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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룩한 허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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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룩한 허비
  • 이흥수
  • 승인 2015.06.12 13:4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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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12장에는 예수께서 나사로를 다시 살리신 사건 이후에 예수님을 위한 잔치가 벌어진 장면이 소개되어 있다. 3절에서 마리아의 등장을 성경은 이렇게 기록한다.

“그 때에 마리아가 매우 값진 나드 향유 한 근을 가져다가 예수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그분의 발을 닦으니 향유 냄새가 집에 가득하더라”

이 향유의 가격은 유다의 평가를 참고해 볼 때 300데나리온이라고 했는데 당시 노동자의 하루 품삯이 1데나리온 이었으니 노동자가 10개월 정도 일을 해야 모을 수 있는 돈의 가치만큼 매우 값비싼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 향유는 아마도 마리아가 간직하고 있었던 것 가운데 단연 최고의 가치가 아니었을까 짐작이 된다.

예수님을 위한 잔치였다. 주님께서는 마지막으로 사랑하는 자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시고자 시몬의 집으로 오셨다. 주님을 위한 잔치에 주님의 마음을 흡족해 해 드릴 선물이 있어야 했는데, 마리아는 이 옥합을 깨뜨림으로 그리고 그녀의 마음을 다한 특별한 행위의 헌신으로 주님께 사랑과 감사와 존경을 표현하고 있었던 것을 볼 수 있다.

그 자리는 그렇게 주님께 마지막 즐거움과 위로가 되는 자리였다. 언제나 주님의 말씀을 즐겨 들었던 마리아는 이제 주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는 이 길이 다시는 돌아오지 못하실 수도 있는 길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을까?

즐거운 웃음소리와 맛있는 음식의 향연이 펼쳐지고 있었지만 마리아의 마음은 이제 마지막으로 사랑하는 사람들과 조용히 즐거움을 나누시는 주님의 마음이 어떠하실지를 감지하면서 그녀는 이제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으로 주님을 향한 사랑을 표현하고 감사의 마음을 전하며 더불어 이제 십자가를 향해 나아가시는 주님의 마음에 깊은 위로의 마음을 전하고자 했던 것을 볼 수 있다.

마리아는 향유를 예수님의 신체의 다른 부위가 아닌 발에 부었다. 언제나 예수의 발 아래에 있기를 사모했던 그녀였다. 그녀는 예수께서 자기 집에 오셨을 때에도 ‘주의 발 아래’ 앉아 그의 말씀을 들었다고 누가복음 10장 39절은 기록하고 있다. 예수의 발 아래, 그 곳이 언제나 그녀가 있어야 할 자리라고 그녀는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참으로 겸비한 마음을 가진 마리아 였음을 알 수 있는 부분이며, 왜 예수께서 그토록 그 녀를 사랑하실 수밖에 없었는지를 추측케 하는 대목이다.

‘발 아래’, 그곳은 나를 지극히 낮춘 자리이다. 자신이 얼마나 죄가 많은 하찮은 존재이며 그리스도는 나에게 있어 얼마나 존귀하신 분 이신지를 아는 자들만이 기꺼이 그분의 발아래 자신을 두기를 마다하지 않을 수 있으리라.

언제나 주님의 말씀을 기쁘게 듣고 순종하며 주님과 깊이 교제하고 예배하기를 즐거워하는 자들의 자리가 바로‘예수의 발 아래’였음은 우리가 깊이 마음에 품어야 할 귀중한 의미가 된다. 그 저녁 만찬의 자리에서 그 누구보다도 자신의 마음을 가장 낮추어서 언제나 그랬듯이 그리스도를 극진히 섬기고자 했던 이가 바로 마리아 였던 것을 알 수 있다.

언제나 그렇게 예수께 마음이 고정되어 있었던 마리아! 언제나 주님께로부터 말씀을 즐겨 들었던 마리아! 그렇게 말씀과 진리의 깨달음을, 주를 예배하기를 사모하면서 주님께 온전히 마음을 집중했던 마리아였기에 그 누구도 쉽사리 생각할 수 없었던 주님께서 크게 기뻐하실 만한 헌신을 시기적절하게 주께 드릴 수 있었던 것이 아니었을까 생각해 본다.

구속의 은혜를 생각하며 그리스도 앞에서 겸비한 마음으로 우리가 온통 하나님을 아는 것에 우리의 관심을 집중할 때 마리아에게 그러하셨듯이,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하나님의 마음을 우리에게 가만히 열어 보여주시지 않겠는가?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들에게 친밀함을 보이시는 하나님이시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다. 하나님을 깊이 사랑하고 진실되게 하나님을 신뢰하는 자에게 사랑의 고백과 그의 헌신을 받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이시다. 모세와 다윗처럼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자를 친구처럼 여기시고 그들과 대면하여 주셨던 하나님이시다

주님께서는 그렇게 주의 죽으심이 임박해 오고 있었던, 이제 지상에서의 시간이 그리 많이 남아 있지 않으셨던 시간들 속에서 그토록 주님을 사랑했던 마리아로부터 주님의 마음에 가장 합한 헌신을 받으셨다.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을 알기를 갈망하고 하나님께 온전히 집중된 마음이 아니라면 무엇을 하든 어떤 헌신을 드리던 그것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아닐 수 있음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가장 귀한 것으로 여기는 자를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헌신과 충성을 기뻐 받으시는 분이시다.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에 집중된 마음에서 비롯된 헌신과 사랑의 고백과 감사만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가치가 되는 것이다.

마리아, 그녀에게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 그분만이 전부였던 것을 우리는 그녀의 모습 속에서 깊이 느낄 수 있다. 얼마나 비싼 것을 드렸는가의 문제가 초점이 되어서는 안 된다. 그녀가 얼마나 주님을 사랑했는가의 문제가 중심이 되어야 할 것이다. 어떻게든 그 사랑을, 그 감사함을 표현하고자 했던 그녀의 그 아름다운 마음이 가장 빛나야 할 부분이다.

그러나 주님의 마음에 기쁨이 되었던 그녀의 헌신이 모든 사람들에게 아름답게 보인 것은 결코 아니었다. 그녀의 아름다운 헌신을 바라보는 시선 가운데는 매우 삐뚤어진 관점이 있었음을 성경은 이어 보여주고 있다. 4~5절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이에 그분의 제자들 중의 하나로 그분을 배반하여 넘길 시몬의 아들 가롯 유다가 말하되 어찌하여 이 향유를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아니하였느냐 하니”’

그녀의 행동을 매우 못마땅하게 여기는 자들이 있었다. 이 기사를 기록한 다른 복음서에서 그녀의 행위를 비난했던 자들은 가롯 유다뿐 아니라 다른 제자들까지 포함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마태복음 26장 8절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제자들이 보고 분하여 가로되 무슨 의사로 이것을 허비하느뇨”

사도 요한은 이 부분에서 비로소 예수를 배반하고 팔아넘길 악역을 맡을 자가 바로 가롯 유다라는 사실을 밝히고 있다. 예수를 은 삼십에 팔아넘길 바로 그 유다가 마리아의 헌신을 보며 눈이 뒤짚혀버린 것이다. 300 데나리온이나 되는 이 향유를 왜 이렇게 사용하는 것인지, 차라리 팔아서 가난한 사람을 도와주는 것이 더 나을 것이라는 지극히 인간적 관점에서의 박애적이고 도덕적인 이유를 들어서 그녀에게 그런 말을 할 자격도 전혀 없는 그가 그렇게 마리아의 행위를 비난하고 있었다.

함께 했던 제자들도 입을 모아 무엇 때문에 이것을 허비하느냐고 그녀의 행위에 대해서 분을 표현하고 있었다. 그들은 왜 이같이 그녀를 비난하고 있었던 것일까? 돈을 좋아하는 탐욕적인, 그래서 예수님의 무리들 가운데서도 돈 주머니를 책임지고 있는 유다야 얼마든지 그럴수 있다고 치고 그럼 다른 제자들은 왜 이런 반응을 보이고 있었던 것일까? 참으로 안타깝고 어리석은 일이지만 3년을 가까이 주께로부터 복음을 듣고 심지어 주께서 어떤 죽음을 맞이하실 것이라는 것까지 여러 차례 예언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은 그녀의 행위가 무엇을 의미하고 있는 애절한 것인지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지금 주님의 마음이 어떠하실지 ... 사랑하는 자들과 만찬을 즐기는 자리에 계셨지만 주님의 마음은 시시각각으로 다가오는 십자가의 고통에 대한 고뇌로 인해서 얼마나 큰 마음의 괴로움을 느끼고 계실지를 제자들은 전혀 알지 못하고 있었던 것을 보게 된다. 제자들은 왜 이 귀한 것을‘허비’하느냐고 그녀에게 다그쳤다. 그들은 ‘허비’ 의 의미를 정확히 이해하고나 있었던 것일까?

사랑이 무엇인가? 사랑은 허비다. 사랑은 아름다운 낭비다. 아무 대가를 바라지 않고 모두다 줘 버리는, 진정한 사랑이란 그래서 허비의 의미를 함의 한다. 모든 것을 주고 나서 내게는 아무런 돌아오는 소득이나 유익이 없는 것, 사랑은 그 위대한 낭비를 기꺼이 끌어안는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창조하셨다 그런데 자신의 기쁨과 영광을 위해서 창조하신 인간이 하나님의 법을 어기고 타락해 버렸다. 영원히 지옥의 영벌에 이르게 된 인간들을 바라보시며 하나님께서는 마음 아파하셨다.

그리고 아들과 의논하신 끝에 그 인간들의 죄를 위해서 아들을 이 세상에 인간의 모습으로 보내시고 그들의 죄를 대신해서 십자가에 달려 죽게 하셨다. 그리고 그 아들이 구주이심을 믿는자 들을 구원하시기로 작정하셨다. 그리고 ... 이 죄악이 더욱 창궐해 가는 오늘에 이르기까지 하나님께서는 택하신 자녀들이 모두 구원의 방주에 완전히 승선하기까지 오늘도 이 역사의 수레바퀴를 굴리고 계신다.

영원한 멸망의 지옥을 향해서 달려가는 우리를 구원하셔서 하나님께서 덕 보신것이 무엇인가? 아무리 생각해도 우리를 구원으로 인도하시고 주의 자녀가 되게 하셔서 하나님께서 덕 보신 것이 아무것도 ...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된다. 우리는 오늘에 이르기까지 이루 헤아릴 수 없는 하나님의 은혜로 많은 덕을 보고 살아 왔지만 우리는 전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린 일이 없는 인생을 살아가고 있는 무익한 존재들일 뿐이다.

이 보다 더 큰 허비가 어디에 있을까? 이 보다 더 큰 낭비가 어디에 있겠는가?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랑은 철저한‘허비’이며 ‘낭비’라 표현할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나를 향한 사랑이, 그 사랑에 속성이 바로 그것임을 아는 자, 그 사람 또한 허비하며 낭비하는 사랑을 하나님께 드릴 수밖에 없는 것이다.

사랑은 계산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사랑은 거룩한 낭비이다. 당신이 만일 하나님께 받은 사랑을 삶으로 표현하는 일에 기꺼이 영적인 허비를 하지 않고 있다면, 당신의 시간과 물질과 몸을 주를 위해 거룩한 낭비로 표현하고 있지 않다면, 기억하라! 당신은 주님을 진정으로 사랑하고 있는 사람이 아닐 수도 있다.

우리를 위해 베풀어 주신 그 사랑의 위대함과 그 희생의 고귀함을 온전히 알지 못할 때, 그것을 머리로만 이해하게 될 때 우리는 마땅히 하나님께 드려야 할 충성과 헌신을 모두 무가치한 허비와 낭비처럼 여겨지게 된다. 어리석은 제자들은, 사악한 가롯 유다는 그 사랑을 계산하려고 했다. 그들은 결코 계산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그 위대한 낭비를, 그 사랑의 의미를 결코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던 자들이었다.

그들은 주께서 그렇게 하나님의 사랑하는 자녀들을 위해서 이제 역사상 가장 위대한 허비적 사랑을 실행 하시려 한다는 사실을 결코 알지 못했다. 하나님께 받은 사랑은 당연한 것이고 우리가 하나님께 드릴 사랑과 희생은 모두 우리에게 있어서 아까운 허비라고 생각 되는가?

그렇다면 바로 이것이 죄인들의 알량한 자기애가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 이것이 우리의 죄가 아니면 무엇이 죄란 말인가? 치열한 계산과 산술, 이해타산의 방식에 근거해서 살아가는 우리에게 여전히 주를 위한 거룩한 낭비가 있는지 생각해 보라. 우리는 그렇게 받은 만큼 사랑하지 못함에 대해, 그렇게 주를 위해 기꺼이 나를 허비하지 못함에 대한 무수한 변명과 핑계를 늘어놓는 것에 익숙한 자들이다.

마리아의 헌신이 그리고 그리스도의 그 허비적 희생과 낭비적 사랑이 우리에게 무엇을 깨닫게 하고 반추하게 하는지 생각해 볼 일이다. 그 점을 다시 한 번 마음 깊이 사유해 보아야 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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