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들어가는 말

신사도개혁운동에 대하여 탁월한 비판을 가하고 있는 정이철 목사는 그의 저서 『신사도 운동에 빠진 교회』에서 신사도개혁운동이 2000년대에 들어서서 본격적으로 그 모습을 드러냈으며, 현재 미국뿐 아니라 전 세계로 확산되고 있다고 주장한다.1) 신사도개혁운동이 전세계 기독교계에 번지고 있으며, 그 파급력과 성장 속도가 놀랍다. 「The World Christian Database」에 의하면 이미 2001년에 전 세계 5억 명이 넘는 기독교인들이 신사도개혁운동 교회에 속해있으며, 특히 아시아와 중남미, 그리고 아프리카에서 맹위를 떨치고 있다고 한다.2) 한국 교회 역시 신사도개혁운동의 활동 무대에서 제외되지 않고 있다. 그들은 신사도개혁운동만이 성장이 멈춘 한국 교회가 다시 회생할 수 있는 절대 대안이라고 주장하면서 자신들의 자리를 만들어 가고 있다.3)

▲ 신사도 운동 연구 논문을 발표하는 총신대 신학대원 양현표 교수

그런데, 이렇게 번성하고 있는 신사도개혁운동이 과연 성경적인 교회 운동인가를 심도 있게 살펴보아야 한다. 복음주의 권에 속한 대부분의 정통 교회들은 이 운동을 성경의 권위를 무너뜨리는 일종의 사이비(Sect)로 규정하고 있다. 반면 옹호자들은 이 운동이야말로 거스를 수 없는 성령의 사역이라고 강변하고, 비판자들을 향하여 성령의 자유로운 사역을 제한하고 있다고 오히려 비난하고 있다. 이렇게 첨예한 이슈가 되고 있는 신사도개혁운동에 대한 개혁주의적 관점이 당연히 요구된다 하겠다.

필자는 본 논고를 통해 신사도개혁운동에 대한 간략한 역사와 그들이 주장한 핵심 주장 몇 가지를 살펴본 후에, 그 중에서도 가장 핵심적인 주장이라 할 수 있는 신사도들(New Apostles)의 존재와 그들의 은사, 즉 초대교회에 존재했던 사도직과 그 사도들이 보인 초자연적 은사가 오늘 이 시대의 교회에도 현존하는가에 관해 답하려 한다. 또한 한국에서의 신사도개혁운동 현황에 관하여 간단히 살펴보고, 결론으로서 필자의 소견을 적으려고 한다.

2. 신사도개혁운동의 유래

신사도개혁운동은 1990년대 이후 일어나고 있는 성령운동 혹은 은사운동으로서, 와그너가(Peter Wagner)가 1997년에 정의한 교회 성장과 관련된 이론이다. Wagner는 이러한 신사도운동을 처음에는 “탈교파주의”(“Post Denominationalism”)으로 불렀다가, 1996년 이후 “신사도개혁운동”(New Apostolic Reformation Movement, NAR)으로 그 명칭을 바꾸었다.4) 와그너는 초대교회를 제1사도 시대라는 전제하에, 2001년부터 “제2사도 시대”가 시작되었다고 선언하고,5) 이 제2사도 시대의 사도들의 활동을 신사도개혁운동이라고 주장했다.

신사도개혁운동은 하루아침에 태어나지 않았다. 그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아마도 2세기의 성령운동 몬타니스주의(Montanism)6)까지도 올라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신사도개혁운동의 실제적인 기원은 오순절파/카리스마파 (Pentecostal/Charismatic) 성령운동을 촉발시킨 1906년의 아주사 부흥운동(Azusa Revival)7)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아주사 부흥운동으로부터 시작하여 1930-40년대의 “늦은 비 운동”(New Order of the Latter Rain)8), 1980년대 “캔자스시티 선지자 그룹”(Kansas City Prophets)9), 1980년대 윔버(John Richard Wimber)10)의 “빈야드 운동”11)(Vineyard Movement of Christianity), 1994년 아놋(John Arnott)의 토론토공항교회(Tronto Airport Christian Fellowship)에서 일어난 “토론토 블래싱”(Toronto Blessing)12) 등을 거쳐서 신사도개혁운동으로 발전하였다.

그런데 1989년, 각각 개별적 활동을 하던 빈야드교회의 윔버와 캔자스시티 선지자 운동의 비클(Mike Bickle)이 연합함으로 신사도개혁운동의 통일된 구조가 비로써 드러났다. 여기에 신학자 와그너(C. Peter Wagner)가 합류함으로 신사도개혁운동이 공식적으로 태동하게 된다. 정이철 목사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당시 존 윔버와 긴밀하게 교류하면서 많은 사상적 변화를 경험했던 피터 와그너도 캔자스시티 선지자들의 예언 사역에 영향을 받았다. 이때부터 그의 사상 속에 사도와 선지자직의 복원을 비롯한 신사도 운동의 신학적 형태가 짜이기 시작했다. …결국 2000년에 텍사스 주의 달라스에서 피터 와그너 등이 중심이 되어 사도들의 모임인 ‘국제사도연맹’(The International Coalition of Apostles, ICA)이 결성되어 신사도운동의 구체적인 형태가 세상에 나타나게 되었다.”13)

신사도개혁운동의 발전에 있어서 와그너의 신학적 영향은 가히 절대적이라 할 수 있다. 현재 그는 그 자신을 사도 중의 한 사람으로 여기고 있으며, 그는 마9:17을 인용하여 신사도개혁운동이 “새 포도주와 새 가죽 부대” 라고 주장하고 있다.14) 오늘날의 전통 교회들은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워진 교회가 아니라 “종교의 영”(the Spirit of Religion) 위에 세워져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에 의하면 이 종교의 영은 물론 거짓 영으로 신사도 운동을 방해하는 영이다.15) 신사도개혁운동의 발전에 관한 정이철 목사의 글을 다시 한 번 인용함으로 신사도개혁운동의 유래를 마무리하고자 한다.

“윌리엄 브랜험의 늦은 비 운동이라는 미혹의 영이 폴 케인과 밥 존스 같은 사람들을 통하여 미국 교회 속에 잠입하여 뿌리 내렸다. 보이지 않게 조용히 흐르던 물줄기는 다시 1980년대 켈리포니아와 1990년대 토론토에서 발원하여 세계 교회를 휘감는 거대한 빈야드 강이 되었다. 또한 그 강에 조금 늦게 합류한 마이크 비클이 있다. 그가 따로 후에 따로 떨어져 나와 캔자스시티에서 IHOP 기도원을 만들고서 물결을 더 크게 일으키고 있는 중이다. 이것이 신사도 운동이다.”16)

3. 신사도개혁운동의 주장

이제 신사도개혁운동이 말하는 주요한 주장들을 검초하려고 한다. 그들이 주장하는 내용은, 대동소이한 내용을 담은 와그너의 몇 권의 책을 통해서, 그리고 신사도개혁운동의 인터넷 홈페이지, 그리고 신사도개혁운동의 사도나 선지자로 불리는 릭 조이너(Rick Joyner),17) 빌 하몬(Bill Hamon),18) 자니 앤로우(Johnny Enlow),19) 신학자 케니스트레시(David Cannistraci) 등의 저서를 통해서 발견할 수 있다.

1) 오중목회(Five Fold Ministry)

신사도개혁운동의 가장 핵심적인 주장한 사도의 직분과 능력의 복원이다. 그들은 초대교회 이후 잃어버렸던 사도직이 현시대의 교회에 복원되고, 따라서 사도은사 역시 현시대의 교회 안에서 실행된다고 믿는다.20) 그들은 사도직 복원의 성경적 근거를 “그가 어떤 사람은 사도로, 어떤 사람은 선지자로, 어떤 사람은 복음전하는 자로, 어떤 사람은 목사와 교사로 삼으셨으니”(엡4:11)로 삼는다. 이 말씀에 근거하여 사도, 선지자(예언자), 복음전하는 자, 목사, 교사 등의 다섯 가지 직분이 교회 안에 지금도 존재한다고 주장한다.

신사도개혁운동에서 주장하는 바에 의하면, 사도는 세속화 된 사탄의 교회들과 교권주의에 물든 사악한 교회 지도자들이 그들의 특권을 유지하려다가 잃어버린 직분이다. 그런데 하나님이 현시대에 그 잃어버린 직분들을 복원시키셨다는 것이다. 와그너는 “신사도개혁운동의 가장 급진적인 특징은 사도의 직임이 오늘날 그리스도의 몸에서도 그 역할을 하고 있음을 널리 인정하게 되었다는데 있다”21)고 말하고 있다. 사도직의 복원을 강력히 주장한 케니스트레시는(David Cannistraci) 역시 사도직의 복원을 막는 것은 사탄의 전략이라고까지 말하면서 사도직의 복원을 사단에 대한 승리로 여기었다.22)

사도직이 복원됨으로 인해 사도은사도 복원되었음은 당연하다. 신사도개혁운동은 주장하기를, 이 시대의 사도들 역시 초대교회 사도들이 행했던 “표적과 기사와 능력”(고후12:12)을 보일 수 있다고 한다. 그 결과 이적, 신유, 귀신축출, 죽은 자를 살리는 일 등의 초자연적인 능력을 실행한다고 주장한다.23) 이 시대의 사도나 선지자의 능력은 성경시대의 사도가 행한 것보다도 더 큰 능력을 행할 수 있으며,24) 심지어 예수님이 행한 기적보다도 뛰어난 기적을 행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25) 예를 들어 병원 건물에 안수함으로 인해 병원 안의 모든 병자가 일시에 고침을 받을 수 있을뿐더러, 중력과 같은 자연의 법칙에 예외가 발생하는 명령까지도 할 수 있는 능력이다.26) 신사도개혁운동이 주장하는 사도의 능력은 초자연적 기적을 행하는 것으로만 제한되지 않는다. 더 놀라운 주장은 이들이 하나님으로부터 계시와 꿈과 환상을 직접 받는다는 주장이다. 다시 말하면, 성경의 권위와 동일한 권위의 새로운 계시가 사도를 통하여 임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하나님으로부터 직접적인 계시를 받는 능력 여부에 따라 다섯 가지 직책에는 분명한 서열과 사역의 한계가 있다. 사도는 다섯 직분 중에서 가장 우월한 지위이다. 그 이유는 과거의 사도가 그러했던 것처럼 오늘의 사도 역시 새로운 신적계시를 받고 그 계시를 교회에 적용함으로 교회의 기초가 되기 때문이다.27) 다음으로 선지자이다. 선지자 역시 신적계시를 받는 직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때때로 하몬(Bill Hamon)과 같은 유력한 선지자는 사도와 동등한 대우를 받기도 한다.28) 복음전하는 자와 목사와 교사는 하나님의 계시를 직접 받지 못한다는 차원에서 사도나 선지자에 비해 열등한 직분이다. 이들은 사도나 선지자에게 순종해야만 하며, 이들의 역할은 이미 성경에 나타난 옛 계시나 혹은 사도나 선지자가 받은 새 계시를 가르치는 것으로 제한된다.29)

2) 왕국의 복음(Gospel of the Kingdom)

“왕국의 복음”은 전통적인 “구원의 복음(Gospel of Salvation)”과 대치되는 개념이다. 전통적인 “구원의 복음”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인간을 죄로부터 구원하신다는 내용이다. 그러나 “왕국의 복음”은 하나님께서 복원된 사도와 선지자들의 리더십을 통해 개인의 구원뿐만이 아니라 이 땅(지구)을 실제로 통치(Dominion)하게 하신다는 내용의 복음이다. 신사도개력운동가들은 이러한 왕국의 복음은 전통적인 구원의 복음보다 우월하고 완성된 복음이라고 주장한다.30)

“왕국의 복음” 이론은 신사도개혁운동의 또 다른 주장인 “통치론(Dominionism/Dominion Theology)” 혹은 “현세왕국(Kingdom Now)” 이론으로 연결된다. 신사도개혁운동이 주장하는바, 땅의 통치는 교회가 사도와 선지자의 리더십을 통해 이루어내야만 하는 사명이다. 원래 인간은 이 땅의 통치권을 갖고 있었는데, 죄를 범함으로 그 통치권을 상실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그 통치권이 회복되었으며, 이 일을 위해 사도와 선지자를 다시 복원시키셨고, 오늘날 교회는 그 복원된 사도와 선지자들을 통해 실제로 땅에 대한 통치권을 되찾아야 한다는 것이다.31)

결국 “통치론”을 성취하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준비하는 것이며, 사도나 선지자, 그리고 그들을 따르는 사람들의 초자연적 이적은 그 통치권을 신속하게 되찾는 절대적 도구라고 주장한다. 와그너는 이 “통치론”의 근거를 주기도문(마6:9-13)에서 찾으며, 통치론의 수행을 지상대명령(마28:18-20)의 완수로 보고 있다. 그는 “하나님의 나라는 도래해야만 하고 하나님의 뜻은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이 땅에서도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32)라고 했으며, 또 지상대명령에 나타난 “모든 민족”(“all nations”)을 개인이 아닌 실제 지구상의 국가들과 특정한 지역으로 보고 있다.33)

3) 칠대 산 정복(Seven Mountain Mandate / Seven Mountain Prophecy)

신사도개혁운동은 “통치론”을 펼치기 위한 하나님의 전략을 “칠대 산 정복”으로 말하고 있다. 칠대 산은 이 땅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산들을 의미하는데, 정부, 방송, 가정, 경제, 교육, 종교, 예술 등의 일곱 가지 사회적 도구들을 의미한다. 미국의 사도라고 칭해지는 앤로우(Johnny Enlow)는 이 산들이 사회를 이루고 있는 중요한 기둥들로 말하면서, “[미국의] 모든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 구조를 정복하기 위해 주의 백성들을 사용하시는 것이 주님의 계획”이라고 강조했다.”34) 그에 의하면 칠대 산 중에서도 “정부”라는 산은 교회(사도)가 반드시 통치해야만 하는 매우 중요한 산이다. “왜냐하면 ‘정부’는 다른 여섯 가지의 산을 다스리고 조정할 수 있는 법과 규정을 만들기 때문이다”35) 앤로우는 하나님께서 지금 “정부”라는 산을 정복하기 위해 특별한 사도를 준비시키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36)

4) 전략적 차원의 영적전쟁(Strategic-Level Spiritual Warfare)

신사도개혁운동이 말하는 전략적 차원의 영적전쟁은 이 땅에서 사단의 권세를 완전히 몰아내는 전쟁을 의미한다. 신사도개혁운동이 주장하는 바에 의하면, 각 지역마다 그 지역의 권세를 잡은 사단들(Territorial Spirits)이 있다. 그 사단들을 몰아내야만이 “왕국의 복음”이 전파되어 땅의 통치력을 회복할 수 있다. 전통적인 복음주의자들의 영적 전쟁은 사단과 대적하기 위해 기도와 말씀을 사용하며, 유혹에 대한 개인적인 승리, 그리고 때로는 개인을 사로잡은 사단을 몰아내는 것 등이다. 그러나 신사도개혁운동의 영적 전쟁은 수백만의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고 있는 그 지역의 고위급 사단과의 전쟁이다. 그들은 이러한 주장에 대한 성경적 근거로 단10:13, 20을 사용한다. 즉 본문 속의 “바사 군주”가 페르시아 제국을 다스리던 사단이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지역을 다스리는 사단과의 영적 전쟁을 위해 신사도개혁운동주의자들은 영적도해(Spiritual Mapping), 땅 밟기 중보기도(Prayer Walk), 전쟁기도와 예배(Warfare Prayer and Warfare Worship), 동일시 회개(Identificational Repentance) 등의 전술을 제시하고 있다.

5) 종말시대의 부(富)의 대 이동(The Great End-Time Transfer of Wealth)

그리스도의 재림 전에, 하나님은 모든 악한 자들의 물질적 재원을 이 땅의 사도들에게로 옮기실 것이라는 주장이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시는 이유는 이 땅의 왕국을 세우기 위해 사도들에게 경제적 능력이 필요하다고 보기 때문이다.

6) 종말시대의 대 회심(Great End-Time Harvest)

그리스도의 재림 전에, 상상할 수 없는 엄청난 사람들의 회심이 이루어질 것이라는 주장이다. 이 회심은 기독교 역사상 유래가 없는 최다 영혼의 수확이 될 것이라고 한다. IHOP의 비클(Bickle)은 one to two billion 명이 회심 할 것이라고 예상한다. 그리고 이 영적 수확은 사도와 선지자와 그들의 추종자들이 행하는 초자연적 기적을 통해 이루어질 것이라고 주장한다.

7) 하나님의 아들의 현현(Manifest Sons of God37))

사도와 선지자에 의해 새로운 계시를 지속적으로 접한 사람은 점점 더 많은 초자연적 능력을 소유하게 되고, 결국에 가서 그들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드러나게 된다는 주장이다. 이렇게 드러난 하나님의 아들들은 이생에서 병과 죽음을 이기고, 하나님의 심판을 집행하는 대리인이 된다는 것이다.38) 이들은 이러한 주장의 성경적 근거로 롬8:19의 “피조물이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것이니”를 제시한다.

4. 신사도개혁운동의 주장에 대한 개혁주의의 비판

지금까지 신사도개혁운동이 주장하는 주요 주장들을 살펴보았다. 사실 이들의 모든 주장은 개혁주의에서는 받아들일 수 허무맹랑한 이야기이다. 성경을 아전인수식으로 풀이한 결과이다. 신사도개혁운동은 그들의 모든 주장을 펼칠 때 진리의 원천인 성경으로부터 시작하지 않는다. 그들이 경험하고 관찰한 현상으로부터 그들의 논거를 시작한다. 성경은 단지 그들의 그 현상을 추인하는 도구로 사용될 뿐이다. 자신들의 주장을 위해 사용하는 대부분의 성경 구절들(엡4:11-13; 엡2:20; 고전12:28; 마6:9-13; 행3:21; 고전15:24-25; 롬8:19; 단10:13,20)은 그들의 경험과 관찰된 현상을 뒷받침하기 위한 도구로 사용되고 있음이 명백하다. 그렇기에 성경 해석과 적용이 바르지 않고 단편적이다.

필자는 제한된 여건상 신사도개혁운동의 모든 주장을 비판하려고 하지 않는다. 필자는 그들의 주장 중에서도 가장 핵심적이며, 신사도개혁 운동의 가장 중요한 기반이라 할 수 있는 한 가지, 이것만 무너지면 신사도개혁운동의 신학적 사상적 구조 전체가 무너지는 그 한 가지, 즉 “사도직과 사도은사의 복원”에 관해서만 비판하려고 한다. 이 일을 함에 있어서 필자는 세 가지 방향에서 접근하려고 한다. 첫째는 성경에 나타난 사도의 자격을 규명하는 관점에서, 둘째는 사도와 관련된 본문 해석학적 관점에서, 마지막으로 성경의 속성과 관련된 신학적인 관점에서 접근하려고 한다.

1) 성경에 기록된 사도의 자격과 용례

“사도”(“Apostolos”)라는 말은 문자적으로 “내보내다”라는 의미의 “apostello”로부터 비롯되었다. 키텔(Gerhard Kittle)은 말하기를 “신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하나님의 권위를 갖고 하나님께 봉사하기 위하여 나가는 것’이라는 신학적 토대 위에서 사용되었다”39)고 했다. 그러므로 “apostolos”라는 단어는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 하나님의 권위와 함께 보냄을 받은 자를 의미한다. 이러한 의미의 사도직은 예수님이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전파할 권세를 주어 12명의 제자들을 파송했을 때 처음 시작되었다.40) 즉, 사도직은 12명의 제자들에게 처음으로 주어졌다는 것이다. 그런데 “사도”라는 호칭이 반드시 12명의 제자들에게만 적용된 것은 아니다. 이 호칭은 예수님의 부활과 승천 이후 다양하게 사용되었다. 성경을 보면, “사도”라는 호칭이 적어도 네 가지 용례가 나타나 있다.

첫째로, 이 호칭은 예수님과 관련하여 사용되었다(히3:1, “우리가 믿는 도리의 사도이시며”; 요17:3, “그가 보내신바 예수 그리스도”). 이러한 용례는 예수님과 하나님의 관계를 나타내기 위함이다. 하나님을 보내신 분으로, 그리고 예수님을 보내심을 받은 자로 묘사하기 위해서이다. “사도”라는 단어의 두 번째 용례는 12명의 제자이다. 성경에 기록된 대부분의 “사도”라는 호칭은 이 경우에 해당된다. 이들은 예수님에 의해 선택되었고, 예수님에 의해 개인적으로 교육을 받았으며, 예수님에 의해 보냄을 받아 신약교회가 세워지는 기반이 되었다.

“사도”라는 단어의 세 번째 용례는 바울에게다. 바울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마지막으로 보았던 자이다(고전15:8). 그는 하나님의 뜻에 의하여(딤후1:1,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의 부름을 받아, 이방 세계로 보냄을 받아 이방 지역의 교회가 세워지는 기반이 되었다(롬1:1: 고전1:1). “사도”라는 호칭의 마지막 용례는 바울 서신서에 나타난다. 12명의 제자들 외에 바울에 의해 사도라고 불린 자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바나바(행14:4,14), 실라와 디모데(살전1:1; 2:6-7), 안드로니고와 유니아 등이다. 사실 이 마지막 용례가 신사도개혁운동이 주장하는 사도의 지속성의 근거로 사용된다.

그렇다면 사도로 호칭된 이들이 누구인가? 과연 이들 역시 12명의 제자와 동등한 권위와 은사를 가진 동일한 반열의 사도로 간주될 수 있는가? 아니다. 이들이 누구였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먼저 바나바를 보자. 바나바는 안디옥 교회를 보살피기 위해 예루살렘 교회로부터 파송을 받았다. 그리고 바울과 함께 최초의 선교사로 떠났다. 또한 바나바는 바울이 고후8:32에서 말한 “여러 교회의 사자(‘Apostolos’)들” 중의 한 사람임에 분명하다. (“사자들”이 원문에는 “사도”이다. 그러나 여러 번역본에서는 “대표자” “파송자” “사자” 등으로 표현하고 있다.) 실라는 선지자이었다(행15:32, “유다와 실라도 선지자라”). 그리고 바울의 두 번째 전도 여행의 동행자였다(행15:36-41). 그는 데살로니가서를 바울과 함께 기록했다(살전1:1, “바울과 실루아노와 디모데는....... 편지하노니”; 살전2:6-7, “우리는”). 그는 또한 베드로를 위한 대필자 역할을 감당하기도 했다(벧전5;12, “실루아노로 말미암아 너희에게 간단히 써서 권하고”). 디모데는 바울의 영적 아들이었다. 바울과 동행한 선교사요, 에베소 교회 목회자였다. 바울은 그에게 에베소 교회의 질서를 세우고 장로를 임명할 권한을 주었다.

이상에서 살펴본 것과 같이 바나바, 실라, 그리고 디모데의 공통점은 사도 바울의 직접적 감독을 받고 있는 자들이며, 바울의(사도의) 권위를 위임받은 사람들이란 사실이다. 또한 이들은 초대 교회의 선교와 목회에 핵심적인 역할을 감당한 자들이다.41) 바울은 분명 그들이 바울 자신의 권위를 위임받아 목회 사역을 감당하고 있었기에 그들을 사도로 언급하였을 것이다.

안드로니고와 유니아에 관해서는 해석이 분분하다. 하나는 그들이 사도라는 해석과 다른 하나는 그들이 사도들의 존중을 받았다는 해석이다(롬16:7, 한글 성경, “사도들에게 존중히 여겨지고” 영어 성경, “They are outstanding among the Apostles”). 따라서 안드로니고와 유니아의 경우는 해석상의 난제로 인해 사도로 분류되었는지조차도 불분명하다. 필자는 한글 성경의 번역이 보다 타당하다고 본다. 그럴 경우 이들 역시 사도의 인정을 받은, 사도의 직접적 권한을 위임받은 교회의 신실한 일꾼이다.

따라서 사도라고 불린 이 사람들에 대한 결론을 내릴 수 있다. 이들은 12명의 사도들과 동일한 반열의 사도라기보다는 사도의 직접적인 관리 하에 사도의 권위를 위임받아 복음을 전하고, 사도의 권위를 위임받아 목회를 충성스럽게 감당하는 사역자를 가리킨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42) 와그너는 단순히 이러한 사람들이 사도로 불렸다는 이유만으로 사도의 지속성을 주장하지만43) 이들이 당시의 사도들과 동등한 권위와 능력을 가졌다고 볼 수 있는 어떤 증거도 없다.

그렇다면 진정한 사도들은 누구인가? 진정한 사도는 열 두 제자와 바울뿐이다. 진정한 사도가 될 자격 요소가 성경에 잘 나타나 있다. 첫째는 예수님에 의해 직접 지명되어야 하고(마10:1-4; 눅6:12-16), 둘째는 예수의 부활을 직접 목격해야만 하며(행1:21-22; 고전9:1; 15:7-8), 셋째는 신적인 표적이 따라야 하며(고후12:12, “표적과 기사와 능력”), 넷째로 신적인 권위를 가진 계시를 받아야 하며(유1:17), 마지막으로 신약 교회의 기반(엡2:20)이어야 한다. 이러한 조건을 다 갖추어야 진정한 사도이다. 그리고 이 모든 조건을 갖춘 자들은 오직 열 두 제자와 바울뿐이다.

따라서 진정한 사도는 성경 시대에만 존재했을 뿐 더 이상 지속될 수 없고, 또 누군가가 대신할 수도 없다. 왜냐하면 성경 시대의 사도들 외에 어느 누구도 성경에 기록된 사도의 자격 조건을 만족시킬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런 견해는 여러 신학자들의 지지를 받는바, 맥아더(John MacAthur)는 참된 사도는 맛디아를 포함한 12명의 제자와 바울뿐이라고 분명하게 주장하고 있다.44)

사도직과 사도은사는 특정한 기간에 신약 교회가 세워지기 위해 주어진 직책과 은사이다. 사도직의 지속성 혹은 복원에 대한 어떤 증거도 찾을 수 없다. 바울이 그의 서신에서 그토록 강하게 자신의 사도권을 주장했다는 사실은 사도직이 숫자나 시대의 제한을 받았을 뿐 아니라 더 이상 지속되지 않음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2) 사도와 관련된 성경구절의 잘못된 해석

신사도개혁운동은 고전12:28과 엡4:11을 통해서 사도직의 지속성과 사도은사를 주장한다. 즉, 고전12:28과 엡4:11의 말씀을 성령의 은사로 간주하고, 사도은사가 계속 존재하며, 당연히 그 은사를 소유한 사도들이 현시대 교회에도 존재해야만 한다는 논리이다. 그런데 과연 이 말씀들이 은사를 의미하는 구절들인가?

먼저 고전12:28을 보자. 고린도전서는 바울이 고린도 교회의 분열과 은사오용에 관한 내용을 전해 듣고 이에 대한 교훈을 주기 위해 기록한 편지이다. 그 중에 고전 12장은 은사의 바른 사용에 관한 내용이다. 바울은 “몸”이라는 은유를 통해 교회를 설명하는 중에 28절에 이르러 “하나님이 교회 중에 몇을 세우셨으니 첫째는 사도요 둘째는 선지자요 셋째는 교사요, 그 다음은 능력을 행하는 자요, 그 다음은 병 고치는 은사(‘charismata’)와 서로 돕는 것과 다스리는 것과 각종 방언을 말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런데 이 구절의 우리말 성경 번역은 헬라어 원문의 의미를 그대로 전달하기에 한계가 있다. 헬라어 원문의 의미 그대로 번역한 영어성경(KJV)을 보면, 본문의 후반부를 “…then gifts (‘charismata’) of healings, helps, governments, diversities of tongues”로 번역하고 있다. 사도, 선지자, 교사, 능력 행하는 자까지는 독립된 직책으로 나열되어 있고, 병 고침과 돕는 것과 다스림과 방언은 “은사”라는 단어에 종속되어 있다. 이것이 원문의 정확한 의미이다. 이러한 사실은 바울이 사도나 선지자나 교사나 능력 행하는 자를 은사로 보지 않았음을 암시한다. 즉 본문의 “사도”는 “사도은사”를 가리키지 않는다.

나아가 본문의 “세우셨으니”의 헬라어 “etheto”는 영어로 “appointed”로 번역되며, 이것은 어떤 장소에 무엇을 위치하게 하거나 아니면 어떤 직책에 누군가를 공식적으로 임명하는 것을 의미한다.45) 그러므로 28절 전반부는 직책을 의미하고, 후반부는 영적 은사를 의미한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 피(Gordon Fee)는 이러한 결론을 지지하고 있다. 그는 “바울이 성령과 사도직을 직접적으로 연결시키는 부분은 없다. 바울의 사도직은 하나님의 뜻에 의해 그리스도로부터 받았다. 그는 결코 그의 사도직이 비록 성령께서 선물(‘gift’)로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성령의 은사(‘charism’)라고 확실하게 언급하고 있지 않다”고 했다.46)

엡 4:11에서도 같은 결론을 얻을 수 있다. 에베소서 4장의 중심주제는 교회의 통일성(“하나 됨”)이다. 바울은 교회가 하나 되는 조건을 하나님의 은혜라고 말한다. 이 사실은 4:7의 “우리 각 사람에게 그리스도의 선물의 분량대로 은혜를 주셨으니”에서 발견된다. 하나님의 선물인 “은혜”(“Charis”)가 교회에 주어짐으로 교회가 하나 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하나님의 선물인 “은혜”가 구체적으로 무엇인가? 바울은 11절에서 밝히고 있다. “그가 어떤 사람은 사도로, 어떤 사람은 선지자로,……삼으셨으니”라고 했다. “삼으셨으니”는 원문대로 번역하면 “주었다”(gave)이다.

정리하면,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통일성을 위해 여러 직분을 가진 사람을 교회에 선물(gift)로 주셨다고 말한다. 만약 바울이 이곳의 직책을 은사로 여겼다면, 일반적으로 은사를 가리키는 “charismata”라는 단어를 사용했어야만 한다. 이 단어가 사용되지 않았다는 점은 엡4:11이 은사 목록이 아님을 자명하게 말하고 있다 하겠다.47) 결론적으로, 엡4:11의 직책들은 교회의 통일성을 위해 주어진 하나님의 선물이다. 즉 하나님은 교회의 통일성을 위해 말씀의 사역자들을 선물로 주셨다는 것이다. 본문의 “사도”가 결코 “사도은사”를 의미하지 않는다.

결론적으로, 엡4:11과 고전12:28의 “사도”(apostolos)는 “사도은사”로 해석될 수 없다. 사도와 사도은사는 초대교회의 진정한 12사도와 바울에게만 적용되고 그들에게만 주어진 은사이다. 이러한 성경구절들은 오늘날 성령의 은사로서의 사도은사의 존재를 주장하고, 그 은사의 활용으로 인한 계시와 기사와 이적과 능력을 주장하는 근거로 사용될 수 없다.

3) 성경의 권위 부정

사도의 직분이 아직도 존재하고 더불어서 사도은사가 나타난다고 주장하는 신사도개혁운동은 “오직 성경으로”(sola scriptura)를 주장하는 개혁주의와 정면으로 대치된다. 신사도개혁운동은 성경시대에 존재했던 사도직과 사도은사가 복원됨으로 인해 그들을 통해 성경 외의 새로운 계시가 주어지며, 성경 시대 사도들이 행했던 것과 동일하거나 그 이상의 기사와 이적과 표적이 나타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이러한 주장은 성경의 필요성, 권위성, 명료성, 그리고 충족성을 주장하는 개혁주의 성경관에 맞지 않다.48)

특별히 현시대 사도들을 통한 추가적인 계시의 가능성과 당연성을 주장하는 것은 성경의 충족성을 부인하는 것으로서, 성경 전체의 권위를 무너뜨리는 이단적 주장이라 하겠다. 박영돈 교수는 성령은 “성경이 알려주지 않는 것을 계시하지 않는다”라고 단호히 말한다. 개혁주의는 사도직과 사도가 보였던 이적과 기사와 표적은 성경이 완성되기 전까지의 한시적이었던 직분과 은사로 간주한다. 성경이 완성된 이후로는 성경이 사도들을 대신하여 교회의 기초가 되었다고 믿는다. “사도들과 선지자들이 사라진 자리를 차지한 것이 완성된 성경이다.”49)

5. 한국의 신사도개혁운동

김재성 교수는 “2009년부터 한국에 널리 퍼져나가고 있는 신사도 운동은 그 뿌리가 미국의 엉터리 은사운동가들이다”50)라고 그의 책에서 밝히고 있다. 현재 한국에서 활동하고 있는 신사도개혁운동과 관련된 단체나 교회는 하몬(Bill Hamon)이 설립한 「Christian International」의 한국 지부 「C. I. Korea」(책임자: 아가페 신학연구원 원장 김태진), 「WLI」(「Wagner Leadership Institute」) 한국지부(책임자: 과천 새서울 교회 홍정식, 예장 합신에서 2004년 목사 제명), 「한국 기독교 영성 총연합회」(예영수), 「HIM Korea」(이성대), 「엘리야 기도 운동」(김종필), 「에스더 기도 운동」(이용희), 「영동제일교회」(김혜자), 「큰 믿음 교회」(변승우) 등이다. 정이철 목사는 온누리교회 3인방인 손기철(「Heavenly Touch Ministry」), 김하중(「하나님의 대사」), 송만석(「Korea Israel Bible Institute」)을 비롯하여 「인터콥」(최바울)까지도 신사도개혁운동권에 포함시키고 있다.51)

 

6. 나가는 말

필자는 성경에 기록된 모든 신비적 은사(Miraculous Gifts)가 완전히 중단되었다고 주장하는 철저한 은사중지론자는 아니다. 성경의 신비적 은사의 가능성을 열어놓고 있다. 그러나 그러한 은사들에 실행과 현상에 관해서는 매우 조심스러운 입장이어만 한다고 믿는다. 또한 필자는 모든 성령 운동이 비성경적이라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성경적이고 건전한 성령운동을 인정한다. 기독교가 “신비”를 품고 있는 종교라는 것을 인정한다. 필자는 다만 성경시대의 사도직분과 사도은사가 회복되어 신비한 능력과 현상이 일어나는 것이라는 신사도개혁운동에 결코 동의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사도직 복원과 사도은사의 재현은 비성경적인 주장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오직 성경으로”를 거부하고 “성경 외 계시”(“Scripture Plus Apostolic Tradition”)를 주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성경의 권위를 전혀 인정하지 않고 성경 본문을 자가당착적으로 해석하고, 역사적이고 전통적 신학을 부인하는 자들만이 주장할 수 있는 이론이다. 사도는 오직 성경시대에만 존재했던 특별한 직무요 은사이다. 따라서 오늘날 사도직의 복원에 기초한 신사도개혁운동은 비성경적인 종교운동이라 할 것이다.

교회의 양적 성장이 모든 신학적, 역사적, 해석학적 오류를 정당화하는 수단이 될 수 없다. 와그너의 주장한 바와 같이, 실제로 신사도개혁운동의 교회들은 양적으로 성장하고 있다. 사람들이 모여들고 재정도 풍부해진다. 그들 나름대로의 전도와 선교의 바람도 분다. 와그너는 그의 저서 『21세기 교회성장의 지각변동』에서 신사도개혁교회들의 이러한 부흥과 풍성함과 선교적 열정을 제시함으로56) 신사도개혁운동의 정당성과 성경적 타당성을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사람이 모이고 재정이 풍부해지고 그로 인한 선교 활동이 왕성하다고 해서 성경적인 교회라고 볼 수는 없다.

와그너는 신사도개혁교회의 부흥의 예를 주로 라틴아메리카나 아프리카 혹은 아시아에서 찾는다. 그런데 필자는 그 중의 라틴아메리카의 교회들에 익숙하다고 할 수 있겠다. 미국에서의 목회를 통해 자주 중남미를 왕래하였기 때문이다. 필자는 중남미 지역의 교회를 보면서 저들이 정말 성경이 말하는 기독교인가 하는 생각이 들 때가 많았다.

와그너가 신사도개혁교회라고 분류한 그러한 교회들을 예로 들면서 신사도개혁교회는 민주주의 교회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필자의 관찰에 의하면 그들만큼 설립자 일인 중심체제의 독재적 교회는 아마도 없을 것이다. 적어도 필자의 관점에 의하면, 와그너가 예로 사용하는 그러한 교회들은 매우 이기적인 교회들이다. 그들은 어떤 해외 선교나 자국 선교에 관심이 없다. 그저 자신의 교회가 비대해지만을 위해 존재할 뿐이다. 그렇게 큰 오순절 교회(신사도개혁교회)들이 즐비하면서도 자신들의 나라의 선교와 구제를 책임지지 않는다. 아직도 교회 설립이나 빈민 구제를 한국 선교사들을 비롯하여 많은 선교사들이 떠맡고 있다.

예배 스타일 역시 매우 토착적이다. 그들의 문화적 배경을 아무리 고려한다 하더라도, 토속적인 문화와 어우러져서, 흥분과 무질서, 무속적 행위, 쓰러짐, 예언 등으로 진행되는 그들만의 예배 모습은 성경적인 예배라고 하기에는 분명 거리가 있다. 그들 나라의 가톨릭이 진정한 가톨릭이 아니라고 하듯, 그들의 교회도 진정한 의미의 교회라고 하기 어렵다. 필자의 확신으로는 라틴아메리카의 교회 부흥은 진정한 의미의 교회 부흥이 아니다. 따라서 와그너의 주장은 틀렸다.

필자는 교회성장학이란 학문을 위한 두 가지 접근 방법이 있다고 본다. 하나는 성경으로부터 시작하는, 신학으로서의 교회성장학이다. 성경에서 원리를 도출하여 그것을 신학으로 정립한 후에 그 원리를 이 땅의 교회의 성장과 부흥에 적용하고 평가하는 것이다. 이러한 교회성장학은 어떤 교회가 아무리 성장한다 하더라도 성경적 원리에 맞지 않으면 성경적인 교회 성장이라고 하지 않는다. 즉, 신학이 현장을 평가한다.

그러나 정 반대로 접근하는 교회성장학이 있다. 이것은 현장의 현상으로부터 시작한다. 어떤 교회가 부흥하면 그 현상을 연구하여 원리를 만들고, 그 원리를 뒷받침하기 위해 성경적 근거를 찾는다. 그렇기에 성경을 전체적으로 사용하지 않고 단편적으로 필요한 부분만 사용한다. 마치 이단이 자신들의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성경의 일부분을 사용하는 것과 같다. 이들에게는 경험이 우선이요 현장이 우선이다. 즉, 현장이 성경을 지배한다.

이러한 접근 방법은 교회성장학 신학이 아니라고 필자는 감히 선언한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한국의 교회성장학은 후자의 경우라고 판단한다. 그렇기에 교회성장학이 교회를 성장시키는 방법으로만 여겨지게 된 것이다. 그 결과 신사도개혁운동까지도 교회성장학의 한 부류로 보여지는 것이다. 이러한 오용된 교회성장학의 배경은 풀러신학교를 중심으로 한 교회성장학의 발전이라고 말하고 싶다. 그리고 그 핵심은 피터 와그너였다고 감히 주장한다. 와그너는 지금 신학적 변절을 거듭하여 신사도개혁운동의 선봉장이 되어 있다.

와그너는 그 자신이 정통적인 교회에서 빠져 나온 것을 사실은 자랑스럽게 여기면서 그의 거의 모든 책에서 자신이 신사도개혁운동으로 돌아선 것을 간증하고 있다. 전술한 바와 같이 신사도개혁운동과 관련된 와그너의 저술은 대동소이한 내용으로 채워져 있다. 한 결 같이 그가 제시한 교회들의 경험과 현상 등을 성령의 역사로, 그리고 오늘날 교회를 위한 절대적 기준으로 제시하고 있다. 신사도개혁 교회들만이 성숙한 교회요 새 포도주와 새 부대라고 주장한다. 반면 개혁신학을 가리켜 “시들어가는 튤립”57)이라고 조롱하고 있다.

하지만 와그너의 주장은 분명 비성경적이다. 다분히 성경보다는 현상으로부터 시작한 억지 주장이다. 그는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맺어진 새 언약의 효용성과 진리성을 무시하고 있다. 새 포도주는 그리스도의 흘리신 피를 상징한다. 그런데 와그너는 그 새 부대를 신사도개혁운동으로 새 포도주를 신사도개혁운동의 표적과 기사와 은사로 바꾸어 버렸다. 결국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보혈의 공로를 삭제한 것이다.

와그너는 그가 “신사도개혁교회”라고 명명한 것에 대해 대단한 자부심을 갖고 있다. 그러면서 “이 이름은 조롱받을 것인가? 역사가 말해 줄 것이다”58)라고 묻고 있다. 그렇다. 하나님이 주관하시는 역사가 말해 줄 것이다. 역사를 멀리 볼 필요도 없을 것 같다. 당장 신사도개혁운동의 바람을 일으키고 있는 당사자들이 이 땅을 떠났을 때 어떤 현상이 오는지를 보면 안다. 윔버가 죽은 후 그 왕성했던 빈야드 운동이 지금 어떻게 되어가도 있는지를 우리는 목도하고 있다. IHOP이 어떻게 될 것인지는 비클이 죽은 후에 보게 될 것이다. 개혁교회를 낡은 가죽부대로 치부하고 신사도개혁운동 바람을 일으키는 한국의 몇몇 리더들이 있지만, 그들이 이 세상을 떠났을 때 곧바로 그들의 주장에 대한 진위가 판가름 난다.

아무리 흥왕했던 이단들도 그 이단의 수장이 죽은 후, 그저 한 번 분 먼지바람이었음을 우리는 여러 번 경험했다. 그러나 진리의 정통신학은 때로 약해져 허물질 것 같은 때도 있지만 그러나 도도히 역사를 통해 그 명맥을 유지해 왔다. 신사도개혁운동도 분명 역사적이고 정통적인 개혁주의 신학에 기생하면서 먼지바람만 일으키다가 사라진 그 동안의 수많은 이단들의 운명을 따를 것이라고 확신한다. 왜냐하면 비 진리가 진리로 둔갑하는 것을 하나님은 용납하시지 않기 때문이다. 다만 개혁주의자들이 기억해야 할 것은 언제나 교회가 교회답지 못할 때 이러한 먼지바람들이 불었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지금의 신사도개혁운동의 출현과 흥황은 개혁주의자들을 향한 하나님의 경고로 여겨야 할 것이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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