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로 목사의 부활복음은 도처에 성경을 인용하고 있으므로 마치 성경적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김 목사는 자신의 부활복음 브랜드를 진리인 것처럼 포장하기 위하여 성경을 왜곡, 변조를 일삼고 있으므로, 사실상 그의 부활복음에는 성경이 없다. 마치 붕어빵에 붕어가 없는 것처럼 말이다.

붕어빵은 팥 앙꼬 때문에 달콤하기는 하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사 먹지만, 그럼에도 붕어빵은 모양은 붕어일지라도 결코 붕어는 아니며, 그러므로 그 속에도 붕어는 없다. 마찬가지로 김 목사의 부활복음은 모양은 복음인 것 같으나 실상은 복음이 아니며, 그러므로 그 안에는 달콤한 부활 앙꼬는 있어도 진짜 성경은 없다. 이렇게 김 목사가 성경을 왜곡, 변조한 것이 사실이라면, 그는 갈1:8과 무관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나 혹은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갈1:8)

왜 바울은 천사라도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하면서 다른 복음을 경계하고 있는가? 그 이유는 복음을 왜곡하고 변조한 다른 복음에는 구원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부활복음 전하는 자는 물론이고, 그 부활복음을 붙들고 신바람 난 자들에게도 십자가로 말미암는 부활의 영광, 영원한 생명은 없다. 

부활이 모든 사람이 믿을만한 증거인가?

그러면 김 목사는 인용한 성경을 어떻게 왜곡, 변조하여 자신의 부활복음을 진리처럼 포장하는지를, 그가 쓴 성경교재 [한마음 제자훈련 시리즈1]을 통해 살펴보자. 이 성경교재의 1과는 “부활-모든 사람이 믿을 만한 증거”라는 타이틀로,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에게 믿을 만한 증거를 주셨다.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다”라고 하면서 행17:30-31을 그 증거 구절로 인용하고 있다.

“알지 못하던 시대에는 하나님이 간과하셨거니와 이제는 어디든지 사람에게 다 명하사 회개하라 하셨으니 이는 정하신 사람으로 하여금 천하를 공의로 심판할 날을 작정하시고 이에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것으로 모든 사람에게 믿을 만한 증거를 주셨음이니라 하니라”(행17:30-31)

김 목사는 여기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것으로 모든 사람에게 믿을 만한 증거를 주셨음이니라”는 말씀을 근거로,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에게 믿을 만한 증거를 주셨다.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다”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김 목사의 이런 해석은 아전인수(我田引水), 자가당착(自家撞着)의 위험천만한 해석이다. 왜냐하면 이것은 자신의 부활복음을 정당화시키기 위해 전후문맥을 깡그리 무시해버린, 천인공노(天人共怒)할 해석이기 때문이다.

행17:30-31에서 바울이 말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것으로 모든 사람에게 믿을 만한 증거를 주셨음이니라”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적어도 행17:18 이하에서 바울이 에비구레오(에피쿠르스 학파)와 스도이고(스토아 학파)와 무엇을 쟁론했는지를 살펴야 하고, 바울이 아레오바고에서 아덴 사람들에게 외치고 있는 설교의 요지가 무엇인지를 파악해야 한다. 그렇지 않고서는 김 목사처럼 아전인수 격의 피상적인 해석밖에 할 수 없을 것이다.

바울과 쟁론한 에비구레오(에피쿠르스 학파)의 신관은, 물론 에피쿠르스 학파의 신관을 단 몇 줄로 표현하는 것은 무리겠지만, 바울과의 논쟁만을 염두에 둔다면 다음과 같이 요약해서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신은 원자들의 복합체에 지나지 않기 때문에 세상을 창조하거나 멸망시킬 수 없으며, 그러므로 사람들을 심판하거나 상급을 줄 수도 없다. 따라서 두려워해야 할 초자연적인 신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인간의 최상의 삶은 지금 이생에서 최상의 쾌락을 추구하며 행복을 누리는 것이며, 최상의 행복을 성취하는 필수 요건은 신들과 죽음에 대한 두려움으로부터 해방되는 것이다.’

또, 스도이고(스토아 학파)의 신관은 모든 존재를 유물론적으로 보므로, 범신론적인 입장을 취한다. 모든 만물은 물질적인 존재이고, 우주의 궁극적인 재료는 신에게서부터 오지만, 그 신은 성경이 말하는 인격적인 신이 아니라 비인격적인 존재이다. 따라서 스도이고(스토아 학파)의 신은 세상에 관여하는 행동을 전혀 할 수 없다. 왜냐하면 이들의 신은 비인격적이며 우주적인 이성, 또는 영으로 만물 속에 내재할 따름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바울은 이들과 무슨 논쟁을 했을까? 누가는 바울이 이들과의 논쟁 이유를 바울이 ‘예수와 또 몸의 부활’을 전했기(행17:18) 때문이라고 말한다. 헬라 사람들에게 신의 부활은, 그들의 신화에 종종 등장하기 때문에 결코 새삼스러운 것이 아니다. 다만 그들이 받아들을 수 없는 것은 지고한 신이 천한 피조물이 되었다는 것(성육신)과 지고한 신이 천한 인간을 대신해서 죽었다는 것이다(이들에게 자연스러운 것은 신을 위해 인간이 제물이 되는 것이지, 인간을 위해 신이 제물이 되는 것은 받아들일 수 없는 금시초문이다).

따라서 바울이 전한 복음은, 이들의 신관에 비추어 볼 때, 지극히 어리석은 것이며, 이런 예수를 신으로, 구원자로 믿고 있는 자들도 어리석은 자일 수밖에 없다(고전1:18, 23, 25; 2:14 등). 또 그들에게 예수는 단순한 인간에 불과하므로 부활할 수 없으며, 이런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 다른 인간들도 부활할 수 없는 것은 마찬가지이다(헬라인들은 영혼불멸은 믿지만 죽은 시체의 부활은 믿지 않는다).

바울은 이런 신관에 젖어 있는 아덴 사람들에게, 먼저 만유를 지으신 하나님은 천지의 주재이심을 선포한다(행17:24). 이어 바울은 하나님을 더 구체적으로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하나님은 만인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자이시며(행17:25), 인류를 온 땅에 거하게 하시고, 그들의 연대를 정하시고, 거주의 경계를 한하시는 하나님이시다”(행17:26).

그리고 바울은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신 목적은 “인류로 하여금 하나님을 찾아 발견하게 하기 위함이며, 또 하나님은 인간 가까이에 계신다”(행17:27)라고 한다. 이렇게 바울은, 앞에서 언급한 헬라인들의 신관에 맞서, 하나님은 창조와 섭리의 하나님이시며, 그 하나님은 인간과 관계를 맺고 계신다고 말하고 있다.

이것을 근거로, 바울은 헬라인들에게 “신을 금이나 은이나 돌에다 사람의 기술과 고안으로 새긴 것들과 같이 여길 것이 아니니라”(행17:29)고 말함으로, 그들의 우상 숭배가 잘못된 것임을 지적한다. 그리고 그들에게 회개를 촉구하며 바울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전에는 너희들이 몰라서 하나님이 허물치 않으셨지만, 이제는 하나님의 구원의 복음이 온 천하에 전해졌으므로, 하나님은 너희의 우상 숭배를 용납하지 않으시고, 회개할 것을 명령하신다.”(행17:30)

그리고 바울은 이들에게 심판의 날을 언급하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하나님은 심판의 날에, 정하신 사람(예수 그리스도)으로 하여금 회개하지 않은 우상 숭배자들을 공의로 심판하게 하실 것이다. 하나님은 이 심판을 예수께 맡기기 위해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셨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마지막 날에 예수 그리스도를 심판자로 하여, 회개하지 아니한 우상 숭배자들을 심판하실 것임의 명백한 증거가 될 것이다”(행17:30-31)

이런 하나님의 계획은 베드로의 설교에서도 발견된다.

“우리에게 명하사 백성에게 전도하되 하나님이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의 재판장으로 정하신 자가 곧 이 사람인 것을 증언하게 하셨고”(행10:42)

지금까지가 대강이기는 하지만, 김성로 목사가 그의 교재에서 인용한 행17:30-31의 바른 의미이다. 행 17:30-31에서 바울이 제시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에비구레오(에피쿠르스 학파)와 스도이고(스토아 학파)를 비롯한 아덴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심판의 명백성을 분명히 하는 증거로 제시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성로 목사는 이 말씀을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모든 사람에게 믿을만한 증거, 즉 회개하고 예수를 믿어 구원함에 이를 수 있게 하는 증거’라고 가르치며, 성경의 원 뜻을 왜곡하고 변조시켰다. 그러므로 김 목사의 부활복음은 성경에는 없다. 

▲ 성경을 왜곡하면서 부활을 강조하고 있는 김성로 목사


성경에 예언된 부활을 표적으로 삼고 예수를 믿을 수 있는가?

김성로 목사는 그의 교재에서 고전15:3-4과 마12:38-40을 인용하면서, “우리는 느낌과 감정이 아닌 성경의 예언대로 이루신 부활의 표적을 통해서 예수님을 믿을 수 있다”고 단언한다. 설령 이것이 사실이라고 가정하더라도, 그가 인용한 성경은 불행하게도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해 주지 않는다.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 바 되셨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고전15:3-4)

고린도교회는 아덴의 사람들과는 다르게, 영지주의 영향을 받아 이미 영적인 부활을 체험했으므로 몸의 부활은 의미가 없다(딤후2:18 참고)고 하는 잘못된 신앙으로, 육체 부활을 믿지 않았다(물론, 영혼불멸은 믿지만 죽은 시체의 부활은 믿지 않았던, 헬라인들의 사상에서도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따라서 바울은 본문에서, 구약에 예언된 대로 예수님은 육체적으로 죽으셨고, 육체적으로 다시 살아났음을 강조함으로, 그리스도의 부활이 주 안에서 죽은 모든 자들의 육체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셨음(고전15:20)을 분명히 한다.

다시 말하면, 바울이 본문에서 언급한 그리스도의 부활은, 김성로 목사의 주장처럼 예수를 믿게 하는 표적이 아니라, 육체 부활을 믿지 않는 고린도교회로 하여금, 육체 부활을 믿게 하는 역사적 사실로 제시한 것이다. 따라서 김 목사는 바울이 말하고자 한 고전15:3-4절의 의미를 명백하게 왜곡했다. 또 김 목사는 “성경에 예언된 부활의 표적으로 예수님을 믿을 수 있다”는 주장의 근거로, 마12:38-40을 제시한다.

“그 때에 서기관과 바리새인 중 몇 사람이 말하되 선생님이여 우리에게 표적 보여주시기를 원하나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선지자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느니라 요나가 밤낮 사흘 동안 큰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 것 같이 인자도 밤낮 사흘 동안 땅 속에 있으리라”(마12:38-40)

예수님은 표적을 구하는 자들을 ‘악하고 음란 세대’로 규정하신다. 이것은 조금 전에 귀신들려 눈 멀고 벙어리 된 자를 고쳐주셨을 때, 바리새인들이 예수께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은 것이라고 비난한 것을 염두에 두신 말씀일 것이다. 예수께서 귀신을 쫓아내심으로, 하나님 나라가 임했음을 분명히 드러내셨음에도 불구하고, 또 다른 표적을 구하므로, 예수님을 함정에 빠뜨리려는 자들은 ‘악하고 음란한 세대’임에 틀림없다.

그런데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구하는 표적은 귀신을 쫓아내는 기적보다 더 화끈한 표적이었다. 예를 들면 부활 표적 같은 것 말이다. 예수께서는 화끈한 표적을 구하는 악하고 음란한 세대에게, 놀랍게도 ‘요나의 표적’을 말씀하신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요나의 표적’이란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구하는, 화끈한 부활 같은 표적과는 반대되는 성격의 표적임에 틀림없다. 눅11:29-30에는 “요나가 밤낮 사흘 동안 큰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 것 같이 인자도 밤낮 사흘 동안 땅 속에 있으리라”(마12:40)는 없이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무리가 모였을 때에 예수께서 말씀하시되 이 세대는 악한 세대라 표적을 구하되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나니 요나가 니느웨 사람들에게 표적이 됨과 같이 인자도 이 세대에 그러하리라”(눅11:29-30)

요나는 니느웨에서 자신이 물고기 뱃속에서 다시 살아난 화끈한 기적을 말하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요나는 어떤 기적도 행하지 않았다. 단지 “40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지리라”(욘3:4)는 하나님의 심판의 말씀을 선포했을 뿐이다. 그럼에도 니느웨는 왕을 비롯한 모든 백성들이 요나가 전한 하나님의 말씀만 듣고도 회개하는 역사가 일어났다. 예수께서 화끈한 기적 같은 표적을 구하는 악하고 음란한 세대에게 말씀하신 ‘요나의 표적’은 기적 없이, 하나님의 말씀만으로 일어나는 역사를 말한다.

이 역사를 마태는 “요나가 밤낮 사흘 동안 큰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 것 같이 인자도 밤낮 사흘 동안 땅 속에 있으리라”(마12:40)를 더함으로, 기적 없는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를 더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물론 예수님의 이 말씀은 십자가의 죽으심뿐만 아니라 부활까지 바라보게 하는 말씀임에는 틀림없다. 그러나 예수께서 화끈한 표적을 구하는 악하고 음란 세대를 향해 말씀하신 것을 염두에 둔다면, 여기서는 틀림없이 ‘기적 없이 십자가에 죽으시고 3일 동안 무덤에 계신 것’을 이들에게 강조하고 있음이 틀림없다.

예수님은 이 말씀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적인 죽음이, 요나가 아무런 기적 없이 말씀만으로도 니느웨의 모든 사람들이 회개했듯이, 다른 기적 없이 복음만으로도 모든 믿는 자들에게 새 생명과 회개의 역사가 일어날 것임을 선포하고 계신다. 그럼에도 김 목사는 이 본문으로 “성경에 예언된 부활의 표적으로 예수님을 믿을 수 있다”는 이해할 수 없는 이상한 결론을 이끌어 내고 있다. 그러므로 김 목사의 부활복음은 성경에는 없다.

믿음을 위해 부활을 표적으로 주시지 않았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하기 위하여, 우리에게 부활을 표적으로 주신 일이 없으시다. 단지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부활의 몸을 보여주신 것은,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십자가에서 아들을 죽이신 일을 행하신 분이 전능하신 하나님이심을 보여주시기 위함이었다. 이때 제자들은, 자신들이 피해버린,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이 정말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확실하게 인지했을 뿐이다. 요20:28의 도마의 고백 “나의 주시여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도 같은 맥락에서 보아야 한다. 그래서 그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두려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아마도 제자들에게는 부활하신 예수님보다는 로마제국과 유대교의 힘이 여전히 더 커보였기 때문일 것이다.

이렇게 부활의 주님을 만났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연약한 가운데 있었던 제자들의 모습은 요한복음 21장에서 적나라하게 볼 수 있다. 부활의 주님을 만난 제자들의 연약한 모습에 대해서는, [바른믿음], <독자마당>에서 ‘오직 십자가’님이 작성한 “부활하신 예수를 만난 제자들의 반응을 읽어보라. 필자의 글과 다수 중복되므로 여기서는 더 이상 언급하지 않겠다.

글을 마치며

성령이 우리 가운데 오심으로, 우리는 하나님이 보내신 그의 아들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우리의 대속 제물이 되셨다는 놀라운 사실을 믿게 된다. 이렇게 십자가에 나타난,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놀라운 구원의 역사를 만난 자들은 하나님이 그의 능력으로 예수를 무덤에서 다시 살리신 것을 자연스럽게 믿게 된다. 그리고 이 믿음은 세상 끝 날에 예수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신 하나님께서 우리도 다시 살리실 것을 확신하며, 부활의 소망 가운데 살게 한다.

예수의 부활이 우리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믿게 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역사하심이 우리로 하여금 십자가가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행하신 구원 사건임을 믿게 한다. 그러므로 성령께서는 십자가에서 피 흘리신 예수의 죽으심이 나를 구원한 하나님의 능력임을 믿게 하고, 다시 사신 예수의 부활이, 모든 믿는 자의 부활의 첫 열매가 됨을 믿게 하심으로, 세상 끝 날에 내가 육체적으로 부활할 것을 확신하게 한다.

김 목사의 주장대로 부활이 십자가를 믿게 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역사로 십자가를 믿을 때, 부활도 믿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에 예언된 부활의 표적으로 예수님을 믿을 수 있다”는 김 목사의 부활복음은 성경에 없다. 그럼에도 김 목사는 더 나아가서 부활로 성경의 모든 말씀을 믿을 수 있다고 하는 이상한 주장까지 한다.

부활도, 십자가도 성경에 있는 말씀인데, 부활로 성경의 모든 말씀을 믿을 수 있다면, 성경의 모든 말씀안에 있는 부활은 무엇으로 믿을 수 있다는 말인가? 아마도 한마음교회 사람들은 김 목사가 외치는 부활복음으로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가 보다. 그렇다면 김 목사의 외침이 없었으면, 그들은 부활복음을 알 수 없었을 것이므로, 성령이 역사한다 할지라도 아무도 성경을 믿을 수 없다는 결론이 나온다. 아마 그래서 간증하는 사람들은 김 목사를 침이 마르도록 부추기며, 고마워하나 보다.

아무튼 김성로 목사의 부활복음은 성경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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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창모 목사는 죽음에 이르는 병에 걸린 한국 교회를 신물 나게 체험하며 갈등하다 하나님을 향해 살아 있는 교회를 꿈꾸며 1999년 김천에서 ‘제자들 경배와 찬양교회’를 개척하였다. 이창모 목사는 한국교회를 죽음에 이르게 한 병이 단지 성공주의, 황금만능주의, 도덕적 윤리적 타락 등이 아니고 이미 한국교회에 만연된 잘못된 신학에 있음을 확신하고서 무엇이 바른믿음인지 신학적으로 깊이 고민하는 목사이다. 이창모 목사는 자신이 중2때 수련회에서 방언을 받았고, 대부분의 목사들이 그것을 ‘영의 기도의 언어’라고 가르치므로 의심없이 수 십년 동안 옹알거리는 방언현상으로 기도(?)하였던 대표적인 방언기도자였다. 김우현, 김동수 등이 저술한 거짓 방언을 미화하는 한심한 서적들을 접한 후 방언에 관한 깊은 신학적인 성찰을 시작하게 되었고, 결국 오늘 날 방언이라고 알려진 소리현상과 성경의 참된 방언은 무관하다는 사실을 확신하게되었다. 이전의 자신처럼 방언으로 기도한다고 착각하고 있는 다른 목회자들과 신자들을 진정한 복음으로 돌이키기 위해 <방언, 그 불편한 진실>(밴드오부퓨리탄,2014)을 출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