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창모 목사의 <방언, 그 불편한 진실>(7회)

고린도전서 14장 1-3절을 전후 문맥을 통해 분석해 보면, 2절의 방언 이야기는 바울의 의견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전후 문맥을 통한 분석

바울은 고린도전서 14장 1절에서 “특별히 예언하려고 하라”고 고린도 교회에 명령한다. 그러고 나서 2-3절에서는 1절에서 예언하라고 명령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밝히고, 4절에서는 2-3절에서 말한 이유를 요약해서 다시 말한다.

헬라어 원문에서 2절은 접속사 ‘가르’(‘ga.r’, 왜냐하면-안타깝게도 한글 성경에는 반영되지 않았다)로 시작하고, 3절은 접속사 ‘데’(‘de.’, 그러나-다행스럽게도 이것은 한글 성경에 반영되었다)로 시작한다. 그래서 2-3절은, 1절의 이유로 제시하는 하나의 문장으로 보는 것이 더 낫다. 원문의 접속사를 살려서 1절과 2-3절을 다시 쓰면 다음과 같다.

"사랑을 따라 구하라 신령한 것들을 사모하되 특별히 예언을 하려고 하라"(1절). "(왜냐하면) 방언을 말하는 자는 사람에게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하나니 이는 알아듣는 자가 없고 (그) 영으로 비밀을 말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언하는 자는 사람에게 말하여 교회의 덕을 세우며 권면하며 위로한다"(2-3절).

‘왜냐하면’으로 시작하는 2-3절은 1절의 특별히 예언을 하려고 해야 하는 이유를 밝힌 것이다. 바울이 1절에서 고린도 교회에 “특별히 예언을 하려고 하라”고 명령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고린도 교회가 사람에게 해야 하는 방언으로 사람에게 하지 않고 하나님께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바울은 2절의 방언이 성령이 원하시는 은사의 목적과 얼마나 동떨어져 있는지 쉽게 확인할 수 있도록, 3절에서 성령의 뜻대로 교회의 덕을 위해 시행하고 있는 정상적인 예언을 동원해서 2절의 비정상적인 방언과 비교하고 있는 것이다.

당시 고린도 교회는 2절에 언급된 거짓 방언의 범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는 예언은 예배에서 점점 설 자리를 잃어가고 있었다. 바로 이것이 바울이 고린도전서 13장에서 교회의 유익을 위하는 사랑의 중요성을 길게 말한 후에 뒤이어 고린도전서 14장 1절에서 “특별히 예언을 하려고 하라”고 명령하는 이유다. 이렇게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예언’을 강조하는 이유는, 지금 위기에 빠진 교회를 위해 고린도 교회가 구해야 할 은사는 개인의 유익을 위한다는 방언(2절)이 아니라 교회의 유익을 위하는 예언(3절)이었기 때문이다.

‘비정상적인 방언’과 ‘정상적인 예언’의 비교

2절: 비정상적인 은사(거짓 방언)
1. 방언을 말하는 자
2. 사람에게 아니하고 하나님께 비밀을 말한다. 그러므로 공동체에 덕을 세우지 못한다.
3. 2절의 방언은 고린도전서 12-13장에 언급된 성령의 은사와 그 성격이 다르다.

3절: 정상적인 은사(예언)
1. 예언하는 자
2. 사람에게 말하여 교회에 덕을 세운다.
3. 3절의 예언은 고린도전서 12-13장에 언급된 성령의 은사와 그 성격이 같다.

4절: 2-3절의 요약
“방언을 말하는 자는 자기의 덕을 세우고 예언하는 자는 교회의 덕을 세우나니”
->
교회의 덕을 세우는 예언과 달리 자기의 덕을 세우는 방언은 성령의 은사가 아니다.

문장 분해를 통한 분석

2절: 방언을 말하는 자는 사람에게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하나니 이는 알아듣는 자가 없고 (그) 영으로 비밀을 말함이라.
3절: 그러나 예언하는 자는 사람에게 말하여 덕을 세우며 권면하며 위로하는 것이요.

2, 3절을 다시 쓰면 다음과 같다.
2절: A(방언을 말하는 자)는 B(사람에게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비밀을 말하는 것)이다.
3절: C(예언하는 자)는 D(사람에게 말하여 덕을 세우며) 권면하며 위로하는 것)이다.

위의 2절과 3절을 ‘그리고’와 ‘그러나’ 중 어떤 접속사로 연결하느냐에 따라서 그 뜻이 전혀 달라진다. 즉, ‘A는 B이다. 그리고 C는 D이다’와 ‘A는 B이다. 그러나 C는 D이다’의 의미는 하늘과 땅 차이라는 말이다. 전자처럼 두 문장을 접속사 ‘그리고’로 연결하면 두 문장 모두를 긍정하는 것이 되지만, 후자처럼 ‘그러나’로 연결하면 두 문장 중 어느 하나를 부정하는 것이 된다. 그러므로 ‘그리고’로 연결하면 문장 A와 B는 둘 다 긍정적인 정보가 되지만, ‘그러나’로 연결하면 문장 A와 B 둘 중 어느 하나는 부정적인 정보가 된다.1)

그렇다면 바울은 ‘그러나’로 연결된 앞과 뒤, 즉 방언을 말하는 자와 예언하는 자에 대한 언급 중 어느 것을 긍정하고 어느 것을 부정하고 있는가? 바울은 고린도 교회가 쉽게 답을 찾을 수 있도록 미리 고린도전서 12-13장에서 성령의 은사에 관해 길게 설명했다. 바울이 고린도전서 12장에서 강조한 것은 성령이 각 사람에게 은사를 주신 목적이 교회를 유익하게 하기 위함이라는 것이다. 또 고린도전서 13장에서 강조한 것은 교회의 유익을 위해 은사를 실패(자신의 유익을 위해 은사를 쓰는 것) 없이 사용하려면 교회를 사랑하는 마음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바울이 고린도전서 12-13장에서 설명한 성령의 은사는 고린도전서 14장 3절의 예언과는 잘 어울리지만, 14장 2절의 방언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따라서 본문에서 바울은 3절의 예언을 긍정하고 2절의 방언을 부정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특별히 예언을 하려고 하라”고 명령하는 바울의 심정

1절에서 고린도 교회에 “특별히 예언을 하려고 하라”고 명령하고 있는 바울의 심정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먼저 고린도 교회가 지금 어떤 처지에 있는지 알아야 한다. 왜냐하면 바울은 고린도전서 12장에서 성령의 은사는 성령이 “그의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시는 것이라고 가르쳤다. 그러므로 예언이라는 특정 은사를 지목해서 “특별히 예언을 하려고 하라”고 명령하는 것은 고린도전서 12장의 가르침과 충돌하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바울은 왜 “특별히 예언을 하려고 하라”는 명령을 고린도 교회에 하는 것일까? 그 까닭은 당시 고린도 교회의 상황이 방언의 은사보다 예언의 은사가 더 절실하게 필요했기 때문이다. 방언의 은사는 어쩌다가 고린도 교회의 예배에 들어온 소수의 외국인들을 위한 은사였지만, 예언의 은사는 예배 때마다 현지인 신자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들려주는 은사였다. 그러므로 방언의 은사는 고린도 교회 현지인 신자들에게는 사실상 필요 없는 은사이기도 하다. 물론 외국인들에게 말한 방언을 통역하면 현지인 신자들에게도 유익이 되지만, 그 유익은 듣지 않은 것보다 낫다는 정도일 것이다.

왜냐하면 이들은 초보 단계의 계시를 외국인에게 전하는 방언(방언은 복음을 모르는 외국인을 위한 것이므로 초보 단계의 계시를 담고 있을 것이다)보다 더 깊고 풍성한 계시를 담고 있는 예언을 들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현지인 신자들에게 꼭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현지어로 들을 수 있는 예언이지 통역 없이는 알아들을 수도 없는 방언이 아니었다. 더구나 그 방언이 통역할 수 없는 거짓 방언이라면 더 말할 나위도 없다.

그럼에도 당시 고린도 교회는 ‘사람에게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비밀을 말한다’는 거짓 방언의 범람으로, 정작 현지인 신자들에게 필요한 예언은 사라져 버릴 지경이 된 것이다. 특히 영적으로 미숙한 고린도 교회 신자들에게는 하나님의 말씀, 즉 예언을 듣는 것이 무엇보다도 절실하게 필요한데도 말이다. 그래서 바울은 고린도 교회를 향해 “특별히 예언하려고 하라”고 명령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고린도 교회를 향한 바울의 심정을 좀 더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고린도전서 14장 1-3절을 접속사 ‘가르’(ga.r, 왜냐하면)와 ‘데’(de., 그러나)를 살려서 다시 쓰면 다음과 같다. 

"(고린도전서 13장에서도 강조했지만,) 아무리 대단한 은사라 할지라도 교회의 유익을 위하려고 하는 사랑이 없는 은사는 아무 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교회의 유익을 위하려고 하는 사랑에 따라 은사를 구해야 한다. 그런데 지금 교회를 위해 가장 필요한 은사는 예언이다. 그럼에도 너희는 예언을 하려고 하지 않고, 자신을 드러내기에 유리한 방언만 하려고 하고 있다. 그래서 지금 교회는 깊은 영적 침체에 빠져있다. 따라서 너희는 은사를 구하되 교회의 유익을 위하여 특별히 예언을 하려고 애써라"(1절).

"왜냐하면 방언을 말하는 자는 사람에게 하지 않고 사람은 알아들을 수 없는 비밀을 하나님께 한다고 하기 때문이다. 지금 너희가 하는 방언은 성령의 뜻과는 달리 교회에 전혀 유익을 주지 못하며 오히려 교회를 해치고 있다. 그러나 예언하는 자는 방언을 말하는 자들과 달리 사람에게 말하므로 성령의 뜻대로 교회에 덕을 세우고 있다"(2-3절).

바울은 2절에서 고린도 교회의 방언을 결코 긍정적으로 말하고 있지 않다. 바울은 오히려 2절의 방언을 고린도 교회가 예언하려고 애써야 할 부정적인 이유로 제시한다. 왜냐하면 고린도 교회의 방언은 교회의 덕을 위하는 예언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즉 사람에게 말하지 않으므로 교회의 덕을 위할 수 없는 거짓 방언이기 때문이다.

고린도 교회의 방언은 사람에게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비밀을 말하는 것이므로 사람이 알아들을 수 없다. 그러므로 이 방언은 고린도전서 12장 7절에 언급된 성령이 교회에 은사를 주신 목적인 ‘(교회를) 유익하게 하려 하심’과는 다른 목적의 방언이다. 그 까닭은 방언의 은사가 교회를 유익하게 하려면 방언을 들어야 하는 대상이 하나님이 아니라 교회여야하기 때문이다.


--- 각  주 ---

1) 물론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다. 예를 들면, ‘사과는 동그랗다. 그러나 바나나는 길쭉하다.’와 같이 두 정보의 특징을 서로 비교할 때도 부정접속사를 쓸 수 있다. 그러나 고전14:2-3은 사정이 다르다. 왜냐하면 이 본문은 고전12-13장을 염두에 두고 읽어야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전후 문맥(고전12-13장)을 고려하면 3절의 ‘그러나’는 고전12-13장에서 말한 성령의 은사와 성격이 다른 은사, 즉 2절을 부정하기 위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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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창모 목사는 죽음에 이르는 병에 걸린 한국 교회를 신물 나게 체험하며 갈등하다 하나님을 향해 살아 있는 교회를 꿈꾸며 1999년 김천에서 ‘제자들 경배와 찬양교회’를 개척하였다. 이창모 목사는 한국교회를 죽음에 이르게 한 병이 단지 성공주의, 황금만능주의, 도덕적 윤리적 타락 등이 아니고 이미 한국교회에 만연된 잘못된 신학에 있음을 확신하고서 무엇이 바른믿음인지 신학적으로 깊이 고민하는 목사이다. 이창모 목사는 자신이 중2때 수련회에서 방언을 받았고, 대부분의 목사들이 그것을 ‘영의 기도의 언어’라고 가르치므로 의심없이 수 십년 동안 옹알거리는 방언현상으로 기도(?)하였던 대표적인 방언기도자였다. 김우현, 김동수 등이 저술한 거짓 방언을 미화하는 한심한 서적들을 접한 후 방언에 관한 깊은 신학적인 성찰을 시작하게 되었고, 결국 오늘 날 방언이라고 알려진 소리현상과 성경의 참된 방언은 무관하다는 사실을 확신하게되었다. 이전의 자신처럼 방언으로 기도한다고 착각하고 있는 다른 목회자들과 신자들을 진정한 복음으로 돌이키기 위해 <방언, 그 불편한 진실>(밴드오부퓨리탄,2014)을 출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