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고경태 목사(조직신학 박사)

 

김효남 교수(총신대 역사신학)는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은 왜 성경적이며, 필연적인가?”를 <총신원보> 279호(2022년 10월 18일)에 개제했다. 그리고 107회기 총회 이단대책세미나에서 “개혁파 언약사상과 청교도 준비교리”에 대해서 발표했다.

정이철 목사는 “합동 이대위가 조사해야 할 사람을 전문위원으로 위촉하여 자문과 지도를 받는 이상한 모습”으로 논평했다(바른믿음, 2023. 4. 19). 합동 이대위는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과 수동적 순종 그리고 회심준비론에 대해서 평가했다. 전자는 논란이 끊이지 않자 신학부로 이관시켜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후자인 “회심준비론”은 교단에서 교류를 금지했다. 그런데 이대위에서 교류 금지에 위배된 내용을 강연하도록 했다. 합동 교단의 결정이 조석으로 변할 수 있다는 것이 될 수 있다. 그럼 신뢰할 수 없는 규약이라고 스스로 인정하는 것이다(107회 총회보고서 410쪽, 참고, 진용식, "회심준비론(준비교리)은 왜 교류금지되었는가?", <기독신문> 2022.10.03).

김 교수는 지난 총회의 결정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이 자기 주장만을 전개하고 있다. 교단의 결정에 대해서 수정을 요구하는 연구자의 자세로 적절하지 않다. 양편으로 논의할 때도 상대방에 대한 배려가 있어야 하는데, 이미 교단적 결정이 난 사안에 대해서 배려가 없다. 이러한 자세는 공적인 교수로서 적당한 자세로 보기 어렵다. 지난 총회 결정의 부당성을 지적해야 한다. 논의 중에 있는 사안처럼 전개하는 것은 좋은 태도가 아니다.

김 교수의 글에 대해서 림헌원 목사(기독교진리수호연구협회 대표, 한돌교회)는 구원 과정에 율법이 추가되는 것임으로 폐기되어야 한다고 평가하며 반박했다(림헌원, 김효남 교수는 ‘준비교리’ 당장 폐기하고 합동 이대위 전문위원 사퇴해야!, <리폼드투데이>, 2023.4.21). 림 목사의 주장은 타당하다. 준비론은 구원 과정에서 준비(율법 역할)를 생략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논문의 내용은 당혹스럽다. 저자가 무엇을 말하려는 너무 쉽게 알 수 있다. 그것은 자기 주장이 옳다고 말하고 싶은 것이다. 그것 뿐이다. 자기 주장의 정당성을 위해서 논리가 있어야 하는데, 논리가 너무나 빈약하다. 논리는 A와 B의 합당한 연결이나, 법적 문서를 정당하게 해석하는 것이다. 김 교수는 A와 B 등 다양한 요소는 제시했지만 요소 사이에 합리적인 연결에 대해서 밝히지 않았다. 법적 문서를 제시하지만 정당한 권위를 밝히지 않았다.

김 교수는 준비론을 반대하는 진영으로 페리 밀러, 로버트 켄달 등을 묶었는데, 이들의 사상을 따르는 합동 계열의 사역자는 없다. 준비론이 찬성함과 반대함에서 신학을 양분시킬 수 있는 핵심 가치는 전혀 아니다. 준비론은 교회의 서고 넘어짐의 조항이 아니라, 뉴잉글랜드에서 체계화된 한 소재에 불과하다.

김 교수는 많은 연구자들이 준비론을 주장했기 때문에 정당하다고 주장한다. 준비론을 말하지 않은 신학자가 없다는 것이다. 어거스틴, 존 칼빈, 사무엘 루더포드, 윌리엄 퍼킨스, 브라켈, 바빙크, 박형룡 등등이다. 모든 신학자가 말했기 때문에 그것이 정당한 것일까? 신학의 표준은 표준문서(standard text)이다. 김 교수는 웨스민스터신앙고백서(15장)를 제시했으면서도, 정당성을 말할 때에 신앙고백서를 언급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아마도 신앙고백서 15장에서는 “회심 이전의 준비”에 대해서 확신하지 못해서가 아닐까? “많은 신학자의 주장”과 “신앙고백서(표준문서)”에서 어디에 판단기준을 두어야 할까? 우리는 신앙고백서를 바꿀 수 있다. 그럼에도 그 문서에 통제를 받는다. 신학자의 권위는 규범적 문서에 근거한 것이다.

김 교수는 매우 정확하게 회심준비론을 밝히고 있다. 회심준비론은 회심 이전에 준비가 되어 있고, 그 뒤에 회심, 구원에 들어간다는 구도이다. 김 교수는 이 구도를 위해서 사도행전의 예를 들었다. 사도행전 2장, 8장(에디오피아 내시), 16장(빌립보 감옥 간수)이다. 김 교수는 3,000명의 회심에 대해서 완벽한 회심으로 보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 안에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있었을 수 있다. 내시가 집사 빌립에게 세례를 받았는데, 집사 빌립은 사마리아에서 베푼 세례는 어떤 문제가 있었다고 볼 수 있다(마술사 시몬에게 베푼 세례). 즉 내시의 회심이 완벽하다고 성경 본문으로 단정하기 쉽지 않다. 성령 임함에 대한 명시가 없기 때문이다.

김 교수는 빌립보 간수가 두렵고 떨면서 말한 ‘구원’에 대해서 질문만 하고 답변하지 않는다(120쪽). 그 ‘구원’은 빌립보에서 바울이 전도한 소리를 들었다고 볼 수 있다. 사도 바울이 그 간수에게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고 선포했고, 주 예수를 영접했다고 보아야 하지 않을까?

김 교수는 갈라디아서를 인용하는데(갈 3:21-25, 121쪽) 매우 부적절한 인용이다. 갈라디아서에서는 율법에 있었던 초등교사(몽학선생)의 기능이 종료되었다는 것이며, 믿음 후에 율법이 추가되어서는 안 된다는 내용이다. 그런데 김 교수는 갈라디아서를 근거해서 초등교사의 역할을 회심 전에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김 교수는 갈라디아 사람들의 오류에 머물고 있을 수 있다.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 (갈 3:1).

회심준비론은 "회심 이전에 준비가 있어야 한다"는 체계인데, 잉글랜드가 아닌 뉴잉글랜드 청교도들의 구도이다. 김 교수는 거의 모든 학자들이 주장했다고 하지만, 체계화는 뉴잉글랜드에서 일어났다(참고, 조엘 비키, 폴 스몰리, <은혜로 말미암은 준비>, 마르투스 역(마르투스, 2018년). 비키는 회심준비론에 대해서 방대한 자료를 취합해서 정리했다. 그 자료들의 대부분은 뉴잉글랜드 사역자들의 견해이다. 회심준비론을 말하려면 뉴잉글랜드에 집중해서 설명했으면 좀 더 구체적으로 제시되었을 것이다. 기독교 역사 전체를 회심준비론으로 구성하려는 시도에서 논리가 없는 글을 양산한 것으로 보인다.

필자는 “회심준비론은 회심 이전에 준비”라는 것을 반복한다. 그것은 회심 이후에도 '준비' 개념도 있기 때문이다. 신학자 중에서 ‘준비’라는 어휘를 사용하지 않은 사람은 없다. 우리는 종말을 '준비'해야 하며, 깨어 있어 준비해야 한다. 그러나 그 ‘준비’가 어떤 수준인지는 긴밀하게 분석해야 한다. ‘준비’라고 했기 때문에 “회심 이전의 준비”가 아니며, ‘순종’이라고 했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과 수동적 순종”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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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효남 교수(역사신학, 총신신대원)

 

김 교수가 루더포드(Samuel Rutherford)의 요리문답 23, 24장의 문답, 280문(Rutherford's Catechism)에서 부르심 전에 준비할 것에 대해서 율법으로 비참한 처지를 보여준다고 제시했다. 회심준비론이 있는 것으로 보이는 루더포드나 뉴잉글랜드 초기 청교도들은 제정분리 이전의 상태이기 때문에 좀 더 사려 깊게 보아야 한다. 국가가 기독교인 사회에서 회심의 경험은 제정이 분리되었고 비 기독교 사회에서의 경험과 유사하지 않기 때문이다. 자연법(natural law)을 신법(神法, Divine law)으로 보는 경향이 전자에 있기 때문이다.

참고로 루더포드의 김교수가 인용한 것으로 보이는, Rutherford's Catechism: Containing the Sum of Christian Religion은 언제 작성되었는지 알 수 없다. 1886년에 Alexander F. Mitchell에 의해서 편집된 작품이다. 루더포드가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에 서명한(1647년) 뒤에 이 문건을 작성했다면 문제가 있겠지만, 그 이전 작품이라면 신앙고백서와 다른 내용은 권위가 없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김 교수는 이 부분에 초점을 두어 신앙고백서에 회심준비론이 있음을 제시하며 주장했다면 논리적인 글이 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회심준비론은 “이미 교회 안에 있는 신자들이 회심되었다고 인지하는 것이 정당하지 않다”는 것이 주요 사항일 것이다. - 그렇게 되면 준비론이 없는 기존 교회의 신자들이 모인 교회는 회심되지 않은 사람이 모인 집합소가 된다. - 준비론, 참된 회심을 강조하면 교회의 갈등을 조장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윌리엄 거스리나 토마스 보스톤의 예로 스코틀랜드 교회가 준비론이 있었다고 김 교수는 제시했다(127쪽). 토마스 보스톤의 악더라더 신조의 한 부분은 다음과 같다. “It is not sound and orthodox to teach that we must forsake sin in order to our coming to Christ.”(우리가 그리스도께 오기 위해서 죄를 버려야 한다고 가르치는 것은 건전하거나 정통적이지 않습니다. The Auchterarder Creed, 1717). 보스톤이 견지했던 악더라도 신조에는 준비론이 없다고 보아야 하지 않을까?

김 교수는 회심준비론이 칼빈, 스코틀랜드 교회, 장로파 청교도, 네덜란드 개혁교회까지 총칭시키면서도, 독핍파 청교도, 뉴잉글랜드 청교도에 대해서 섹션을 배치시키지 않았다. 그리고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를 장로파 청교도가 작성한 것처럼 보이게 한 것은 정확한 제시라고 보기 어렵다.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는 엄숙한 동맹과 언약(1643년)을 통해서 장로파 청교도(잉글랜드 장로파), 잉글랜드 청교도, 스코틀랜드, 아일랜드가 참여해서 만든 문서이다.

그런데 신앙고백서 15장 “생명을 얻은 회개”에서 준비교리를 설명한다는 것은 부적절하다. 문서에는 "복음의 사역자가 죄인에게 율법을 선포해야 한다"는 규정이 없다. 죄인은 두 종류가 있는데, 회심 이전의 죄인과 회심 이후의 죄인이다. 그런데 신앙고백서에는 복음의 사역자가 죄를 지적하는 것이 ‘율법’이라는 명시가 없다. 회개를 촉구하는 것이 ‘율법’으로 해야 한다고 볼 수 없다. 그런데 김 교수는 회개 사역자의 문서의 핵심을 “율법을 설교한다”고 단정했다(128쪽). 율법을 설교하면 회개하고, 복음을 설교하면 회개하지 않을까?

또한 신앙고백서에서 ‘회개’는 구원 후에 신자(죄인)에게 주어지는 것이지, “구원 이전의 죄인”에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이신칭의와 병행되는 문구가 "의인이면서 동시에 죄인(simul justus et peccator)"이다(참고 롬 7장). 믿는 그리스도인도 죄에 대한 지적을 받으며 반드시 회개를 수행해야 한다. 회개가 없는 크리스천은 존재할 수 없다. 구원 후 성도에게도 복음선포자는 회개를 선포해야 한다.

김 교수는 빌헬무스 아 브라켈(Wilhelmus à Brakel, 1635-1711)을 네덜란드 개혁교회의 유일한 아버지로 생각하는 것 같다. 브라켈은 Nadere Refomatie(제이 종교개혁)을 이끈 유력자이지만 네덜란드 교회의 절대자로 보기는 어렵다. 그는 “네덜란드 청교도”로 칭하며 경건한 삶을 강조하는 경건주의와 유사하기도 하다. 네덜란드 개혁파에서 헤르만 바빙크와 아브라함 카이퍼는 다른 교단의 사역자이다. 김 교수는 카이퍼에 대한 언급은 없다.

필자는 김효남 교수의 글을 당황스럽게 보았는데, 준비론을 회심 이전의 준비라고 규정했으면서도, 회심 이후의 준비, 회심 이후에 죄의 지적에 대해서 교차적으로 제시하기 때문이다.

김 교수는 “회심 이전의 준비”를 “율법”으로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루더포드나 뉴잉글랜드의 청교도들의 ‘준비’는 교회 강단이 아닐 수도 있고, 강단이어도 무방하다. 그것은 국가법과 교회의 선포가 일치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교가 분리된 이후에 준비는 학교나 사회가 아닌 반드시 교회 강단에서 ‘준비, 즉 율법’을 선포해야 한다. 그렇다면 언제 복음을 선포할 것인가?

김 교수는 회심이 되었는가? 회심된 사역자라는 것은 누구에게 어떻게 평가받은 것인가? 회심된 사역자는 죄인을 준비시킬 수 있다는 것인데, 준비가 된 것을 어떻게 파악할 수 있는가? 사역자가 율법으로 준비시키면 성령이 회심시키는 역사를 해야하는가? 그리고 회심을 마친 성도와 준비가 덜 된 성도를 함께 교회에 놓고 율법을 설교에서 누구의 죄를 어떤 방향으로 제시할 것인가? 회심, 거듭남(above birth)는 오직 성령께서 하시는 것이지, 인간의 역할이 개입될 수 없다. 모든 구원은 전적 은혜의 산물이다.

김 교수는 이 짧은 논문에서 준비론을 장로파의 정통 체계로 자리잡게 하려는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장로파의 신앙고백서 근거까지 제시하면서 신앙고백서가 아닌 많은 신학자들로 정당성을 주장한 이유는 무엇인가? 교단은 표준문서대로 하면 된다. 표준문서를 정확하게 제시하면서도 표준문서의 정당성을 주장하지 않았다. 그러나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에서 회심준비론을 정당하게 주장할 내용이 없다.

김 교수의 제시처럼 준비론이 브라켈 이후의 바빙크, 벌코프, 박형룡은 유사한 계통으로 볼 수 있다. 필자는 뉴잉글랜드의 산물이라고 평가하고 있다. 그런데 박형룡 박사는 “청교도 개혁주의”라는 카테고리를 형성시켰다. 그런데 박용규 교수는 “역사적 개혁주의”를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청교도 개혁주의와 역사적 개혁주의의 차이는 무엇인가? 우리가 배울 때에는 "구 프린스턴 전통"이라고도 배웠는데, 구 프린스턴 전통에는 스코틀랜드의 상식철학이 활용되었다고 배웠다.

청교도 개혁주의는 독립파 청교도(존 오웬, 브라켈)의 계통을 따르며 지향하는 개혁주의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역사적 개혁주의는 많은 신학자보다도 표준문서인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장로파), 세일치신조(개혁파)를 근거로 신학하는 것이다. 장로파의 역사(historic)에는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가 있다. 그런데 경건주의적 성향, 재세례파적 성향은 정통 문서를 소홀히 하고 “오직 성경”을 강조하는 경향이 절대적이다. 청교도들은 경건한 삶을 강조했다. 그럼에도 침례파에서는 정통 신학을 견지하면서 성경을 해석하려는 특수침례파가 있다.

그래서인지 미국에서 사역한 PCA 소속의 어떤 한국인 목사는 침례파가 합동 측과 유사하다고 증언했다. 그것은 엄격하게 주초(酒草)를 금지하는 패턴이 장로파가 아니라 침례파에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침례파와 한국 장로교가 차이가 있는 것은 표준문서의 차이이다. 성경을 해석해서 동일한 산물이 나온다면 무엇이 문제겠는가? 표준문서가 다르면 해석된 내용에서 차이가 발생해야 정상적이다. 똑같은 쌀덩어리가 들어가도 떡틀에 따라서 다른 모양으로 나온다. 같은 재료의 떡이지만 모양은 틀에 따라서 다르다.

성경을 해석한 내용에서 율법이 나와서 율법을 선포해서 죄인을 준비시킨다는 준비론이 합당한 성경 해석이고 합당한 주일강단 선포 내용이 되겠는가? 목사가 복음을 선포하면 성령께서 역사하신다(계 2-3장). 복음을 듣는 자에게 성령께서 회개할 자를 회개하게 하시며, 감동을 받을 자에게 감동을 주시고, 지식을 주실 자에게 지식을 각자에게 각양으로 은혜를 주실 것이다. 루터는 율법을 설교해서 복음이 될 수 있고, 복음을 설교해도 율법이 될 수 있는 것으로 들었다. 율법과 복음을 구분하려고 하지 말고 예수를 깊이 생각하면서, 선포된 복음을 깊이 영접하면서 순종하는 것이 합당한 성도의 자세이다(게 1:3). 그 영접할 복음을 주께서 자기가 보내신 사자에게 주셨다. 귀 있는 자는 성령께서 하시는 말씀을 들을 수 있다(계 2-3장).

마지막 김효남 교수는 현재 총신대학교나 거의 모든 신학교에서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와 인간의 책임에 대한 배분이 미숙하거나 부재하다고 평가한다(109쪽). 필자는 신학교 교수가 신학교 교육을 교회에 부정적으로 소개하는 것은 부적절하다고 생각한다. 교수 요원은 신학교에서 주도성을 갖아야 하며, 신학교에 대한 비판은 신학교 밖에 있는 사역자들이 수행해야 한다. 신학교가 신앙고백서에 위배되었을 때에, 합법적인 자세로 호소하는 것은 가능할 것이다. 그런데 뇌피셜로 주장하는 것은 좋은 자세가 아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의지를 해결했다(109쪽, 언약 사상으로)는 뉘앙스가 있는데 부당하다. 두 과제는 해결되지 못했고, 지금은 인간의 의지에 많은 비중을 두는 것이 추세이고 지향성이다. 이러한 논의의 원점은 루터(노예의지)와 에라스무스(자유의지)의 논쟁에 있다. 루터가 반펠라기우스적 성향(시너기즘)으로 가는 지향성을 노예의지론(모너기즘)으로 강력하게 지향성을 확립했다. 이 문제는 협상의 문제가 아닌 선택의 문제이다. 균형을 잡을 수 있다는 착각을 하지 않아야 한다.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십자가만을 온전히 붙들어도 여전히 죄인이다. 그럼에도 십자가를 붙들 은혜를 주셔서 십자가를 지고 나갈 뿐이다. 성화에서 루터는 굵고 강력하게 십자가를 주장했지만, 칼빈은 좀 더 섬세하게 성경해석을 훈련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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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이철 목사는 2004년부터 현재까지 미국 미시간 주 ‘앤아버 반석장로교회’의 담임목사이고 거짓 신학의 ‘견고한 진’(고후10:4)을 무너뜨리기 위해 시작된 신학신문 <바른믿음>의 대표이다.
총신대학(B.A 졸업), 총신대학 신학대학원(M.Div Eqiuv.졸업), 아세아연합신학대학 대학원(Th.M 졸업), Liberty Theological Seminary(S.T.M 졸업), Fuller Theological Seminary(Th.M 수학), Puritan Reformed Theological Seminary(Th.M 수학), Liberty Theological Seminary(D.Min 수학), 남아공신학대학원(South African Theological Seminary, Ph.D)에서 연구하였고, 현재 University of Pretoria(Ph.D)에서 연구하고 있다.
저서로는 「신사도 운동에 빠진 교회」, 「제3의 물결에 빠진 교회」, 「가짜 성령세례에 빠진 교회」, 「피터 와그너의 신사도운동 Story」, 「한 눈에 들어오는 청교도 개혁운동」, 「능동적 순종에 빠진 교회」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