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신 신대원 원장 정승원 교수(이후 정승원)가 “죽산 박형룡의 온전한 순종”이란 제목의 논문을 발표했다. 그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정승원이 ‘신학 정치’를 하는 분이라고 한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첫째, 현재 합동 이대위가 합신측의 주요 교수들이 주장하는 능동순종 교리의 이단성을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이 문제는 정이철 목사의 합신 교수에 대한 비판으로 인해 시작되었다. 그리고 합신신학위원회가 정이철 목사의 신학을 조사하기 시작함으로 더욱 뜨거운 관심을 일으켰다.

합신신학위원회가 나서 집단 방어를 시도하면 정이철 목사의 기가 죽을 것으로 알았으나 오히려 “그것 참 잘 되었다!”하며 유출된 합신신학위원회의 보고서의 내용을 정이철 목사는 더욱 적극적으로 비판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얼마 후 합동이대위가 능동순종 교리에 대해 성경적 근거가 없는 교리라고 2021년 합동 총회에 보고하였다. 합동 총회는 이대위 보고서를 그대로 수용함으로 능동순종 교리에 대한 합동의 입장이 형성되었다. 세계 교회사에서 유래를 찾을 수 없는 참으로 큰 역사적인 사건이었다. 이제 합동 이대위가 정치파동에 밀려 다시 능동순종에 대한 입장을 바꾼다면, 지난 해 총회에 보고한 내용을 취소해야 한다. 

총신 신대원장 정승원이 이러한 때에 (고)박형룡 박사의 능동순종 이론을 홍보하는 논문을 발표했다는 것은 결코 순수한 의도로 보이지 않는다. "너희가 지금 합동의 정신적 기둥 박형룡을 욕보이려는 것이냐?"하는 메시지인 것으로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고 있다. 순수 신학연구가 아니고 합동이 무시하기 어려운 한 죽은 사람을 이용하는 정치 신학인 것이다.   

둘째, 합동 이대위의 금년의 조사보고 사례들 가운데 가장 비중있는 사안은 계속 능동순종 교리를 주장하는 합신의 이승구-김재성 교수의 이단성 조사의 건이다. 이미 이대위는 능동순종 교리를 비성경적인 신학으로 판정했으므로 금년 9월 총회에 합신의 이승구-김재성 교수에 대해 ‘교류금지’ 정도의 보고서를 제출할 가능성이 크다.

바로 이러한 때에 이전에 합신 교수였고 이승구 등과 친분이 있는 정승원이 “죽산 박형룡의 온전한 순종”이라는 제목의 논문을 들고 등장하였다. 공교롭게도 이승구와 정승원은 WEA를 지지하는 사람들이기도 한다. 그래서 정승원의 논문이 순수한 신학연구로 보이지 않는 것이다. 

정승원이 성경을 제시하면서 “능동순종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은 이러하다”라고 주장하면, 사람들은 수긍할 것이고 그 의도를 순수하게 여길 것이다. 그러나 능동순종을 잘못 가르친 (고)박형룡 박사를 앞세우므로 순수한 신학연구로 보이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필자는 정승원의 논문 “죽산 박형룡의 온전한 순종”을 살펴보고 있다. 이미 정승원의 논문에 대하 두 번의 서평을 올렸다. 읽지 못한 분들은 다음의 링크를 이용하기 바란다. 

"정승원 교수(총신 신대원장)의 박형룡의 능동순종에 대한 연구 발표"(크릭)

“성경은 절대진리, 칼빈 하교리 웨신서 바빙크 벌코프 박형룡은 사람의 해설”(크릭)

앞의 글들에 이어 정승원의 논문 “죽산 박형룡의 온전한 순종”의 주요 내용들을 계속 살펴보자.

“그리스도는 영원전부터 영원까지 완전하신 하나님이시다. 성육신이 이 사실을 변경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자는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완전하게 되셨다. 칼빈은 하나님이신 그리스도가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 완전하게 되신 것을 ‘완성된 제사로서 완전하게 만드는 것’이라고 했다고 박형룡은 소개한다.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 완전하게 되었다는 표현은 십자가의 죽음만을 의미하는 것 같지 않다” (정승원).

능동순종 추종자들의 특징은 그리스도가 고난을 통해 순종을 배워 완전한 구세주가 되시었다고 히브리서에 나온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리스도가 어려움 중에도 하나님의 율법에 완전히 순종하시여 구원자의 자격을 확보했다는 주장이다. 정승원도 그 대열에 합류하였다.

그런데 히브리서의 그 내용은 그리스도가 십자가로 죄의 사면을, 그리고 율법준수로 영생의 의(자격)을 획득하여 우리에게 전가했다는 그리스도의 수동적-능동적 순종의 교리의 근거로 여길 내용이 전혀 아니다. 히브리서의 그 말씀을 전후 문맥 속에서 읽어보자.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외하심을 인하여 들으심을 얻었느니라. 그가 아들이시라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온전하게 되었은즉 자기를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 하나님께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은 대제사장이라 칭하심을 받았느니라” (5:7-10).

반역죄로 죽은 자기 백성들을 살리기 위해 대신 죗값을 갚으라는 성부의 뜻에 성자 하나님이 완전하게 순종했다는 의미이다. 결코 성자께서 고난 속에서도 율법에 완전히 순종하심으로 우리의 영생의 자격(의)을 획득했다는 뜻이 아니다. 

만일 히브리서의 이 내용이 그리스도께서 고난을 당하면서도 하나님의 율법에 완전히 순종하심으로 구세주의 자격을 얻었다는 뜻이라면, 기독교의 구세주에게 이미 '부처 그리스도'라는 별명이 생겼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 땅에서 노력하여 구원의 길을 개척하셨다는 점에서 그리스도와 부처가 공통점을 가지기 때문이다. 정승원이 이 정도를 바르게 방어하지 못한다면, 신대원장의 소임을 바르게 감당하는 교수 역할을 할 수 있을까? 

“칼빈은 능동적 순종 혹은 수동적 순종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않았지만 둘을 유기적으로 봤다. 칼빈은 아래와 같이 그리스도의 순종을 총체적으로 본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묻기를, 그리스도께서는 과연 어떻게 해서 죄를 제거하셨고, 우리와 하나님 사이의 분리된 상태를 없애셨으며, 또한 의를 얻으셔서 하나님으로 하여금 우리를 향하여 자비와 친절을 베푸시게 만드셨냐고 한다. 이에 대한 우리의 일반적인 답변은 곧, 그의 복종의 전 과정을 통해서 우리를 위해 이를 이루셨다는 것이다’” (정승원).

정승원이 인용한 칼빈의 이 말도 바로 위에서 이미 필자가 말한 그 뜻이다. 칼빈은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죗값을 대신 갚으심으로 우리가 '죄용서-칭의'를 얻게 하라는 하나님의 모든 뜻에 완전하게 복종하시는 삶을 사셨다고 강조하였다.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신 그리스도의 사역이 우리에게 의가 되었고, 우리를 의롭게 만드심이라고 칼빈은 늘 가르쳤다.

만일 칼빈이 율법의 행위를 통한 의의 획득을 믿고 주장했다면, 칼빈은 우리가 경계해야 할 이단이었다. 율법의 행위를 통한 영생의 의 획득을 주장하는 사람은 칼빈의 할아버지라도 이단이다. 나의 이 말이 틀렸으면, 이것을 빌미로 또 나를 상대로 이단시비를 해 보기 바란다. 기독교 속에 영생을 얻는 두 가지 방법, 즉 1)율법준수, 2)그리스도를 믿는 길, 이 둘이 있으나 1번보다 2번이 더 쉬운 구원의 길이므로 모두 2번을 통해 구원을 얻고 있다고 가르치는 것은 분명히 이단사상이다.  

“칼빈은 히 5:9을 이렇게 주석한다. ‘그는 아담과 정반대의 행동으로, 즉 순종으로 아담의 불순종을 제거함으로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의를 획득하셨기 때문에 그는 구원의 근원이 되셨다’. 이러한 칼빈의 해석은 비록 그가 ‘능동적 순종’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않았지만 개혁주의에서 가르쳤던 능동적 순종 개념을 칼빈 역시 가지고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정승원)

정승원은 히브리서 5:9절에 대한 칼빈의 말을 이용하기 전에 먼저 히 5:9절의 내내용을 다시 읽었어야 했다. 한번 전후 문맥과 함께 히 5:9절을 다시 읽어보자.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외하심을 인하여 들으심을 얻었느니라. 그가 아들이시라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온전하게 되었은즉 자기를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 하나님께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은 대제사장이라 칭하심을 받았느니라” (5:7-10).

그리스도가 율법에 순종하여 천국 영생의 자격을 얻었다는 뜻이 어디에 있는가? 사람이 되신 그리스도는 원래 하나님의 독생자이시지만, 우리의 죄용서를 완전하게 이루어 내라는 성부의 뜻에 완전하게 순종하시었다는 뜻이다. 그리스도는 우리 대신 죗값을 감당하라는 성부 하나님의 모든 뜻에 철저하게 순복하는 삶을 통해 아브라함이 만난 그 신비한 제사장 멜기세댁의 반차를 따르는 완전하고 영원한 대제사장이 되시었다는 내용이다.

구약의 대제사장이 율법을 지켜 영생의 의를 얻어야 할 사명을 가진 사람이었는가? 대제사장은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죄용서를 가져다 주는 속죄의 제물을 하나님께 바치는 사람이었다. 그것이 대제사장의 최우선적 소임이었다. 하나님의 뜻에 완전히 순종하시는 삶을 사신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칭의를 주시기 위해 자기의 목숨을 희생했다는 뜻이다. 

“칼빈은 갈 4:4-5,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에 나게 하신 것은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구절을 다음과 같이 주해한다.

‘모든 복종으로부터 자유로우신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가 율법 아래에 속하셨다. 왜? 그것은 우리 자리에서 그렇게 하신 것이다. 그가 우리를 위해 자유를 얻으신 것이다.... 이렇게 그리스도는 율법을 지키기로 결정하셨는데 이것은 우리를 위해 율법으로부터 면속(免屬) 되도록 하시기 위함이었다. 그렇지 않고서는 그가 율법 아래 매이심에 어떤 목적도 없었을 것이다. 그가 그렇게 하신 것은 분명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렇듯이 비록 칼빈은 “능동적 순종”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지는 않았지만 “율법을 지키기로 결정하셨다”(Christ chose to become liable to keep the law)는 표현은 개혁주의가 전통적으로 가르쳐 온 “능동적 순종”을 의미한다” (정승원).

정승원은 칼빈이 능동적 순종이라는 용어를 한 번도 사용하지 않았을지라도 율법준수로 영생의 의를 얻을 수 있다는 사상이 칼빈에게 진즉부터 있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정말 칼빈에게 그런 사상이 있었다면, 칼빈은 율법주의 이단이었고 결코 종교개혁자가 될 수 없는 사람이었다. 율법준수로 영생의 의를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한 사람이 그것을 핵심사상으로 가르치는 로마교회와 왜 싸웠을까?

칼빈의 어떤 말은 표면적으로 모호하고, 그래서 자주 이단들이 이용하고 있다. 칼빈의 성경 해석이 이상하다 싶으면 우리는 무조건 성경으로 돌아가야 한다. 성경을 이기는 신학이 없고 성경을 능가하는 성경 해석은 없기 때문이다. 

갈 4:4-5절(“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에 나게 하신 것은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이 참으로 그리스도의 능동순종을 말하는 성경 구절인가? “율법 아래에 나게 하신 것은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 이 구절은 대체 무슨 뜻인가?

아담 안에서 죄에 사로 잡힌 모든 인간의 인격의 상태를 지적하려고 율법이 먼저 왔다. 율법은 죄인들을 그리스도에게로 토끼몰이하려는 것 외에 다른 목적으로 오지 않았다. 죄에 사로잡힌 인간의 인격이 율법을 지킨다고 깨끗해 질 수 있는가? 죄에 지배되는 인간의 인격을 고치기 위해 율법을 지킨다는 것은 호박을 수박으로 바꾸기 위해 껍질에 광택을 낸다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갈 4:4-5절은 죄에 사로집힌 인간의 상태를 지적하고, 반드시 저주받고 죽어야 한다고 정죄하는 율법의 정당한 요구를 그리스도가 자기 몸으로 대신 받으시려고 세상에 오셨다는 뜻이다. 우리 대신 그리스도께서 율법에 순종하심으로 율법대로 죽으시려고 오셨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를 율법의 저주에서 속량되게(벗어나게) 하시려고 그리스도께서 먼저 보내신 율법의 지배를 받는 사람들 속으로 오셨다는 뜻이다. 

이렇게 쉬운 것을 총신 신대원장하시는 교수님은 왜 모르실까? 이러면 우리 총신 후배들이 무엇을 배울 수 있을까 하는 염려가 들지 않도록 신대원장님께서 신학에 계속 정진하여 주시기를 바란다. 

“칼빈이 율법에 대한 그리스도의 자발적 순종을 강조하는 것은 율법은 폐기되는 것이 아니라 영원히 지켜야 할 법칙이기 때문이다 ... 이런 맥락에서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πληρόω)’(마 5:17)는 말씀을 이해할 수 있다. 여기 ‘완전하게 한다’는 번역보다는 마1:22 ‘이 모든 일이 된 것은 주께서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니(πληρόω)’ 말씀처럼 ‘이루려 하심이라’는 번역이 문맥상 더 매끄럽다. 그리스도는 율법을 이루시기 위해 자발적으로 순종하신 것이다” (정승원)

정승원의 주장한 것처럼, 마 5:17절(“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는 그리스도가 율법 조항들을 완전하게 준수하는 방식으로 율법을 완성하신다는 뜻으로 해석될 수 없다. 그리스도께서 그런 뜻으로 하신 말이라면, 율법 조항들을 다 완전하게 지키려고 그리스도께서 도시락 통을 허리 춤에 달고 매일 율법 조항들을 좇아다니는 모습이 성경에 자주 나왔을 것이다. 그러나 성경에서 그리스도가 모세의 율법 조항들을 지키려고 애쓰는 모습을 얼마나 찾을 수 있는가? 능동순종 주장자들의 억지해석을 정승원이 거들고 있다.

그리고 칼빈이 그리스도께서 율법 조항들을 지키심으로 율법을 완성했다고 가르쳤다는 정승원의 주장은 칼빈에 대한 범죄이다. 칼빈이 그런 사람이었다면 종교개혁자가 될 수 있었을까? 칼빈은 그리스도가 죄인들을 사로잡고 정죄하는 율법의 최종적 요구를 자기 몸으로 감당하심으로 우리에게 율법의 완성이 되시었다고 가르쳤던 사람이다. 칼빈에게 그리스도의 율법을 완전하게 하신 사역은 곧 우리에게 죄용서를 주신 사역이었다. 칼빈에게 그리스도가 율법 조항들을 다 완전하게 지키는 방식으로 율법을 완전하게 하셨다는 개념을 없다. 칼빈의 말을 보라!
 

“사도는 그리스도의 피로 얻는 구속을 ‘죄의 용서’라고 규정한다(골 1:14). 이 뜻을 바꿔 말한다면, ‘그 피가 우리를 위한 배상에 해당되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함을 받는다 또는 무죄 방면을 받는다’고 할 수 있다” (기독교강요, 2.17.5).

그러나 칼빈의 다음의 말은 마치 그리스도께서 율법준수를 통해 율법을 완전하게 만드신것 같은 느낌이 들게 한다. 그러나 자세하게 보면, 칼빈이 그리스도가 죄인들에 대한 율법의 요구대로 죽으신 것을 그리스도의 율법준수로 이해했음을 알 수 있다. 앞의 그리스도의 죽으심이 우리에게 의를 주었다는 내용과 같은 페이지에 있는 내용이다.  칼빈이 같은 페이지에서 그리스도가 죄인에 대한 율법의 요구대로 자신이 대신 죽으심으로 율법을 완전하게 했고, 또한 그리스도가 율법 조항들을 완전하게 지키심으로 율법을 완전하게 했다는 두 가지 상반된 내용을 가르쳤을까?

“이 점은 안디옥 설교도 분명히 확인한다. ‘모세의 율법으로 너희가 의롭다 하심을 얻지 못하던 모든 일에도 이 사람을 힘입어 믿는 자마다 의롭다 하심을 얻느니라’(행 13:39 의역). 율법을 지키는 것이 의라면, 그리스도께서 그 짐을 담당하시고 마치 우리가 율법을 지킨 것같이 우리를 하나님과 화해시키신 것이 공로가 되어, 우리에게 하나님의 호의를 얻어 주셨다는 것을 누가 부인할 것인가? 사도가 다음에 갈라디아 신자들에게 가르친 것도 같은 뜻이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 율법 아래 나게 하신 것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속량하려 하심이라’(갈 4:4-5). 이와 같이 그리스도를 율법하에 두신 것은, 우리가 치를 수 없는 것을 그가 치르심으로써 우리에게 의를 얻어 주시려는 목적이 아니고 무엇이었겠는가?” (기독교강요, 2.17.5).
 

맺는 말

우리는 구원을 위해 그리스도가 자발적으로 하나님께 순종했다는 사실에 대해 말하는 사람들을 진리의 적으로 간주하지 않는다. 그것은 능동적 순종의 교리 논쟁의 본질이 아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구원을 위해 자기를 자발적으로 하나님께 드리셨고 자발적으로 하나님의 모든 뜻에 순종하신 분이다.

우리가 진리의 적으로 간주하는 내용은 그리스도가 율법을 지켜서 영생의 의를 얻으셨고, 그것을 전가하여 우리에게 천국 영생을 선물했다는 율법주의 이단사상이다. 정승원은 자신이 무엇을 위해 나섰는지 다시 생각하기 바란다. 이 이단사상을 옹호하기 위해 나섰다면 더 적극적으로 싸우다가 이단사상과 운명을 같이하는 비극을 당해야 마땅하다. 그리스도가 십자가로 우리를 완전하게 구원하지 못했다고 가르치는 이론은 이단사상이다. 십자가 중심의 기독교를 십자가와 율법준수의 종교로 바꾸는 이론은 이단사상이다. 

그러나 이 이단사상을 위해 나선 것이 아니라면 생각을 바꾸어야 할 것이다. 혹시 지난 WEA 논쟁 때처럼 "나도 능동순종(WEA)을 지지하지는 않아요"라고 할 것이면, 더 나서지 않아야 할 것이다. 그리스도가 우리의 구원을 위해 자발적으로 헌신했다느니, 능동적 순종과 수동적 순종은 유기적으로 연관되어 있다느니 등 막중한 논쟁의 본질에서 벗어나는 의미없는 말로 물타기 하다 창피당하다면 보는 사람들도 안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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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이철 목사는 2004년부터 현재까지 미국 미시간 주 ‘앤아버 반석장로교회’의 담임목사이고 거짓 신학의 ‘견고한 진’(고후10:4)을 무너뜨리기 위해 시작된 신학신문 <바른믿음>의 대표이다.
총신대학(B.A 졸업), 총신대학 신학대학원(M.Div Eqiuv.졸업), 아세아연합신학대학 대학원(Th.M 졸업), Liberty Theological Seminary(S.T.M 졸업), Fuller Theological Seminary(Th.M 수학), Puritan Reformed Theological Seminary(Th.M 수학), Liberty Theological Seminary(D.Min 수학), 남아공신학대학원(South African Theological Seminary, Ph.D)에서 연구하였고, 현재 University of Pretoria(Ph.D)에서 연구하고 있다.
저서로는 「신사도 운동에 빠진 교회」, 「제3의 물결에 빠진 교회」, 「가짜 성령세례에 빠진 교회」, 「피터 와그너의 신사도운동 Story」, 「한 눈에 들어오는 청교도 개혁운동」, 「능동적 순종에 빠진 교회」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