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춘천한마음교회 김성로 목사

(다음은 Titus Kim이라는 분이 독자마당에 올리신 글이다). 춘천한마음 교회 김성로 목사나 그의 부활 복음을 간증하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부활만이 가장 확실한 증거, 믿을 만한 증거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부활보다 더 중요하고 확실한 증거는 다름 아닌 성경의 증거며 부활보다 오늘날 교회가 더 강조해야 할 교리는 다름 아닌 동정녀 탄생 교리이다.

1. 성경의 증거

김성로 목사는 그리스도의 부활이 가장 확실한 증거, 믿을만한 증거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예수님의 그리스도 되심을 증거하는 가장 확실한 증거는 다름 아닌 성경의 증거다. 성경은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일관되게 그리스도를 증거하기 때문이다.

우선 율법을 생각해보자. 율법은 그리스도의 필요성을 깨닫게 해주는 것이었다. 율법은 반드시 지켜야 하는 법이었다. 지킬 때만 구원이 가능한 법이었다. 그러나 율법을 지키려고 할수록 율법을 지킬 수 없음으로 자신에게는 구원의 소망이 없음을 깨닫고 절망에 빠지게 된다. 하나님께서는 율법을 지키지 못한 자들을 위하여 제사법을 주셨다. 동물의 희생을 통하여 인간의 죄를 대속하게 하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동물 제사로는 인간의 죄 문제를 완전히 해결할 수가 없었다. 제사를 드리고 나오자마자 또 다시 죄를 짓게 되니 어떻게 인간이 하나님께 나갈 수 있겠는가? 결국 율법이나 제사법이나, 죄로부터 해방시켜 줄 하나님의 자비에만 호소하게 하고 결국 하나님께서 보내실 메시아, 그리스도에게 소망을 두게 하기 위하여 주신 한시적인 제도였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이런 구약의 제사 제도를 가리켜 모형과 그림자, 먹고 마시는 것과 여러 가지 씻는 것과 함께 육체의 예법만 되어 개혁할 때까지 맡겨 둔 것으로 표현했다.

율법은 이렇게 그리스도의 필요성을 깨닫게 해줄 뿐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하나님께 나갈 수 있음, 구원이 가능함을 설명해준다. 율법의 제사와 정결례를 생각해보자. 율법의 제사법들은 굉장히 복잡하다. 번제, 화목제, 소제, 속죄제, 속건제로 나누이며, 각 제사도 드리는 사람의 지위나 신분, 제물의 종류에 따라서 반드시 따라야 할 절차가 있었다. 제물을 바칠 때도 주께서 정하신 방법을 따라야 했다.

만일 주께서 정하신 방법을 따르지 않고 임의로 바치면 나답과 아비후처럼 죽음에 이르게 됐다. 제사법뿐만이 아니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먹어야 할 음식과 먹지 못하는 음식, 의복이나 피부나 집 안에 곰팡이 같은 것이 발생하면 부정한 것인지 정한 것인지 제사장을 통해서 구분하게 했으며 부정한 것이면 집이라도 다 헐어서 부정한 것들을 다 버리고 새로 지어야 했다. 유출병과 출산도 부정한 것으로 간주돼 반드시 정결케 되는 규례를 행해야 했다.

이뿐이 아니다. 성막을 지을 때는 모든 기구가 주께서 정해주신 치수대로 정확하게 만들어져야 했다. 이렇게 복잡한 규례가 주어진 이유가 어디에 있겠는가? 오직 주께서 정하신 방법을 통해서만 주님 자신에게 접근하도록 함으로서 궁극적으로 하나님께서 정하신 방법인 십자가의 대속죽음을 통해서만 주님 자신에게 올 수 있음을 조명하기 위함이었다. 동물의 희생으로 인간의 죄가 용서받을 수 있음을 보여주심으로 궁극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대속 죽음을 통해서 우리의 죄가 용서 받을 수 있음을 조명해주신 것이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 율법에서 벗어나면 하나님께서는 선지자들을 보내셔서 책망하고 교정하려고 하셨다. 선지자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메시아를 이 땅에 보내기 위해서 언약으로 선택되었음을 상기시키면서 어떻게든 율법을 지키는 삶을 살도록 독려했다. 그래서 그들의 메시지는 언제나 메시아의 도래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다.

이렇게 구약 성경이 그리스도의 대속죽음을 통한 우리의 구원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면 신약 성경은 그리스도께서 구약 성경의 율법과 선지자들의 예언을 성취하시고 완성하셨음을 증거하고 있다. 가장 대표적으로 마태복음을 생각해보면, 마태는 1장부터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하는 족보를 통하여 그리스도가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언약 성취를 위하여 오신 분임을 선포한다.

동정녀 탄생과 함께 베들레헴 탄생, 헤롯의 유아살해와 애굽 도피, 나사렛에서 성장하신 것까지 모두 선지자의 예언의 성취임을 증언한다. 세례 요한의 사역도 그리스도의 사역을 예비하는 선지자의 예언의 성취였으며, 요한에게 세례 받으실 때는 성령이 비둘기같이 내려오시며 하늘에서 아버지께서 "이는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고 말씀하심으로서 성부께서 예수님의 신분을 자신의 아들로 공포해주셨다.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실 때는 성경 말씀으로 물리치시는 장면, 갈릴리의 가버나움에서 머무심, 모든 병자들을 고치시는 능력 등 이 모든 것이 예수님의 그리스도 되심을 입증하고 있다.

산상수훈에서는 “옛 사람의 말한바 ...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라고 말씀하심으로 율법의 원래 의미를 밝혀주심으로서 예수님 본인이 율법의 수여자가 되심을 증거하고 있으며, 감옥에 갇힌 세례 요한이 “오실 그 이가 당신입니까 아니면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까?”라고 질문하자 이사야 말씀을 인용하여 대답하심으로서 예수님 본인이 바로 구약에 예언된 메시아, 그리스도이심을 명명백백하게 밝혀주셨다.

예루살렘 입성도 스가랴 선지자의 예언의 성취로, 유월절 만찬을 통해서 예수님 자신이 유월절의 어린양이 되심을 설명해주셨다. 그의 고난과 십자가에 달려 운명하시기까지 모든 것이 선지자의 예언의 성취였다. 산헤드린 공회와 빌라도, 헤롯의 심문을 통해서는 예수님이 아무 죄가 없으시다는 사실을 분명히 함으로서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죽으셨음을 확증했다. 십자가 처형 당시 옆에서 모든 과정을 감독했던 백부장은 “이는 실로 하나님의 아들, 의인이었다.”고 고백하지 않았던가? 물론 그의 부활도 그의 그리스도 되심을 보여주는 증거임에는 틀림없다. 그러나 부활까지도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이 아닌가?

예수님이 나의 주, 나의 하나님이 되시는 가장 확실한 증거는 바로 성경의 증거 때문이다. 성경이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증거하고 있기 때문이다. 부활만이 가장 확실한 증거, 믿을만한 증거라는 한마음교회의 주장이 억지인 이유는 성경 전체가 예수님의 그리스도 되심을 증거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김성로 목사는 성경을 통하여 자신의 부활 복음을 증명하기 보다는 한마음교회 교인들의 간증이나 유명한 몇몇 목사들의 증언, 그들의 권위에 더 의지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그들이 인용하는 한천설 교수나 이승구 교수의 글도 부활의 중요성을 설명하는 글이지, 그들이 주장하는 하늘 성소에서의 제사를 지지하는 글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활을 강조하는 몇몇 신학자들의 글을 홈페이지에 게재함으로 자신들의 부활 복음을 지지하는 듯 호도하고 있다. 그들에게 직접 물어봐라. 한천설 교수나 이승구 교수가 과연 부활의 중요성을 하늘 성소의 제사 때문이라고 대답할까? 결코 그렇지 않을 것이다.

2. 부활보다 더 강조해야 할 동정녀 탄생, 그리스도의 인성과 신성

우리가 부활보다 더 강조해야 될 것이 있다면 그것은 다름 아닌 동정녀 탄생이다. 하나님의 아들이 처녀의 몸을 통하여 인간의 몸을 입고 태어나신 사실이 강조될 때 그리스도의 대속죽음과 부활 역시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동정녀 탄생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죄 없는 사람의 몸을 입지 않으셨다면 그의 죽음과 부활도 아무 의미가 없게 된다.

그는 인간의 죄에 대한 형벌을 대신 받으시기 위하여 반드시 사람이 되셔야 했으며 인간의 죄에 대한 형벌을 다 받고 부활로 승리하시기 위하여 하나님이셔야 했던 것이다. 신학적 논리로 따진다면 우리의 죄 문제 해결이라는 차원에서는 부활보다는 동정녀 탄생이 더 중요하다. 하나님께서 동정녀의 몸을 통해서 완전한 하나님이면서 완전한 사람이 되셨기에 모든 대속사역을 완성하시고 부활하실 수 있었기 때문이다.

김성로 목사는 성경 전체가 예수님의 그리스도 되심을 증거하고 있다는 사실과 함께 그리스도의 대속죽음과 부활을 가능케 하는 동정녀 탄생의 중요성을 간과함으로서 그만의 왜곡된 부활관을 갖게 된 것이다. 그가 만일 성경 전체를 볼 수 있는 눈을 갖고 있었다면 천주교처럼 그리스도의 대속 죽음의 효력을 부인하는 하늘 성소에서의 제사라는 이단적 주장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가 만일 동정녀 탄생의 의미를 알았다면 그가 중요하다고 외치는 부활을 가능케 한 동정녀 탄생에 더 무게를 두고 바른 복음을 전했을 것이다. 더 안타까운 것은 많은 교회와 목회자들이 잘못된 부활 복음에 열광하는 한국교회의 현실이다. 이는 실로 한국교회의 신학부재의 심각성을 보여주는 것이 아닐 수 없다.

매스터스신학교의 로버트 토머스 박사는 이렇게 경고했다. 한국교회의 모든 목회자에게 경종을 울리는 말이다.

"사람들은 대체로 갑자기 이단적으로 변하지 않는다. 그런 일은 점차적으로 일어난다. 또 사람들은 대개의 경우 의도적으로 이단이 되지 않는다. 진리의 말씀을 다루는 데 있어서의 거짓됨과 나태함으로 인해 이단에 빠지게 된다. 이단으로 빠지는 길을 출발하는 데 필요한 것은 무언가 새롭고 색다른 것, 겉만 번드르르한 새로운 생각에 대한 욕구와 더불어 하나님의 진리를 다루는 데 있어서의 약간의 게으름이나 부주의함이나 정확성의 부족 정도가 전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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