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을 열며

<바른믿음>이 김성로 목사의 부활복음을 비판한 것에 대해 이인규 씨가 반박문을 [무물]에 올렸다는 소식과 함께 필자에게 반박문 전문이 이-메일로 왔다. 솔직히 말하면, 메일을 열기 전에 필자의 가슴이 두근거렸었다. 아마도 이 두근거림은 그동안 이단들에게 상당한 타격을 준 그의 칼날이 얼마나 날카로운 지에 대한 일종의 호기심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기대만큼이나 실망이 컸다. “혹시나” 했지만, 결국 “역시나”였기 때문이다. 예전에도 그의 칼날이 무딘 줄은 알았지만 이렇게까지 무딘 줄은 미처 몰랐기 때문에 실망 또한 클 수밖에 없었나보다. <바른믿음>의 어떤 독자의 댓글이 생각난다.

“이인규 씨에게 공격 당한 이단들은 이단이 틀림없습니다. 왜냐하면 이 정도 실력을 가진 사람에게 밟혔다는 것은 이단이라는 또 다른 증거입니다. 이인규 같은 사람이 이단전문가로 통하는 현실이 한국교회입니다”

어떤 독자의 평가대로 이인규 씨의 칼에 베인 자들은 이단이 맞다. 왜냐하면 그렇게 무딘 칼날에도 베였으니까 말이다. 그러나 그의 칼은 어설픈 이단은 벨 수 있을지 몰라도 고단수의 이단은 결코 벨 수 없을 만큼 무딘 칼날이다. 그래서 그는 김성로 목사의 부활복음을 베기는커녕 오히려 그의 호위 무사노릇이나 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본질을 비껴가는 이인규 씨의 무지몽매한 칼, 무딘 칼날

그의 반박문에서 이인규 씨는 “구속”, “구속적 사건”이라는 말을 부지런히 사용하면서도 사실상 그 의미조차 정확하게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왜냐하면 그는 자신이 인용한 교수들의 글들과 성경 구절들에 대해 그 의미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채, 사실은 그런 의미가 아닌데도, 겉으로 김성로 목사의 부활복음을 옹호하는 것처럼 보이는 성경 구절이나 글들이라고 생각되면 죄다 끌어 모아 인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 그가 인용한 교수들의 글들은 신학교수라고 하기에는 부끄러울 만치 부활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함량 미달의 글들이었다(왜 그런지는 정이철 목사님의 “이인규 씨의 교활함의 끝은 어디인가”를 참고하라). 어쩌면 함량미달 무딘 칼날이 함량미달의 무딘 글을 이용하려 한 것은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부활복음과 <바른믿음> 논객들의 주장의 차이점을 밑줄까지 그어가며 기술한 아래 글을 보면, 그가 얼마나 복음의 본질에서 멀리 비켜서서 허공에다 무딘 칼을 어리석게 휘두르고 있는지 실감할 수 있다.

“김성로 목사는 십자가와 부활을 구속적 사건으로 보고 바른 믿음 측은 십자가만 구속적 사건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바른믿음> 측과 춘천한마음교회 김성로 목사와의 결정적인 신학적 견해 차이이다.”(이인규)

윗글은 이인규 씨 스스로 <바른믿음>이 문제 삼고 있는 부활복음의 심각한 문제가 무엇인지 전혀 모르고 있음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그는 적어도 “구속 사건”, “구속적 사건”의 의미 차이를 모르고 있음에 틀림없다. 이런 무지는 일부 신학교수들과 김성로 목사에게서도 동일하게 나타난다).

이인규 씨가 <바른믿음>과 김성로 목사의 결정적인 신학적 견해 차이라고 제시한 것들은 모두 사실이 아니다. 왜냐하면 <바른믿음>은 부활이 구속적 사건이 아니라고 주장한 적이 없고, 예수님의 부활의 중요성을 한 번도 가볍게 취급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인규 씨는 정이철목사와 임헌원목사의 주장에 대한 반박(3)에서 ‘정이철 목사와 임헌원 목사가 부활을 믿지 않아도 죄사함과 구원이 완성될 수 있다는 위험한 주장을 스스로 보이고 말았다’는, 하지도 않은 말을 했다는 거짓말을 하고 있다).

오직 <바른믿음>이 문제 삼는 것은 “십자가와 부활이 구속적 사건”이라고 말하면서도, 부활을 슬쩍 십자가보다 우월한 구속 사건으로 변질시켜버린 김성로 목사의 부활복음의 정체이다. <바른믿음>과 김성로 목사의 부활에 대한 결정적인 신학적 차이는 다음과 같다.

김성로 목사와 <바른믿음>의 주장의 결정적인 신학적 차이는 십자가에서 구속이 완성되었는가? 십자가로는 아직 모자라고, 그래서 예수님께서 부활하여 하늘에 올라가 하늘성소에서 제사를 드림으로 구속이 완성되었는가? 이것이다. 전자는 <바른믿음>의 주장이고 후자는 김성로 목사와 그를 옹호하는 이인규 씨의 주장이다. 

다시 말하면 <바른믿음>은 ‘십자가만이 구속 사건이며, 부활은 십자가의 구속 사건이 하나님의 구원 사건임을 입증하는 구속적인 사건이다’라는 것이며, 김성로 목사는 ‘부활은 십자가에서 이루어진 모자라는 구속의 완성을 위해 하늘 성소에 들어가 영원한 제사를 드리기 위함’이라는 것이다. 이로써 그는 십자가가 아니라 부활이 구속의 완성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정상적인 신학자들의 ‘부활이 구속의 완성’이라는 표현은, 십자가에서 이루어진 미진한 구속을 완성시킨다는 의미가 아니라 마지막 때의 성도들의 부활과 관련하여 종말론적인 의미에서 사용한 표현들이다. 만약 여기에서 벗어나 부활이 십자가에 영향을 준다는 뜻으로 구속의 완성이라고 말하는 신학자가 있다면, 이는 아무리 저명한 학자라고 할지라도 적어도 부활에 관해서는 함량 미달인 엉터리일 수밖에 없다. (서철원 교수의 “김성로 목사의 하늘제사 주장은 허구”를 참고하라).

앞에서 언급했지만, 이인규 씨는 자신이 인용한 이승구, 박형용, 한천설 교수의 부활에 대해 정이철 목사님의 날카로운 비판을 보고 대단히 당황한 것 같다. 부랴부랴 다시 쓴 “정이철목사와 임헌원목사의 주장에 대한 반박(3)”에서 황승룡, 조석만, 마크 드리스콜, 게리 부레셔스에다 로이드 존즈 목사의 설교까지 인용하고서는, 정이철 목사와 림헌원 목사는 이들도 이단이라고 말할 용기가 있느냐고 묻고 있다. 그리고 그는 두 사람에게서 ‘유치하고 서투른 아마츄어 냄새가 난다’ 하면서, 또 다시 이들은 이단 연구가가 아니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가 인용한 로이드 존즈 목사님을 비롯한 여러 사람들의 글들은, 앞에서 인용한 이승구 교수 등의 글에서보다 자신의 무지를 더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 그러므로 이인규 씨야말로 이단 연구가라고 해서는 안 될 것이다. 왜냐하면 그의 무지한 칼, 무딘 칼날로는 제대로 된 이단들은 결코 벨 수 없기 때문이다.

그는 로이드 존즈 목사의 말을 다음과 같이 인용한다.

“구원은 몸의 부활이 없이는 완성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 사실이 바울이 고린도전서 15장을 쓴 이유입니다. 돌아다니면서 몸의 부활이 없고 영적인 부활만 존재한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그 당시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이 말합니다.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신 것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고전15:17) - 구원이 없습니다. 바울은 실제로 “여러분에게 처음 왔을 때 전파한 이 믿음에 굳게 서지 않는다면, 여러분은 전혀 아무 것도 얻지 못하고 구원 받지 못하며 그리스도인이 아닐 것입니다”(로이드 존스)

이인규 씨는 이것이 김성로 목사의 부활복음을 정당화시켜 주는 말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그러나 미안하지만 오히려 그 반대이다. 다른 글에서 필자가 누누이 지적했듯이 고전15:17은 마지막 때 있을 성도들의 몸의 부활을 믿지 않는 고린도교회의 잘못된 부활 신앙을 지적하는 바울의 가르침이다. 로이드 존즈 목사님도 이 사실을 “몸의 부활이 없고 영적인 부활만 존재한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그 당시에 있었습니다”로 바르게 설명하고 있다.

바울의 지적은, 마지막 때 성도의 몸의 부활을 믿지 않는다는 것은, 역사적으로 그리스도께서 육체적으로 부활하셨다는 사실을 믿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또한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지 않는다는 것은 십자가가 하나님의 아들이 대속 제물이 되신 하나님의 구속 사건이라는 것을 믿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그래서 바울은 실제로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시지 않으셨다면 십자가는 하나님의 구속 사건이 될 수 없으므로, 이런 십자가를 믿는 믿음은 죄 사함이 없는 헛된 믿음이 된다는 말이다.

예수의 부활은, 성도들의 몸의 부활이 실제로 일어날 것임을 확증하는 십자가의 능력으로 결과된 것이다. 그런데 성도들의 몸의 부활은 예수의 재림 때 일어나며 이때 성도들의 구원은 완성된다. 그러므로 “성도들의 몸의 부활이 없이는 구원이 완성되지 않는다”는 로이드 존즈 목사님의 말은 옳다. 이렇게 종말론적인 관점에서 볼 때 부활은 십자가 구속의 완성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말은 이인규(김성로) 씨가 말하는 부활이 구속의 완성이라는 것과는 거리가 먼 것이다.

십자가의 구속과 부활의 관계를 설명할 때, 저 유명한 신학적 명제인 “already but not yet”(이미 그러나 아직 아니)으로 설명하면 이해가 쉬울 것이다.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구속은 이미 완성되었다(already). 그러나 지상에서의 성도들에게는 아직 구원이 완성되지 않았다(but not yet). 그럼에도 예수 재림 때에 성도들의 몸의 부활로 말미암아 십자가에서 완성된 구속이 부활한 성도들에게 완전히 적용될 것이다. 이때 비로소 십자가에서 완성된 구속이 성도들에게서 완성될 것이다.

로이드 존즈 목사는 이 구속의 진리를, “부활한 후의 여러분은 여전히 여러분 자신일 것입니다. 여러분의 구원이 완성되고 여러분의 영은 이미 구원되고 여러분의 몸도 완전히 구속되었을 것입니다. 인류 전체가 전적으로 죄와 악에서 구원되었을 것입니다”는 말로 정확하게 표현했다. 우습게도 이인규 씨가 인용한 로이드 존즈 목사님의 말씀은, 오히려 김성로 목사의 부활복음이 성경이 말하는 복음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다.

또 이인규 씨가 인용한 황승룡 교수도 종말에 일어날 성도들의 몸의 부활과 관련지어 부활을 설명한다(이것은 박형용 교수가 추천사를 잘못 쓴, 리차드 게핀의 “부활과 구속”에서도 그대로 나타난다. 이인규 씨가 박형용 교수의 잘못된 추천사를 그대로 인용하는 것을 보면, 리차드 게핀의 책은 읽지 않았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서 종말은 현실화된다. 죽은 자로부터의 그리스도의 부활은 하나의 종말적 사건이다. 예수그리스도의 부활에서 종말은 현재화된다”

또 황 교수가 “하나님의 이 행위(부활)는 죄와 악을 무너뜨리고 새 시대를 시작하신 징표였으며”라고 한 말을 눈 여겨 보라. 황 교수는 ‘부활이 죄와 악을 무너뜨린 능력’이라고 말하지 않았다. 오히려 하나님이 (십자가로) 죄와 악을 무너뜨리시고 새롭게 하나님 나라를 시작하신 것의 징표가 부활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쯤 되면 이인규 씨는 황 교수의 다음 말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지도 모르겠다.

“현재 우리의 구원은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될 것, 곧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느니라”(롬8:23)에서처럼 불완전하다. 우리는 종말의 그 때에 완전한 구속을 받을 것이다..... 종말은 이처럼 우리의 구속을 완성시킨다”

이인규 씨는 위의 글에서 “현재의 우리의 구원은.............불완전하다”를 읽으면서, 아직도 십자가의 구속은 불완전한 것이고 그래서 부활로 그 구속이 완성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고 있을까? 그렇다면 앞에서 “already but not yet”로 설명한 십자가와 부활의 관계를 다시 한 번 되씹어 보길 바란다. 아무튼 황 교수는 이인규 씨와는 다르게 십자가와 부활의 관계를 로이드 존즈 목사처럼 바르게 이해하고 있다(조석만 교수의 글도 위와 대동소이하다).

이인규 씨는 마크 드리스콜. 게리부레셔스의 [기독교 교리]에서 “성경의 다른 곳에서는 예수님의 부활이, 그 때문에 우리가 비록 죄인이지만 하나님 보시기에 의롭다고 선언될 수 있는 칭의의 원천으로 일컬어진다. 바울은 예수님이 “우리를 의롭다하시기 위하여" 살아나셨다고 명백히 진술한다”를 인용한다. 그러나 이인규, 김성로, 마크 드리스콜, 게리부레셔스 모두 롬4:25을 잘못 이해하고 있다.

김성로 목사는 롬4:25(예수는 우리 범죄함을 위하여 내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이 마치 자신의 부활복음을 정당화시켜주는 본문으로 생각하고 열심히 인용하고 있지만, 그러나 이 본문은 결코 김성로 목사의 부활 복음을 설명해 주지 않는다. 롬4:25을 제대로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예수는 우리 범죄함을 위하여 내어줌”이 되신 십자가에서 구원은 완성되었다. “우리를 의롭다 하심”은 십자가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 자들에게 하나님이 선언하시는 법정적 선포 행위이다. 하나님의 이 행위는 그분이 행하신 십자가에서 완성된 구원을 근거로 그것을 믿는 자들에게 주어지는 선포이다. 그런데 십자가에서 완성된 구원이 진짜 하나님의 구원이라면 부활로 그 사실이 입증된다. 하나님은 부활로 입증된 십자가의 구속 능력으로, 믿는 자들에게 “의롭다 하심”을 선포하시기 위하여, 예수를 다시 살리신 것이다.

김성로의 부활복음에서 십자가는 핵심 사건이 아니다

이인규 씨는 “1990년 8월20일에 창립된 기독교 한국 침례회 한마음교회는 오직 성령의 권능으로 예수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을 땅 끝까지 증거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그리고 김성로 목사는 “십자가’ 없이는 인간의 죄를 용서할 수 없기에 십자가는 복음의 핵심 사건이다”라고 말했다고 강변한다.

그러나 이것은 부활복음의 치명적인 문제점을 감추려는 꼼수이며 거짓말이다. 왜냐하면 김성로 목사가 정말로 십자가를 복음의 핵심 사건으로 믿고 있다면, 당연히 복음의 핵심 사건인 십자가를 강조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오히려 십자가를 ‘무엇인가 모자라는 것이라고 말하며 멸시한다. 그리고 열심히 부활만을 강조한다. 부활 후에 예수님이 하늘 성소에 올라가서 영원한 제사를 드렸다는 거짓말까지 하면서 말이다.

그는 왜 이렇게 부활만을 강조하는 것일까? 그 이유는 뻔하다. 사실상 그에게 십자가는 복음의 핵심 사건이 아니며, 부활만이 복음의 핵심 사건이기 때문이다. 그는 설교에서 “다 이루었다”는 예수님의 말씀까지 부인하면서, 십자가는 모자라는 것이며, 그래서 십자가를 지나 부활이 필연적으로 있어야 예수님이 하늘에 올라갈 수 있고, 그래야 하늘 성소에서 영원한 제사를 드림으로 구속이 완성된다고 분명히 주장하고 있다. 이것이 그의 부활복음의 핵심이다.

그러나 이인규 씨는 이것이 부활복음의 치명적인 약점임을 알고 있는 듯하다. 그래서 그의 카페에서 이 문제를 거론하는 댓글 독자들에게 그것은 김성로 목사의 사소한 표현상의 문제일 뿐이고,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고 애써 변명하고 있다.

그러나 김성로 목사가 주장하는 부활복음은 십자가를 복음의 핵심 사건으로 믿음에도 불구하고, 표현상의 문제가 조금 있어서 듣는 사람들이 오해한 것이 아니라, 실제로 그는 하나님의 구속 사건의 핵심이 부활이라고 굳게 믿고 있다. 그래서 그는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께서 부활하셔야만 하늘 성소에 들어가서 영원한 제사를 드림으로 하나님의 구속이 완성된다고 반복해서 말하고 있다.

이런대도 이인규 씨는 김성로 목사가 사소한 표현상의 문제는 있지만, 그의 부활복음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말하는 것은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는 꼼수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언젠가 이인규 씨는 <바른믿음>에게 김성로 목사가 부활을 강조하는 것이 무엇이 문제인가? 를 질문했다. 그러나 이 질문도 김성로의 부활복음의 치명적인 문제점을 슬쩍 가리려는 꼼수 질문에 불과하다.

구속적 사건으로 부활은 당연히 강조되어야 하며, 또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역사적으로, 무덤에 계신 예수님을 정말로 다시 살리셨고, 그로 인해 십자가에서 예수님이 대속제물이 되심으로 이루신 하나님의 구속이, 사망 권세를 깨뜨리는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임을 부활이 웅변적으로 말해주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초대교회의 사도들도 예수의 부활을 힘 있게 전했다. 왜냐하면 예수가 역사적으로 다시 사셨다는 사실만큼이나 완전한 십자가의 구속 능력을 효과적으로 전할 수 있는 사건도 없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지만 초대교회의 사도들이 생명을 걸고 부활을 전한 것은 십자가에서 하나님이 이루신 완전한 구속의 능력을 밝히 드러내기 위함이었다. 결코 김성로 목사처럼, 십자가를 약화시키고 부활을 부각시키기 위함이 아니었다는 말이다.

따라서 십자가를 밝히 드러내기 위한 목적으로 부활을 강조하는 것은 아무리 지나쳐도 권장되어야 할 일이지만, 부활을 부각시키기 위하여 부활을 강조하는 것은 단 한 번이라도 할지라도 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그것은 하나님의 구속 사역을 능멸하는 범죄 행위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구속 사건은 오직 십자가뿐이다

“십자가와 부활은 모두 구속적 사건이다”는 이인규 씨의 말을 받아줄 수는 있다. 그러나 부활은 말 그대로 인류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구속적 사건이지 결코 구속 사건은 아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의 부활에서 죄 용서함의 효력이 발생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오직 죄 용서함의 효력은 십자가에서 대속 제물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에서만 나온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구속 사건은 오직 십자가뿐이다. 하나님은 출애굽 때, 어린양의 피를 통해 장자를 죽이는 재앙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셨다. 하나님은 이것을 예표로,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십자가의 구속을 이스라엘에게 미리 보여 주셨다. 또 하나님은 광야 여정에서 모세에게 불 뱀에게 물린 이스라엘을 구원하시기 위해 놋 뱀을 장대에 높이 걸어놓게 하셨다. 하나님은 이것을 예표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리심으로 이루실 하나님의 구속을 미리 보여 주셨다.

이때 하나님께서는 죽임당한 어린양을 다시 살리거나 장대에 매달린 놋 뱀을 날아가게 하거나 하셔서 부활을 예표하지는 않으셨다. 왜냐하면, 인류의 구속은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충분하기 때문이다. 수 천년동안 계속된 성전에서의 속죄제사도 십자가의 구속을 예표하기는 마찬가지이다. 짐승을 잡아 피 흘리게 하는 속죄제사에서도 부활은 암시조차 없다. 왜냐하면 인류의 구속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보혈만으로 충분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십자가를 통한 인류 구원을 이루시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구속적 사건을 행하셨다. 성육신, 부활, 성령강림, 재림 등이 바로 그것이다. 이런 하나님의 일하심은 십자가의 구속 사건을 위해 반드시 있어야 하며, 필연적으로 있을 수밖에 없는 구속적 사건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행하신 구속적 사건들 중에 어느 하나가 빠져도 십자가는 하나님의 구속 사건이 될 수 없다.

성육신은 구속적 사건이다. 하나님의 아들이 인간으로 이 땅에 오지 않으셨다면, 십자가에서 피 흘린 자는 단순한 죄인에 불과한 인간일 것이므로, 그 십자가는 구속의 능력이 없는 헛된 것이 되고 만다. 동일하게 부활이라는 구속적 사건이 없었다면, 십자가에 달린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 아님이 분명하므로, 그 십자가는 구속 능력이 없는 헛된 것이 되고 만다. 그러므로 이런 십자가는 죄를 없애는 효력이 없으므로, 부활이 없는 십자가를 믿는 믿음은 헛된 것이 되고, 그것을 믿는 자들은 여전히 죄 가운데 있게 된다. 그러므로 그런 십자가를 전하는 행위도 헛된 일이 될 수밖에 없다.

김성로 목사가 부활복음의 정당성을 변호하기 위해 빈번하게 사용하는 고전15:14, 17절은 부활이 구속 능력이 있다는 말이 아니라, 부활의 결과를 야기한 십자가를 믿는 믿음만이 구속 능력이 있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부활은, 구속 사건은 아니지만 십자가가 하나님의 구속 사건이 맞는다면 반드시 있게 되는, 그리고 십자가가 하나님의 구속 사건임 확실하게 드러내는 구속적 사건임에는 틀림이 없다.

글을 닫으며

그럼에도 김성로 목사는 고전15:14-17에서 바울이 말하는 부활이 마치 모자라는 십자가의 구속 능력을 보완하여 십자가의 구속을 완성시키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착각하고 있다. 그래서 그는 오직 자신만이 발견한, ‘십자가의 죽음을 지나 부활 후에 예수께서 하늘 성소에서 영원한 제사를 드림으로써 구속이 완성되었다’는 신 부활론을 펼치는 것이다.

그의 어리석은 신 부활론에서 말하는 부활은, 예전에 “십자가만”님이 풍자했던 이몽룡의 마패와도 같다. 김 포졸은 마패가 이몽룡을 어사또가 되게 했다고 가르친다. 마패는 이몽룡이 어사또임을 밝히는 증표에 불과한데도 말이다. 이몽룡이 변사또에게 마패를 보여주기 전에도 이몽룡은 임금님이 보낸 100% 어사또였다. 마찬가지로 죽으신 예수가 부활했기 때문에 십자가가 구속 사건이 된 것이 아니라, 부활 이전에도 예수님이 피 흘려 죽으신 십자가는 100% 하나님의 구속 사건이었다. 그래서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시면서 “다 이루었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이몽룡이 마패를 꺼내기 전에도 100% 어사또였기 때문에 마패를 보여줄 수 있었듯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도 부활이 있기 전에 100% 하나님의 구속 사건이었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부활이 결과된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구속적 사건이지만 구속 사건은 아니다. 하나님의 구속 사건은 오직 하나님의 아들이 대속 제물로 죽으신 십자가밖에 없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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