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창모 목사의 <방언, 그 불편한 진실>(8회)

▲ 이창모 목사

거짓방언자들은 고린도전서 14장 2절을 근거로 자신들이 하는 방언기도는 하나님께 비밀을 말하는 기도라고 주장한다. 만약 바울도 이들처럼 방언기도를 ‘영으로 하나님께 비밀을 말하는 것’이라고 가르치기 위하여 고린도전서 14장 2절을 썼다면, 방언하는 자야말로 놀라운 경지의 영적 고수가 아닐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피조물인 인간이 창조주이신 하나님께 비밀을 말할 수 있다니 말이다.

그렇다면 거짓방언자들의 주장대로 고린도교회는 방언기도를 통해서 전능하신 하나님께 비밀을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영적으로 고수였을까?
 

고린도교회는 방언으로 하나님께 비밀을 말할 수 있을 만큼 영적인 고수인가?

한낱 피조물에 불과한 인간이, 그것도 인간의 언어가 아닌 하늘의 언어로, 그것도 평범한 이야기가 아니라 비밀을 창조주 하나님께 말할 수 있다는 것은 감히 상상하기조차 숨 막히는 최고의 영적 경지가 아닐 수 없다. 거짓방언자들의 주장대로 방언기도가 ‘하나님께 영으로 비밀을 말하는 것’이 사실이라면, 방언기도야말로 영적으로 최고의 경지에 오르게 하는 놀라운 은사임이 틀림없다.1)

구약 성경의 인물들 가운데 누가 감히 하나님께 비밀을 말한 자가 있었는가? 아브라함, 모세, 사무엘, 엘리야, 이사야, 에스겔, 다니엘 등 당대 최고의 영적 고수들도 하나님께 열심히 비밀을 들었으면 들었지, 감히 말하지는 못했다. 이는 신약 성경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베드로, 바울, 그리고 예수님마저도 사람들이 알아들을 수 없는 이상한 하늘 언어로 하나님께 비밀을 말한 적은 없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 비밀을 말했던 고린도 교회의 방언 은사자들이야말로 신구약 성경 전체를 망라해서 최고 경지의 영적 고수였음이 틀림없다. 그런데 정말로 당시 고린도 교회의 방언 은사자들이 방언으로 하나님께 비밀을 말할 수 있을 만큼 영적인 고수였을까? 정말 이들에게는 하나님께 비밀을 말하는 것이 가능했을까?

그러나 고린도전서에 나타난 이들의 영적 상태와 바울이 평가한 이들의 영적 수준을 살펴보면, 이들이 방언으로 하나님께 비밀을 말했다는 말은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일이 아닐 수 없다.
 

고린도 교회의 영적 상태

당시 고린도 교회가 당면한 영적인 문제는 매우 다양했으며, 또 어떤 것들은 매우 심각하기까지 했다. 성령의 은사 문제(고전12-14장)를 제외하고 고린도전서 1장에서 15장까지에 나타난 고린도 교회의 문제들을 정리하면 대략 다음과 같다.

1. 분쟁과 파당(고전1:10-12).

2. 지적 우월감(고전1:17-18,20-25; 2:1-5,10-16; 3:18-23).

3. 교만과 허세(고전4:6-21).

4. 성적 부도덕(고전5:1).

5. 세상 법정에 송사(고전6:1-8).

6. 도덕적 타락(고전6:9-20).

7. 이방인의 제사에 참여(고전10:18-21).

8. 바울의 사도권을 의심하며 바울에게 도전함(고전9장).

9. 세례와 성만찬에 대한 비정상적인 열광주의(고전10장).

10. 성찬식에서의 추태(고전11:17-22).

11. 잘못된 부활 신앙(고전15장).

위와 같은 고린도교회의 형편없는 영적 상태로 미루어 볼 때, 이들이 방언으로 하나님께 비밀을 말한다는 것은 절대 불가능한 일이다. 다만 ‘방언으로 하나님께 비밀을 말한다’는 것이 이들의 거짓말이라면 고린도 교회의 난감한 영적 수준에 비추어 볼 때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따라서 지금 고린도교회는 ‘거짓말 중’이다.

오늘날 거짓방언자들은 방언의 유익에 대해 선전하는 데 열을 올린다. 예를 들면, 방언은 영적인 열정을 회복시켜주며, 하나님의 실제를 경험하게 해주며, 기쁨을 회복시켜 주고, 교만한 맘을 부수어버리고, 사람들을 사랑으로 대하게 하며, 열정적인 전도자로 만들어주며, 열정적인 크리스천의 삶을 살 수 있게 해준다고 말한다.2) 이것이 사실이라면 방언으로 하나님께 비밀을 말하는 고린도 교회는 왜 그 모양 그 꼴이었을까? 지금 거짓방언자들도 고린도교회처럼 ‘거짓말 중’이다.
 

고린도 교회의 영적 수준

고린도전서에서 바울이 다루고 있는 고린도교회의 문제들은 하나같이 다 심각한 것들뿐이다. 물론 거짓 방언의 문제는 더욱 그렇다. 이를 고려하면, 고린도교회는 모든 면에서 당시의 다른 교회들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최악의 영적 상태였음이 분명하다. 바울은 이런 영적 상태의 고린도 교회를, 육신에 속한 자로 규정하면서 그들의 신앙 수준이 어린아이 같음을 안타까워하고 있다.

형제들아 내가 신령한 자들을 대함과 같이 너희에게 말할 수 없어서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 아이들을 대함과 같이 하노라 내가 너희를 젖으로 먹이고 밥으로 아니하였노니 이는 너희가 감당하지 못하였음이거니와 지금도 못하리라 너희가 아직도 육신에 속한 자로다 너희 가운데 시기와 분쟁이 있으니 어찌 육신에 속하여 사람을 따라 행함이 아니리요(고전3:1-3).

영적으로 어린아이 같고, 육에 속한 고린도교회가 하나님께 방언으로 비밀을 말할 수 있을 만큼 높은 영적 수준이었다고는 상상하기 어렵다. 그럼에도 거짓방언자들의 주장대로 고린도 교회가 방언으로 하나님께 비밀을 말하는 것(고전14:2)이 사실이라면, 바울이 고린도교회의 영적 상태를 어린아이 같이 유치하며 육신에 속한 자들이라고 평가한 것은 바울의 실수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고린도전서 14장 2절을 근거로 고린도 교회의 영적 수준을 판단한다면, 고린도 교회의 영적 수준은 바울에게 책망 받아야 할 만큼 저급한 수준이 아니라, 오히려 칭찬 받아야 할 만큼 대단한 수준이라고 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바울은 왜 이들에게 어린아이 같이 유치하며, 육신에 속한 자들이라고 책망했을까? 혹시 바울이 잘못 판단한 것은 아닐까?

그러나 고린도전서 전체에서 포착되는 고린도 교회가 직면한 여러 가지 심각한 영적 문제들을 고려한다면, 고린도 교회를 향한 바울의 책망이 그의 판단 착오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따라서 고린도전서 14장 2절은 바울이 내린 방언의 정의가 아니라 오히려 어린아이 같은 고린도 교회가 지어낸 거짓말로 보는 것이 훨씬 더 타당할 것이다.

고린도 교회의 신자들은 육신에 속한 자들로서 자신을 드러내고 자랑하기 위해서는 무슨 짓이든 할 수 있을 만큼 영적으로 충분히 유치했다. 따라서 이들은 실제로 하나님께 비밀을 말할 수는 없었지만, ‘나는 사람들이 알아들을 수 없는 방언으로 하나님께 비밀을 말한다’는 거짓말은 얼마든지 할 수 있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들은 하나님의 지혜에는 어린아이 같았지만, 악한 일에는 장성한 사람 같았기 때문이다(고전14:20 참고).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들을 받지 아니하나니 그것들이 그에게는 어리석게 보임이요 또 그는 그것들을 알 수도 없나니 그러한 일은 영적으로 분별되기 때문이라(고전2:14).

“육에 속한 사람”으로 번역한 헬라어 ‘프쉬키코스’(yuciko.j)는 동물적이며 자연적인 생명을 소유한 자연인이라는 의미로, 성령으로 거듭나지 않은 자를 통칭하는 말이다.3) 다시 말하면 “육에 속한 사람”은 순전히 인간적인 생명력으로 살아가는 사람이지, 성령의 움직임에 응답하며 살아가는 사람이 아니다.4)

바울은 고린도전서 2장 14절에서 “육에 속한 사람”을 성령과 상관없는 자로 규정하고, 뒤이어 3장 1-3절에서 고린도교회를 “육신에 속한 자”(sa,rkinoj, 살키노스. 이 세상에 속해 있으므로 성령의 지배 아래 있지 않은 자)로 말함으로, 이들이 구원받지 못한 “육에 속한 사람”은 아니라 할지라도 “육에 속한 사람”처럼 성령의 일을 받지도 않고, 그것을 깨닫거나 분별하지도 못하는 “육신에 속한 자”라고 평가하고 있다. 바울의 평가대로 고린도 교회의 영적 수준이 이 정도라면, 이들은 방언으로 하나님께 비밀을 말하기는커녕, 성령이 예언의 은사를 통해 주시는 계시(비밀)조차도 듣기 어려운 상태라고 보아야 옳다.

바울은 이런 심각한 고린도 교회의 상태를 염려하며, 고린도전서 14장 20-25절에서 이사야 당시의 이스라엘이 선자지의 예언을 듣지 않다가 심판당한 것처럼, 예언(하나님의 계시) 대신 거짓 방언에 집착하고 있는 고린도 교회도 하나님의 심판 앞에 있음을 경고하고 있다. 이것이 바울이 이들에게 “특별히 예언하려고 하라”(고전14:1), “특별히 예언하기를 원하노라”(고전14:5), “다 예언을 하면”(고전14:24), “예언하기를 사모하며”(고전14:39)라고 반복해서 예언을 강조하는 근본적인 이유다.

절대 그럴 리는 없지만, 설령 방언기도가 하나님께 “영으로” 비밀을 말하는 은사라고 할지라도, 저급한 영적 수준의 고린도교회가, 하늘의 언어로 하나님께 비밀을 말했다는 것은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허황된 말이다. 그러나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고린도교회는 육신에 속한 자들, 어린아이 같은 자들이므로 자신을 자랑하기 위해 거짓말은, 얼마든지 할 수 있는 자들이라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고린도전서 14장 2절의 ‘방언으로 하나님께 비밀을 말한다.’는 말은 바울이 내린 방언의 정의가 아니라 육신에 속한 자들이 자신의 거짓 방언을 숨기기 위해 만들어낸 어린아이 같은 유치한 거짓말임에 틀림이 없다.5)
 

--- 각주 ---

1) 거짓방언자들은 방언을 한다고 해서 영적으로 고수가 되는 것은 아니며, 단지 방언은 신앙이 성숙해지는데 필요한 도구일 뿐이라고 말한다. 김동수, 방언은 고귀한 하늘의 언어(서울: 이레 서원, 2008), pp.41-42). 그러나 그 말이 그 말이 아닌가? 방언을 하지 못해 영적으로 성숙해 지는 데 아무런 도움을 받지 못하는 자들에 비해, 방언으로 자신의 영적 성장에 기여하는 자 들이 훨씬 더 영적으로 고수인 것은 당연하지 않는가? 더구나 하나님께 비밀을 말할 수 있는 하늘 언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자들을 두고 어찌 영적인 고수가 아니라고 말할 수 있겠는 가? 김우현, 하늘의 언어(서울: 규장, 2007), p.52 참고하라.

2) 김동찬, 위로와 회복의 방언(서울: 돋을새김, 2007), pp.125-127.

3) 강면광, 생명의 삶 플러스(서울: 두란노, 2008.10[2]), p.54.

4) 앤토니 C. 티슬턴, 고린도전서, 권연경 옮김(서울: SFC, 2011), p.112.

5) 오늘날에도 방언으로 하나님께 비밀을 말한다고 하는 자칭 영적 고수들 가운데 도덕적, 윤리 적으로 형편없는 자들이 허다하다. 그것은 고린도 교회처럼 사실상 그들도 영적으로 어리고 육신에 속한 자들이기 때문이다. 물론 방언을 하지 않는 자들 중에서도 영적으로 어리고 육신 에 속한 자들이 많으며, 도덕적, 윤리적으로 문제가 있는 자들도 많다. 그러나 적어도 이들은 거짓 방언을 하면서 그것을 내세워 영적인 고수처럼 행세하지는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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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창모 목사는 죽음에 이르는 병에 걸린 한국 교회를 신물 나게 체험하며 갈등하다 하나님을 향해 살아 있는 교회를 꿈꾸며 1999년 김천에서 ‘제자들 경배와 찬양교회’를 개척하였다. 이창모 목사는 한국교회를 죽음에 이르게 한 병이 단지 성공주의, 황금만능주의, 도덕적 윤리적 타락 등이 아니고 이미 한국교회에 만연된 잘못된 신학에 있음을 확신하고서 무엇이 바른믿음인지 신학적으로 깊이 고민하는 목사이다. 이창모 목사는 자신이 중2때 수련회에서 방언을 받았고, 대부분의 목사들이 그것을 ‘영의 기도의 언어’라고 가르치므로 의심없이 수 십년 동안 옹알거리는 방언현상으로 기도(?)하였던 대표적인 방언기도자였다. 김우현, 김동수 등이 저술한 거짓 방언을 미화하는 한심한 서적들을 접한 후 방언에 관한 깊은 신학적인 성찰을 시작하게 되었고, 결국 오늘 날 방언이라고 알려진 소리현상과 성경의 참된 방언은 무관하다는 사실을 확신하게되었다. 이전의 자신처럼 방언으로 기도한다고 착각하고 있는 다른 목회자들과 신자들을 진정한 복음으로 돌이키기 위해 <방언, 그 불편한 진실>(밴드오부퓨리탄,2014)을 출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