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성로 목사(춘천한마음교회)

지난 2015년 11월 자운교회에서 설교한 김성로 목사의 첫번째 영상을 보고 다른 글에서 중요하게 다뤄지지 않았던 문제점 몇 가지를 지적해보고자 합니다. 그는 이 첫번째 설교에서 선지자 요나의 표적 밖에는 없다는 점과 함께 부활을 강조할 때 사람이 변화될 수 있다고 하더군요. 이것이 얼마나 성경적으로 신학적으로 무지한 주장인지 입증해보고자 합니다.

우선 그는 선지자 요나의 표적 밖에 없다고 하지만, 이는 성경의 입장과 상반된 주장입니다. 요20장 30,31입니다. "예수께서 제자들 앞에서 이책에 기록되지 아니한 다른 표적도 많이 행하셨으나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선지자 요나의 표적 밖에 없는 것이 아니라 성경에 기록된 모든 표적이 다 예수님의 하나님의 아들 되심, 그리스도되심을 입증하는 표적이었습니다.

두번째로 부활을 통해서 사람이 변화될 수 있다는 말도 성경적 신학적으로 맞지 않습니다. 요21장 1-3절을 보시면, "그 후에 예수께서 디베랴 바다에서 또 제자들에게 자기를 나타내셨으니 나타내신 일이 이러하니라 시몬 베드로와 디두모라 하는 도마와 갈릴리 가나 사람 나다나엘과 세베대의 아들들과 또 다른 제자 둘이 함께 있더니 시몬 베드로가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가노라 하매 저희가 우리도 함께 가겠다 하고 나가서 배에 올랐으나 이 밤에 아무 것도 잡지 못하였더니."

이 말씀을 보면, 김성로가 그렇게 강조했던 도마, 부활을 오감으로 체험한 도마가 예수님께 나의 주 하나님이라고 고백했다고 했지만 그 도마와 함께 수제자인 베드로, 나다나엘, 야고보, 요한과 다른 제자 두명, 총 7명이 주께서 그들을 부르신 소명을 버리고 다시 예전의 직업, 예전의 삶으로 돌아간 것이었습니다. 부활이 사람을 변화시킨다고 하지만 부활을 직접 목격했던 제자들은 무기력하게 다시 예전의 삶으로 돌아간 것이었습니다. 부활은 이들에게 아무런 능력도 아니었습니다.

그러면 이렇게 무능력했던 제자들이 어떻게 담대하게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사람으로 변화될 수 있었던 것은 다름 아닌 성령의 조명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의 의미를 바르게 깨달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주께서 승천하시기 전 제자들에게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할 것을 부탁하시는 데, 당장 나갈 것이 아니라 일단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성령이 오실 때까지 기다릴 것을 명령하셨습니다.

왜 그러셨을까요? 행1:4-6입니다. "사도와 같이 모이사 저희에게 분부하여 가라사대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 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하셨느니라 저희가 모였을 때에 예수께 묻자와 가로되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때니이까 하니." 이 말씀에서 제자들이 예수님께 갖고 있던 메시아관이 무엇인지 알 수 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이제 부활하셨으니까, 그 부활하신 능력으로 로마를 정복하고 다윗과 같은 위대한 유대인의 나라를 세우실 것이라고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이니까라고 물었던 것입니다.

만일 이들이 이런 상태로 땅 끝까지 가서 복음을 전한다면 그 복음이 무엇이겠습니까? 예수님은 유대인의 나라를 일으키시기 위하여, 유대인들은 세계 만국에 가장 뛰어난 민족으로 만드시기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것이라고 전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방인들도 구원을 받으려면 예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일단 유대교로 개종하고 할례를 받아야 구원이 가능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아브라함과 맺으신 언약을 통해서 성취하시고자 했던 복음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승천하시면서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성령께서 강림하셔서 이들에게 임하심으로 이들의 잘못된 메시아관을 교정하실 때까지 기다리라고 하신 것입니다. 요14,16장에서 주께서 말씀하신대로 성령께서 주의 말씀을 깨닫게 하시고 모든 진리가운데로 인도하실 것이기에 성령의 강림까지 기다려야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잘 알고 있는 행1:8말씀대로 성령이 오셔야 이들이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증인이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행2장 오순절 강림하신 성령의 역사(성령의 조명으)로 베드로와 제자들은 비로소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의 의미를 알게 됩니다. 성령의 강림 이전에는 유대주의적 메시아관을 갖고 있던 사람들이 성령 강림으로 주님의 죽음과 부활의 의미를 깨닫게 되었음을 그들이 전한 복음을 통하여서 보여주고 있습니다. 행2:38 "베드로가 가로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 베드로가 전한 복음은 예수그리스도의 대속죽음을 통한 죄 문제의 해결이었습니다.

부활만으로는 변화되지 못했던 사람들이 성령의 역사를 통하여 주님의 죽으심의 의미, 대속죽음의 의미를 깨닫게 되자 비로소 변화되었던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무서워서 숨어있던 제자들이 담대하게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의 의미를 선포했을 뿐 아니라 산헤드린공회 앞에서도 담대하게 복음을 전했던 것입니다. 이와 같이 사람을 변화시키는 것은 부활이 아닙니다. 성령의 역사, 조명을 통한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의 의미를 깨달을 때 변화가 일어날 수 있습니다.

오늘날 한국교회가 무능력한 것은 이런 진정한 복음 선포의 부재에 있습니다. 김성로의 부활 복음 역시 사람들의 문제를 해결하고 교회 부흥을 위한 이기적인 수단에 불과합니다. 거의 모든 교회가 기복주의와 신비주의에 오염된 복음을 전하니 진정한 구원의 역사를 기대할 수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한국교회의 회복은 부활의 강조가 아닌 진정한 복음 선포가 회복될 때 가능합니다. 진정한 복음 선포를 통한 성령의 조명이 있을 때 비로소 참된 중생의 역사가 가능하며 그렇게 주 앞에 나온 사람들의 은혜에 감사하는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헌신과 희생을 기대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바른 복음 선포와 성령의 역사를 통하여 변화된 사람들이 있을 때 한국교회는 다시 살아날 수 있을 것입니다.

세번째로 부활이 중요한 이유입니다. 물론 부활이 중요합니다. 그러나 김성로식의 부활강조는 신학적으로 거부돼야 합니다. 행2:36입니다.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이 정녕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하니라.” 하나님께서 자신의 아들을 다시 살리심으로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다는 말입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저주 받아 죽었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의 부활은 하나님께 저주받은 자가 아니라 아버지께서 기뻐하시는 의로운 자였고 하나님의 아들, 메시아로서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죽으신 대속제물이었음을 확증해주는 것이었습니다.

칼빈은 이를 가리켜 예수님의 의로우심의 증거로, 헤르만 바빙크는 예수님에게 주어진 산헤드린공회와 빌라도의 정죄 선고에 대한 하나님의 선고파기로 표현했습니다. 이 예수님의 부활은 죄와 죽음의 세력에 대한 승리와 예수님께 대한 하나님 편에서의 의의 선포임과 더불어 장차 우리 부활에 대한 보증이라는 차원에서 강조돼야 합니다.

벧전1:3 “찬송하리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이 그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만일 예수님이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셨는데 그냥 무덤에 계속 머물러 있었다고 가정해보십시오. 그러면 예수님은 죄와 죽음의 세력을 이기신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무덤에서 일어나심으로 죄와 죽음의 세력을 정복하셨음을 확증해주셨을 뿐 아니라 그와 신비하게 연합된 그리스도인들이 그와 함께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게 될 것을 입증해 보이신 것입니다.

롬6:5입니다.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리라.” 주님의 부활은 죄와 죽음의 세력에 대한 정복을 의미함으로 그와 함께 연합된 그리스도인들도 죄와 죽음을 이길 수 있음의 확증이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고전15:20에서 그리스도의 부활을 가리켜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라고 한 것이었습니다. 그가 첫 열매이기에 그에게 붙은 모든 성도들 역시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김성로는 이런 차원에서 부활을 강조하지 않기에 그가 얼마나 신학적으로 무지한 사람인지 스스로 폭로한 것입니다.

요약하자면,
1)요나의 표적 밖에 없는 것이 아니라 성경에 기록된 모든 표적이 예수님의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되심을 입증하는 표적입니다.

2)부활의 강조로 사람이 변화되는 것이 아니라 바른 복음 선포와 성령의 조명으로 가능합니다. 부활이 중요한 것은 부활이 강조될 때 사람이 변화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의로우심과 죽음에 대한 정복, 모든 신자의 부활의 보증이라는 차원에서 강조돼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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