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와 불교, 과학, 철학, 아인슈타인, 양자론은?



1. 기독교와 불교

기독교는 창조-타락-구속의 세계관을 믿는 위로부터(창조주 하나님)의 초월 계시를 믿고 불교는 깨달음을 통해 해탈에 이르기 위한 아래로부터(인간 중심)의 방법론을 추구하는 종교이기에 접근 방법이 전혀 다르다 할 수 있습니다.

2. 불교와 아인슈타인, 양자론

따라서 양자역학이 인과(원인과 결과: 이게 과학의 기본 전제입니다)를 다루는 불교의 연기법을 연상시킨다고 보는 것이나, 아인슈타인이 불교가 물리학에 영감을 주는 종교라 해도 이상하지 않다고 봅니다. 아인슈타인은 평생 동안 양자론은 불완전하다고 했는데, 양자론의 슈뢰딩거 방정식이 양자를 확률적으로밖에 예측할 수 없다는 불만 때문이었지요.

그런 면에서 기계론자였던 뉴턴이나 평생 통일장 이론을 추적했던 아인슈타인은 우주의 물리적 현상은 완벽하게 계산해낼 수 있다고 보았다는 점에서 실재론(實在論)자라 할 수 있겠습니다. 반면에 양자의 불확정성을 다룬다는 점에서 양자론(量子論)자들은 실재보다는 증거를 다룬다는 측면에서 실증론(實證論)자라 할 수 있겠습니다.

1926년 아인슈타인이 막스 보른에게 보낸 편지에서 “신은 주사위를 던지지 않는다”고 한 유명한 언급도 확률적인 예측에 만족하는 실증론자를 실재론자의 입장에서 비판하고 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3. 불교와 철학의 범신론, 스피노자

이렇게 불교는 원인과 결과 그리고 순환논리적 윤회를 믿는다는 점에서 범신론(God is Nature)적이며 초월보다는 내재를 다루는 학문인 자연과학과 통하는 점이 많을 수밖에 없습니다. 사실 이 윤회설은 불교의 독창적 교리는 아닙니다. 윤회설은 고대 서양철학에서도 존재하고 불교의 윤회관은 힌두교에서 유래하였다 할 수 있습니다.

철학으로는 스피노자의 학문이 범신론적이요 고대 자연철학 속 엠페도클레스나 아리스토텔레스 그리고 과학철학의 가스통 바슐라르나 서학(西學)을 배운 우리나라의 정약용이나 최한기 같은 학자들에게서 그런 경향을 보게 됩니다.

​만일 어떤 신학자가 소피노자를 따른다고 공공연히 말하거나 수용한다 말하면 삼위일체를 믿는 정통 신학자가 아니라 범신론적 신학을 한다고 보면 틀림없습니다.
 

고대의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 동상
고대의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 동상

 

4. 기독교와 자연과학

반면에 기독교는 시간과 공간과 물질 속 그 물리적 현상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계시를 믿기에 관심 영역과 접근 방법이 전혀 다릅니다. 즉 기독교는 과학이든 철학이든 아인시타인의 생각이든 양자론이든 모든 학문 영역에 열려 있는 종교입니다. 기독철학자 아더 홈즈가 "모든 진리는 (창조주) 하나님의 진리이다"라고 한 것이 바로 그런 의미입니다.

성경은 세상을 보는 관점 자체가 다른 책인 것이지요. 성경은 <창조과학>이 말하는 과학책이 전혀 아니고, 칼빈이 말하듯 남녀노소, 빈부귀천, 지식고하를 막론하고 모든 보통사람들이 창조주 하나님의 구원의 진리에 이르는데 전혀 블편함이 없도록 하나님께서 친히 자신을 낮추어 지식고하를 막론하고 역사 속 모든 인류에게 눈높이를 조정한 책이기에 표면적으로는 대단히 단순해 보인다고 할 수 있습니다.

고차원 철학(?) 논하기를 좋아하는 일부 불교 고승들이 우수개소리로 기독교 진리는 며칠이면 전부 파악이 가능하다고 농담 또는 교만하게 평가 절하하는 것이 바로 그런 기독교 진리의 특성을 반영한다고 보아야 겠지요. 하지만 여기에 파라독스가 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미련한 것이 사람보다 지혜있고 하나님의 약한 것이 사람보다 강하다고 말합니다(고전 1:25-26). 육체를 따라 지혜 있는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않다(고전 1:26)고 한 사도 바울의 역설인 것이지요.

창조주 하나님은 세상 똑똑한 자들이 아니라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는 반전의 하나님이십니다. 기독교 교리와 성경이 얼핏보면 아주 단순 명료해 보이나 승려들의 학문적 책보다 신학의 논문과 책들이 압도적으로 방대하다는 사실도 기독교 진리의 파라독스적 신비를 보여줍니다.

5. 결론: 기독교 정통신학

결론적으로 우리 기독교는 과학을 배척하는 것이 아니고 과학의 한계를 잘 인식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도 과학적 사고를 즐기는 분들에게 창조주 하나님은 그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을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하시는(롬 1:20) 다양한 여지를 남겨두셨다고 보면 됩니다. 다만 이 자연과학적 내재(內在)의 영역은 근본적으로 구원과 관계된 은총에 접근할 수 있는 영역은 아니라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을 신앙의 유무와 관련 없이 누구에게나 열려진 일반계시, 일반은총 영역이라 합니다.

신학은 초월과 내재를 모두 다루는 종합학문인 반면 자연과학은 내재를 다루는 하등학문이기는 하나 이 영역도 결국은 창조주 하나님이 주관하시는 섭리의 영역인 것이지요.

하지만 기독교적 창조 신앙은 역사적으로 변함없이 삼위일체 하나님의 창조입니다. 반면, 과학적 추구는 가끔 하나님의 능력과 신성을 분명히 알게 하기는 하나 결국은 제한된 단일신을 겨냥할 뿐이지요. 즉 과학적 추구도 창조에 대해 일정한 정보를 취할 수는 있지만 결국 자연과학적 접근은 바른 해석이 아닌 양태론적 단일신이라는 제한적이며 마치 전혀 해답을 찾을 수 없는 막다른 골목 같은 곳에 다다를 수밖에 없다는 의미입니다.

제가 늘 <창조과학>이나 <지적설계운동>은 아무리 깊은 연구에 이르더라도 그 본질상 단일신을 보여줄 뿐이기에 양태론이나 창조주보다 더 탁월한 창조주가 즐비하다 주장하는 영지주의자들에게 논리적으로 설득 당할 위험이 있다고 주장하는 이유입니다. 그냥 성경적 창조, 창조론, 창조 신앙, 창조 신학, 설계라고 하면 자연스럽습니다. 그러나 20 세기에 이르러 등장한 일종의 새로운 운동(movement)인 <창조과학>, <지적설계> 등은 과학적 신학이 되어 그 타당성(지속 가능성)을 다른 신학처럼 평가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좋은 신학이란 늘 역사적이기 때문이지요.

조덕영 박사(창조신학연구소 소장, 조직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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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덕영 박사는 환경화학공학과 조직신학을 전공한 신학자다. 강남대, 개신대학원, 건양대, 명지대, 서울신(예장 합동), 서울기독대학원, 백석대와 백석대학원, 피어선총신, 한세대신대원에서 가르쳤고, 안양대 겸임교수, 에일린신학연구원 신대원장을 역임했다. <과학으로 푸는 창조의 비밀>’(전 한동대총장 김영길 박사 공저), <기독교와 과학> 등 30여 권의 역저서를 발행했고, 다양한 창조론 이슈들을 다루는 '창조론 오픈포럼'을 주도한다. 창조론과 관련된 방대한 자료들을 비축하고 있는 인터넷 신학연구소'(www.kictnet.net)을 운영하며, 현재 참기쁜교회의 담임목사이며 김천대, 평택대의 겸임교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