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천지와 같이 노골적으로 복음과 크게 다른 것을 가르치는 집단은 오히려 덜 위험하다. 왜냐하면 보통 사람들도 쉽게 분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단연구가들은 일반인들 중에서 조금 깨어있는 분들이라면 누가 의심하게 되는 빤한 이단집단들을 확실히 퇴치하기 앞장서는 사람들이다. 물론 이단사역자들의 나름 매우 귀하고 중요하다. 그런데 복음을 살짝 비틀어서 복음처럼 보이는 '다른 복음'(교후 11:4)을 가르치는 김성로 목사의 부활복음고 같은 것은 실로 위험하기 짝이 없다. 왜냐하면 그의 부활복음은 보통 사람들은 물론이고 비교적 분별력이 있다는 일부 이단전문가들도 보지 못할 정도로 성경적인 복음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김성로 목사의 부활복음은 많은 사람들에게 신바람 같이 호응을 받고 있다. 그러나 거기에는 하나님이 주시는 구원이 없다. 왜냐하면 거기에는 우리 대신 대속 제물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이 없기 때문이다.

부활복음의 심각한 위험성은 김성로 목사를 비호하는 평신도 이단연구가 이인규씨에게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스스로 진리 분별에 일가견이 있다고 하는 이인규 씨도 부활복음이 성경이 경고하는 '다른복음'이라는 사실을 눈치 채지 못하고 있으니 말이다(어쩌면 알고 있으면서도 다른 이유들 때문에 김성로 목사를 비호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보통 사람들은 두말할 것도 없이 김성로의 부활복음을 구원의 복음으로 받아들이고, 신바람 나 할 것은 불을 보는 듯 뻔하며, 평신도 이단연구가 이인규씨의 부활복음 비호 행위는 이들의 신바람을 부채질하는 ‘안심보험’이 되고 있다. 이인규 씨는 부활복음을 다음과 같이 비호하였다. (지면의 제약 상 전(全)문을 인용하지 못하고 문제되는 부분만 부분적으로 인용한다).

“춘천 한마음교회는 부활을 강조합니다. 그것은 분명히 사실이며, 그러나 부활을 강조하면 이단인가요?”(이인규)

“부활이 없으면 믿음도 없고, 죄 가운데 그대로 있을 것이며, 거듭남도 없으며, 소망도 없다는 주장은 잘못된 주장이 아니라 모두 성경적인 내용입니다. 만약 부활이 없다면 기독교의 복음은 모두 헛된 것이 되고 맙니다. 이것을 비판하는 사람들은 아마 성경적인 지식이 없는 것 같습니다. 우리는 복음을 여러 가지로 분류할 수 없지만, 부활이 복음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어야 합니다”(이인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십자가 복음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이 사실이지만(여기에서 중요한 역할이란 구원에 영향을 미치는 역할이 아니라, 십자가만이 구원이라는 복음을 분명하게 해주는 역할이다), 그럼에도 십자가보다 부활을 더 강조하거나 부활만 강조하면 안 된다. 왜냐하면 구원의 진원지인 십자가가 저절로 약화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성경 어디에서도 십자가보다 부활이 강조되는 곳은 없다. 성경에서 부활이 언급되는 목적은 언제나 십자가가 하나님의 완전한 구원 계시임을 증거하는 차원이다. 그래서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실행하신 구원을 말할 때, 십자가만 언급되기도 하고, 혹 부활이 언급될 때에는 십자가(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와 함께 언급된다.

왜냐하면 부활을 언급하는 목적이 바로 십자가 사건이 하나님의 구원 사건임을 말하기 위해서인데, 하나님께서 무덤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신 사건만큼 십자가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임을 드러내는 물증이 없기 때문이다.

또 드물기는 하지만, 부활만 언급되는 곳(예를 들면, 김성로 목사가 애용하는 고전15:17에서의 ‘다시 사신 것’도 전후문맥을 살펴보면 십자가가 하나님의 구원 사건임을 밝히 드러내기 위함이다)도 전후문맥을 살펴보면 어김없이 그리스도가 ‘우리 죄를 위해 죽으신’(고전15:4) 십자가를 제대로 믿게 하기 위함이다(이 부분은 조금 뒤에서 상세히 설명할 것이다).

▲여러 사람들에게 큰 실망을 끼치는 평신도 이단연구가 이인규 씨

따라서 이인규는 다른 이에게 성경 지식이 없다고 말하기 전에, 자신의 무지를 깨닫고 지금이라도 신학교에 입학하여 성경을 좀 더 깊이 있게, 제대로 공부하는 것이 나을 듯하다. 아무튼 이인규가 “부활이 복음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어야 합니다”라고 말한 것은 성경에 대한 무지에서 나온, 혹은 의도적인 거짓말이다.

부활을 신앙의 대상으로 가르치는 김성로 목사

부활복음을 비판하는 글에 달린 댓글들을 보면 가슴이 답답해진다. 이들은 <바른믿음>이 십자가만 주장하고, 상대적으로 부활을 등한히 하는 그릇된 신학언론인 것처럼 말한다. 그것은 <바른믿음>이 부활복음에 대해 문제 삼는 이유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바른믿음>이 김성로 집단의 신앙을 문제 삼는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많이 말하기 때문이 아니고, 김성로 집단이 교묘하게 성경을 비틀면서 ‘죽은 십자가를 지나 부활을 더 중요한 신앙의 대상’으로 가르치기 때문이다.

십자가가 하나님의 구원 사건임을 입증하기 위하여, 부활을 외치는 것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그래서 필자도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으며, 십자가만큼은 아니라 할지라도 부활을 자주 강조한다. 그러나 결코 우리의 구원은 십자가에서 완성되었기 때문에 부활을 신앙의 대상으로 삼지는 않는다. 단지 예수님의 부활이 역사적으로 일어난 하나님의 역사임을 믿는다(고전15:12-19에서 바울이 강조하는 부활도, 부활이 역사적인 실제 사건임을 믿으라는 외침이다. 예수님의 부활이 역사적인 사실임을 믿지 못한다면, 그 예수님이 대속재물이 되신 십자가가 구원의 능력임을 믿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필자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믿음으로써 의롭다하심을 얻어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을 믿는다.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의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죽어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라.”(롬6:6-7)

또한 필자는 롬6:8-9절과 롬8:11을 믿는다. 필자는 먼지가 되어버린 필자의 육체의 영광스러운 부활이 마지막 날에 실제로 일어난다는 사실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는다.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와 함께 살 줄을 믿노니 이는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으매 다시 죽지 아니하시고 사망이 다시 그를 주장하지 못할 줄을 앎이로라.”(롬6:8-9)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롬8:11)

그러나 김성로 목사처럼 부활을 십자가와 비교하며, 부활의 우월성을 입증하기 위해 부활을 강조하는 것은 대단히 위험하다. 왜냐하면 그것은 부활을 신앙의 대상으로 삼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김성로 목사의 부활복음의 가장 심각한 문제는 부활을 신앙의 대상으로 가르치는 데 있다. 이것은 김성로 목사가 부활을 믿음의 대상인 십자가와 비교하며, 죽은 십자가보다 부활의 우월성을 강조하는 것만 보아도 확실히 알 수 있다.

아마도 김 목사는 고전15:17의 ‘부활이 없으면 믿음이 헛되고,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라는 말씀에서(고전15:17에 대한 필자의 자세한 설명을 보려면, <김성로가 전하는 것은 영혼을 죽이는 ‘파멸의 복음’>을 참고하라) 믿음이 헛되지 않으려면 부활을 믿음의 대상 속에 넣어야 하고, 부활을 믿을 때 완전한 죄 사함이 있다고 유추하는 듯하다.

(김 목사는 한마음 제자훈련 시리즈1- p.17에서 “부활로 죄사함이 확증된다”와 p.31에서 “예수님의 부활은 우리의 모든 죄를 다 사하여 주셨다는 증거이다”라는 터무니없는 결론을 내린다. 왜 이것이 터무니없는 결론인가 하면, 김 목사의 메시지는 “부활로 십자가에서의 죄사함이 확증된다”나 “예수님의 부활은 십자가에서 우리의 모든 죄를 다 사하여 주셨다”가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김 목사는 이 메시지로 부활이 십자가보다 우월한 구원의 능력인 것처럼 사람들을 미혹한다. 성경에 언급된 예수님의 부활은 십자가가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임을 더욱 분명하게 드러내는데 반해, 김 목사가 말하는 예수님의 부활은 교묘하게 십자가에 나타난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을 약화시키거나 가려버린다).

그러므로 이런 생각은 자연스럽게 십자가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결론을 내리게 하여, ‘부활이 없으면 죄 사함도 없다’고 하면서 십자가보다 부활의 우월성을 강조할 수밖에 없도록 한다.

그러나 바울은 고린도전서를 쓰면서 15장 이전에서는, 김 목사가 그토록 중요하다고 강조하는 ‘부활’을 한 번도 언급한 적이 없다. 바울은 1장에서 고린도교회의 분열을 책망하면서 “그리스도께서 어찌 나뉘었느냐 바울이 너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혔으며 바울의 이름으로 너희가 세례를 받았느냐”(고전1:13)고 말할 때, ‘너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신 자’는 바울도 아볼로도 아닌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강조한다.

만약 부활이 ‘너희를 위하는’ 구원에 필요조건이었다면, 바울은 여기서 ‘부활’을 언급했을 것이다. 그러나 바울은 ‘너희를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 박히셨다’고만 말하고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너희 대신 십자가에서 대속제물이 되어 죽으셨다는 것이 죄인 구원의 필요충분조건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님도 십자가에서 숨을 거두시기 직전에 “다 이루었다”라고 말씀하셨다.

(김 목사는 이 예수님의 말씀을 부정한다. 그는 예수께서 부활하신 후에 하늘 성소에 들어가심으로 구원이 완성되었다고 주장한다. 그도 그럴 것이, 만약 김 목사가 “다 이루었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인정하면 ‘부활’이 구원을 헛되지 않게 할 만큼, 구원에 직접 작용하는 것처럼 가르치는 자신의 부활복음이 엉터리임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고린도전서에서 바울은 고린도교회에 복음을 전하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말하지 않았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전1:18)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사람보다 지혜롭고 하나님의 약하심이 사람보다 강하니라.”(고전1:23-25)

그렇다! 바울이 고린도교회에 전한 복음의 핵심은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라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 그리스도이다. 24절에서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 즉 십자가에 나타난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를 말하는 것이다. 25절에서 “하나님의 미련한 것”과 “하나님의 약한 것”도 동일하게 십자가에 나타난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를 말하는 것이다.

단, 고전15:3-4을 보면, 바울은 성경대로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함께 부활도 전했음을 알 수 있다.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 바 되셨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고전15:3-4)

여기서도 바울은 그리스도의 죽으심이 우리의 죄를 위한 사건임을 분명히 한다. 계속해서 바울은 성경대로 예수께서 실제로 다시 살아나셨음을 주지시킴으로,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해 죽으신 것이 우리의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역사임을 확인한다. 그럼에도 김 목사는 우리 죄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죽으신 자리에 십자가 대신 억지로 부활을 끼워 맞추려다 보니 성경 말씀을 무리하게 비약시키거나 거짓말을 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김성로 목사는 부활복음을 진리인양 성경에 없는 거짓말도 한다

그는 한마음 제자훈련 시리즈1, p.12에서 행4:1-3과 행12:1-2을 제시하고 다음과 같이 말한다.

“사도들이 백성에게 말할 때에 제사장들과 성전 맡은 자와 사두개인들이 이르러 예수 안에 죽은 자의 부활이 있다고 백성을 가르치고 전함을 싫어하여 그들을 잡으매 날이 이미 저물었으므로 이튿날까지 가두었으나.”(행4:1-3)

“그 때에 헤롯 왕이 손을 들어 교회 중에서 몇 사람을 해하려 하여 요한의 형제 야고보를 칼로 죽이니.”(행12:1-2)

“만약 이들이 부활을 목격하지 않았다면, 생명의 위협 때문에 예수님을 부인했던 베드로가 목숨 걸고 예수님의 부활을 증거하는 삶을 살 수 없었을 것이며, 또한 예수님의 제자였던 야고보 또한 순교자가 될 수 없었을 것이다.”(김성로 목사)

▲ 인간의 욕구에 부합하는 '웰빙복음' 전파자라고 비판받는 김성로 목사

그러나 성경 어디에서도 예수 부활을 목격한 것이 야고보를 비롯한 순교자들의 순교 조건임을 암시조차 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김 목사는 마치 예수 부활을 목격하는 것이 순교의 절대적인 조건처럼 말하므로 “부활”의 가치를 확대 포장한다. 아마도 김 목사는 그리스도의 부활을 목격하지 못한, 스데반과 순교자의 대명사인 저스틴 마터의 순교는 제대로 된 참 순교가 아니라고 말할 지도 모르겠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김 목사는 같은 페이지에서 “~더욱 분명한 것은, 예수님의 대적자였던 사울(바울)이 그의 일생을 바쳐 예수님의 부활을 증거하는 사람이 되었다는 것이다”라고 말하면서, 행9:20-22을 증거 본문으로 제시한다.

“즉시로 각 회당에서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전파하니 듣는 사람이 다 놀라 말하되 이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이 이름을 부르는 사람을 멸하려던 자가 아니냐 여기 온 것도 그들을 결박하여 대제사장들에게 끌어 가고자 함이 아니냐 하더라 사울은 힘을 더 얻어 예수를 그리스도라 증언하여 다메섹에 사는 유대인들을 당혹하게 하니라.”(행9:20-22)

그러나 제시된 본문에서는 바울이 예수의 부활을 증거했다는 언급이 없으며, 바울이 그의 일생을 바쳐 예수님의 부활을 증거했다는 김 목사의 말은 거짓말이다. 왜냐하면 바울 서신에서 부활과 십자가의 빈도수는 36:59로 부활보다 십자가가 월등하게 많이 언급되기 때문이다. 참고로 바울 서신에서 ‘부활’은 9회, ‘다시 살(리)다’는 성도가 다시 사는 것까지 포함시켜 27회이며, ‘십자가’는 21회, ‘죽다’에서 예수님의 죽으심만 38회 나온다(여기서 1-2회의 오차는 있을 수 있다). 이렇게 김 목사는 부활의 우월성을 증명하기 위해 뻔한 거짓말도 서슴지 않는다.

글을 마치며......

어떤 사람이 살인을 했다고 가정하자(십자가의 복음을 살인 사건으로 설명하는 것이 마음에 걸리지만). 처음에는 사람들이 그가 살인자라는 사실은 전혀 몰랐다. 그러나 나중에 결정적인 증거가 나와서 그가 살인자라는 사실이 만천하에 드러났다.

그런데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증거가 나타나기 전에도 그 사람은 살인자였다. 증거가 나타났기 때문에 그가 살인자가 된 것이 아니다. 단지 살인자였던 그가 증거 때문에 살인자로 드러났을 뿐이다.

이렇게 증거로 인해 어떤 사람이 살인자로 드러났으면, 그 다음은 살인자를 주목해야 한다. 왜냐하면 증거는 살인자를 드러내는데 필요한 것이지, 살인자보다 더 중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김 목사는 살인자보다 증거가 더 중요하다고 주장하고 있으며, 그 주장에 많은 사람들이 미혹되고 있다.

김성로 목사는 바울이 평생 부활을 전했다고 거짓말을 한다. 그러나 바울서신에는 온통 십자가이다. 김성로 목사의 설교나 성경 교재에는 온통 부활이다. 그러나 신구약 성경이나 찬송가에는 온통 십자가이다.

SNS 기사보내기
기사제보
저작권자 © 바른믿음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