로 목사의 부활복음의 품으로 들어갈 것을 약속한다.

글을 닫으며

얼마 전 일간 신문에서 2015년 6월의 출간된 김성로 목사의 “하나님의 승부수, 부활”이라는 제목의 책 광고를 보았다. 필자는 이 광고를 보는 순간, 김성로 목사가 말하는 부활은 책 제목과는 장반대로 전능하신 하나님께 도전하는 사탄의 승부수임을 단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전능하신 여호와 우리 하나님에게는,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결코 적수가 될 수 없다. 그러므로 전능하신 하나님은 어느 누구에게도 결코 승부수를 사용하지 않으신다. 왜냐하면 그분에게는 결코 승부수를 사용해야 할 만큼 강한 적수가 없으시기 때문이다.

"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롬8:31)

일반적으로 승부수는 약자가 강자와의 경쟁에서 지고 있을 때, 짙어진 패배를 뒤집기 위해 마지막으로 사용하는 최후의 수단이다. 교회사를 통해 살펴보면, 영적 전투에서 언제나 수세에 몰릴 수밖에 없는 사탄이, 자신의 수세를 역전시키려고 획책할 때, 하나님께 던진 수가 바로 김성로 목사가 말하는 그런 “승부수”였다.

이스라엘이 애굽의 노예로 있을 때, 사탄은 바로를 통해 이스라엘의 아들들을 모조리 죽이도록 획책함으로써, 다윗의 후손으로 십자가에 달리실 예수의 존재를 없애려는 승부수를 하나님께 던졌다. 또 십자가에 달리실 예수님이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셨을 때, 사탄은 헤롯으로 하여금 두 살 아래의 남자 아이들을 모조리 죽이도록 명령하므로, 십자가에 달리실 예수의 존재를 없애려는 승부수를 하나님께 던졌다.

사탄은 오늘, “하나님의 승부수, 부활”이라는 김성로 목사의 책으로, 결코 승부수를 던지지 않으시는 전능자 하나님께 승부수를 던지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능하신 하나님께서는, 예수의 부활로 교묘하게 위장한, 그리고 이인규 씨도 합세한 사탄의 승부수인 김성로 목사의 부활복음을, 바른믿음을 통해 철저하게 파괴시키실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의지하고 용감히 행하리니 그는 우리의 대적들을 밟으실 자이심이로다"(시10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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