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5-28 00:51 (일)
정태홍이 '하나님의 의'를 거부하고 끝내 '율법의 의'를 추종하면 저주 받는다
상태바
정태홍이 '하나님의 의'를 거부하고 끝내 '율법의 의'를 추종하면 저주 받는다
  • 정이철
  • 승인 2023.02.09 03:40
  • 댓글 4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정태홍 목사(이후 정태홍)는 자신의 출판물 <능동적 순종교리: 이단인가?> 310 페이지에서 "성경은 면죄 상태가 의로운 상태라고 말하지 않는다"라고 주장하였다.

정태홍의 이 주장은 기독교를 기독교되게 하는 핵심 진리를 반박한 것이다. 필자는 이 전의 글에서 그리스도의 속죄로 말미암는 죄의 사면이 우리의 의로움이라고 성경이 가르치고 있음을 성경의 증거들로만 증명하였다. 읽지 않으신 분들은 다음을 크릭하여 읽기 바란다. 

"정태홍 목사가 신학 치매 병에 걸린 것 같다" 

정태홍처럼 능동적 순종 교리를 신봉하는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는 죄의 사면 상태는 단지 소극적인 의로움에 불과하다고 한다. 천국에 들어가기 위해서 그것으로는 부족하다고 한다. 정태홍 같은 사람들은 사람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가 율법을 준수하신 공로가 우리에게 전가되어 우리가 적극적인 의로움의 상태가 되고, 그래서 천국 영생으로 들어갈 수 있게 된다고 한다.

그러나 이는 성경이 가르치지 않는 신앙이다. 정태홍이 계속 “성경은 면죄 상태가 의로운 상태라고 말하지 않는다”라는 주장을 굽히지 않으면 성경을 대적하고 맞서는 것이고, 그 종착지는 지옥일 수 밖에 없다.

오늘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얻어지는 죄의 사면이 곧 우리의 완전한 의로움이라는 성경의 가르침이 쉽게 이해되도록 보충적인 설명을 하려고 한다. 부디 정태홍이 은혜를 입어 복음을 왜곡하는 이단들의 종착지로 향하는 발걸음을 돌리고 통회자복하기를 바란다. 
 

 

(이제부터의 내용은 필자의 책 <능동적 순종에 빠진 교회>의 5장의 내용을 거의 그대로 끌어오는 내용들이다). 정태홍처럼 그리스도의 속죄로 말미암는 죄의 사면의 결과를 별것이 아닌 것처럼 여기는 사람들이 모르는 중대한 것 하나가 있다. 그것은 자기 목숨으로 우리의 죗값을 지불하신 그리스도께서 곧 바로 자신과 우리를 연합시켰다는 사실이다.

정태홍처럼 능동적 순종 교리를 죽도록 신봉하는 학자들은 성령이 우리의 죄를 속하신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우리 속으로 오셨다는 사실의 의미를 모른다. 예수의 영으로 오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그리스도와 연합됨으로 거룩하신 하나님의 의가 나의 의로 인정된다는 사실을 저들은 전혀 모른다. 그러니 기독교인이라고 할 수가 없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롬 1:17).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롬 3:22).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을 하나님이 의롭다 하시는 이유는 바로 이것이다. 친히 우리 죄인들의 의가 되시려고 사람이 되신 성육신의 신비로 말미암는 하나님의 비밀이다. 하나님이 자기의 거룩하심을 주 무기로 삼아 우리를 죄에서 건지시고, 또 그것으로 우리를 의인으로 변화시켰다. 구원이 율법이나 우리의 노력의 행위 때문이 아니고, 오직 ‘하나님의 의’로 된다는 것은 바로 이 뜻이다.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과 피 흘리심으로 우리와 하나님 사이의 죄의 장벽이 사라져 하나님과 하나로 연합되었음을 모르고, 우리에게 적극적인 의가 되어 천국에 가게 한다는 '기괴한 그리스도의 율법준수의 의'를 신봉하는 사람들은 기독교인이 아니다. 그 이유는 다른 신앙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의 공로로 말미암아 나에게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오신 성령을 받아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됨이 우리를 천국 영생에 들어가게 하는 적극적인 의라는 사실을 모르는 정태홍 같은 사람들은 더 이상 성경을 다루는 선생이 되지 말하야 한다. 더 이상 남의 잘못된 신앙에 대해서 비판하는 활동도 중단해야 한다.

능동적 순종 교리를 신봉하는 사람들의 눈을 마귀의 손바닥이 눈을 가리고 있다. 그래서 이 중요한 기독교의 심장을 모른다. 그래서 십자가의 공로 외에 다른 어떤 적극적인 의가 필요하다면서, '괴이한 율법 준수의 의'를 주장하고 있다. 참으로 답답한 일이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롬 1:17).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롬 3:22).

이와 같이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모든 믿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의를 선물한다고 말한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외에 다른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기게 되었다고 고백했다 (빌 3:8). 능동적 순종 교리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교수들은 왜 이 귀하고 귀한 하나님의 의를 거부하고 마른 막대기만도 못한 율법의 의를 사랑하는가?

이러니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 교리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을 대적하는 사악한 사탄의 거짓 신학인 것이다. 그래서 서철원 박사는 그리스도께서 율법준수를 통해 우리를 의인 되게 만들었다고 주장하는 신학을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구속을 허무는 이단신학이라고 비판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것은 후기 유대교의 주장과 같다” (서철원, 청교도 능동순종에 대한 합동이대위 세미나, 2021).

서철원 박사가 이 교리를 이처럼 심각하게 비판하는 이유는 능동순종이 그리스도께서 속죄 사역으로 죄의 장벽을 허무시고, 자기의 이름으로 성령을 우리에게 부으심으로 하나님과 우리가 하나로 연합되게 하는 하나님의 위대한 복음을 대적하는 거짓 교리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거룩하심이 우리의 의가 되게 하여주신 하나님의 구속 경륜을 파괴하는 악한 교리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가 율법을 완전하게 지켜서 얻으신 적극적인 율법의 의를 우리에게 전가했다고 주장하는 정태홍 같은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속죄를 우리에게 적용하는 성령 안에서 이루어지는 하나님과 우리의 연합의 신비로 관심을 돌려야 한다. 그렇게 되지 않으면 필히 성경적 기독교 신앙과 무관한 인생으로 끝을 보게 된다.

정태홍처럼 능동적 순종 교리에 세뇌되어있는 사람들은 칼빈의 <기독교강요>와 다른 저술들을 정직한 눈으로 찬찬히 다시 읽어야 한다. 칼빈의 신학을 왜곡시키지 말고 정직하게 보아야 한다. 그리스도가 율법을 준수하여 얻으신 율법의 의를 우리에게 전가하여 우리를 의롭게 만들었다는 이론과 칼빈의 신학과 무관한다.

이 교리를 주장하는 많은 학자들이 칼빈이 비록 자신들과 동일한 용어를 사용하지 않았을지라도 자신들과 같이 율법주의 신학을 가졌었다고 한다. 그러나 엄밀하게 말하면 그들의 그런 말들은 칼빈에 대한 범죄이고 심각한 명예훼손이다.

칼빈은 그리스도가 율법의 의를 얻어서 우리에게 전가했다고 가르치지 않았고, 반대로 그리스도의 속죄로 인해 죄인이 그리스도에게 신비하게 연합되었다고 강조했다. 그 연합으로 우리가 그리스도의 몸에 접붙여지니 하나님이신 그리스도의 의가 우리에게 전가된다고 하였다.
 

“우리의 마음속에 그리스도가 내주하심을 간단히 말하면, 신비로운 연합을 우리는 최고로 중요시한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소유자가 되심으로써 그가 받은 선물을 우리도 나눠 가지게 하신다. 그러므로 우리가 우리 밖에 계신 그리스도를 멀리서 바라봄으로써 그의 의가 우리에게 전가되는 것이 아니라, 그를 옷 입으며 그의 몸에 접붙여지기 때문에, 간단히 말해서 그가 우리를 자기와 하나로 만드시기 때문에 그의 의가 우리에게 전가된다” (기독교강요, 3.11.10).

정태홍처럼 능동적 순종 교리를 주장하는 학자들은 더 이상 칼빈에 대한 명예훼손죄를 범하지 말아야 한다. 그리스도의 속죄로 말미암아 우리가 그리스도에게로 받아들여지고, 그래서 성육신하신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의 본래의 의가 우리에게 전가되어진다는 것이 칼빈의 칭의 신학이다.
 

서철원 박사도 단지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으로 이루어진 죄의 용서로만 우리의 칭의를 설명하지 않는다. 죄용서와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손바닥의 양면처럼 같이 연동하는 것임을 언제나 설명한다.

"물론 우리가 부름받은 목표점이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다. 그러나 연합은 믿음고백에서 이루어지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믿음 고백으로 의롭다함과 연합이 이루어진다. 믿음고백 이전에 연합이 이루어진다고 하는 주장은 부당한 논의이다” (서철원, 구원론, 56).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거듭남과 믿음고백에 이어진다고 할 때에 시간적인 경과를 말하기 어렵다. 그것은 죄용서와 의롭다 하는 선언과 동시적이라고 해야 한다. 시간적인 순서를 말한다면, 믿음고백을 할 때 죄용서가 이루어지고 의롭다 하는 선언이 온다. 믿음고백과 동시에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이루어진다고 해야 정확하고 믿음의 진리와 일치한다” (서철원, 구원론, 159).
 


정태홍처럼 능동적 순종 교리에 강한 집착을 보이는 사람들이 매우 우호적으로 여기는 존 머레이도 같은 방식으로 칭의를 가르쳤다. 머레이는 칭의의 근본 원인을 죄 사함이라고 했다.

죄 사함은 칭의의 필수 북가결한 요소 또는 측면이다. 왜냐하면 죄로 인한 정죄와 저주가 남아 있다면 정죄가 계속된다는 말인데, 정죄는 칭의의 반대이다” (조직신학 2, 박문재 역, 229).

머레이는 우리를 의롭게 만든 것이 그리스도가 율법을 지켜서 얻으신 의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의이고, 우리가 그리스도와 연합됨으로 의로 인정된다고 분명하게 말했다.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없다면 우리가 의인으로 인정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의다(소제목) .... 이 의는 우리 자신의 의가 아니며 율법의 의도 아니고 계시된 의이며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의 의라는 것을 주의해야 한다” (조직신학 2, 박문재 역, 223).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가 그와 연합하여 이러한 의가 된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이 의의 수혜자가 될 뿐만 아니라 이 의의 참여자가 되고 실제적으로 이 의에 의하여 판단된다. 그리스도가 우리의 죄와 동일시되어 죄를 알지도 못하면서 죄인으로 취급받았듯이, 전적으로 불경건하고 의를 알지도 못하는 우리가 그리스도의 의와 동일시되어 하나님의 의가 된다” (조직신학 2, 박문재 역, 225).

“이것들은 그리스도와의 연합에서 나오는 필수 불가결한 것들을 의미하고 있다. 왜냐하면 만약 우리가 그리스도의 의의 참여자가 아니고 그러한 의미에서 그것과 동일시되지 않는다면, 그리스도와의 연합의 교리는 희석되고 손상되어 위로와 확신은 말할 것도 없고 의미성과 유효성을 결여하게 될 것이다”  (조직신학 2, 박문재 역, 225).

요약하자면, 성도는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얻는 죄의 사면으로 완전한 의인으로 간주된다. 왜냐하면 죄의 사면이 이루어짐과 동시에 믿음과 성령 안에서 그리스도가 자기를 우리에게도 연합시키시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그리스도 안에 있는 창조주 하나님의 거룩하심(의로우심)에 우리가 동참되어지기 때문이다. 이 진리를 거부하고 끝까지 율법의 의를 고집하는 자는 반드시 지옥에 간다.   

사도 바울은 이 진리를 거부하고 율법의 의를 추구하는 교인들에게 다음과 같이 저주하였다. "그러나 우리나 혹은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선포한 복음 외에 어떤 다른 복음을 너희에게 선포하면 그는 저주를 받을지어다" (갈 1:8).

정이철 목사는 2004년부터 현재까지 미국 미시간 주 ‘앤아버 반석장로교회’의 담임목사이고 거짓 신학의 ‘견고한 진’(고후10:4)을 무너뜨리기 위해 시작된 신학신문 <바른믿음>의 대표이다.
총신대학(B.A 졸업), 총신대학 신학대학원(M.Div Eqiuv.졸업), 아세아연합신학대학 대학원(Th.M 졸업), Liberty Theological Seminary(S.T.M 졸업), Fuller Theological Seminary(Th.M 수학), Puritan Reformed Theological Seminary(Th.M 수학), Liberty Theological Seminary(D.Min 수학), 남아공신학대학원(South African Theological Seminary, Ph.D)에서 연구하였고, 현재 University of Pretoria(Ph.D)에서 연구하고 있다.
저서로는 「신사도 운동에 빠진 교회」, 「제3의 물결에 빠진 교회」, 「가짜 성령세례에 빠진 교회」, 「피터 와그너의 신사도운동 Story」, 「한 눈에 들어오는 청교도 개혁운동」, 「능동적 순종에 빠진 교회」가 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4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오직 성경 2023-02-18 11:31:44
원래 인간의 상태는 완전하고 죽음이 없는 상태에서 하나님의 무한하고 영원한 생명에 연결되어서 이 생명과 웨신서 6장에 언급된 인간의 본래의 의(義)와 하나님과의 교제를 막힘 없이 누리고 있는 상태이며,
타락 후 회복된 성도의 상태는 타락한 본성의 부패성이 아직은 남아 있을지라도 "믿음 안에서(갈 2:20)" 하나님의 무한하고 영원한 생명에 연결되어서 이 생명과 그리스도의 본래의 의 그리고 하나님과의 교제를 누리고 있는 상태이며, 추가하면 이 생명과 본래의 의 그리고 하나님과의 교제에서 영원히 단절되지 "않을" 상태입니다.

타락 전 아담이 죽음이 없는 상태에서 누리고 있는 무한하고 영원한 생명은 스스로의 자유의지로 잘라내어 단절시킬 수 있는 것이며 실제로 아담은 그렇게 했습니다.
타락 전 아담과 회복 후 성도의 차이는 비유하면, 인간이 자기에게 영원한 생명이 연결된 호스를 끊어버리지 않고 유지하고 있는 이 상태와 인간이 믿음 안에서 자유의지를 사용하여 이 호스를 영원토록 끊어버리지 "않을" 것이므로 그래서 끊기지 "않을" 상태의 차이인 것입니다.

영생은 스스로 하나님의 무한하고 영원한 생명을 잘라내어 단절시킴에도 여전히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영생을 그렇게 오해하면 안 됩니다.
성도의 영생도 믿음 안에서 자유의지를 사용하여 자원하여 하나님의 무한하고 영원한 생명을 간직하고 영원히 잘라내지 "않을" 것이 영생인 것입니다.
아담은 영원한 생명을 걷어 차버릴 수 있는 자유의지를 가졌고 회복된 성도는 영원한 생명을 영원히 차버리지 "않을" 자유의지를 가진 것입니다.
마치 생명이 연결된 호스를 잘라내도 영원히 생명을 누리는 것이 영생이 절대로 아닙니다.

'상승이나 신화의 관점'이 아니라 '타락과 회복'의 관점이 맞고, 완전하고 죽음이 없는 아담이 "가진 것을 잃었다(단절 되었다)"가 아닌 "불완전하여 불순종했고 가진 것을 잃어버린 것도 아니고 성취하지 못한 것이다"가 성경에 없습니다.
아담은 완전하고 죽음이 없는 상태에서 하나님의 무한하고 영원한 생명을 누리고 있는데도 사단의 미혹으로 욕심 때문에 이것을 잘라내어 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생명에서 의에서 하나님과의 교제에서 단절된 것입니다.
성도는 믿음이라는 끊어지지 않는 호스로 이것이 회복된 것이라고 설명할 수 있습니다.
이런 시각에서 보면, 타락 전 아담의 상태는 사실 "무한하고 영원한 영생을 누리고 있는 상태"로 표현해도 또는 "무한하고 영원한 생명을 누리고 있는 상태"로 표현해도 별문제가 없는 표현이며 정목사님이 전하고자 하시는 것을 전하는 데 문제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논란을 일으키는 '영생하는 상태' 표현 대신 '무한하고 영원한 생명을 누리고 있는 상태' 또는 '영원한 생명에서 단절되지 않은 상태'처럼 조금은 더 구체적 표현으로 굳이 논란이 필요 없는 표현을 만들어주시길 부탁드립니다.



다 가진 아담이 사단의 미혹에 이끌려 욕심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것을 포기하고 사단의 말을 선택했기 때문에 그 결과로 행동이 뒤따랐다는 견해와, 그리스도께서 '그림자'인 율법보다 상위에 있는(cf히 7:28, 새번역) '실체'인 하나님의 법에 순종하셔서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를 이루셨다고 하는 견해는 부담스러우시면 사용하시지 않으셔도 됩니다.
칼빈은 분명 "바울이 칭의를 죄의 사면으로 해석했다"고 주장했습니다. 역시 칼빈도 칭의를 죄의 사면이라고(롬 5:18 주석) 주장했습니다. 스스로도 순서로는 "죄의 사면 후에 의롭다 함을 받는다"고 가르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정목사님께서도, 주장하시고 계신 이 바울의 해석을 붙잡고 흔들림 없이 나아가시기를 바랍니다.

오직 성경 2023-02-12 14:20:06
추가구절이 있습니다.
3/3
그리고 중간 단계인 타락 과정과 회복 과정에서 눈여겨보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아담은 하나님같이 되고자 하는 욕심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 믿는 것을 포기하고 하나님의 말씀보다 사탄의 말을 선택하였습니다. 그 선택의 결과로 하나님께 반역하는 행위를 실행했습니다. 그리고 타락하였습니다.
회복 과정도 구원을 제공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그 말씀을 믿은 자 또는 그 말씀을 믿음을 선택한 자가 믿음 안에서 구원받음으로 회복되어 참 하나님과 그의 영원하고 무한한 생명에서 영원히 단절되지 “않을” 상태에 있습니다.(믿는 것은 본인이 선택했지만, 그 선택에 대해서는 논외로 합니다.)
반드시 믿음은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므로, 회복시키실 때 하나님께서 은혜로 선물로 주신 믿음을 갖게 하셨습니다. 타락뿐 아니라 회복에서도 행위가 아니고 믿음이 인과관계에서 우선입니다.
믿어서 칭의와 구원을 받은 성도는 자유의지 역시 ‘믿음 안에서’ 그것도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 안에서 자원하여 영원히 법을 지키는 자유의지입니다.
하나님께서 계명을 지킬 힘과 능력을 가진 아담이 행위로 불순종을 하기 전에,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간직하는지 포기하는지를 테스트하신 것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사실상 행위에 초점을 맞춘 행위언약 개념은 가려운 다리 대신 옆에 있는 기둥을 긁는 것과 같이, 성경을 바르고 통전적으로 보게 하는 개념과 초점에서 빗나가 있는 것입니다.

율법순종으로 획득하는 ‘의’ 개념에 대해서도 역시 '칭의' 측면에서의 시각이 아닌 다른 측면에서도, 성도의 새 계명이 옛 계명의 수준보다 확장 되었기에 역으로 그리스도께서 이웃을 위한 계명을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에서 확인할 수 있듯 확장시켜 옛 계명의 수준을 넘도록 사람으로서 지키신 것 역시 그리스도께서 하신 순종을 율법순종으로 제한하는 것이 맞는 것인지 여부를 확인 할 수 있는 면이 있습니다. 나사로를 부활시키신 케이스 이외에도 말입니다.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뜻대로 하나님께 순종하시되 율법의 범주를 넘어서는 순종으로 순종하셨으며 그림자인 율법에 순종하신 것이 아니고 그림자보다 상위에 있는 하나님의 법에 순종하셨습니다.
율법이 그림자인 것과 그리스도께서 그림자에 속한 동물의 피보다 더 나은 제물이 되신 것과 그림자에 속한 아론의 반차를 따르는 한 제사장이 아닌 불멸의 생명의 능력을 따라 되신(히 7:16) 한 제사장이신 것도 숙고할 만합니다.
사랑은 율법의 완성인데, 율법은 그림자이고(히 10:1) 당연하게도 사랑은(요일 4:16) 그림자에 속한 것이 아닙니다.


정이철 목사님께 부탁드립니다.
능동적 순종을 반대하시는 고경태 목사님을 비롯한 한국과 미주의 지인분들에게 조언을 구하시고, 그리고 서철원 박사님께서 가르치신 인간의 타락과 회복이라는 틀 안에서, 이미 제기되어 있는 문제 제기를 심화하여 주시고, 후에 ‘행위언약’과 ‘율법순종으로 획득하는 의’에 대하여 정제된 표현으로 다듬어진 올바른 수정에 합당한 문장을 제안하시기를 부탁드립니다.



P.S. 칼빈의 로마서 5장 18절과 19절 주석-
http://www.good-faith.net/news/articleView.html?idxno=2796 여기 댓글에도 올려져 있습니다.

오직 성경 2023-02-12 14:19:30
추가구절이 있습니다.
2/3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계명(요일 3:23, 새번역) 역시 옛 계명의 범주를 넘어서는 계명입니다.
(요일 3:23, 새번역) “하나님의 계명은 이것이니, 곧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고,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명하신 대로 서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기에 이웃을 "내 몸보다 내 목숨보다 더 사랑하라"로 확대된 것입니다.
믿음 안에서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의 범주는 주께서 우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셨으므로 우리도 형제자매를 위하여 목숨을 버릴 수 있기까지(요일 3:16, 새번역) 서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물론 죽음을 포함하여 사랑이 없는 희생은 내게 ‘헛된 것’(고전 13:3)일 뿐입니다.
만약 율법을 지킬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하나님께 대한 사랑이 참으로 완성된 사람인데(cf요일 2:6, 기준) 십자가 대속 전에는 그리스도 뿐입니다. 새 계명을 받은 성도는 옛 계명보다 더 확대된 순종이 믿음 안에서 가능해집니다.

그리스도께서도 하나님의 뜻대로 하나님께 순종하시되 율법의 범주를 넘어서는 순종으로 우리를 향하신 사랑을 증명하여 보여주셨고, 성도인 우리에게도 명령하시되 주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같이 서로 사랑하라고 명령하십니다. 이는 ‘율법의 범주를 넘어서는’ 순종이 필요한 명령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 명령은 믿음 안에서 성령을 따라 행하거나(롬 8:4) 다른 표현으로, 성령을 좇아 행할 때(갈 5:16)에야 이루어지는 일입니다.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갈 5:6, 새번역)’ 안에서야 비로소 가능한 일인 것입니다.

즉, 사랑 때문에 그리스도께서도 하나님의 뜻대로 하나님께 순종하시되 율법의 범주를 넘어서는 순종으로 순종하셨으며 우리도 하나님의 계명대로(요일 3:23, 새번역) 믿음 안에서 율법의 범주를 넘어서는 순종을 해야만 합니다.

이를 돕기 위해 설교 시에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확실히 증명하신 ‘사랑’을 선포해야 하며, 한번 구원은 영원 구원인 것은 이미 아시겠지만, 이 사랑을 알고 모범적 모습으로 성화 과정을 가도록 하기위해 참 하나님 아버지와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알도록’ 가르쳐야 하며 다시 말해 성경을 가르쳐야 합니다.


정이철 목사님께 부탁드릴 것이 있는데, 글 마지막 부분에 부탁드리겠습니다.

서철원 박사님께서 타락한 인간이 구원을 받아 영생을 얻음을,
인간의 앙양이나 상승 또는 인간의 신화()로 말하는 것을 거부하셨고 ‘회복’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저도 여기에 동의합니다.
인간의 타락 전 상태는 완전하고 죽음이 없는 상태이며 참 하나님과 그의 영원하고 무한한 생명에서 단절되지 “않은” 상태이고 이를 유지하고 있는 상태입니다. 자유의지 측면에서는 법을 어길 수도 있는 자유의지를 가지고 있는 상태입니다.
이미 눈이 밝아져버리고 타락한 인간이 믿음으로 구원을 받아 영생을 얻은 상태는, 믿음 안에서 회복되어 참 하나님과 그의 영원하고 무한한 생명에서 영원히 단절되지 “않을” 상태이고 자유의지 측면에서도 이미 ‘믿음 안에’ 있기에 그것도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 안에 있기에 믿음 안에서 자원하여 영원히 법을 지키는 자유의지를 가지고 있는 상태입니다. 우리를 산 자로 여긴다면(롬 6:11) 이렇게 여겨야 합니다.

오직 성경 2023-02-12 08:38:05
1/3
정목사님께서 본문 글을 믿음과 연합, 사면과 칭의로 맥을 잡아서 잘 설명하시고 계십니다.

칼빈은 그리스도께서 우리 대신 율법을 준수하여 우리를 위한 의를 얻었다고 주장하지 않고 대속으로 인한 죄 사함을 통해 믿는 자에게 칭의를 얻게 만드셨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교차하는 칼빈의 주장들을 통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
칼빈은 로마서 5장 18절 주석에서 우리에게 효력이 있는 것은 의가 아니라 칭의임을 확실히 했고 죄의 사면을 칭의로 말했습니다. 본래 의로우신 그리스도의 온전한 순종을 통해 그리스도께서 믿는 자에게 효력이 있는 ‘사면’ 곧 ‘칭의’를 우리를 위해 만들어내셨습니다. 이는 새로운 의를 만들어내신 것이 아니라 칭의를 만들어내신 것입니다. 19절 주석에서 그리스도의 본래의 의가 온전한 순종을 특성으로 가진다고 밝혔고 온전한 순종을 하게 한 그 의는 18절 주석에서 그리스도의 본래의 의임을 말하고 있기 때문에, 18절과 19절 주석을 종합하면 이 칭의, 곧 이 사면은 그리스도의 본래 의로우신 그 의가 자기 특성으로 가지고 있는 “온전한 순종을 통해” 바로 그 본래의 의가 믿는 자에게 전가되어 ‘의롭다 칭하심’, 곧 ‘사면’이 되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또 교차하는 증거로 칼빈은 기독교 강요에서 “그래서 사도행전 13장에 있는 바울의 설교에 이런(38~39절) 말이 있다... ....의롭다고 인정하는 것을 분명히 ‘죄의 사면’으로 해석하며, 의롭다함을 율법의 행위에서 분리시키고 있다”라고 했고, 갈라디아서 강해설교에서도 “하나님께서는 율법이 우리를 ‘죽이도록’ 의도하셨기 때문에 우리를 의롭게 할 목적으로 율법을 보냈을 리 없습니다”라고 주장합니다. 율법이 요구하는 것은 죄인은 죽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차하는 증거들을 통해 알 수 있는 칼빈의 주장은, 율법이 요구하는바 곧 “죄인은 죄의 값을 치르라”는 요구를 그리스도께서 그분의 본래의 의의 특성인 완전한 순종하심을 통해 “대신 속죄를 완성하여” 믿는 자에게 그분의 본래의 의가 전가되게 하심으로, 믿는 자에게 ‘대신 속죄’를 받음과 ‘사면’을 받음과 ‘칭의’를 받음을 사실상 같은 내용이라고 증거하고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뜻대로 순종하셨는데 그 순종은 분명 율법의 범주를 벗어나는 순종이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순종하신 규칙도 성경에 설명되어(요 5:19) 있고 ‘율법순종의 범주를 벗어나는’ 죽은 지 나흘이나 되어 냄새가 나는 나사로를 부활시키신 일도 이 ‘규칙 안에서’(요 5:21, 구원관련) 순종하신 것입니다.

이뿐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뜻대로 순종하신 것은 율법순종에 국한된 것이 아닌 율법순종의 범주를 넘어서는 것입니다. 다른 예로,
그리스도께서는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는 율법에 의거하여 우리를 사랑하시며 행하신 것이 아니라, 몸과 목숨을 내어주시기까지 사랑하셨습니다. 십자가에서 우리 대신 돌아가심이 율법의 수준을 뛰어넘어 “우리를 사랑하신 확증(롬 5:8)”이며 그리스도의 사랑인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요 13:34)”를 증명해주시는 것입니다.

주요기사
이슈포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