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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수의 방언은 고린도에 나타난 변태방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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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수의 방언은 고린도에 나타난 변태방언
  • 이창모
  • 승인 2015.07.20 1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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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의 방언은 바울이 퇴치하였던 사탄의 모조 방언

(제목 입력 공간의 한계로 이 글의 제목에서 '김동수 교수'라고 호칭하지 못했음을 독자들께서 널리 양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바른믿음 편집자) 

오늘 전개되는 현대 교회의 변태적인 거짓 방언에 대한 토론에 참여하기 위해 먼저 독자들은 나와 김동수 교수가 주장한 다음의 내용을 먼저 파악하기 바란다.  

“고전 14:2,4에서 방언이 하나님께 말한다고 했는데, 그것은 바울의 주장이 아니라 고린도교회의 주장을 인용한 것이다”(이창모).

변태 방언옹호자 김동수 교수

"이러한 주장은 바울이 전혀 말하지도 않은 방언에 대한 정의(외국어를 말하는 능력)에서 출발해서 이런 엉뚱한 해석을 하는 것이다. 본문에서 바울이 자신의 말을 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반대하는 고린도교회의 주장을 인용한 것이라는 것은 말도 되지 않는다. 기록 당시에 인용부호는 없었지만, 다른 사람의 말을 인용할 때와 자신의 말을 하는 것을 분명히 구분해서 저자는 말할 수 있었고 또 저자들은 그렇게 했다.”(김동수)

“기록 당시에 인용부호는 없었지만 다른 사람의 말을 인용할 때와 자신의 말을 하는 것을 분명히 구분해서 저자는 말할 수 있었고 또 저자들은 그렇게 했다.”는 김동수 교수의 말은 옳다. 따라서 바울이 고린도전서를 쓰면서 다른 사람의 말을 인용할 때는, 그것을 구별할 수 있게 기술했기 때문에 틀림없이 당시 고린도 교회의 독자들은 바울의 인용문을 구별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현대의 독자들은 바울이 기술한 것을 읽으면서 고린도 교회의 독자들처럼 인용문을 잘 구별할 수 없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바울이 인용문임을 나타내는 표시를 헬라어를 잘 모르는 현대의 독자들이 간파하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고린도전서 7장 1-2절의 “너희의 쓴 문제에 대하여 말하면 남자가 여자를 가까이 아니함이 좋으나 음행을 피하기 위하여 남자마다 자기 아내를 두고 여자마다 자기 남편을 두라”에서 “남자가 여자를 가까이 아니함이 좋으나”는 바울이 당시 고린도 교회에 있었던 금욕주의자들의 구호를 인용한 것인데도 현대의 독자들은 한 동안 이것을 눈치 채지 못했다. 그래서 오랫동안 이 본문은 바울의 결혼관으로 오해되어 왔다.

 

고린도전서 14장 2절의 정체

고린도전서 14장 2절은 바울의 방언의 정의가 아니라, 고린도 교회의 거짓 방언을 폭로하기 위해 바울이 고린도 교회의 거짓 방언자들이 주장하는 거짓말을 바울이 인용한 것이다. 만약 고린도전서 14장을 읽는 독자들이 이 사실을 간파했다면, 어렵지 않게 고린도 교회의 방언이 거짓 방언임을 깨달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지금까지 이 본문을 읽는 모든 자들은 이 사실을 간파하지 못했다.

14장 2절의 정체를 간파하기 위한 두 가지 고려 사항

고린도전서는 헬라어로 기록된 고대 문서이다. 따라서 고대 문서의 특징을 고려하지 않으면 고린도전서 14장 2절의 정체를 영원히 간파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본문의 정체를 알려면 적어도 고대 문서의 특징 두 가지를 고려해야 한다.

첫째, 1세기의 헬라어는 어디서 새로운 문장이 시작되는지 알 수 없고(대문자로 문장을 시작하는 방식으로 대화를 구별하는 현대 헬라어 인쇄 방식은 모든 글자를 대문자로 쓰던 방식의 당시보다 한 참 후에 생겨난 관습이다), 인용부호(따옴표)를 비롯한 문장 부호는 아예 없었다.1)그래서 고도로 훈련된 전문가들도 헬라어로 된 고대 문서를 읽을 때, 문장들 안에 인용문이 있음을 놓치는 경우는 허다하다. 특히 고린도전서에는 많은 인용문들이 있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성경을 읽는 독자가 바울이 인용한 인용문을 놓치지 않고 찾아내는 것은 특히 고린도전서를 바르게 이해하는데 꼭 필요한 요소다.

둘째, 상대방의 주장의 모순을 폭로하기 위하여 상대의 말을 수용하는 듯 논박하는 고대 수사법인 ‘디아트리베’(diatribe) 방식2)을 바울이 고린도전서에서 여러 번 사용하고 있음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

그 동안 고린도전서의 본문을 해석할 때, 앞의 두 가지 사항을 고려하지 못한 탓에, 예를 들면 고린도전서 7장 1절의 “남자가 여자를 가까이 아니함이 좋으나”를 읽으면서 사람들은 오랫동안 이것을 바울의 결혼관으로 잘못 이해했다. 이런 오해를 야기한 결정적 이유는, 비교적 최근에 이르기까지 고린도전서 7장 1절이 바울 자신의 말이 아니라 고린도 교회 신자들 중 금욕주의자들의 슬로건을 바울이 인용해서 ‘디아트리베’ 수사법으로 이들의 주장을 수용하는 듯 반박하고 있음을 간파하지 못했기 때문이다.3)

고린도전서에 나오는 바울의 ‘인용’과 ‘디아트리베’ 수사법의 예문들

고린도전서에서 바울이 다른 사람의 말을 인용해서 그것을 수용하는 듯 반박하는 ‘디아트리베’ 수사법을 사용하고 있는 본문들을 좀 더 살펴보자. 바울 서신들 중에 유독 고린도전서에 인용문들이 두드러지게 많이 있다. 그러나 지면의 제약으로 3가지 예만 살펴보자.

아래 제시된 본문들에서 밑줄 친 부분은 바울의 말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말을 바울이 인용한 것이며, 기울어진 글꼴 부분은 인용한 내용에 대한 바울의 반박이다. 그리고 반박이 시작됨을 알리는 바울의 표시인 부정접속사(avllV, 알 / de,,, 데)는 파란색 으로 표시했다.(여기에 사용된 성경은 개역개정과 헬라어 성경 BNT, 그리고 영어 성경 NIV 다.)

"모든 것이 내게 가하나 다 유익한 것이 아니요 모든 것이 내게 가하나 내가 아무에게든지 얽매이지 아니하리라"(고전6:12).

모든 것이 내게 가하 다 유익한 것이 아니요 모든 것이 내게 가하 내가 아무에게든지 얽매이지 아니하리라(고전6:12).

Pa,nta moi e;xestin avllV ouv pa,nta sumfe,rei pa,nta moi e;xestin avllV ouvk evgw. evxousiasqh,somai u`po, tinojÅ

"Everything is permissible for me"-- but not everything is beneficial. "Everything is permissible for me"-- but I will not be mastered by anything.

위 본문에서 “모든 것이 내게 가하나”는 바울의 말이 아니라 당시 고린도 교회의 자유주의자(도덕 폐기론자)의 슬로건이었다.4) 바울은 자유주의자의 이런 주장을 비판하기 위해 이들의 슬로건을 인용하고, 이에 대해 ‘그러나(avllV, 알) 다 유익한 것은 아니요’와 ‘그러나(avllV, 알) 내가 아무에게든지 얽매이지 아니하리라’(나는 어떤 것도 나를 통제하도록 허용하지 않을 것이다)5)는 말로 이들의 주장을 반박하고 있다. 영어성경 NIV는 독자들이 인용문임을 쉽게 구별할 수 있도록 친절하게 따옴표로 표시해 놓았다.

음식은 배를 위하여 있고 배는 음식을 위하여 있으나 하나님이 이것저것 다 폐하시리라 (그러나) 몸은 음란을 위하여 있지 않고 오직 주를 위하며 있으며 주는 몸을 위하여 계시느니라(고전6:13).

ta. brw,mata th/| koili,a| kai. h` koili,a toi/j brw,masin(o` de. qeo.j kai. tau,thn kai. tau/ta katargh,seiÅ to. de. sw/ma ouv th/| pornei,a| avlla. tw/| kuri,w|(kai. o` ku,rioj tw/| sw,mati

"Food for the stomach and the stomach for food"-- but God will destroy them both. (but) The body is not meant for sexual immorality, but for the Lord, and the Lord for the body.

위 본문 개역개정은 헬라어 원문에 있는 부정접속사 ‘그러나’(de., 데)를 빠뜨렸다. NIV 본문에서는 ‘but’의 위치가 (but)(지은이 삽입)에 있는 것이 원문에 훨씬 더 가깝다. NIV 본문의 따옴표의 범위로 보아, NIV 번역자는 바울이 인용한 자유주의자의 슬로건을 “음식은 배를 위하여 있고 배는 음식을 위하여 있으나”까지로 본 것 같다. 그러나 “음식은 배를 위하여 있고 배는 음식을 위하여 있으나 하나님은 이것저것 다 폐하시리라”까지를 자유주의자의 슬로건으로 보아야 한다.

이 슬로건은 당시 고린도 교회의 자유주의자들이 자신들의 음행을 합리화시키는 말이었다. 당시 헬라 사상에서는 먹는 것과 성행위를 똑같이 몸에 속한 것으로 여겼다.6) 이런 헬라적 이원론에 영향을 받은 고린도 교회 신자들은 인간의 몸은 영과는 달리 영원한 가치가 없는 물질적인 것으로서 하나님에 의해 죽음으로 폐하게 되는 것으로 보았다. 그리고 몸은 영의 구원에 아무런 영향을 주지 않으므로 몸으로 무엇을 하든지(특히 음행) 괜찮고, 그 속에 어떤 음식으로(음식도 영원한 가치가 없는 물질이므로) 채워도 괜찮다고 본 것이다.7)

이에 대해 바울은 “그러나(de., 데) 몸은 음란을 위해 있지 않고 오직 주를 위하여 있으며 주는 몸을 위하여 계시느니라”는 말로 이들의 슬로건을 반박하고 있다.

“너희의 쓴 문제에 대하여 말하면 남자가 여자를 가까이 아니함이 좋으음행을 피하기 위하여 남자마다 자기 아내를 두고 여자마다 자기 남편을 두라”(고전7:1-2).

Peri. de. w-n evgra,yate(kalo.n avnqrw,pw| gunaiko.j mh. a[ptesqai\ dia. de. ta.j pornei,aj e[kastoj th.n e`autou/ gunai/ka evce,tw kai. e`ka,sth to.n i;dion a;ndra evce,twÅ

Now for the matters you wrote about: It is good for a man not to marry. But since there is so much immorality, each man should have his own wife, and each woman her own husband.

위 본문에서 “남자가 여자를 가까이 아니함이 좋으나”라는 말도 바울의 의견이 아니라 고린도 교회의 금욕주의자의 슬로건이었다. 이에 대해 바울은 “그러나(de, 데) 음행의 연고로 남자마다 자기 아내를 두고 여자마다 자기 남편을 두라”는 말로 이들의 슬로건을 반박하고 있다. 위 NIV 본문에서 바울이 인용한 말을 따옴표로 표시하지 않은 것은, 바울은 자신이 인용할 말 앞에서 “너희의 쓴 문제에 대하여 말하면”이라고 함으로, 뒤에 나오는 말이 인용문임을 밝히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이제 문제의 본문인 고린도전서 14장 2절을 살펴보자.

방언을 말하는 자는 사람에게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하나니 이는 알아듣는 자가 없고 (그) 영으로 비밀을 말함이니라.

o` ga.r lalw/n glw,ssh| ouvk avnqrw,poij lalei/ avlla. qew/|\ ouvdei.j ga.r avkou,ei( pneu,mati de. lalei/ musth,ria

For anyone who speaks in a tongue does not speak to men but to God. Indeed, no one understands him; he utters mysteries with his spirit.

이 본문도 바울의 의견이 아니라 거짓 방언자들의 말을 바울이 인용한 것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 본문을 읽는 모든 독자들이 이 점을 간파하지 못하고 있다. NIV 본문에서 번역자가 2절을 따옴표로 처리하지 않은 것도 이 때문일 것이다.

앞에서 예로 든 본문에서는 바울의 인용과 그에 대한 반박이 한 절 안에 있지만, 여기서는 두 절에 걸쳐 있다. 이 때문에 독자들은 2절이 바울의 인용문임을 간파하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그러나 2절과 3절을 한 절로 보면, 2절은 바울의 의견이 아니라 다른 사람(거짓 방언자)의 말을 바울이 인용한 것이며, 3절은 인용한 말에 대한 바울의 반박임을 간파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3절을 부정접속사 ‘데’(de., 그러나)로 시작함으로, 3절이 2절의 인용문에 대한 자신의 반박임을 나타낸다. 아래 3절에서 ‘그러나’를 눈여겨보라.

"그러나 예언하는 사람에게 말하여 덕을 세우며 권면하며 위로하는 것이요."

o` de. profhteu,wn avnqrw,poij lalei/ oivkodomh.n kai. para,klhsin kai. paramuqi,anÅ

But everyone who prophesies speaks to men for their strengthening, encouragement and comfort.

바울은 영적으로 어린아이 같은 고린도 교회 신자들이, 통역할 수 없는 자신들의 거짓 방언에 대해 변명하는 말을, 2절에서 인용하고 3절에서 반박하고 있다. 그리고 반박하는 방법으로, 교회의 유익을 위해 비교적 성령의 의도대로 잘 시행되고 있는 예언을 2절의 방언과 비교함으로써, 2절에서의 거짓 방언자들의 설명이 교회의 유익을 위해 사용해야 하는 성령의 은사와 얼마나 동떨어져 있는 것인가를 보여 주고 있다.

고린도전서 14장 4a절의 “방언을 말하는 자는 자기의 덕을 세우고……”도 고린도전서 14장 2절과 마찬가지로 방언에 대한 바울의 의견이 아니다.

방언을 말하는 자는 자기의 덕을 세우고 (그러나) 예언하는 자는 교회의 덕을 세우나니(고전14:4).

o` lalw/n glw,ssh| e`auto.n oivkodomei/ o` de. profhteu,wn evkklhsi,an oivkodomei/Å

He who speaks in a tongue edifies himself, but he who prophesies edifies the church.

4절은 2-3절보다 짧지만 2-3절과 같은 구조를 가지고 있다. “자기의 덕을 세우고”는 거짓방언을 말하는 자들의 주장을 바울이 인용한 것이며, 이에 대해 “(그러나-필자 삽입) 예언하는 자는 교회에 덕을 세운다”로 반박하고 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한글 성경에는 ‘그러나’(de, 데, but)를 ‘그리고’(and)로 오역했다. 즉, 4절의 ‘세우고’는 ‘세우나’로 번역해야 한다는 말이다.

바울은 지금 거짓 방언자들의 주장대로 개인의 유익을 위해 사용되고 있는 방언과 교회의 유익을 위해 사용되고 있는 예언을 서로 비교하므로, 어느 것이 성령의 뜻대로 사용되고 있는 진짜 성령의 은사인가를 묻고 있다. 생각해 보라! 본문이 정상적인 방언과 정상적인 예언에 대한 바울의 설명이라면, “방언을 말하는 자는 자기의 덕을 세운다. 그리고(kai., 카이) 예언하는 자는 교회의 덕을 세운다”로 기술해야 자연스럽다. 그러나 지금 바울은 앞에 인용한 “방언을 말하는 자는 자기의 덕을 세우고”를 반박하려고 “예언하는 자는 교회에 덕을 세우나니”를 말하고 있기 때문에, 인용에 대한 반박의 시작을 알리는 부정접속사 ‘데’(de, 그러나)를 쓴 것이다.

즉, 예언과 방언을 ‘카이’(kai., 그리고)로 나란히 연결하지 않고 부정접속사 ‘데’(de., 그러나)로 연결해 서로 대조시키는 것은, 정상적인 방언과 정상적인 예언의 기능을 설명하려는 것이 아니라, 비정상적인 방언과 정상적인 예언을 대조시켜 교회를 위하지 않고 개인을 위한다는 비정상적인 방언의 정체를 밝히려는 것이다. 이해를 돕기 위해 예를 하나 들어보자.

어떤 반에서 담임선생님이 영수에게는 사과를, 철수에게는 토마토를 주시면서 말씀하셨다. “너희는 가서 선생님이 준 과일을 가장 연약한 친구에게 주어라.” 그런데 영수는 부모님이 계시지 않는 순희에게 그 사과를 주었고, 철수는 집에 가서 그 토마토를 혼자 먹어 버렸다. 담임선생님은 영수와 철수가 한 일을 놓고, 반 아이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영수는 선생님이 준 사과를 순희에게 주었고, 철수는 선생님이 준 토마토를 집에 가서 혼자 먹었다."

우리는 선생님의 이 말씀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사과는 친구에게 주어야 하는 과일이고, 토마토는 자기 혼자 먹어도 되는 과일이다”로 이해해야 할까? 아니면 “영수는 선생님 말씀대로 잘 순종했지만 철수는 그렇지 않았다.”로 이해해야 할까? 여기서 어느 것이 바른 해석인지를 묻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그런데 방옹자들은 왜 사과는 친구에게 주어야 하는 과일이지만, 토마토는 자기 혼자 먹어도 되는 과일이라고 우기는 것일까?

고린도전서 14장 2절과 4a절을, 개인용 방언에 대한 바울의 설명이라고 주장하는 방옹자들은 바울의 가르침 대신에 고린도 교회의 거짓 방언자들의 거짓말에 속고 있음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9)

 

-- 각주 --

1)앤토니 C. 티슬턴, <고린도전서>(권연경 옮김)(서울: SFC, 2011), p.174.
2)강면광, <생명의 삶 플러스>(서울: 두란노, 2008.11[1]), p.22.
3)앤토니 C. 티슬턴, <고린도전서>,(권연경 옮김)(서울: SFC, 2011), p.187.
4)김세윤, <고린도전서>(서울: 두란노아카데미, 2007), p.112.
5)데이비드 프라이어, <고린도전서 강해>(정옥재 옮김)(서울: IVP, 1999), p.129.
6
)강면광, <생명의 삶 플러스>(서울: 두란노, 2008.11[1]), p.22.
7)김세윤, <고린도전서 강해>(서울: 두란노아카데미, 2007), p.113. 이를 미루어 보면 고린도 교회가 영지주의의 영향을 받았음이 틀림없다. 또 다음을 참조하라. 강면광, <생명의 삶 플러스>(서울: 두란노, 2008.11[1]), pp.23-24. 
8)문장 구조상 ‘a는 b다. 그리고 c는 d다’와 ‘a는 b다. 그러나 c는 d다’의 의미는 하늘과 땅 차이다. 전자는 접속사로 연결된 두 문장을 다 긍정하는 것이지만, 후자는 둘 중 어느 하나를 부정하는 것이다. 전자는 두 가지의 바른 정보를 주는 것이지만, 후자는 둘 중 하나가 틀렸음을 말하는 것이다. 따라서 바울은 이런 문장 구조를 통해 ‘a는 b다’ 즉, ‘방언(a)은 개인의 덕(b)을 위한다’는 것을 부정하고 있다.
9)오늘날의 오순절주의자의 방언은 오순절 날 예루살렘에 있었던 방언과 같은 외국어가 아니라, 고린도 교회에 있었던 고전14:2, 4의 방언과 같은 것이므로, 이들을 ‘오순절주의자’라고 부르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오히려 ‘고린도주의자’라고 불러야 맞다.

이창모 목사는 죽음에 이르는 병에 걸린 한국 교회를 신물 나게 체험하며 갈등하다 하나님을 향해 살아 있는 교회를 꿈꾸며 1999년 김천에서 ‘제자들 경배와 찬양교회’를 개척하였다. 이창모 목사는 한국교회를 죽음에 이르게 한 병이 단지 성공주의, 황금만능주의, 도덕적 윤리적 타락 등이 아니고 이미 한국교회에 만연된 잘못된 신학에 있음을 확신하고서 무엇이 바른믿음인지 신학적으로 깊이 고민하는 목사이다. 이창모 목사는 자신이 중2때 수련회에서 방언을 받았고, 대부분의 목사들이 그것을 ‘영의 기도의 언어’라고 가르치므로 의심없이 수 십년 동안 옹알거리는 방언현상으로 기도(?)하였던 대표적인 방언기도자였다. 김우현, 김동수 등이 저술한 거짓 방언을 미화하는 한심한 서적들을 접한 후 방언에 관한 깊은 신학적인 성찰을 시작하게 되었고, 결국 오늘 날 방언이라고 알려진 소리현상과 성경의 참된 방언은 무관하다는 사실을 확신하게되었다. 이전의 자신처럼 방언으로 기도한다고 착각하고 있는 다른 목회자들과 신자들을 진정한 복음으로 돌이키기 위해 <방언, 그 불편한 진실>(밴드오부퓨리탄,2014)을 출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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