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에 그리스도께서 언약의 머리라고 하는 용어는 없다. 오직 언약의 보증(히7:22)이시며 언약의 중보자(히8:6, 히9:15, 히12:24)라고 하는 말씀만 있다.

종교개혁자 칼빈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영원한 영생의 삶에 대한 묵상을 매순간마다 해야 한다고 했다. 칼빈이 스콜라주의에 영향을 받았다고 하는 것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칼빈이 영혼의 감옥이 육체라고 하였다고 하는 것 때문에 그렇게 말하지만, 그러나 칼빈의 그런 가르침은 우리가 나그네로 이 땅에서 살아가는 인생이므로 땅의 것에 집착하지 말라고 하는 의미에서 가르친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 주변에 잘못된 신앙의 모습이 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삶에 대한 적극적인 헌신의 모습이 사라지고 단지 마지막 날에 대해서만 집착하게 만드는 사상이다. 영적으로 지나친 사색이나 영적 한량들처럼 그런 삶을 살게 되면 사람들은 현실적인 삶에 하나님의 뜻에 적극적인 순종이나 헌신의 삶보다는 하나님께서 시간을 만드시고 우주 가운데 피조물들을 창조하셨지만, 그 하나님의 창조의 시간보다 더 초시간적인 존재에 대한 사색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다.

이것을 달리 말하면 영적 한량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하늘 보좌에까지 올라가려고 한다. 성도의 관심을 오늘이 아니라 늘 마지막 심판의 날로 가져간다. 이러한 영적 한량들의 주장들이 마치 성경에서 가르치는 것처럼 언제나 추론의 방법을 가지고 마치 새로운 진리를 찾았다고 떠벌리게 된다. 결국 하나님께서 인간을 시간 속에 두시고 살아가게 하시는 특별한 뜻에는 그다지 관심을 크게 보이지 않고 성경에 나오지 않는 것을 성도들의 유익을 위한 변명으로 언제나 추론의 방식을 가지고 하나님의 뜻을 찾으려고 한다. 어떻게 해서 이런 경향이 역사적 교회에서 생겨나게 되었는지 우리는 반성의 시간을 가져야 한다.

이러한 현생이 생긴 이유는 다름 아닌 “그리스도는 언약의 머리”이시다는 거짓된 신학에서 기인이 되고 있다. 그리스도가 언약의 머리라고 하는 용어를 대부분의 사람들이 잘 모른다. 그러나 신학을 가르치는 자들에게서 언약의 머리라는 신학 이론을 종종 듣게 된다.
 


2018년에 “합신은 말한다”고 하는 신학매체에 기고한 이승구 교수는 행위언약에 대한 자신의 글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언약적 머리이시다” 라고 주장하였다. 얼핏 생각하기에 하나님께서 택한 백성들과 언약을 맺으셨고 언약 백성들의 모임이 바로 교회이기에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이시라면 당연히 그리스도는 교회의 머리이실 뿐만 아니라 교회가 하나님과 맺은 언약의 머리도 되신다는 것이다.

이 논리는 그럴듯하다. 하지만 이런 가르침은 아주 잘못된 가르침이다. 성경의 가르침이 아니다. 마치 예수 그리스도가 교회의 머리이기 때문에 그리스도가 언약의 머리라고 하는 것처럼 쉽게 느낄 수가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가 언약의 머리라고 하는 가르침은 반 기독교적인 가르침이라는 것을 주의해야 한다.

먼저 그리스도가 언약의 머리라고 하는 것을 믿는 것은 마치 대단히 경건하고 바른 신학의 교리에 서 있는 것처럼 보일 수 있는데 그것은 성도는 모든 면에서 예수 그리스도께 의존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의존한다고 하는 것은 떠넘기는 것이 아니다. 의존한다고 하는 것은 그분의 모든 말씀에 순종하려고 하는 의지의 표현이고 행동이다.

하지만 언약의 머리라고 하는 의미는 하나님께서 택한 모든 자신의 백성들의 대표로 예수 그리스도와 언약을 맺으셨다고 하는 말이다. 하나님께서 택자들과 언약을 맺은 것이 아니라 아들과 언약을 맺었다고 하는 것이다. 만약 그렇게 되면 하나님께서 언약을 맺은 당사자는 우리 각자가 아니라 아들이신 것이다. 결국 언약의 머리라고 하는 것은 교회의 머리로서, 즉 성도들의 머리로서 성부와 언약을 맺은 것이 된다.

영적 한량들은 하나님의 창조사건 이전으로 항상 올라간다. 그래서 창조 이전에 성부와 성자가 언약을 맺었다고 한다. 그러나 창조 이전에 성부와 성자가 언약을 맺었다고 하는 것은 그 언약의 보증이시되며 언약의 중보자가 되기 위해 언약을 맺었다고 하는 의미이다.

뿐만 아니라 은혜언약의 내용이 오실 아브라함의 자손이신 그리스도라고 하는 것인데(갈3:16) 청교도 회중파들은 언약을 아버지가 아들과 맺었다고 한다. 그러나 성부와 성자간의 언약을 맺었다고 하는 것은 마치 아버지와 아들이 언약을 맺어 아버지의 언약에 아들이 순종해야 한다고 하는 것이 아니다. 그런 의미라고 하면 하나님의 창조는 성부와 성자간의 창조로만 남는다. 인간을 창조하시고 인간과 맺어야 할 언약은 없는 것이다.

성경의 모든 말씀 가운데 하나님께서 언약을 맺은 것은 오직 하나님의 백성들과 맺은 것이다. 하지만 그리스도가 언약의 머리라고 말하는 것은 우리를 대표해서 성부와 아들이 언약을 맺었다고 하는 의미인 것이다. 그렇게 되면 언약에 순종해야 할 우리의 순종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미 언약을 이루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백성들은 더 이상 언약에 순종할 이유가 없게 된다.

뿐만 아니라 언약에 대한 책임도 우리가 질 필요가 없다. 우리의 신앙은 믿음이라고 하는 통로를 통해 우리의 죄와 예수 그리스도의 의가 서로 전가되는 방식으로 의롭다고 하는 은혜가 주어진다. 그런데 우리가 믿는 그 믿음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모든 것을 다 이루어 주셨기 때문에 우리는 단지 그분만 믿으면 된다고 하는 신앙이 되는데, 구약에서 이스라엘 백성들과, 아니 에덴에서부터 하나님은 자신의 백성들에게 언약에 순종할 것을 명령하신 것이다.

아담의 타락 이후에도 모든 언약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들에게 주어진다. 하나님과 인간의 상호간의 맺은 언약은 그 기원에 있어서는 일방적이지만 존속에 있어서는 상호적인 것이다.

하나님을 믿으면, 즉 하나님의 백성이 되면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들에 요구하시는 것이 있다. 이것이 바로 언약의 순종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은 인간의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이다. 그러나 그 은혜를 받고 택한 백성이 되면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들에게 요구하시는 언약을 주신다. 그 언약은 바로 하나님과 자신의 백성들 간의 영원한 화목의 관계가 이루어졌다고 하는 보증인 것이다.

그래서 옛 언약이나 새 언약은 동일하다. 그 내용은 십계명이다. 그런데 옛것이고 새것이라고 한다. 그 의미는 내용이 아니라 언약을 체결하는 방식의 차이인 것이다. 옛것은 동물의 피로 언약을 맺었고, 새것은 하나님의 아들의 피로 언약을 맺었다고 하는 것이다. 결국 언약의 당사자는 하나님과 그분의 백성들이다.

여기에 중보자의 피가 언약의 보증으로 등장한다. 그 이유는 다른 것이 아니라 구약의 피는 모형이었고, 신약의 피는 아들의 피이기 때문에 단번에 완전하고 확고한 보증이 된 것이다. 결국 하나님께서는 구약의 동물의 피를 통해서 구약 백성들이 자신의 백성들이라고 하는 것으로 여기신다. 비록 불완전한 모형이지만 그 피로 인해 하나님과 구약의 백성들이 화목하게 되었다고 하는 것을 의미한다.

신약의 백성들은 하나님의 아들의 피를 통해 완전하고 그 구원의 확신이 분명한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언약의 중보자로 인해 구원의 기쁨과 즐거움 가운데 자원하는 심령으로 감사를 드리며 언약의 요구에 순종하려고 하는 삶을 살려고 하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가 언약의 머리라고 하면 언약의 요구는 예수 그리스께서 짊어지셔야 하는 것이 된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란 단지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을 예배당 자리 앉아 구경하는 구경꾼이 되는 것밖에 없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가 언약의 머리라고 하면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여 언약의 백성으로서 마땅히 순종하여 살라고 하신 언약의 법은 우리가 져야 할 의무가 아닌 것이 된다. 우리가 할 일이라고는 주님의 행위를 주목하여 보고 우리 대신 언약의 요구를 어떻게 감당하시는지 관망하는 일밖에 없다. 우리는 모든 주님의 율법에 대해서 직접 순종해야 할 의무를 질 필요가 없어진다.

사실은 그럴 자격도 없다. 우리의 머리이신 주님께서 그 언약의 요구에 순종하셨는지 여부만이 중요하게 된다. 마치 예수님의 모든 순종을 능동, 수동 순종으로 나누어 어떻게 주님께서 능동적으로 순종하셨는지에 대한 관심만 가지게 되는 것이다. 언약이 요구하는 것은 다름 아닌 은혜에 감사하는 우리의 믿음의 생활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새로운 언약의 백성들에게 율법의 순종을 요구하셨다. 그것은 다름 아닌 구약 백성들에게 요구하셨던 언약의 내용과 동일한 것이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고 하신 언약의 요구를 요약해 주셨다.

현대신학의 오점 가운데 하나가 바로 언약 이해를 추론으로 접근하였기 때문이다. 인간 이성으로 하나님의 언약을 이해하려고 한 것이 바로 행위언약의 시작이다. 이 말은 필자의 말이 아니다. 1634년 잉글랜드 회중파들이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에 행위언약을 주장할 때 그들이 만든 행위언약에 대한 패러다임이라고 스스로 말하고 있다. 에덴 동산에서 아담을 창조하신 하니님께서는 영생하는 존재로 당신의 백성으로 창조하셨다. 그런데 이 아담의 생명이 영생하는 존재가 아닌 수습기간이라고 하는 기간을 두고 순종하면 영생을 준다고 하는 구원상급이 언약의 내용이라고 하는 것이 바로 행위언약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언제나 자신의 백성들과 언약을 맺으셨다. 에덴에서부터 시작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피로 택자들을 부르시는 모든 인간의 시간적 역사 가운데 언제나 언약을 맺고 자신이 하나님이시고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고 하는 것을 말씀하셨다. 이것이 바로 성경 전체에서 일관되게 통일성 있게 나타나는 언약을 맺는 모습이다.

하나님은 아담과 언약을 맺고 그에게 하나님의 백성으로 영원히 살아야 하는 법을 주셨다. 바로 그것이 선악과 계명이었던 것이다. 에덴에서는 죄로 인해 아직 아담이 타락하지 않았기 때문에 구원을 받을 필요가 없었으므로 언약의 중보자가 있을 이유가 없었다. 언약의 중보자는 속죄와 관계된다. 그래서 칼빈은 에덴동산에 있었던 선악과 나무와 생명나무를 외적인 성례론적 표징이라고 한 것이다. 두 나무가 다 하나님께서 생명을 주시는 분으로 보여지는 예표로 두셨다고 한다. 금지한 선악과를 먹으면 반드시 죽는다고 하는 것, 생명나무는 생명이 유지된다고 하는 것을 의미한 것이다.

하지만 아담이 죄를 짓고 죽음의 형벌을 받게 되자 하나님은 모든 인류가 죽음 가운데 처하는 형벌에서 자신의 백성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언약의 중보자를 보내시기로 하신 것이다(성경에서 말씀하신 순서상 이렇게 표현한다). 그것이 바로 아담이 타락한 직후 하나님이 아담에게 약속하여 여자의 후손으로(창3:15) 오실 예수 그리스도였던 것이다.

결국 인간의 타락 이후에 에덴 동산이나 가나안 땅에 거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이나 신약 이후 교회에 구성원이 된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은 언약의 요구에 순종해야 한다. 그것은 구원을 받기 위해 순종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기 때문에 그 은혜에 감사하여 순종하는 삶을 사는 것이다. 이것이 성경의 가르침이고 성도의 거룩한 삶을 위한 길이다.

필자의 이 글을 읽고 반문하는 분들이 있을 것이다. 그리스도가 언약의 머리라고 하는 것을 필자가 잘못 이해하고 있다고 말이다. 그러나 언약의 머리인가? 언약의 중보자인가 하는 논쟁이 1930년대 화란 개혁주의교회에서 일어났다. 이 역사적 사건속에서 언약의 머리라고 하는 것을 주장한 사람들이 바로 성경을 잘못 이해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다음에 이 역사의 논쟁이 어떻게 나타나고 진행되었는지 살펴볼 것이다.

 

- 임진남목사(한국개혁신학연구원 총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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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남 목사는 임진남 목사는 총신신대원(M.Div)에서 공부한 합동교단 소속 목회자이다. 2012년에 김제예본교회를 개척하여 담임하고 있고, 칼빈주의 개혁교회를 이루기 위해 그리스도 중심의 설교와 종교개혁의 위대한 유산인 신앙고백서들 가지고 성도들을 온전하게 세우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개혁신학 연구에 특별한 관심과 소명이 있어 서철원 박사와 함께 신학연구 모임을 진행하는 ‘한국개혁신학연구원’의 총무로 섬기고 있고, 저서로는 설교집 <다니엘이 증거한 복음>, <엘리야가 증거한 복음>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