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께서 은사를 주시는 목적은 오직 교회의 유익

이창모 목사의 책 표지 사진

"은사는 여러 가지나 성령은 같고 직분은 여러 가지나 주는 같으며 또 사역은 여러 가지나 모든 것을 모든 사람 가운데서 이루시는 하나님은 같으니 각 사람에게 성령의 나타내심은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라”(고전12:4-7).

바울은 4-6절에서 다양한 은사와 직임에 관여하시고 역사하시는 분은 하나님 한 분이라는 사실을 강조한다. (바울이 여기서 삼위 하나님을 차례로 언급하고 있는 것은 고린도 교회에 삼위일체 하나님을 가르치려는 의도라기보다는 중복을 피하려는 문학적 습관이라고 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바울이 여기서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하는 이유는 7절에서 “각 사람에게 성령의 나타내심은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라”고 말함으로써, 성령이 “그의 뜻대로”(11절) 교회에 은사를 주시는 목적이 교회의 유익에 있음을 강조하기 위해서다.

그런데 바울은 지극히 당연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성령의 은사와 관련해서 왜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하는 것일까? 그것은 육적인 고린도 교회 신자들이 인간적으로 노력만 하면 어떤 은사든지 받을 수 있다는 생각으로, 하나님의 주권을 무시한 채 자신의 영적 우월감을 만족시키는데 가장 유리한 은사인 방언에 집착했기 때문이다. 아래 제시하고 있는 본문의 밑줄 친 부분에 주의하며 살펴보라. 바울은 성령의 은사와 관련하여 일관되게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를 강조하고 있다.

“또 사역는 여러 가지나 모든 것을 모든 사람 가운데서 이루시는 하나님은 같으니”(6절)
“각 사람에게 성령을 나타내심은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라”(7절).
“어떤 사람에게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말씀을 ... 어떤 사람에게는 방언들 통역함을 주시나니”(8-10절).
“이 모든 일은 같은 한 성령이 행하사 그의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시는 것이니라”(11절).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13절).
“그러나 이제 하나님이 그 원하시는 대로 지체를 각각 몸에 두셨으니”(18절).
“몸 가운데서 분쟁이 없고 오직 여러 지체가 서로 같이 돌보게 하셨으니”(25절).
“하나님이 교회 중에 몇을 세우셨으니”(28절).

위 본문 8-10절, 11절에서 밑줄 친 부분이 보여 주듯 교회에 은사를 나누어 주시는 분은 오직 성령 하나님이시다. 성령은 여러 가지 은사들을 나누어 주실 때, 인간의 간절함이나 취향대로가 아니라 자신의 주권적 의지대로, 즉 “그의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누어”(11절) 주신다. (히 2:3-4, 약1:17절도 참고하기 바란다). 그러므로 신자는 자신의 취향이나 목적에 따라 특정한 은사를 사모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이것은 “그의 뜻대로” 은사를 나누어 주시는 성령 하나님의 주권을 역행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고린도 교회의 육적인 어린 신자들은 “그의 뜻대로”와 상관없이 인간의 노력으로 자신이 원하는 특정 은사를 받을 수 있다고 여긴 것 같다. 그래서 예언과 방언, 그 중에서도 특히 방언을 더 열렬히 사모했다. 왜냐하면 이들은 교회의 유익과는 상관없이 자신을 돋보이게 하는 수단으로 방언의 은사를 이용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이것은 웅변술을 선호하므로 말 잘하는 사람이 최고의 대우와 존경을 받았던 당시 고린도 시의 가치관과 이들이 고린도 교회의 신자가 되기 전에 말 못하는 우상에게로 끄는 그대로 끌려 다니며(고전12:2), 우상 신전에서 보고 듣고 경험했던 방언에 대한 익숙함과도 깊은 관련이 있을 것이다.

이렇게 고린도 교회는, 특정 은사를 간절히 사모함으로 “그의 뜻대로” 은사를 나누어 주시는 성령의 주권을 무시하는 심각한 영적 딜레마에 빠졌던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고린도전서 12장 4-6절에서 “여러 가지”(diaire,seij, 디아이레세이스)와 “같은”(auvto.j, 아우토스)을 병행해서 세 번씩이나 반복하는 수사적 강조를 통해 고린도 교회의 개인주의적 은사 이해와 특정 은사에 대한 집착을 강도 높게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1)

그러므로 고린도전서 14장에서 바울이 어떤 특정 은사를 사모하라고 가르쳤다는 방옹자들의 주장은 대단히 어리석은 생각이다. 만약 그것이 사실이라면, 바울은 고린도 교회를 부추겨 성령의 주권에 도전하도록 사주한 꼴이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현대 교회가 성령의 은사들 가운데 방언만을 강조하며 방언만을 사모하며 몸부림치는 행위는 “그의 뜻대로” 은사를 나누어 주시는 성령의 주권에 도전하는 대단히 위험한 짓이다.

 

은사의 목적은 오직 교회의 유익

“각 사람에게 성령을 나타내심은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라”(고전12:7).

바울은 성령이 교회에 은사를 주시는 목적이 교회의 유익에 있음을 분명히 한다. 그러나 이 말은 지극히 상식적어서 사실은 하지 않아도 되는 말이다. 그런데 여기서 바울이 굳이 이 말을 하는 것은 고린도 교회가 은사에 대해 지나치게 비상식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은 자신의 영적 우월을 드러내기 위해 성령의 은사를 이용하려는 비상식적인 시도를 했으며, 급기야는 거짓 은사를 만들어 사용함으로써 교회에 유익은커녕 오히려 심각한 폐해를 입히고 있었다.

이런 고린도 교회를 향해 바울은 ‘성령의 은사는 교회의 유익을 위해 성령이 주신 것이며(히2:4 참고), 개인의 덕을 위해 쓸 수 있는 성령의 은사는 없다. 여기에는 어떤 예외도 존재하지 않는다. 로버트 토마스도 고전12:7을 주석하면서 ‘어떤 신령한 은사도 사적인 목적을 위해 주어진 것은 없다’고 단정한다.2)

 

고린도전서 12장 8-11절의 은사 목록

“어떤 사람에게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말씀을, 어떤 사람에게는 같은 성령을 따라 지식의 말씀을, 다른 사람에게는 같은 성령으로 믿음을, 어떤 사람에게는 한 성령으로 병 고치는 은사를, 어떤 사람에게는 능력 행함을, 어떤 사람에게는 예언함을, 어떤 사람에게는 영들 분별함을, 다른 사람에게는 각종 방언 말함을, 어떤 사람에게는 방언들 통역함을 주시나니 이 모든 일은 같은 한 성령이 행하사 그의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시는 것이니라”(고전 12:8-11).

위의 은사 목록에서 밑줄 친 부분을 눈여겨보라. 성령의 은사는 어떤 은사이든지 간에 성령의 주권적인 의지로 교회에 주시는 선물이다. 다시 말해서 성령이 교회에 여러 가지 은사들을 주실 때, 사람의 소원이나 간절함에 의해서가 아니라 오직 성령이 “그의 뜻대로” 나누어 주신다는 말이다.

바울은 7절에서 은사의 목적이 교회의 유익에 있음을 말한 후, 뒤이어 8-11절에서 고린도 교회에 주시는 성령의 은사의 종류를 언급하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바울의 이런 배열은 성령의 은사 목록에 있는 모든 은사들이 예외 없이 교회의 덕을 위해 성령이 주시는 은사임을 강조하기 위함일 것이다.

 

다른 서신서의 은사 목록

바울이 고린도전서 12장 7-11절에서 강조한 내용은 다른 서신서의 은사 목록에서도 그대로 나타난다.

“우리가 한 몸에 많은 지체를 가졌으나 모든 지체가 같은 기능을 가진 것이 아니니 이와 같이 우리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어 서로 지체가 되었느니라.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받은 은사가 각각 다르니 혹 예언이면 믿음의 분수대로, 혹 섬기는 일이면 섬기는 일로, 혹 가르치는 자면 가르치는 일로, 혹 위로하는 자면 위로하는 일로, 구제하는 자는 성실함으로, 다스리는 자는 부지런함으로, 긍휼을 베푸는 자는 즐거움으로 할 것이니라”(롬12:4-8).

바울은 로마서에서도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받은 은사는 각각 다르니”라는 말로 은사 주심에 대한 성령의 주권을 강조한다. 이 강조는 고린도 교회와 마찬가지로 로마 교회를 향해서도 ‘성령의 주권을 무시하고 자신의 뜻대로 어떤 특정 은사에 집착하는 실수를 범하지 말라’는 바울의 염려일 것이다.

또 바울은 “우리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어 서로 지체가 되었느니라”는 말로 모든 지체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임을 강조함으로써 성령의 은사는 자기 자신을 위해 쓰는 것이 아니라 한 몸인 교회, 즉 다른 지체들을 위해 써야 하는 것임을 암시하고 있다. 이 암시는 뒤이어 나오는 로마서 12장 9-13절에서 더욱 분명하게 나타난다.(아래 본문의 밑줄 친 부분에 유의하라)

“사랑에는 거짓이 없나니 악을 미워하고 선에 속하라 형제를 사랑하여 서로 우애하고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하며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 소망 중에 즐거워하며 환난 중에 참으며 기도에 항상 힘쓰며 성도들의 쓸 것을 공급하며 손 대접하기를 힘쓰라”(롬12:9-13).

바울은 고린도전서 12장 6절(은사의 목적)과 8-11절(은사의 종류)의 배열처럼 여기서도, 비록 순서는 바뀌었지만, 로마서 12장 6절(은사의 종류)과 9-13절(은사의 목적)의 배열로 성령의 모든 은사는 교회의 덕을 위해 성령이 주신 것임을 강조하고 있다.

바울은 에베소 교회를 향해서도 은사목록(11절)을 소개하기 전에 한 분이신 하나님과 한 몸인 교회(4-6절)를 언급하고, 뒤이어 하나님의 주권(7절)을 강조한다. 여기서도 바울은 은사에 대한 인간의 개인적인 취향을 경계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몸이 하나요 성령도 한 분이시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받았느니라 주도 한 분이시요 믿음도 하나요 세례도 하나요 하나님도 한 분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일하시고 만유 가운데 계시도다 우리 각 사람에게 그리스도의 선물의 분량대로 은혜를 주셨나니”(엡4:4-7).

“그가 어떤 사람은 사도로, 어떤 사람은 선지자로, 어떤 사람은 복음 전하는 자로, 어떤 사람은 목사와 교사로 삼으셨으니”(엡4:11).

그리고 바울은 “이는 성도를 온전하게 하여 봉사의 일을 하게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엡4:12)는 말로 성령이 교회에 은사를 주신 목적이 교회의 유익에 있음을 밝힌다. 베드로 역시 바울과 같은 방식으로, 은사 목록을 소개하기 전에 은사의 목적이 사랑으로 서로 봉사하는 것임을 분명히 한다(아래 본문에서 밑줄 친 부분에 유의하라).

무엇보다도 뜨겁게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서로 대접하기를 원망 없이하고 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여러 가지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같이 서로 봉사하라 만일 누가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 같이 하고 누가 봉사하려면 하나님의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 같이 하라 이는 범사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니 그에게 영광과 권능이 세세에 무궁하도록 있느니라 아멘“(벧전4:8-11).

성령의 은사는 교회의 유익을 위해 써야한다는 바울의 가르침은 고린도전서의 다른 곳에서도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말고 교회의 유익을 구하도록’ 가르치고 있다.

“누구든지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말고 남의 유익을 구하라”(고전10:24).
“나와 같이 모든 일에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여 자신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고 많은 사람의 유익을 구하여 그들로 구원을 받게 하라”(고전10:33).
“너희 모든 일을 사랑으로 행하라”(고전16:14).

고린도전서의 이런 흐름으로 볼 때, 바울이 고린도전서 14장에 와서 유독 개인의 유익을 위하는 은사로써 방언을 말했다는 방옹자들의 주장은 설득력이 없다. 바울은 성경 어디에서도 성령의 은사를 개인적인 유익을 위해 쓸 수 있다고 말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방언의 은사를 개인의 유익을 위해 쓰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성령의 은사로서의 방언이 아니라 자신이 만들어낸 거짓 방언을 하고 있음이 틀림없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방옹자들은 방언은 개인의 덕을 위하는 은사이므로 방언기도로 개인의 덕을 세운 자가 그 덕으로 공동체를 위해 봉사하면, 궁극적으로 방언은 공동체의 덕을 위하는 은사가 된다는 이상한 논리를 펴고 있다.3) 어쨌든 한 가지 분명한 것은 현대 교회의 방언기도는 방언하는 자에게 착각을 불러일으켜 자신이 대단한 영적 고수라도 된 것처럼 우쭐댈 수 있는 유익(?) 외에는 없다는 것이다.
 

--- 각주 ---

1)강면광, <생명의 삶 플러스>(서울: 두란노, 2008.11[2]), p. 6.
2)로버트 토마스, <성령의 은사들>, pp.39-40.
3)다음을 참고하라. 옥성호, <방언 정말 하늘의 언어인가>(서울: 부흥과개혁사, 2008), pp.179-180.

SNS 기사보내기
기사제보
저작권자 © 바른믿음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창모 목사는 죽음에 이르는 병에 걸린 한국 교회를 신물 나게 체험하며 갈등하다 하나님을 향해 살아 있는 교회를 꿈꾸며 1999년 김천에서 ‘제자들 경배와 찬양교회’를 개척하였다. 이창모 목사는 한국교회를 죽음에 이르게 한 병이 단지 성공주의, 황금만능주의, 도덕적 윤리적 타락 등이 아니고 이미 한국교회에 만연된 잘못된 신학에 있음을 확신하고서 무엇이 바른믿음인지 신학적으로 깊이 고민하는 목사이다. 이창모 목사는 자신이 중2때 수련회에서 방언을 받았고, 대부분의 목사들이 그것을 ‘영의 기도의 언어’라고 가르치므로 의심없이 수 십년 동안 옹알거리는 방언현상으로 기도(?)하였던 대표적인 방언기도자였다. 김우현, 김동수 등이 저술한 거짓 방언을 미화하는 한심한 서적들을 접한 후 방언에 관한 깊은 신학적인 성찰을 시작하게 되었고, 결국 오늘 날 방언이라고 알려진 소리현상과 성경의 참된 방언은 무관하다는 사실을 확신하게되었다. 이전의 자신처럼 방언으로 기도한다고 착각하고 있는 다른 목회자들과 신자들을 진정한 복음으로 돌이키기 위해 <방언, 그 불편한 진실>(밴드오부퓨리탄,2014)을 출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