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이철 목사의 “한마음침례교회의 부활신앙 성경적인가요?”라는 기사의 하단에 평신도 이단연구자 이인규가 남긴 무례한 댓글의 내용을 보고서 참 마음이 상했다. 왜냐하면 그 내용은 매우 저급한 인신공격이고, 그 속에는 심각한 오류가 있고, 동시에 이 시대의 하나님의 교회를 무너지게 하는 ‘다른 복음’의 문제와 깊이 연관되었기 때문이다.

진리의 본질을 흐려놓는 나쁜 테크닉

“로렌스 콩과 콩히 목사에 대해서 구별도 못하는 한심한 정이철 목사는 그의 글에서 로렌스 콩을 비판하면서 사진은 콩히 목사의 사진을 실어 놓았다. 그리고 나중에 그것을 알게 되자 허둥지둥 사진을 바꾸는 웃을 수 없는 코메디까지 연출하고 있었다. 그는 자신이 스스로 밝혔듯이 이단연구가가 아니다. 이단연구가로서 자격이 없다.”

이인규는 이렇게 말하면서 본질을 오도하였다. 싱가폴의 콩 목사와 싱가폴의 콩히 목사를 착각하여 사진을 잘못 올린 것이 그렇게 심각한 실수일까? ‘한심한’, ‘허둥지둥’, ‘웃을 수 없는 코미디’ 등의 수식어를 써 가면서 그것이 정말 엄청난 과오라도 되는 것처럼 말하는 것이 참 보기에 좋지 않았다. 물론 정이철 목사가 싱가폴의 콩 목사와 싱가폴의 콩히 목사를 착각하여 사진을 잘못 올린 것은 실수이다. 그러나 나중에 콩히 목사 사진을 내리고 콩 목사의 사진을 제대로 올렸으니 얼마든지 이해할 수 있는 문제라 볼 수 있다. 춘천의 어떤 교회의 그릇된 신앙운동 문제가 본질이었는데, 그것을 흐리기 위해 엉뚱한 것을 빌미로 조롱하고 비아냥하는 모습은 정말 보기 좋지 않았다.

“자기의 신학과 다르면 이단이고, 자신의 판단과 다르면 사탄의 역사이다”

평신도 이단연구가 이인규는 또 이렇게 정이철 목사를 비난하였다. 사실 자신의 신학이 바른 것임을 확신하고, 그것에 근거하여 진리와 거짓을 판단하는 것은 모든 신학하는 사람들의 당연한 모습이다. 성경적이라고 확신하는 자기의 신학을 중심으로 그릇된 것들을 판단하지 않을 것이라면, 대체 무엇에 근거하여 비성경적인 것들을 분별할 것인가? 이렇게 말하는 이인규 자신은 무엇을 기준으로 진리를 변호하다면서 지금까지의 이단사역을 했던 것일까? 자기 신학이 옳다고 믿지 않으면 어떻게 성경의 진리를 변증하는 일을 할 수 있을까? 결국 이렇게 말하는 이인규 씨야말로 단지 정 목사에게 시기심과 적의를 품고서 무조건 비판하려는 좁은 마음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춘천의 한마음교회의 부활복음에 대한 중대한 논의가 벌어지는 상황에서 비본질적이고 사소한 것을 크게 부각시키며 다수의 독자들의 관심을 오도하는 꼼수는 하나님의 진리를 변호한다고 자처하는 사람들이 붙들지 말아야 할 나쁜 테크닉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늘 기억해야 할 것이다. 

현대의 ‘방언기도’를 ‘거짓방언’이라고 집요하게 말하는 이유

“그가 오로지 강조하는 것은 곧 방언이며, (현대의) 방언은 “사탄의 옹알거림”이라고 정의한다. 그에게 있어서 한국교회 80%는 모두 사탄의 교회로 보일 것이다. 그는 이단들이 아무리 들끓어도 관심조차 없으며 오직 방언만 비판한다. 그가 전하는 복음은 “오직 예수”가 아니라 “오직 방언에 대한 반대”일 뿐이다. 필자도 방언을 반대한다. 오늘날 한국교회가 은사를 남용하는 것은 문제점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목숨을 걸고 오직 방언에 대한 문제만을 반대하지 않는다. 방언 문제는 이단문제와 관련이 없는 아주 사소한 부수적인 문제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신학훈련을 받지 못한 평신도 이단연구자 이인규 씨는 또 이렇게 정이철 목사를 공격하였다. 그는은 정 목사가 방언기도를 일관성 있게 반대하는 까닭이 마치 방언에 대한 정 목사의 일방적인 편견과 고집 때문인 것처럼 오도하였다. 그러면 바리새인들과 유대 당국자들에 대해 일관성 있게 지적하고 책망하신 예수님도 편견에 사로잡히셨던 분이었을까? 사실 그들은 책망받아야 마땅한 사람들이었으므로 예수님께서 일관되게 책망하였던 것이다.

나는 이인규 씨가 정이철 목사의 집요한 현대의 거짓 방언에 분별사역을 그렇게 쉽게 비판하기 전에 현대의 방언기도가 정말 성경의 방언인지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해 보시기 바란다. 왜냐하면 만약 현대의 방언기도가 정 목사의 주장대로 하나님과 무관한 거짓방언이라면, 방언기도를 집요하게 비판하지 않는 것이 오히려  매우 심각한 비성경적 행동이기 때문이다. 동시에 정 목사가 하고 있는 거짓 방언에 대한 집요한 분석과 비판사역을 반대하는 훼방하는 그 행위가 하나님을 대적하는 중대한 범죄행위이가 되기 때문이다.

이인규 씨는 현대교회의 “방언기도는 성령의 은사이기 때문에 근본적으로 문제가 되지 않으나, 단지 사람들이 남용하고 오용하여 문제가 되고 있으므로 절제하기만 하면 무방하다”라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는 것 같다. 즉, 통역하는 자가 없을 때에는 집에서 조용히 방언기도를 한다면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입장을 견지하고 있어 보였다. 그래서 그는 정 목사가 일관되게 지적하고 분별하는 현대의 거짓 방언 문제를 ‘아주 사소한 부수적인 문제’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이인규 씨의 생각과 주장이 맞다면 천만 다행이지만, 사실이 아니라면 어떻게 되는 것인가? 정 목사의 주장대로 현대의 방언기도가 성경과 무관한 거짓방언이이라면, 그 분의 말처럼 지금 한국 교회의 80% 이상이 사탄에게 농락을 당하고 있는 셈이다. 참으로 소름끼치는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이것이 한국교회의 슬픈 현실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인규 씨와 유사한 자세로 현대의 거짓 방언 문제에 접근하고 있다. 이전에 30년 이상 방언기도를 하였던 나도 그런 사람이었다. 분명히 현대의 방언기도는 남용하고 오용하기 때문에 문제가 되는 정도가 아니다. 그 배후에서 사탄이 크게 역사하는 심각한 거짓 은사이다. 그래서 정 목사와 <바른믿음>은 방언기도를 사탄이 현대의 교회를 무너뜨리는데 가장 효과적인 수단으로 사용하고 있음을 드러내기 위해 힘을 다하고 있다. 그 때문에 ‘거짓방언’, ‘옹알거림’, ‘변태방언’ 등의 적나라한 용어들을 총 동원하며 그 정체를 드러내기 위해 집요하게 노력하고 있는 것이다.

평신도 이단연구가 이인규가 비방한 것처럼, 정 목사와 <바른믿음>이 오직 방언만 비판하고, 다른 이단에는 관심조차 보이지 않는 것은 아니다. <바른믿음>은 겸손하게 능력의 한계를 인정하며,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미 인식하고 있는 일반적 이단들과 다른 여러 연구가들이 활발하게 연구하고 있는 대상들은 연구의 대상에서 제외하고 있을 뿐이다. 정 목사와 <바른믿음>이 특히 현대의 방언기도에 더욱 더 큰 관심을 보이는 것은 오직 방언만 비판하자는 것이 아니다. ‘다른복음’ 위에 서 있는 대부분의 그릇된 운동들과 단체들이 거짓된 변태방언을 기본적인 영성(?) 수행의 수단으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정 목사와 <바른믿음>은 한국교회를 건강하게 세우기 위해 현대 교회의 방언기도가 거짓은사임을 알리기 위해 힘을 다하고 있다.

과연 현대 교회의 방언기도가 사람들의 단순한 남용, 오용으로 인해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 현대 교회의 방언기도는 본질적으로 성경의 참 방언을 모조하는 다른 영의 거짓방언이다. 지면의 한계상 여기사 자세한 내용을 모두 살펴보기는 어렵다. 필자가 고전14:2,4절을 근거로 주장되는 현대의 방언기도가 왜 거짓된 변태방언인지에 대해 500 페이지 분량의 책 <방언, 그 불편한 진실>을 썼으니, 부족하지만 참고하기를 바란다.

현대의 방언기도는 남용하거나 오용하여 문제가 되는 것이 결코 아니다. 그렇게 말하는 것은 간교한 사탄의 메시지이다. 왜냐하면 성령의 역사로서의 방언을 말하는 은사가 정말 나타난다면, 인간의 남용과 오용이 일어나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고전14:33절에서 바울은 “하나님은 어지러움의 하나님이 아니시오”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성령이 역사하는 방언의 현장에서도 당연히 성령 하나님이 역사하실 것이므로 방언하는 현장은 필연적으로 인간의 남용과 오용 없이 질서가 있을 수밖에 없다.

“만일 곁에 앉은 다른 이에게 계시가 있거든 먼저 하던 자는 잠잠할찌니라”(고전14:30)

이 말씀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성령이 역사하실 때에만 인간이 예언의 은사를 시행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어떻게 성령의 방언 은사에 대한 인간의 남용과 오용이 있을 수 있겠는가? 불행하게도 고린도교회에서는 성령의 역사로 다른 사람이 예언할 때, 자신이 하던 예언을 멈추지 않으므로 어지러움을 유발시키는 자들이 있었다. 이것은 예언의 은사의 남용이나 오용의 문제가 아니라 거짓 영에 의한 거짓 예언의 문제였다. 왜냐하면 성령은 여러 사람에게 동시에 예언을 하게 하시어 교회를 어지럽히시는 분이 아니시기 때문이다.

만약 그 예언이 참 성령의 은사로 말미암은 예언이었다면, 비록 바울이 권위있는 사도였을지라도 ‘잠잠하라’라고 명령할 수는 없었다. 그것은 성령의 역사를 방해하고 멈추게 하는 죄악이기 때문이다. 어떻게 성령이 말씀하게 하시는 예언을 인간이 강제와 의지로 멈출 수 있단 말인가? 바울이 ‘잠잠하라’고 명령한 것은 그 예언이 거짓예언이기 때문이었다. 고린도교회의 은사의 문제는 성령의 은사를 남용하고 오용하는 문제가 아니라 거짓된 은사였던 것이다.

“만일 누가 방언으로 말하거든 두 사람이나 다불과 세 사람이 차서를 따라 하고 한 사람이 통역할 것이요. 만일 통역하는 자가 없거든 교회에서는 잠잠하고 자기와 및 하나님께 말할 것이요”(고전14:27-28)

고린도교회에서 방언의 은사가 남용되고 오용되었다고 여기는 사람들은 아마도 위 본문에 대한 그릇된 해석으로부터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위 본문에서 바울은 고린도교회의 방언의 남용과 오용을 막기 위해서 순서에 따라 한 사람씩 방언을 말하고, 한 사람은 통역하도록 했으며, 또 통역하는 자가 없는 경우에는, 교회에서는 잠잠하고 집에서 혼자 조용히 방언기도를 하라고 명령했다고 많은 사람들이 그릇되게 이해하고 있다.

그러나 이는 27-28절의 의미를 심각하게 오해한 것이다. 위 본문의 방언이 성령의 은사로서 ‘하나님께 비밀을 말하는 것’(고전14:2)이 사실이라면 통역이 없다한들 무슨 문제가 되겠는가?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서는 통역 없이도 얼마든지 방언의 의미를 아실 것이며, 또 아무리 많은 사람들이 한꺼번에 방언을 말한다 할지라도 하나님이 한꺼번에 이들의 비밀을 들으시는 데는 아무런 문제가 없을 것이다. 그런데 그릇된 방언 사상을 전파하는 사람들은 이 내용이 방언을 오용하고 남용한 것이라고 가르친다.

그러나 하나님께 비밀을 말하는 심오한 방언기도라면, 아무리 한꺼번에 많은 사람들이 한다 할지라도 방언 은사의 남용과 오용이 될 수 없으며, 오히려 예배 중에 더 많이 하라고 권장해야 할 사안이다. 바울은 왜 이런 방언기도를 인정하지 않았을까? 그 이유는 단 한 가지밖에 없다. 하나님께 비밀을 말한다는 고린도 교회의 방언이 거짓방언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바울은 예배 시간에 거짓방언이 난무하는 것을 방치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 본문을 거짓된 방언기도하는 사람들의 주장대로 잘못 이해하려고 한다. 그것은 “통역하는 자가 없으면”이라는 내용을 ‘방언을 말할 때에 그곳에 통역의 은사자가 없으면’으로 해석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명백한 오석이다.

생각해 보라! 전능하신 성령이 방언 통역의 은사자가 그곳에 없는데, 그 사실을 모르고 방언의 은사자로 하여금 회중 앞에서 방언으로 말하게 하셨을까? 회중 앞에서 방언으로 말한 것이 결국 헛수고가 되므로 차라리 집에 가서 혼자 그 방언을 하라고 하셨다는 것일까? 만일 그렇다면 방언의 은사를 주신 성령은 한 치 앞도 내다보지 못하시는 바보 하나님이다. 그러나 성령의 역사로 은사가 나타나는 현장에서 이런 일은 절대로 벌어지지 않는다. 성령은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성령은 방언을 말하는 자와 함께 통역하는 자도 그 곳에 있게 하셨을 것이라고 우리는 믿어야 한다.

그러므로 예배 중 통역자가 없는데도 누가 일방적으로 방언이라고 떠들면, 그 방언은 성령의 은사가 아니라 거짓 영의 방언인 것이다. 그래서 28절에서 바울은 그런 자들에게 “교회에서는 잠잠하라”고 명령하였다. 왜 이런 명령이 가능했을까? 만약 이 방언이 성령의 은사로서의 방언이라면 바울이 성령의 역사로 이루어지고 있는 방언을 함부로 멈추라고 명령할 수 없었다. 또한 바울이 “잠잠하라!”고 명령한다고 하여 방언을 말하는 자가 성령이 말하게 하시는 방언을 스스로 멈출 수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짐짓 성령의 은사인척 가장하여 거짓 방언을 말하는 자는 성령의 역사와 상관이 없었으므로 언제든지 스스로 멈출 수 있을 것이다. 실제로 현대 교회의 방언기도 옹호자들은 자신들이 방언으로 기도할 때 언제든지 더 할 수도 있고 멈출 수도 있는 은사라고 자랑한다. 그러나 그런 자랑은 스스로 자신들의 방언기도가 거짓 은사임을 폭로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거짓 방언은 성령의 뜻과 상관없이 인간의 의지대로 언제든지 조절 가능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바울이 27절에서 방언 통역을 명령한 것은 통역의 은사로 거짓 방언을 가려내 고린도 교회에서 퇴출시키기 위함이었다.

그러면 바울의 “통역하는 자가 없으면”은 무슨 의미로 말한 것일까? 지난 예배 때 참석했던 통역의 은사자들이 이번 예배에는 한 사람도 참석하지 않았기 때문일까? 아니다! “통역하는 자가 없으면”이라는 말의 진의는 “누가 방언으로 말할 때 통역의 은사자가 여러 명 있는데도 그 방언을 통역하는 자가 한 명도 없으면”이라는 뜻이다. 그러면 이런 상황은 왜 발생하였을까? 그것은 뜻 없는 거짓 방언이 나타나고 있었기 때문이다. 통역의 은사자가 아무리 많아도 울리는 꽹과리 같은 소음에 불과한 거짓 방언을 통역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거짓방언 옹호자들은 그 방언이 통역할 수 있는 정상적인 방언이었으나, 단지 그곳에 통역하는 자가 없었으므로 집에 가서 혼자하라고 했다고 우기고 있다. 아무튼 성령이 역사하심으로 나타나는 은사는 인간의 남용, 오용에 의해 망가질 수가 없다. 거짓된 변태방언 옹호자들의 주장대로 성령의 은사를 오용하고 남용할 수 있다면, 그것은 인간의 의지가 성령 하나님의 주권보다 우위에 있다는 것이다. 어찌 그런 일이 가능할 수 있겠는가?

80%가 넘기 때문에 더욱 집요하게 가르쳐야 한다!

“그에게 있어서 한국교회 80%는 모두 사탄의 교회로 보일 것이다.....(중략).......한국교회의 80%는 방언을 허용하고 있다. 아마 80% 이상이 될 것이다.”

평신도 이단연구가 이이인규는 한국 교회의 80% 이상이 방언기도를 수용하고 있으므로 다수의 한국 교회를 대적하는 정이철 목사의 자세가 그릇되었다면서 이와 같이 말했다. “무엇이든지 물어보세요”라는 인터넷 카페의 “방언을 교회에서 몰아내야 한다고요?”라는 기사의 하단에 달린 댓글을 보니 다른 글에서보다 압도적으로 많은 댓글이 있었다. 현대의 거짓 방언에 대해 관심이 많다는 것을 의미하며, 동시에 그 정도로 사람들이 현대의 방언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가지고 있지 못하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현상이다. 

그래서 정 목사와 <바른믿음>이 현대의 방언기도가 사탄의 거짓 방언이라는 사실을 밝히는데 힘을 쏟고 있다. 이 일은 현실적으로 작은 정 하나와 작은 망치 하나로 거대한 바위를 쪼개기 위해 도전하고 있는 상황이다. 그 분의 말대로 한국 교회의 절대다수가 방언기도를 하고 있고, 그것을 성령의 은사로 믿고 있기 때문이다.

“목사님, 요즘은 진리가 문제가 아니고 대세가 문제입니다. 목사님이 말씀하시는 방언 이야기가 설령 진리라고 할지라도 대세가 아니니 말조심하시는 게 나을 것 같습니다”

필자가 현대의 방언기도의 허구를 이야기하자 어떤 사람이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정 목사의 방언 분별사역을 비판하는 그 분도 이와 같은 대세를 알고 있으므로 한국 교회의 80%가 방언기도을 한다는 것을 강조하며, 정 목사가 무조건 반대하는 방언기도에 신경을 곤두세우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그러나 정 목사와 <바른믿음>은 절대다수가 거짓방언에 속고 있기 때문에 대세에 역행하면서 다음과 같이 외치고 있는 중이다.

“방언기도는 거짓이며, 현대의 방언기도는 비성경적인 변태방언이고, 거기에는 사탄의 역사가 있습니다. 정신 차리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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