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이철 목사(바른믿음 운영자)

(다음은 이인규 씨가 김성로 목사를 옹호하고 자신의 이단옹호 행각을 정당화하기 위해 최근에 쓴 글 "십자가와 부활은 모두 구속적 사건이다"를 읽고 느낌 점을 쓴 글이다.)

부활이 구속사적 사건인가? 아닌가? 하는 이상한 논쟁을 일으키면서 김성로 목사 문제의 본질을 오도하는 사람이 있다. 부활을 구속(사)적 사건이라 말할 수 있다고 하여 김성로 집단의 괴상한 부활복음이 정당성을 가지게 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엄밀한 신학적 의미에서 부활을 구속(사)적 사건이라고 말하는데에는 정당하지 못한 부분이 있다. 그러나 이 부분이 김성로 목사의 그릇된 사상과 연관된 핵심적인 내용이 아니므로 여깅 대해서는 논의하지 않기로 한다)


‘구속’(Redemption)이라는 말은 타락으로 말미암아 죄와 마귀의 포로로 전락했고, 하나님의 진노와 저주로 말미암아 영원한 사망의 형벌에 처해진 죄인들을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가 자기의 피를 대신 지불하시고 건져내셨음 뜻하는 말이다.

‘구속사’(History of Redemption)라는 말은 하나님께서 멸망당할 죄인들 가운데 택하신 일부를 예수 그리스도를 피를 통해 되찾아으시기 위해 진행하신 역사이다. 하나님의 구속사의 목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였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해 피 흘리심이 하나님의 구속사의 완성이다. 김성로 목사와 자신의 그릇된 주장을 옹호하려고 부활이 '구속적' 사건이라고 표현하는 이인규 씨의 말은 아마도 '구속사적'이라는 말을 그렇게 말하는 것 같다. 실제로 구속적 사건이라는 말을 쓰여지지 않는 말이다.

 

부활이 구속(사)적 사건?

부활을 '구속(사)적인 사건'이라고 말 할 수 있을까? 하나님께서 우리를 죄로부터 되찾으심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완성되었다는 중요한 사실에 바추어보면, 부활을 구속(사)적 사건이라고 말하는 것은 옳지 않다. 그러나 죄로부터의 구속이 십자가의 피를 통해 완성되었음이 부활이라는 결과를 일으켰다는 의미에서, 십자가의 완전한 구속와 그 필연적 결과인 부활이 동전의 양면과 같이 하나라는 관점에서 부활을 구속사적 사건이라고 말한다고해서 크게 문제가 될 사항은 아닐 것이다.

문제는 김성로 목사가 부활도에 우리의 죄를 완전하게 사하는 요소가 있다고 가르치고 있고, 이인규 씨는 그것을 옹호하기 위해 십자가와 부활 모두가 구속(사)적인 사건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실제로 김성로 목사는 예수님의 부활에도 죄를 사하는 것과 관련된 중요한 요소가 있으므로 부활을 믿어야 (신앙의 대상) 완전한 죄사람을 받는다고 하였다. 이인규 씨는 이 점을 책망하지 않고 오히려 옹호하기 위해 부활도 십자가와 같이 구속(사)적 사건이라고 한다. 그래서 심각한 것이다.

우리가 김성로 목사와 그 교인들의 신앙을 배격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유는 그들이 완전한 구속사건인 예수님의 피 묻은 십자가를 파괴하는 그릇된 부활을 전파하기 때문이다. 그들이 그냥 부활에 대해 많이 말한다고 시비하는 것이 아니다.

구속사를 이해하는 넓은 관점에서 볼때, 구약 구속사의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준비하심이었고, 신약 구속사는 구속의 근거가 되는 십자가 제사의 효력을 성령께서 부르심 받은 각 사람에게 적용하심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가 구속의 유일한 근거라는 사실은 우리의 죄를 전가받으시고, 스스로 죄인과 동일시되어 십자가에서 대신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 자신과도 무관하지 않았다. 예수 그리스도에게 전가된 우리의 죄가 십자가에서 흘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피로 말미암아 다 제거되어 하나님께서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살리셨다.

김성로 씨의 문제는 구속의 완성이며, 기독교의 생명인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와해시키면서 십자가 완전속죄의 결과인 부활을 그와 동등하게, 또는 그 위에 두는 괴상한 기독교를 만든다는 것이다. 우리가 사용하는 같은 동일한 용어들을 사용하면서 전혀 다른 내용의 종교를 만들어 버렸다. 이런 지혜를 어찌 우둔한 사람이 만들어 낼 수 있겠는가? 거짓의 아비 마귀가 아니면 어디에서 이런 지혜가 나올까?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대로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그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그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라.”(요 8:44)

김성로 목사가 같은 용어들을 사용하면서 다른 종교를 만들어 버렸다는 나의 말이 거짓말이라고 생각되는 사람은 김성로 목사의 실제 강의 내용을 보여주는 다음의 영상을 보기 바란다. 김성로 씨는 구속사의 가장 핵심인 십자가를 붙잡는 목회를 했더니 교회가 다 죽어갔다고 했다. 그러다가 십자가 속제의 첫번째 결실인 예수님의 부활을 발견하고서 쾌재를 불렀고, 십자가의 죽은 예수를 믿는 신앙을 넘어 부활의 산 예수를 목회가 잘되었다고 했다. (다른 영상을 보니 김성로 목사는 십자가의 죽은 예수를 믿기 때문에 세계 교회가 죽어간다고도 했다). 이런 기독교는 어디에도 없는 것인데, 그에게 이런 일이 실제로 일어났으니 마귀의 거짓이 임한 것이 아니면 대체 뭘까? 다음의 영상을 보자!

 

"제가 이것을 이야기하니까 (사람들이) 무슨 말인지 몰라요. 왜냐하면 십자가에 딱 붙들려 있으니까 ... 예수님이 부활하지 않으면 죄가 그대로 있는 것입니다. 부활하셔야 할 이유가 여러가지 있지만, 부활하여서 하늘나라 참 장막에 들어가셔서 영원한 제사가 드려져야할 줄로 믿습니다. 이거지요! 그러면 히브리서 10장을 보겠습니다. 왜 부활이 이렇게 중요한지 보겠습니다. 9장 11.12절부터보겠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장래 좋은 일의 대제사장으로 오사 손으로 짓지 아니한 곧 이 창조에 속하지 아니한 더 크고 온전한 장막으로 말미암아 염소와 송아지 피로 아니하고 오직 자기의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 인간이 만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지으신 더 크고 온전한 장막에서 염소와 송아지 피로 아니라고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었다는 것이 바로 이겁니다. 단번에 성소에 올라갔다는 것이 이것입니다."(김성로 목사)

“이 분(예수 그리스도)이 십자가에 달려 피 흘려 죽으시고 3일 만에 부활하셔서 하늘나라 성막에 들어가셔서 다시 제사를 드려주어야만, 이 땅의 제사는 순간적인 효력밖에는 없지만, 예수께서 부활하고 승천하셔서 하늘나라 성소에 들어가시게 되면 순간적인 죄사함이 아니라 영원한 죄사함이 이루어진 줄로 믿습니다. 그래서 이게 놀라운 것입니다.”(김성로 목사)

김성로 목사의 이런 그릇된 가르침을 받고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춘천한마음교회의 수천의 신자들의 영혼을 생각해 보자. 그들은 자신들의 구원의 절대적 요건인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놀라운 은혜를 깨닫고 묵상하는 단계로 성장하는 것을 근본적으로 차단하는 그릇된 부활복음에 잡혀있다.

“부활이 없었으면 우리가 죄가 사해지지 못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심으로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셨고,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었던 것입니다.”

춘천한마음교회의 신자들은 이런 엉뚱한 말들이 얼마나 참된 신앙과 성경의 본뜻을 왜곡하는지에 대해서 생각조차 못하고 있다. 더욱 더 심각한 것은 이단전문가라는 이인규 씨 마져도 같은 수준에 머물고 있으면서, 진리를 위해 애쓰는 사람들을 훼방한다는 것이다. 이인규 씨가 어떤 방식으로 김성로 목사를 옹호하면서 진리의 싸움에 물타기를 하는지 보자!

정이철 목사와 <바른믿음>이 부활을 구속적 사건으로 보지 않아?

“김성로 목사는 십자가와 부활을 구속적 사건으로 보고 바른 믿음 측은 십자가만 구속적 사건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바른믿음 측과 춘천한마음교회 김성로 목사와의 결정적인 신학적 견해 차이이다.”(이인규)

“바른믿음 측은 김성로 목사가 십자가로 구속이 완성이 되었는데 부활까지 구속적 사건이라고 하니 십자가를 부정하고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것은 오히려 바른 믿음 측이 구속의 완성으로 부활을 부정하고 있는 것이다.”(이인규)

이인규 씨의 이런 말에 대해 부활이 구속(사)적 사건이 아니라고 말해도 무방하고, 또한 부활도 구속(사)적 사건이라고 말해도 무방하다고 본다. 구속사를 어떤 관점에서 설명하는가에 따라 달라질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자와 <바른믿음>의 논객들이 부활이 구속(사)적 사건이 아니라고 말해 본 적도 없다는 사실이다. 이는 우리가 하지도 않은 말을 만들어서 엉뚱한 데로 싸움을 유도하여 정작 중요한 김성로 목사의 이단성에 대해서 논쟁하지 못하게 하려는 이인규 씨의 간교하고 얄팍한 행동인 것 같다.

사실 이런 일은 처음이 아니다. 이전에도 이인규 씨는 내가 감리교가 행위로 구원받는다고 강의했다고 거짓말을 더하여 많은 사람들이 나를 오해하게 하였다. 이인규 씨도 직접들었던 나의 그 강의는 천주교의 거짓됨을 다루는 내용이었다. 천주교의 구원론, 즉 하나님께서 ‘초기 도움의 은총’을 주시어 인간이 그리스도를 믿을 것인지? 안 믿을 것인지? 스스로 결정하게하고, 믿기로 결정하는 사람을 인도하여 구원을 주신다는 천주교의 구원 사상을 이야기하였다. 동시에 웨슬리와 감리교 또한 일단 구원과는 무관한 ‘선행은총’을 하나님으로부터 받고, 이후 인간이 그리스도를 믿을 것인지? 안 믿을 것인지?를 스스로 결정하여 구원의 길로 나간다고 가르치고 있고, 그것이 바로 ‘행위구원론’이라고 했다.

그 이전에 나에 협박한 것처럼, 나를 매장하겠다고 글을 작성하여 퍼뜨린 이인규 씨는 내가 강의했던 중요한 내용을 싹 잘라버렸다. 감리교회는 단순 행위로 구원을 얻는다고 가르치는 교회라고 강의했다는 듯이 거짓된 소문을 퍼뜨렸다. 그리고 감리교가 믿음으로 구원얻는다고 설명하는 감리교회의 어떤 문서를 예로 들었다. 

감리교가 말하는 그 '믿음'은 인간이 자신의 판단하에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을 얻기로 결정함으로서 가지게 되는 믿음이다. 감리교가 말하는 그 믿음은 구원얻기를 바라는 인간이 스스로 선택하여 가지는 믿음이지, 결코 성경이 말씀하는 불강항력적 은혜로 말미암은 믿음이 아니다.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선택과 은혜로 말미암이 주어지는 믿음이 아니고 인간의 행위와 선택으로 말미암아 얻어지는 믿음이다. 믿음을 자기의 것으로 선택할 수 있는 기회를 하나님이 주셨다는 면에서 '은혜'이기는 하나, 성경이 말하는 구원주시기로 작정된 자들에게 무조건 부어주시어 구원에 이르게하는 은혜는 아니다. 성경은 선택되어 구원에 이른자는 믿음을 버리고 다시 지옥에 갈 수가 없다고 가르치나, 감리교 신앙은 인간이 믿음을 더 가지기를 싫어하면 얼마든지 믿음을 버릴 수 있고, 범죄하면 회개하지 않으면 '의'를 상실하여 다시 지옥에 떨어질 수도 있다. 이것이 웨슬리와 감리교회의 행위구원론이다. 

이인규 씨는 이와 같은 웨슬리의 행위구원론의 내막도 알지 못하면서 안다고 착각하였던 것 같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이것으로 정이철 목사를 공격하면 되겠구나!"라고 생각하고 나를 공격하는 인신비방의 글 세편에서 이것을 고루고루 써먹어 보았다. 이번에도 마찬가지다. 나와 <바른믿음>의 논객들이 십자가는 구속적 사건이고 부활은 구속적 사간이 아니라고 한 적이 없다. 우리가 강조하는 것은 "구원은 십자가에서 이미 완성되었고, 부활은 십자가의 효력이 적용됨으로 나타나는 결과"라는 사실이다. 다른 어떤것도 죄사함과 구원에 있어 십자가의 절대적 위치를 넘보거나 대등해 질 수가 없다는 것이 우리의 주장이다.

이인규 씨는 이것을 정직하게 다루지 않고 김성로 목사가 부활하여 다시 제사를 드림으로 우리의 구원을 완성했다는 차원에서 부활이 구원의 완성이라고 말하는 이단적 내용의 심각성을 덮기 위해 부활도 '구속적인 사건'이라는 당연하고 엉뚱한 내용을 강조하면서 물타기를 시도했다.

 

불리하면 개념없이 '정통신학' 들먹이는 이인규 씨

이인규 씨의 또 다른 병폐는 성경으로 참과 거짓을 가르려 하지 않고, 기존에 유통되고 이미 정착된 이론들을 진리의 시금석으로 삼으려고 한다는 점이다. 그래서 현대의 거짓방언에 대해서 성경적 근거로만 이야기하려 하지 않고 "나도 방언을 싫어하지만, 한국 교회의 80%가 이미 하고 있는데" .... 하면서 진리를 배반하고 한국 교회의 주류에 편승하는 배교적인 자세를 보이고 있는 것이다.

이번에도 이인규 씨는 또 다시 비슷한 면을 보이고 있다. 제 아무리 유명한 신학교수라 할지라도 비성경적인 주장을 한다면, 누구라도 진리를 위해 싸우는 사람이라면 당연히 반박하고 교정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논쟁 기술에 능한 이인규 씨는 그것이 이미 유통되고 있으니 정통신학이라며, 그것으로 진리의 말씀을 제단하려는 우매함을 일삼는다. 이인규 씨가 자신과 김성로 씨를 옹호하기 위해 써먹은 소위 정통신학자들의 말들을 보자! 

“부활은 구속사적인 사건이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십자가와 함께 객관적으로 우리를 위한 구원의 근거가 되는 사건인 것이다. 이 부활은 십자가의 궁극적 구원적 의미를 드러내는 사건이며, 우리의 구속의 객관적인 근거를 마련하는 사건들 중의 하나이다.”(이승구 교수)

위의 이승구 교수의 부활이 구속사적인 사건이고, 부활이 십자가의 의미를 드러내는 사건이라는 말은 분명히 맞다. 그러나 부활이 구원의 근거, 구속의 객관적인 근거라는 말은 절대로 옳지 않다. 설마 이승구 교수가 그런 뜻으로 했던 말일까? 그런데 이인규는 이승구 교수의 말의 진의를 알아보려고는 하지 않고 무조건 자신과 김성로의 입장을 옹호하기 위해 써먹었다.  

“바울에게 있어서 예수님의 부활은 구속의 완성, 구속의 종결로서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예수님의 죽음보다도 예수님의 부활에서 구속의 성취를 찾을 수 있는 것이다. 예수님의 죽음과 예수님의 부활을 대치시켜서는 안된다. 그러나 구속의 완성은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해서 더 결정적으로 성취된 것이다.”(박형용 교수)

두날개를 적극적으로 옹호하였던 박형용 교수의 이 말 속에도 옳은 내용과 틀린 내용이 공존한다. 바울이 부활을 구속의 완성과 종결로 이해했다는 박형용 교수의 말에 대해 동의할 올바른 신학자가 과연 어디에 있을까? 십자가에서 이루어진 완전한 죄사함과 구원이 부활을 통해 확증되었다는 것이 바울의 핵심 부활사상이다. 부활이 구속의 완성과 종결이라는 말은 이인규 씨가 좋아는 말 ‘정통신학’이 되지 못한다. 이인규 씨 등이 이런 주장을 위해 관련된 성경 말씀을 어떻게 왜곡하였는지 또 말할 기회가 있을 것이다. 

“바울에 의하면 그리스도는 그의 죽음만을 통해서는 그 누구도 구속할 수 없었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부활'이 그의 구속적 죽음이 갖는 효과에 대한 단순한 증거의 차원을 훨씬 넘어서서 중요한 기여를 하고 있음을 의미하고 있는 것이다 ...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의 죽으심을 우리의 구원을 위한 수단으로(믿어야 하고), 그리고 부활을 단지 구원을 확인하는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이런 이유로 바울은 우리에게, "부활 없이는 어떠한 죄의 용서함도 없다"는 것을 상기시키고 있다(롬 4:25참조).”(한천설 교수)

한천설 교수의 이런 말이 정통 신학이라며 나를 반박하는 논리의 근거로 쓴다는 것은 이인규 씨가 교활하고 동시에 어둠에 잡힌 우매한 사람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이인규 씨가 이단연구자라는 말을 들을 수 있는 자질이 전혀 없음을 여실히 보여준다. 바울이 예수님의 죽으심 만으로 죄인들을 구원할 수가 없고 부활도 죄를 사하는 중요한 기능을 가졌으며, 부활없이는 죄 용서가 없다고 믿었다는 한천설 교수의 말은 전혀 받을 수 있는 내용이 되지 못한다. 이런 사람이 신학교 교수라는 말을 듣는 것 자체를 수치로 여겨야 할 일인데, 이인규 씨는 그런 사람의 글을 인용하면서 부활에도 죄를 속하는 요소가 있다고 말하고 있다. 이런 사람이 한국 교회의 이단을 잡는데 앞장서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분명히 말하지만, 부활은 십자가를 통해 완성된 죄사함을 성령께서 신자들에게 적용하여 앞으로 나타나는 영광스러운 결과이다. 이것이 진정한 정통신학이다. 이것이 정통신학이 아니라고 말하는 신학자는 절대로 정통신학자가 아니다. 성육신하시어 우리 대신 죽으신 예수님 자신도 십자가의 효력을 먼저 덧입고 부활하셨다. 예수님 자신의 부활은 예수님 자신의 십자가의 열매였고 결과였다. 예수님의 부활이 예수님 자신의 십자가와 맞먹는 죄사함의 근거였다는 이론은 정통신학이 물리쳐야 할 거짓이다. 

“우리가 부활의 하나님을 믿어 의롭게 된다면, 부활이 없는 칭의란 존재할 수 없다. 칭의를 죄 용서와 동일시하고, 이를 전적으로 십자가의 효과로 간주하는 통상적인 경향과는 달리, 바울은 칭의가 십자가뿐 아니라 부활 또한 필요로 하는 것이라고 역설한다.”(권연경 교수)

칭의가 전적인 십자가의 효과라고 보는 성경적 견해를 배격하고 십자가와 더불어 부활까지가 칭의의 근거라고 주장하는 권연경 교수는 대체 어떤 종교를 가르치는 학자일까? 이런 사람을 옳다가 말해주는 정통신학자가 있다면, 내가 기꺼이 교활한 이인규 씨에게 맛있는 빵을 사줄 것이다. 이단연구가라고 자부하는 이인규 씨는 어째서 이런 한심을 글들을 제시하면서 그릇된 부활을 주장하는 김성로를 돕는 것인가? 왜 스스로 자기의 수명을 이다지 가혹하게 단축시키려고 안달을 내는 것인가? 참으로 안타깝다.

"성경에 무식하여 부활을 모르면 구원받지 못할까? 아니다 십자가를 믿으면 구원받는다. 설령 의심이 많아 부활을 믿지 못한다 해도 십자가의 죄사함을 확실히 믿으면 구원받는다. ... 김성로는 “십자가와 부활을 동전의 양면 같다”라고 말한다. 그가 복음의 개념을 모르니 이런 말을 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고난은 우리에게 죄 사함과 구원을 주는 복음이나, 부활을 믿는다고 구원을 받을 수는 없는 것이다. 이것은 부활을 십자가위에 두려는 김성로 목사의 무지와 억지이고, 기독교 복음을 왜곡하는 거짓된 논리다."(오직 십자가)

이인규 씨는 어떤 독자가 익명으로 <바른믿음>의 '독자마당'에 남긴 이 글을 인용하면서 마치 무슨 문제라도 되는 것인양 분위기를 만들려고 하였다. 혹시 내가 '오직 십자가'라는 닉으로 이 글을 썼다고 생각하는지 모르겠으나, 하나님 앞에서 말하지만 나는 아니다. 교정하면서 쓴 한 두 마디의 문장은 내 글이지만, 분명히 내가 이 글을 쓰지 않았다. 이 글의 저자의 핵심 주장은 "부활을 믿는다고 구원을 받을 수는 없다는 것이다"이다. 부활은 신앙의 대상이 아니라는 것이다. 다른 어떤 표현에서 약간의 논란이 있을 수 있으나, 핵심은 다 맞는 내용이다. 

(위 '오직 십자가' 님의 표현에 문제가 있다는 지적이 있어 그 당시 다음과 같이 문구를 수정하였다. 아마도 이인규 씨는 김성로 목사를 옹호하는 사람들이 수집해 주는 지난간 정보들을 근거로 글을 쓰고 있는 것 같다.)

"그런데 김성로 목사는 부활을 ‘믿지 않으면’ 믿음도, 죄 사함도 헛되다고 해석하고 있다. ‘없으면’과 ‘믿지 않으면’의 차이는 엄청난 차이다. 성경에 무식하여 부활을 모르면 구원받지 못할까? 아니다 십자가를 믿으면 구원받는다. 설령 그 사람이 혹 부활에는 관심을 두지 않는다고 해도 해도 십자가의 죄 사함을 확실히 믿으면 구원받을 뿐아니라 영생과 부활을 십자가의 신앙으로 인해 누리게 되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러나 김성로는 교묘하게 해석하여 부활을 믿지 않으면 십자가도 헛된 것처럼 가르쳤고, 부활을 믿어야 구원을 받는 것처럼 ‘부활 구원론’을 가르치고 있다. 한마음교인들도 부활을 믿어 구원받는다고 알고 있다."(오직 십자가) 
 

정이철 목사와 <바른믿음>의 논객들은 부활이 구속(사)적이니? 아니니? 하는 말을 한 적이 없다. 이단옹호자 이인규 씨는 없는 말 만들어 이상한 싸움 벌이지 말고 진실하게 논의하기 바란다. 우리가 주장하는 김성로 씨의 문제는 부활을 많이 이야기한다는 것도 아니고, 부활이 구속적인 사건이 아니라는 것도 아니다.

김성로 씨는 구속사의 핵심인 십자가를 넘어서서 부활로 가야 한다고 주장하고, 십자가의 예수는 죽은 예수이고, 십자가 제사는 불완전한 제사였고, 부활하신 예수님이 승천하여 다시 완전한 제사를 드림으로 우리의 죄가 완전하게 사해졌다는 비성경적인 사상에 바탕을 둔 부활론은 전개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인규 씨는 더 나서고 싶으면, 바로 여기에 대해서 이야기하기 바란다. "김성로 목사가 때로는 이렇게 십자가도 강조했는데" ... 하면서 진실을 덮는 말들을 퍼나르지 말고, 그가 십자가를 불완전한 것으로 이야기하면서 그릇된 부활을 주장했다는 이 무서운 사실에 대해서 이야기하기 바란다. 어떤 사람의 말을 인용하고 마치겠다. 이인규 씨는 이 말의 뜻을 잘 새기기 바란다.

“어떤 사람이 도둑질을 했다. 그런데 도둑질을 하지 않았던 날로 있다. 도둑질하지 않고 정상적으로 살았던 날이있었을지라도 도둑질한 적이 있으면 그는 도둑이다. 도둑은 반드시 합당한 처벌을 받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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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이철 목사는 2004년부터 현재까지 미국 미시간 주 ‘앤아버 반석장로교회’의 담임목사이고 거짓 신학의 ‘견고한 진’(고후10:4)을 무너뜨리기 위해 시작된 신학신문 <바른믿음>의 대표이다.
총신대학(B.A 졸업), 총신대학 신학대학원(M.Div Eqiuv.졸업), 아세아연합신학대학 대학원(Th.M 졸업), Liberty Theological Seminary(S.T.M 졸업), Fuller Theological Seminary(Th.M 수학), Puritan Reformed Theological Seminary(Th.M 수학), Liberty Theological Seminary(D.Min 수학), 남아공신학대학원(South African Theological Seminary, Ph.D)에서 연구하였고, 현재 University of Pretoria(Ph.D)에서 연구하고 있다.
저서로는 「신사도 운동에 빠진 교회」, 「제3의 물결에 빠진 교회」, 「가짜 성령세례에 빠진 교회」, 「피터 와그너의 신사도운동 Story」, 「한 눈에 들어오는 청교도 개혁운동」, 「능동적 순종에 빠진 교회」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