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창모 목사의 성경 오역(誤譯), 오석(誤釋) 바로잡기(32)

 

글을 시작하며

한글로 번역되어 쉽게 읽을 수 있는 성경은 개역개정, 한글개역, 공동번역, 새번역, 현대인의 성경 등 여럿 있다. 이들 중에서 한국 교회에서 가장 많이 사용되는 번역 성경은 아마도 한글개역을 개정한 개역개정일 것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가장 많이 사용되는 개역개정이 다른 번역 성경들에 비해 오역이 가장 많다는 것은 슬픈 일이 아닐 수 없다.

필자에게는 개역개정이 나온다는 소식에 가슴이 울렁거릴 정도로 기대가 컸었던 기억이 있다. 그러나 정작 필자가 개역개정을 손에 들었을 때, 가슴이 터질 정도로 실망이 더욱 컸었던 기억도 있다. 왜냐하면, 물론 개역개정이 한글개역보다 번역이 좀 더 나은 것은 사실이었지만, 여전히 오역들이 너무 많았고, 한글개역보다도 못한 개악도 상당수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특히 아연실색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한글개역에서 필히 수정해야 할 심각한 오역들이 개역개정에서도 거의 그대로 방치되어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래서 필자는 필자가 목회하는 교회에서 개역개정을 쓰지 않기로 결심했으며, 개역개정이 출판된 1998년 이후 지금까지도 필자와 필자의 교회에서는 한글개역을 사용하고 있다(물론 원고를 작성할 때에는 어쩔 수 없이 개역개정을 사용한다). 이런 이유로 필자는 개역개정에서 확인되는 오역들을 하나하나 정리해야겠다는 생각으로 설교를 준비할 때나 성경 공부 준비를 할 때, 헬라어 성경을 옆에 두고 힘이 닿는 데까지 확인하는 작업을 해 왔으며(이전에는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헬라어 성경은 보지 않고 NIV와 KJV 정도를 참고했을 뿐이었다), 확인 작업 중에 발견한 오역과, 또 오역은 아니지만, 해석에 문제가 있는 본문들을 소재로 <바른 믿음> 사이트를 통해 [성경의 오역과 오석] 시리즈를 쓰고 있다.

본 지면에 소개하려는 오역은 요6:23에 있는 것으로서, 실소를 금할 수 없을 만큼 기가 막힌 오역이어서 코미디 번역이라는 재목을 붙였다. 물론 이 코미디 번역은 전후 본문들의 의미에는 아무런 영향을 주지 않기 때문에 참으로 다행스러운 오역이지만, 그러나 개역개정에 버젓이 존재하는 이런 코미디 같은 오역은 가장 많이 사용되는 개역개정에 얼마나 많은 오역들이 있을 것인가를 걱정하게 하는 서글픈 실마리가 될 것이다.
 

요6:23의 “ἄλλα”(알라)의 코미디 번역, “그러나”

개역개정 외의 다른 번역 성경들에서도 아래에서 지적하는 코미디 번역이 더러 발견된다. 물론 이 오역은 하나님의 계시를 왜곡하지 못하는 가벼운 오역이지만, 그럼에도 이런 웃지 못 할 오역은 번역 성경들 속에 숨겨진 오역의 위험성을 걱정해야만 하는 명백한 이유가 될 것이다.

아래는 개역개정의 요6:23 본문이다. 붉은 색으로 표시한 단어를 주목해서 보라.

“(그러나 디베랴에서 배들이 주께서 축사하신 후 여럿이 떡 먹던 그 곳에 가까이 왔더라)”

위 번역의 헬라어 본문은 아래와 같다.

ἄλλα ἦλθεν πλοιάρια ἐκ Τιβεριάδος ἐγγὺς τοῦ τόπου ὅπου ἔφαγον τὸν ἄρτον εὐχαριστήσαντος τοῦ κυρίου.”(알라 엘덴 플로이아리아 에크 티베리아도스 엥귀스 두 토푸 호푸 에파곤 톤 아르톤 유카리스테산토스 투 퀴리우)

위 헬라어 본문의 문두에 나오는 “ἄλλα”(알라)를 개역개정에서 “그러나”로 번역한 것은 어처구니없는 코미디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이 코미디는 결코 웃을 수 없는 슬픈 코미디이다. 왜냐하면, 그래도 성경은 인간의 영혼을 좌지우지하는 하나님의 계시인데, 번역자들이 조금만 주의했어도 이런 코미디 같은 오역의 실수는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이런 어처구니없는 오역이 버젓이 존재하는 것을 보면, 교리를 왜곡시키는 심각한 오역들까지 포함해서 상당히 많은 오역들이 개역개정에 있을 것이라는 합리적인 의심이 충분히 가능하다.

위 본문에서 “ἄλλα”(알라)를 “그러나”로 오역한 까닭은 아마도 번역자들이 형용사 “ἄλλα”(알라)를 ‘반의적 불변사’인 ‘역접 접속사’ “ἀλλά”(알라)로 착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형용사 “ἄλλα”(알라)와 ‘반의적 불변사’ “ἀλλά”(알라)는 악센트의 위치가 사로 다르므로, 적어도 하나님의 계시인 성경을 번역하는 자라면 이 차이점을 구별할 수 있어야 마땅하다.

악센트가 앞에 있는 본문의 “ἄλλα”(알라)는 형용사 “ἄλλος”(알로스)의 ‘중성 복수 형용사’로서, “다른”(other, another) 등의 의미를 가진다. 그러나 악센트가 뒤에 있는 ‘반의적 불변사’ “ἀλλά”(알라)는 “그러나”(but) 등의 의미를 가진 ‘역접 접속사’이다.

참고로 ‘반의적 불변사’라는 말은 역접 접속사 “ἄλλα”(알라)가 어떤 위치에서 있어도 단어의 변화가 없다는 뜻이다(우리가 잘 알다시피 헬라어는 위치에 따라서 단어의 변화가 라틴어만큼이나 대단히 심하다). 그럼에도 한글개역을 다시 개정하는 개역개정의 번역자들은 한글개역에서와 똑같이 본문에서 “다른”의 의미를 가진 ‘형용사’ “ἄλλα”(알라)와 “그러나”의 의미를 가진 ‘역접 접속사’ “ἀλλά”(알라)를 구별하지 못하고, 형용사 “ἄλλα”(알라)를 “그러나”로 번역하는 기가 막힌 코미디를 연출한 것이다.

요6:23에서 “다른”(other, another) 등의 의미를 가진 “ἄλλα”(알라)는 본 문장의 주어인 “배들이”(πλοιάρια/플로이아리아)를 수식하는 형용사이다. 따라서 헬라어 본문의 “ἄλλα ἦλθεν πλοιάρια ἐκ Τιβεριάδος/알라 엘덴 플로이아리아 에크 티베리아도스”는 “다른 배들이 디베랴에서~”로 번역해야 한다.

참고로 요6:23의 다른 번역 성경들을 소개하면 아래와 같다.

*공동번역: 한편 티베리아로부터 다른 작은 배 몇 척이 주께서 감사의 기도를 드리시고 빵을 나누어 먹이시던 곳으로 가까이 와 닿았다.

*새번역: 그런데 디베랴에서 온 배 몇 척이, 주님께서 감사 기도를 드리고 무리에게 빵을 먹이신 곳에 가까이 닿았다.

*현대인의 성경: 그러나 디베랴에서 다른 배가 몇 척 왔는데 상륙 장소는 주님이 감사 기도를 드리신 후에 군중들이 빵을 먹던 곳에서 가까운 곳이었다.

*NASB: There came other small boats from Tiberias near to the place where they ate the bread after the Lord had given thanks.

*ESV: Other boats from Tiberias came near the place where they had eaten the bread after the Lord had given thanks.

*NIV: Then some boats from Tiberias landed near the place where the people had eaten the bread after the Lord had given thanks.

*KJV: (Howbeit there came other boats from Tiberias nigh unto the place where they did eat bread, after that the Lord had given thanks:)

*RSV: However, boats from Tiberias came near the place where they ate the bread after the Lord had given thanks.

*ASV: (howbeit there came boats from Tiberias nigh unto the place where they ate the bread after the Lord had given thanks)

한글 번역 성경들에 비해, 비교적 오역이 적은 영어 번역 성경들에서도 위에서 보듯이 코미디 오역이 상당히 발견된다는 것은 참으로 아이러니하다.

여기서 형용사 “ἄλλα”(알라)를 본 김에, “다른”의 의미를 가진 헬라어 형용사에 대해 좀 더 알아보았으면 한다. 왜냐하면 헬라어에서 “다른”의 의미를 가진 대표적인 형용사는 두 개, 즉 “ἄλλος”(알로스)와 “ἕτερος”(헤테로스)가 있는데, 두 단어의 의미 차이가 상당히 있음에도 불구하고, 번역에서 그 차이를 제대로 묘사하지 못하거나, 아예 오역하는 경우들이 왕왕 있기 때문이다.
 

형용사 “ἄλλος”(알로스)와 “ἕτερος”(헤테로스)에 대하여

헬라어에서 “다른”의 의미를 나타내는 대표적인 형용사는 “ἄλλος”(알로스)와 “ἕτερος”(헤테로스)가 있다. 신약 성경에서 “ἄλλος”(알로스)와 “ἕτερος”(헤테로스)는 때로 구분 없이 사용되기도 하지만, 두 형용사의 고유한 의미는 서로 명백히 다르다. 왜냐하면 “ἄλλος”(알로스)는 “같은 종류의 다른”이라는 의미를 나타낸다면, “ἕτερος”(헤테로스)는 “다른 종류의 다른”이라는 의미를 나타내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이 사과는 저 사과들과는 다른 과일이다”에서 “다른”에 해당하는 헬라어 형용사는 “ἄλλος”(알로스)를 사용하는 것이 적절하다. 왜냐하면 같은 종류의 과일들(사과들)을 서로 비교하고 있기 때문이다(막15:31/그와 같이 대제사장들도 서기관들과 함께 희롱하며 서로 말하되 그가 남은/Ἄλλους/알루스/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

그러나 “이 사과는 저 토마토와는 다른 과일이다”에서 “다른”에 해당하는 헬라어 형용사는 ἕτερος”(헤테로스)가 적절하다. 왜냐하면 여기서는 다른 종류의 과일들(사과와 토마토)을 서로 비교하고 있기 때문이다(롬7:23/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ἕτερον/헤테론/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 이 두 형용사의 의미 차이를 굳이 영어로 설명한다면, “ἄλλος”(알로스)는 “other, another”의 의미를 나타내며, “ἕτερος”(헤테로스)는 “different, strange”의 의미를 나타낸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신약 성경에서 “ἄλλος”(알로스)와 “ἕτερος”(헤테로스)의 의미 차이를 제대로 반영하지 못해서, 대단히 중요한 본문의 의미를 놓쳐버린 안타까운 오역이 개역개정(한글개역) 행7:18에서 발견되는데, 슬프게도 다른 번역 성경들에서는 발견되지 않는 오역이다. 아래 행7:18의 개역개정과 헬라어 본문을 비교해 보라.

“요셉을 알지 못하는 임금이 애굽 왕위에 오르매”(행7:18)

“ἄχρι οὗ ἀνέστη βασιλεὺς ἕτερος [ἐπ᾽ Αἴγυπτον] ὃς οὐκ ᾔδει τὸν Ἰωσήφ”(아크리 후 아네스테 바실류스 헤테로스 [에프 아이귑톤] 호스 우크 에데이 톤 이오셉)

개역개정에서 “새”(new)로 번역된 헬라어 “ἕτερος”(헤테로스)는 앞에서 설명했듯이 다른 종류의 “다른”이라는 의미의 형용사이므로, “새”(new)는 명백한 오역이다. 헬라어 본문의 형용사 “ἕτερος”(헤테로스)는 요셉을 아는 이전의 왕과는 전혀 다른 종류의 “다른” 왕이 애굽 왕위에 올랐음을 나타낸다. 만약 본문에서 “ἕτερος”(헤테로스) 대신에 같은 종류의 “다른”이라는 의미를 나타내는 “ἄλλος”(알로스)가 사용되었다면, 이는 요셉을 아는 이전의 왕과 같은 종류의 “다른” 왕(βασιλεὺς ἄλλος/바실류스 알로스)이 애굽 왕위에 올랐음을 나타낼 것이다. 그러므로 다시 말하지만, 본문에 사용된 “ἕτερος”(헤테로스)는 요셉을 잘 알고 있던 이전의 왕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전혀 “다른” 왕(βασιλεὺς ἕτερος/바실류스 헤테로스)이 애굽의 왕위에 올랐음을 의미한다.

본문에서 “다른”의 의미로 사용된 “ἕτερος”(헤테로스)는 행17:19(그가 우리 족속에게 교활한 방법을 써서 조상들을 괴롭게 하여 그 어린 아이들을 내버려 살지 못하게 하려 할새)에서 요셉을 알지 못하는 다른 왕이 왜 히브리 민족을 말살하려고 시도했는지를 알 수 있게 하는 실마리를 제공한다. 그러므로 행7:18을 읽을 때, 형용사 “ἕτερος”(헤테로스)의 독특한 의미를 염두에 두는 것이 이 본문을 제대로 이해하는데 매우 중요하다.

야곱의 가족이 가나안 땅의 기근을 피해 애굽의 고센 땅에 정착할 수 있었던 까닭은 야곱의 11번째 아들 요셉이 당시에 애굽의 총리대신이었으므로, 애굽 왕이 요셉을 잘 알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야곱의 가족이 고센 땅에 정착한 후 약 30년쯤 후에 요셉을 알지 못하는 다른 왕(βασιλεὺς ἕτερος/바실류스 헤테로스)이 애굽의 왕위에 오른다. 추측컨대 이때 요셉을 알지 못하는 다른 왕이 쿠데타를 일으켜 요셉을 잘 아는 이전의 왕을 실각시키고 애굽의 왕으로 등극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요셉을 알지 못하는 다른 왕이 요셉에게 속한 히브리 민족을 말살하려고 시도한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일 것이다. 왜냐하면 요셉을 잘 아는 실각한 왕이 다시 왕권을 회복하려고, 쿠데타로 왕권을 잡은 다른 왕의 권좌를 호시탐탐 노릴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실각한 왕과 가까운 히브리 민족이 많아지는 것은 쿠데타로 왕권을 잡은 다른 왕에게는 왕권을 유지하는데 대단한 불리한 조건이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숫자가 많은 히브리 민족은 실각한 왕에게는 왕권을 회복할 큰 세력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다른 왕이 실각한 왕의 편에 설 가능성이 아주 높은 히브리 민족을 말살하는 정책은 자신의 왕권을 지키기 위한 필연적인 정치 행위일 것이다.

요셉이 바로의 총리대신이 되었을 때 애굽은 힉소스(Hyksos) 왕조(15-16왕조)가 지배하고 있는 시기의 말기쯤일 것이다. 힉소스는 애굽어로 ‘외국인 지배자’라는 뜻이다. 힉소스(Hyksos)가 어떤 종족인가에 대해서는 그리스인이란 설, 히타이트족이라는 설, 셈족이라는 설 등 학자들 간에 논란이 분분한데, 고고학계에서는 가나안 지역에 살던 셈족의 일파라는 견해가 다수설이다. 힉소스가 만약 셈족이었다면, 이들이 아프리카계 원주민인 애굽 인들을 지배하기 위해, 또 다른 셈족 출신인 요셉을 총리대신으로 등용한 것은 정치적으로 매우 타당한 일일 것이다.

아무튼 요셉이 죽은 뒤 어느 시점에, 힉소스(Hyksos) 왕조를 몰락시키고 새로운 왕조가 시작되었다. 바로 이 새로운 왕조를 연 왕이 행7:18에 언급된 요셉을 알지 못하는 다른 왕(βασιλεὺς ἕτερος/바실류스 헤테로스)이 틀림없을 것이다. 다시 말하면 이 새로운 왕이 힉소스(Hyksos) 왕조의 왕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왕조의 “다른”(ἕτερος/헤테로스) 왕이라는 말이다.
 

글을 마치며

“다른”이라는 의미를 가진 형용사 “ἄλλος”(알로스)와 “ἕτερος”(헤테로스)의 차이에서도 성경이 말하려고 하는 상당히 다른 의미들을 발견할 수 있다. 그럼에도 개역개정 행7:18에서는 명백히 “다른”(different, strange)이라는 의미를 가진 형용사 “ἕτερος”(헤테로스)를 “새”(new)로 번역한 것은 무책임한 오역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번역자들이 다른 번역 성경을 참고하는 성의만 보였더라도, 이런 실수는 하지 않았을 테니까 말이다. 참고로 행7:18의 다른 번역 성경들을 소개하면 아래와 같다.

*공동번역: 그런데 요셉의 내력을 알지 못하는 다른 왕이 이집트를 다스리게 되었습니다.

*새번역: 마침내, 요셉을 알지 못하는 다른 임금이 이집트의 왕위에 올랐습니다.

*현대인의 성경: 그때 요셉을 알지 못하는 다른 왕이 이집트를 다스리게 되었습니다.

*NIV: Then another king, who knew nothing about Joseph, became ruler of Egypt.

*KJV: Till another king arose, which knew not Joseph.

*NASB: until THERE AROSE ANOTHER KING OVER EGYPT WHO KNEW NOTHING ABOUT JOSEPH.

위에서도 “ἕτερος”(헤테로스)를 “different” 또는 “strange”로 번역하지 않고, “another”로 번역한 것은 정밀하지 못한 아쉬운 번역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이유들로 필자가 마음 속 깊이 바라는 것은 힘이 있는 큰 교단들이 힘을 합쳐서 성경 번역 상설 기구를 설치하고, 지속적으로 번역 작업을 함으로써, 최소한 신약 성경만이라도 10년 정도의 간격으로, 주님이 다시 오시는 그날까지 반복해서 개정판을 출판했으면 하는 것이다.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일획도 결코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마5:18).

“천지는 없어질지언정 내 말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마24: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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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창모 목사는 죽음에 이르는 병에 걸린 한국 교회를 신물 나게 체험하며 갈등하다 하나님을 향해 살아 있는 교회를 꿈꾸며 1999년 김천에서 ‘제자들 경배와 찬양교회’를 개척하였다. 이창모 목사는 한국교회를 죽음에 이르게 한 병이 단지 성공주의, 황금만능주의, 도덕적 윤리적 타락 등이 아니고 이미 한국교회에 만연된 잘못된 신학에 있음을 확신하고서 무엇이 바른믿음인지 신학적으로 깊이 고민하는 목사이다. 이창모 목사는 자신이 중2때 수련회에서 방언을 받았고, 대부분의 목사들이 그것을 ‘영의 기도의 언어’라고 가르치므로 의심없이 수 십년 동안 옹알거리는 방언현상으로 기도(?)하였던 대표적인 방언기도자였다. 김우현, 김동수 등이 저술한 거짓 방언을 미화하는 한심한 서적들을 접한 후 방언에 관한 깊은 신학적인 성찰을 시작하게 되었고, 결국 오늘 날 방언이라고 알려진 소리현상과 성경의 참된 방언은 무관하다는 사실을 확신하게되었다. 이전의 자신처럼 방언으로 기도한다고 착각하고 있는 다른 목회자들과 신자들을 진정한 복음으로 돌이키기 위해 <방언, 그 불편한 진실>(밴드오부퓨리탄,2014)을 출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