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짓 방언자들의 헛 소리를 바울이 인용하여 교정했을뿐

바울은 고린도전서 12장 4-11절에서 설명한 성령의 은사들을 곧바로 12절-27절에서 몸의 지체 비유로 다시 설명한다. 바울이 몸의 지체 비유를 동원하는 까닭은 영적으로 어린아이 같은 고린도 교회의 이해력을 고려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면 바울이 몸의 지체 비유를 통해 성령의 은사에 대해 말하고 싶었던 것은 무엇일까?

“몸은 하나인데 많은 지체가 있고 몸의 지체가 많으나 한 몸임과 같이 그리스도도 그러하니라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고전 12:12-13).

몸은 하나지만 몸의 지체들은 눈, 코, 입, 손, 발 등 다양하다. 그런데 몸의 다양한 지체들은 다 한 몸에 붙어 있다. 이렇게 몸과 지체들이 하나인 구조에서 어떻게 한 지체가 다른 지체들 모르게 비밀리에 어떤 일을 할 수 있겠는가? 예를 들면 왼손이 모르게 오른손이 무엇인가를 할 수 없다는 말이다. 마태복음 6장 3절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너는 구제할 때 오른손의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는 은밀하게 구제하라는 일종의 과장법으로, 실제로 정상적인 몸에서는 이런 일이 결코 일어나지 않는다.

교회는 하나지만 신자들은 유대인, 헬라인, 종, 자유자, 남자, 여자 등 다양하다. 마찬가지로 교회는 하나지만 성령의 은사도 다양하다. 그런데 성령의 은사가 아무리 다양하다 할지라도, 그 은사들은 다 한 몸인 교회에 속해 있는 은사들이다. 때문에 어떤 특정한 은사, 예를 들면 방언의 은사를 가진 자가 다른 지체들 모르게 개인적으로 하나님께 비밀을 말하는 일은 교회에서 결코 일어날 수 없다.

따라서 고린도전서 14장 2, 4절을 근거로, 방언은 사람이 알아들을 수 없고 하나님께 비밀을 말하는 은사며, 개인의 덕을 위할 수 있다는 방옹자들의 말은 사실이 아니다. 그럼에도 방옹자들은 교회에서 결코 일어날 수 없는 일을 날마다 교회에서 하고 있다!

“몸은 한 지체뿐만 아니요 여럿이니 만일 발이 이르되 나는 손이 아니니 몸에 붙지 아니하였다 할지라도 이로써 몸에 붙지 아니한 것이 아니요 또 귀가 이르되 나는 눈이 아니니 몸에 붙지 아니하였다 할지라도 이로써 몸에 붙지 아니한 것이 아니니”(고전12:14-16).

몸에는 여러 지체들이 함께 붙어 있으며, 각 지체는 몸을 위해 꼭 필요한 존재들이다. 왜냐하면 몸을 건강하게 유지하기 위해서는 다양한 기능을 가진 여러 지체들이 함께 필요하기 때문이다. 몸을 옮기는 발, 여러 지체들을 만져주고 때로는 가려워하는 지체를 긁어주고 음식을 집어 입에 넣어주는 손, 음식 맛을 보는 혀, 사물을 보는 눈, 소리를 듣는 귀 등 몸에 있는 다양한 기능의 지체들은 건강한 몸을 위해 꼭 필요한 존재들이다. 그러므로 각 지체는 몸과 분리되어 다른 지체들과 상관없이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없다. 만약 어떤 지체가 “나는 몸에 붙어있지 않다”라고 주장할지라도 몸에 붙어있지 않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어떤 지체라도 몸에 붙어있지 않고서는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만약 어떤 지체가 “나는 몸과 떨어져 홀로 존재할 수 있고, 내가 가진 기능으로 나를 위해서 쓸 수 있다”고 하면서 실제로 자신을 위해 자신이 갖고 있는 기능을 사용하고 있다면 그 지체는 몸에 붙어있는 것처럼 보이더라도 몸과 분리된 지체임이 틀림없다. 왜냐하면 어떤 지체라도 몸에서 분리되지 않고서는 자신이 자신을 위해 일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렇게 몸에서 분리된 지체는 몸과 다른 지체들의 생명을 위협하는 암같은 존재가 될 것이다. 그러므로 이런 지체는 빨리 그리고 반드시 몸에서 제거해야 한다. 한 몸에 붙어있는 각 지체는 서로 다른 지체들을 위해 일해야 한다. 그러면 몸은 건강을 유지할 수 있고, 각 지체는 자신을 위해서는 일하지 않아도 다른 지체들과 함께 건강하게 존재할 수 있다.

이처럼 주의 몸 된 교회도 건강하려면 여러 종류의 은사들이 다양하게 있어야 한다. 교회를 다스리고, 하나님의 계시를 전하는 사도가 있어야 하고, 전해진 계시의 말씀을 가르치는 교사가 있어야 하며, 사도나 선지자가 없을 때 하나님의 계시를 전하는 예언의 은사자가 있어야 하고, 외국인들이 교회에 들어왔을 때 이들에게 외국어로 계시를 전하는 방언의 은사자가 있어야 하며, 외국인에게 전한 방언을 현지인 신자들도 알아들을 수 있게 통역해 주는 통역의 은사자도 있어야 한다(고전12:28 참고).

이런 은사들은 몸과 지체들의 관계처럼 교회와 분리되어 다른 은사들과 상관없이 독립적으로 사용될 수 없다. 그러므로 방언하는 자가 거짓 방언이 아니라 성령의 은사로서의 방언을 말한다면 결코 교회의 다른 지체들과 상관없이 개인적으로 하나님께 비밀을 말할 수는 없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통역이 없다고 해서 교회를 떠나 집에 가서 자신만을 위해 방언을 사용할 수도 없다. 그것이 거짓 방언이 아니라면 말이다.

그렇다면 고린도전서 14장 2, 4절을 가지고, ‘방언은 개인의 덕을 위하는 은사이며 사람이 알아들을 수 없는 말로 하나님께 비밀을 말한다’는 주장과 ‘통역이 없으면 집에서 혼자 하나님께 방언으로 기도하면 된다’는 주장은 바울의 가르침과는 거리가 먼 어처구니없는 허구다. 그러나 고린도 교회는 성령의 은사, 특히 방언을 개인의 유익을 위해 사용하려고 시도(고전14:4)함으로써 결국 하나님께 비밀을 말한다는 거짓 방언을 만들어 개인의 영적 우월을 드러내는데 사용했다. 이로써 주의 몸 된 교회인 고린도 교회는 생존마저 위협당하는 심각한 영적 질병에 걸리게 된 것이다.

“만일 온 몸이 눈이면 듣는 곳은 어디며 온 몸이 듣는 곳이면 냄새 맡는 곳은 어디냐”(고전12:17).

몸의 모든 지체들이 어떤 특별한 기능을 선호해서 각자 자신의 기능을 포기하고 어떤 특별한 기능을 가지려고 애쓴다면 몸은 건강하게 유지될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어떤 특정한 기능 하나만으로는 몸 전체를 건강하게 유지시킬 수 없기 때문이다. 이처럼 교회도 건강을 유지하려면 어떤 특정한 은사만 있어서는 안 된다. 그런데 이런 일은 성령이 다스리시는 건강한 교회에서는 사실상 발생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성령이 “그의 뜻대로” 각 지체들에게 은사를 다양하게 나누어 주시기 때문이다. 성령이 “그의 뜻대로” 은사를 나누어 주시는 이유는 교회에 분쟁이 없게 하고, 지체들은 각자의 은사를 가지고 서로 돌아보게 함으로(고전12:25) 교회가 건강을 유지하도록 하기 위함이다.

그러나 고린도 교회는 예언과 방언, 그 중에서도 특히 방언의 은사를 더욱 사모함으로써 심각한 영적 혼란에 빠졌다(고전14:27-33 참고). 그런데 고린도 교회를 어지럽힌 예언과 방언은 성령이 “그의 뜻대로” 나누어 주신 은사가 아니라 인간이 만들어낸 거짓 은사들이었다. 왜냐하면 성령이 “그의 뜻대로” 나누어 주신 은사로는 교회를 어지럽힐 수 없기 때문이다.

어떤 특정한 은사가 다른 은사들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이 사모되고 또 많이 시행되고 있다는 것은, 그 은사가 거짓 은사라는 확실한 증거다. 또 이런 은사들이 만연되어 있는 교회는 틀림없이 고린도 교회처럼 병든 교회일 것이다. 따라서 다른 은사들은 미미한데 방언의 은사만 넘쳐나고 있는 한국 교회도 이미 영적으로 중병에 걸려 있음이 틀림없다. 최근에는 방언에 이어 신사도주의에 의해 범람하는 거짓 예언도 한국 교회를 병들게 하는 주범중 하나이다. 거짓 은사들로 말미암아 영적 중병에 걸려 있는 한국 교회는 고린도 교회처럼 곳곳에서 죽음에 이르는 증상들로 넘쳐나고 있다.

“그러나 이제 하나님이 그 원하시는 대로 지체를 각각 몸에 두셨으니 만일 다 한 지체뿐이면 몸은 어디냐 이제 지체는 많으나 몸은 하나라 눈이 손더러 내가 너를 쓸 데가 없다 하거나 또한 머리가 발더러 내가 너를 쓸데가 없다 하거나 하지 못하리라”(고전12:18-21).

하나님은 “그 원하시는 대로” 몸에 여러 지체들을 두셨다. 이 지체들은 몸의 여기저기에서 각자의 기능으로 일하고 있지만, 어떤 위치에서 무슨 일을 하든지 간에 몸에 쓸데없는 지체는 하나도 없다. 왜냐하면 모든 지체가 몸에 붙어 존재할 수 있는 이유는 각각의 지체가 자신을 위해서는 일할 수 없지만 다른 지체들이 자신을 위해 일해주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왼손은 오른손을 위해 일할 수 있지만 왼손이 자기 자신인 왼손을 위해 일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이것이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 것은 왼손을 위해 오른 손이나 다른 지체들이 일해주기 때문이다. 왼손에 오물이 묻었다면 왼손이 스스로 그 오물을 닦을 수는 없지만, 발이 물가로 왼손을 데리고 가고, 눈은 왼손에 묻은 오물을 확인하고, 오른손이 왼손에 묻은 오물을 닦아줄 수 있다. 이것이 한 몸에 붙어있는 모든 지체들이 서로에게 꼭 필요한 이유다. 그러므로 각 지체는 다른 지체들을 쓸데없다고 무시해서는 안 된다.1)

특히 본문 21절에서 ‘쓸 데’를 나타내는 헬라어 ‘크레이안’(crei,an)은 ‘서로에게 없어서는 안 될 필수적인 존재임’을 표현할 때 쓰는 말이다.2) 마찬가지로, 성령이 교회에 주신 은사들은 다양하지만 교회를 위해 쓸데없는 은사는 하나도 없다. 그러므로 자신이 어떤 은사를 가졌든지 간에 다른 은사들을 가진 자들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자신이 무시하는 그 은사가 자신을 위해 일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특정 은사를 선호하고, 다른 은사들을 무시하는 것은 마치 입이 자신을 위해 일하는 발을 쓸데없다고 잘라버리고 그곳에 자신과 같은 입을 몇 개 더 붙여 놓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특정 은사를 선호하는 자들은 결국 교회 공동체를 병들어 죽게 하는 암세포와 같은 존재가 될 것이다. 바울은 위 본문에서 고린도 교회가 어떤 특정 은사를 선호하며 다른 은사들을 무시하는 못된 성향의 암세포들을 책망하고 있다.

“그뿐 아니라 더 약하게 보이는 몸의 지체가 도리어 요긴하고 우리가 몸의 덜 귀히 여기는 그것들을 더욱 귀한 것들로 입혀 주며 우리의 아름답지 못한 지체는 더욱 아름다운 것을 얻느니라 그런즉 우리의 아름다운 지체는 그럴 필요가 없느니라 오직 하나님이 몸을 고르게 하여 부족한 지체에게 귀중함을 더하사 몸 가운데서 분쟁이 없고 오직 여러 지체가 서로 같이 돌아보게 하셨느니라”(고전12:22-25).

지체마다 기능이 다르므로, 경우에 따라서는 더 요긴한 지체가 있기 마련이다. 음악가에게는 귀가 더 요긴하고, 화가에게는 눈이 더 요긴하고, 요리사에게는 혀가 더 요긴하듯이 말이다. 그러나 각 지체는 한 몸을 이루고 서로를 위해 존재하기 때문에 본질적인 가치 차이는 없다. 몸에서 약한 지체를 더 귀하게 여겨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왜냐하면 약한 지체도 다른 지체들과 더불어 한 몸이며, 약하지만 다른 지체들에게 꼭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약한 지체는 약하기 때문에 오히려 더 귀하게 여겨주어야 한다. 그래야지 약한 지체도 강한 지체들과 함께 건강하게 존재하면서 다른 지체들을 위해 일할 수 있기 때문이다.

본문에서 '요긴하고‘로 번역된 헬라어 ‘아낭카이아’(avnagkai/a,)는 절대 필요한 불가결의 존재를 뜻한다.3) 겉으로는 더 약하게 보이고 덜 귀히 여겨지고 아름답지 못한 지체들이 있지만, 하나님은 지체들이 분쟁 없이 서로 돌아보게 하심으로4) 몸을 고르게 하여 부족한 지체에게 존귀를 더하셨다. 이와 같이 성령이 주신 은사들도 교회에 더 요긴하고, 덜 요긴한 은사들이 있다.5)

그럼에도 모든 은사들은 교회를 건강하게 유지하는데 꼭 필요한 은사들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물과 공기는 몸의 존재를 위해 다 필요하지만, 물보다는 공기가 더 요긴하다. 왜냐하면 몸이 물 없이는 2-3일 정도를 버틸 수 있지만, 공기 없이는 5분도 채 못 버티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공기가 물보다 더 귀중한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공기가 있어도 물이 없으면 몸은 결코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물과 공기는 둘 다 몸이 존재하기 위해서는 꼭 있어야 하는 귀중한 것들이다.

마찬가지로 성령의 은사들도 교회의 사정에 따라 더 요긴하고 덜 요긴한 은사들이 있기는 하지만(예를 들면, 아픈 지체들이 많은 교회에서는 신유의 은사가 가장 요긴한 은사가 될 것이다), 그러나 좀 덜 요긴한 은사라 할지라도 교회를 위해서는 꼭 필요한 은사이기 때문에, 어떤 은사라도 똑같이 귀중하게 여겨야 하며, 혹 덜 귀하게 여기거나 내쳐서는 안 된다.6) 바로 이것이 바울이 현지인 신자들에게 필요한 예언의 은사에 비해 방언의 은사는 소수의 외국인들에게 필요한, 그래서 상대적으로 덜 요긴한 은사지만 금하지 말라(고전14:39)고 고린도 교회에 명령한 이유다. 특히 기억해야 할 것은 ‘더 약하게 보이는’, ‘덜 귀하게 여기는’, ‘아름답지 못한’, ‘아름다운’ 등의 표현들은 객관적인 평가가 아니라 주관적인 평가라는 사실이다. 성령의 은사들도 교회를 위한 쓰임새에 따라서 어떤 은사는 더 약하게 보이고, 덜 귀하게 보이기도 하지만, 은사들 사이에 객관적인 우열은 존재하지 않는다. 단지 교회의 사정에 따라 더 요긴하게 쓰이는 은사와 덜 요긴하게 쓰이는 은사가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어떤 은사라도 무시하거나 선호해서는 안 된다.

그런데 고린도 교회는 겉으로 더 화려하고 신령해 보이는 방언의 은사를 선호한 나머지 상대적으로 덜 아름답고 약해 보이는 다른 은사들을 무시했다. 왜 그랬을까? 그것은 육에 속한 고린도 교회가 방언을 개인의 유익을 위해 쓸 수 있는 은사로 여겼기 때문이다. 만약 고린도 교회가 성령의 은사들 중 개인의 유익을 위해서 쓸 수 있는 은사는 없다는 사실을 알았더라면 어떤 특정 은사에 집착하는 어리석음을 범하지는 않았을 텐데 말이다.

“만일 한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고통을 받고 한 지체가 영광을 얻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즐거워하느니라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고전12:26-27).

몸의 지체들은 각기 다른 기능, 다른 모양, 다른 위치에 붙어 있지만 그래도 한 몸이다. 그러므로 한 지체의 고통과 영광은 곧 다른 지체들의 고통과 영광이 된다. 그래서 한 지체의 고통과 영광에 대해 다른 모든 지체들은 함께 고통 받고 함께 기뻐한다. 그러나 만약 그렇지 않은 지체가 있다면, 그 지체는 중병에 걸려 감각을 잃었거나 몸에서 떨어져 나갔기 때문일 것이다.

고린도 교회는 모든 지체들이 고통으로 함께 아파하고, 영광으로 함께 기뻐하기는커녕 서로 경쟁하며 당을 짓고(고전1:12), 허세를 부리며 교만했고(고전4:6이하), 다른 지체들을 세상 법정에 고소하고(고전6:1), 믿음이 강하다고 하는 자들은 믿음이 약한 자들을 실족시키고(고전8:11), 부자는 가난한 자들을 업신여겨 낙심하게 만드는 일들(고전11:22)이 끊이지 않았다. 이들은 다른 지체들의 고통이 곧 자신의 행복이었고, 다른 지체들의 영광은 곧 자신의 불행이었다. 이런 상황은 성령의 은사에서도 예외는 아니었다. 어떤 지체가 성령의 은사를 받으면, 다른 지체들은 어떻게 해서든지 그것보다 더 뛰어난 은사를 받으려고 애썼다. 왜냐하면 이들은 육적인 신자답게 다른 지체들 위에 군림해 자신을 과시하며 영광을 누리고 싶은 욕망으로 가득 차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끝내는 고린도전서 14장 2절과 같은 거짓 방언까지 만들어 내고 말았다.

“하나님이 교회 중에 몇을 세우셨으니 첫째는 사도요 둘째는 선지자요 셋째는 교사요 그 다음은 능력을 행하는 자요 그 다음은 병 고치는 은사와 서로 돕는 것과 다스리는 것과 각종 방언을 하는 것이라”(고전12:28).

바울은 12-27절에서 몸의 지체에 대해 말하고, 뒤이어 28절에서 성령의 은사의 종류를 소개한다. 이것은 바울이 몸의 지체 비유로 교회의 은사들을 설명하려는 것이 분명하다. 한 몸에 여러 지체들이 있듯이 교회에도 여러 은사들이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사도, 선지자, 교사, 능력, 병 고치는 은사, 서로 돕는 것, 다스리는 것, 각종 방언 말하는 것 등이다.

“다 사도이겠느냐 다 선지자이겠느냐 다 교사이겠느냐 다 능력을 행하는 자이겠느냐 다 병 고치는 은사를 가진 자이겠느냐 다 방언을 말하는 자이겠느냐 다 통역하는 자이겠느냐”(고전12:29-30)

이제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몇 가지 질문을 던짐으로, 지금까지 은사에 대해 설명한 것들을 총체적으로 다시 한 번 상기시킨다. 위 본문의 헬라어 원문은 ‘메’(mh.)로 시작되는 형식의 의문문들로 이루어져 있다. 그런데 헬라어에서 이런 형식의 의문문은 ‘아니오’라는 분명한 답을 기대하는 질문이다.7) 바울은 이렇게 ‘메’로 시작되는 형식의 질문들을 통해 성령의 은사들은 개인의 유익을 위해 제 마음대로 사모하고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성령이 “그의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셔야 가질 수 있는 것임을 분명히 한다.

성령이 교회에 주시는 은사는 다양하지만 그 은사들을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시는 분은 오직 한 분 성령이시다. 성령은 인간이 자신의 욕구대로 은사를 사모하도록 버려두시지 않으시고 “그의 뜻대로 각 사람에게” 어떤 은사를 줄 것인가를 결정하시고 시행하신다. 왜냐하면 누가 어떤 은사를 가지고 교회에 봉사할 때 가장 효과적으로 교회를 유익하게 할 수 있는가를 정확하게 아시는 분은 오직 성령 하나님밖에 없으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고린도전서 14장 5, 18, 39절은 바울이 특정한 은사(방언)를 사모하라거나, 권면하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이 부분은 뒤에서 상세하게 다룬다). 바울이 아무리 위대한 사도라 할지라도 “그의 뜻대로 각 사람에게” 은사를 나누어주시는 성령의 주권적 결정을 간섭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오이코도메오’가 자신을 세우다는 의미로 쓰인 사례는 고전 14:4이 유일

헬라어 ‘오이코도메오’(oivkodome,w)는 문자 그대로 도시를 건립하거나 집이며 회당 등을 건립할 때, 또 비유적으로는 교회를 세울 때 ‘건립하다’, ‘세우다’ 등의 의미로 성경에서 사용된 단어다. 성경의 용례를 보면,

“내 교회를 세우리니”(마16:18),
“교회가 평안하여 든든히 서 가고”(행9:31),
“너희는 하나님의 집(하나님이 세우신 집)이니라”(고전3:9),
“예언하는 자는 교회의 덕을 세우나니”(고전14:4),
“만일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하여 통역하지 아니하면”(고전14:5),
“교회의 덕 세우기를 위하여”(고전14:12),
“모든 것을 덕을 세우기 위하여 하라”(고전14:26),

“너희도 산 돌 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벧전2:5) 등이 있는데, ‘오이코도메오’는 항상 자기 자신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세운다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그런데 딱 한 번 예외적으로 ‘방언을 말하는 자는 자기의 덕을 세우고’에서 ‘오이코도메오’가 사용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오니코도메오’의 예외적인 용법이 아니다. 왜냐하면 고린도전서 14장 4절의 ‘자기가 자기를 세우다’라는 말은 신약 성경 전체에서 사용된 ‘세우다’의 모든 말과 그 용례가 다르며, ‘오이코도메오’로 ‘자기가 자기를 세우다’라고 표현하는 것은 그 자체로도 모순이 되기 때문이다.8) 고린도전서 14장 4절의 “자기의 덕을 세우고”에서 사용된 ‘오니코도메오’는 바울의 말이 아니라 고린도 교회의 거짓 방언자들이 자신의 거짓 방언을 성령의 은사로 위장하기 위하여 하는 허튼소리를 바울이 그대로 인용한 내용이다.

지금까지 살펴본 대로, 성령의 은사는 어떤 것도 개인의 유익을 위해 쓸 수 있는 은사는 없다. 그러므로 고린도전서 14장 4절에서 “방언을 말하는 자는 자기의 덕을 세우고”라는 말은, ‘방언의 은사만큼은 개인의 덕을 위하는 방언이 있다’라는 바울의 설명이 결코 아니다(이 부분은 5장에서 상세하게 다룬다). 그러므로 고린도전서 14장 2, 4절을 근거로 ‘바울이 개인용 방언을 인정했다’고 주장하거나, ‘고린도 교회 신자들이 개인용 방언을 예배에서 오용 또는 남용해서 예배를 혼란스럽게 했기 때문에 바울이 책망한 것이지 개인용 방언은 엄연히 존재한다’고 주장하거나, ‘바울이 통역이 없을 때 교회에서는 개인용 방언을 하지 말고 집에 가서 개인적으로 하나님께 방언을 하라’고 가르쳤다는 주장은 전적으로 잘못된 것이다. 그런데도 방옹자들은 고린도전서 14장 2, 4절을 비롯한 몇몇 본문을 근거로, 바울은 개인용 방언을 분명히 인정했다고 주장하면서 날마다 방언기도로 시간을 낭비하고 있으니 이 얼마나 어리석은 짓인가?
 

거짓 은사로 병들어 있는 고린도 교회를 위한 바울의 처방전

“(그러나, de.[데]-헬라어 원문에는 있다)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 내가 또한 가장 좋은 길을 너희에게 보이리라”(고전12:31).

방옹자들은 이 본문을 근거로 ‘바울이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고 했으므로, 더 큰 은사인 방언을 간절히 사모하는 것은 정당하며 또한 그렇게 해야 방언의 은사를 받을 수 있다’는 자신들의 주장을 정당화시킨다. 그러면 과연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는 바울의 명령이 방옹자들의 주장을 정당화시켜 주는가? 아니다. 오히려 바울은 본문에서 특정 은사(방언)에 집착하므로 심각한 영적 중병에 걸려 있는 고린도 교회에 그 병을 치료할 처방전을 제시하겠다고 말하고 있다(바울의 처방전은 고린도전서 13장이며, 바울이 처방한 약은 ‘사랑’이다).

위 본문에서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는 말은 바울의 이전 가르침(고전12장 11절, 17절, 29-30절 등)에 비추어 보면 모순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바울은 본문 바로 앞에서 특정한 은사를 더 크게 보고 사모하는 것을 명백히 금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29-30절과 모순처럼 보이는 31절의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9)는 말을 바울이 왜 했는지 전후 문맥, 특히 바로 뒤에 나오는 고린도전서 13장을 고려해서 읽으면 금방 깨달을 수 있다.

31절을 전후 문맥을 고려해서 쉽게 풀어서 다시 쓰면 다음과 같다.

“지금까지 내가 한 말을 듣고 혹 너희가 교회의 유익을 위해 쓰라고 주시는 성령의 은사마저도 외면하고 사모하지 않을까봐 걱정이 되는구나. 내가 너희에게 한 말, 즉 특정 은사를 선호해서는 안 된다는 말은 반드시 너희가 명심해야 한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성령의 은사 자체를 외면하거나 사모하지 않아서는 안 된다. 너희가 하는 것처럼 특정 은사를 사모해서는 안 되지만 교회의 유익을 위해 성령이 그의 뜻대로 주시는 은사는 무엇이든지 간에 더욱 큰 은사가 되도록 사모해야 한다. 이제 내가 그렇게 할 수 있는 가장 좋은 길(무슨 은사이든지 더욱 큰 은사가 되게 하는 길)을 너희에게 보여 주겠다.”

그러면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열심히 사모하라고 한 “더욱 큰 은사”란 도대체 무슨 은사를 말하는 것일까? 여기서 바울이 말한 “더욱 큰 은사”는 어떤 특정 은사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어떤 이들은 13장에 언급된 ‘사랑’을 은사로 보고 바울이 말하는 더욱 큰 은사를 사랑이라고 생각한다) 어떤 은사이든지 간에, 고린도전서 13장에서 제시할 ‘사랑’으로 튜닝된 은사를 말한다. “더욱 큰 은사”에서 “은사”가 복수 “카리스마타”(cari,smata)인 이유도 여기에 있다. 즉 교회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교회의 유익을 위해 은사를 쓴다면 그 은사가 무엇이든지 간에 “더욱 큰 은사”가 된다는 말이다.10)

성령의 은사는 종류에 따라 더 큰 은사가 따로 있는 것은 아니다. 성령의 은사는 기능은 다 달라도 그 크기는 모두 같다. 그러나 어떤 은사든지 간에 어떤 마음과 어떤 목적으로 은사를 사용하느냐에 따라 더욱 큰 은사가 되기도 하고 그렇지 않은 은사가 되기도 한다. 그러므로 성령이 은사를 주신 목적대로 교회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교회의 덕을 위해 은사를 쓴다면 그 은사는 다른 어떤 은사들보다 더욱 큰 은사가 될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사랑 없이 자기의 유익을 위해 성령의 은사를 개인 용도로 사용하려는 자들에게 교회의 유익을 위하여 은사를 사용할 수 있도록 고린도전서 13장에서 사랑의 길을 제시한다. 고린도전서 13장에서 바울이 하려는 말은 성령이 주신 은사를 자신을 위해 개인 용도로 쓰려고 하지 말고, 사랑으로 교회의 덕을 세우는데 쓰라는 것이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13장에서도 일관되게 개인의 유익을 위한다는 개인용 은사를 철저하게 부정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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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앤토니 C. 티슬턴, <고린도전서>(권연경 옮김)(서울: SFC, 2011), pp.368-369.
2)강면광, <생명의 삶 플러스>(서울: 두란노, 2008.11[2]), p.14.
3)앞의 책, p.24.
4)바울은 여기서 몸의 상호의존성을 통해 은사의 상호의존성을 강조하고 있다. 다음을 참고하라. 스텐리 M. 홀튼, <성경이 말하고 있는 성령>(순복음교육연구소 옮김)(서울: 서울서적, 1988), p.226.,
5)로버트 토마스, <성령의 은사들>(김지찬 옮김)(서울: 생명의말씀사, 1983), p.77.
6)앤토니 C. 티슬턴, <고린도전서>(권연경 옮김)(서울: SFC, 2011), pp.368-369.
7)웨인 그루뎀, <성경 핵심 교리>(김광열, 곽철근 옮김)(서울: CLC, 2004), p.686; 크레이그 L. 블롬버그, <오순절 성령강림에서 밧모섬까지>(왕인성 옮김)(서울: CLC, 2010), p.303.
8)존 R. W. 스토트, <오늘날의 성령의 사역>(조병수 옮김)(서울: 한국기독교교육연구원, 1983), p.137-138.
9)존 맥아더는 31절이 명령법도 될 수 있지만 직설법도 될 수 있다고 하면서 직설법으로 이 본문을 번역하므로 전후 문맥의 모순을 해결하려고 한다. 새국제역(INIV)도 이 본문을 직설법으로 번역하고 있다. “너희가 가장 좋은 은사를 사모하므로 내가 너희에게 제일 좋은 길을 보이리라.” 존 맥아더, <무질서한 은사주의>( 이용중 옮김)(서울: 부흥과개혁사, 2008), p.367. 그러나 이 본문은, 명령문으로 보더라도 전후 문맥과 모순되지 않는다.
10)웨인 그루뎀, <성경 핵심 교리>(김광열, 곽철근 옮김)(서울: CLC, 2004), p.6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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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창모 목사는 죽음에 이르는 병에 걸린 한국 교회를 신물 나게 체험하며 갈등하다 하나님을 향해 살아 있는 교회를 꿈꾸며 1999년 김천에서 ‘제자들 경배와 찬양교회’를 개척하였다. 이창모 목사는 한국교회를 죽음에 이르게 한 병이 단지 성공주의, 황금만능주의, 도덕적 윤리적 타락 등이 아니고 이미 한국교회에 만연된 잘못된 신학에 있음을 확신하고서 무엇이 바른믿음인지 신학적으로 깊이 고민하는 목사이다. 이창모 목사는 자신이 중2때 수련회에서 방언을 받았고, 대부분의 목사들이 그것을 ‘영의 기도의 언어’라고 가르치므로 의심없이 수 십년 동안 옹알거리는 방언현상으로 기도(?)하였던 대표적인 방언기도자였다. 김우현, 김동수 등이 저술한 거짓 방언을 미화하는 한심한 서적들을 접한 후 방언에 관한 깊은 신학적인 성찰을 시작하게 되었고, 결국 오늘 날 방언이라고 알려진 소리현상과 성경의 참된 방언은 무관하다는 사실을 확신하게되었다. 이전의 자신처럼 방언으로 기도한다고 착각하고 있는 다른 목회자들과 신자들을 진정한 복음으로 돌이키기 위해 <방언, 그 불편한 진실>(밴드오부퓨리탄,2014)을 출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