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 메리데스 G. 클라인(Meredith G. Kline, 1922-2007)이라는 이름을 들어 보았을 것이다. 필자도 행위언약에 대한 연구를 하면서 자주 접하게 되었다. 클라인은 필라델피아의 웨스트민스터신학교, 보스톤의 고든콘웰신학교, 캘리포니아의 웨스트민스터신학교에서 구약학을 가르쳤고, 언약신학에 관한 대가라고 알려졌던 사람이다.

언약에 대해 다루는 책을 읽다가 보면 “메리데스 클라인은 ....했다”라는 내용이 수 없이 등장한다. 필자는 논문을 위한 Proposal을 작성하는 중인데, 그리스도의 능동순종 교리는 성경이 가르치는 참된 신앙과 완전히 무관하다는 사실에 대한 연구를 준비하고 있다. 최근 연구 동향을 보기 위해 한국의 개혁주의권 신학자들과 목회자들이 존경하는 마이클 호튼, 메리데스 클라인, 존 페스코 등의 책들을 읽고 있는 중이다.

성경에서 근거를 0.1도 찾을 수 없는 능동순종 교리는 구원을 위한 인간의 공로를 당연시하는 그릇된 언약신학의 산물이다. 불행히도 유명세를 누렸던 대부분의 신학자들이 창조 그 자체가 하나님이 인간(아담)에게 구원을 위한 공로를 요구하는 언약이었다는 창조언약(또는 자연언약, 행위언약)을 가르쳤다. 사람(아담)이 그 공로를 만들지 못하자 하나님의 성육신자 예수 그리스도가 대신 그 공로를 만들었다는 능동순종 교리도 대부분이 가르쳤다.

백금산 목사가 번역한 마이클 호튼이 쓴 책 <언약신학>을 먼저 보았다. “이런 책을 번역하면서 눈에서 비늘이 벗겨지는 느낌이었다고 감탄한 백금산이나, 이런 책을 쓴 호튼이나, 이 책을 먼저 읽고서도 전혀 개탄하지 않은 한국의 많은 교수들과 목사들을 싹 쓸어 한 자루에 담아 바다에 던져야 한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들이 기독교를 몰라도 너무 모르는 것 같다. 다음의 기사를 참고하기 바란다.

“백금산 목사(부개사 대표)를 바르게 지도해 주어야 할 때가 되었다고 생각된다”

호튼에게 신학적 영향을 많이 미친 클라인이 쓴 책 <하나님 나라의 서막>(Kingdom Prologue)의 창조언약-행위언약 부분을 읽으면서 비슷한 느낌을 받았다. 클라인의 말들을 직접 보면서 설명해 보겠다.
 

 

 

“태초의 창조세계의 언약적 성격은 세계의 창조와 동시에 생겨났다는 점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피조세계의 수장인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는 시점에 언약이 형성되었다. 창조 언약은 따라서 ‘창조주의 아담과의 행위언약’이라고 명명될 것이다. ‘행위’라는 말이 명칭에 보존한 이유는 (구속언약을 지칭하는) ‘은혜언약’과 대조되는 ‘행위언약’이라는 전통적인 명칭이 가지는 유익을 그대로 보존하기 위해서이다.” (메리데스 클라인, 하나님 나라의 서막, (김구원 역), 45)

클라인의 언약에 대한 이런 설명은 창조주 하나님이 자기를 섬기는 자기의 백성으로 창조된 아담과 서로의 인격에 기초하여 언약했다는 내용이 아니다. 쌍방 간에 언약이 체결되려면 먼저 언약의 내용에 대한 소통이 있어야 하고, 쌍방의 그 내용에 대해 자발적이고 인격적인 동의가 있어야 한다.

그러나 클라인의 말하는 창조언약 개념 속에는 그런 것이 없다. 태초에 하나님의 창조가 이루어질 때, 아담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지는 순간 아담에게 영생을 누리기 위한 어떤 공로적 행위가 요구되는 하나님의 언약이 반포되었다는 것이다.

그 언약의 내용이 하늘의 구름 속에 기록되었었는지, 아담의 마음의 마음 속에 기록되었었는지, 또는 아담이 밟고 사는 땅에 기록되었었는지 ... 아무런 설명이 없다. 클라인은 왜 자신이 가르치는 창조언약에 관한 그런 합당한 요건들을 설명하지 못할까?

창조 자체를 통해 영생을 위한 아담의 행위의 공로가 요구되는 창조언약이 반포되었다는 창조언약 (자연언약, 행위언약) 개념은 성경의 가르침이 아니기 때문이다. 클라인의 언약 개념은 하나님의 선하고 완전한 창조를 모욕하는 이단적인 이론이다. 대체 클라인은 성경 어디를 근거로 이런 괴이한 창조언약을 말했는가? 종교개혁 이후 울시누스 또는 다른 누가 이런 이론을 가르치기 시작했다고 한다. 아무리 그래도 창조언약 개념은 이단사상이라고 해야 성경적 기독교가 바로 세워진다. 

하나님께서 자기를 찬송하는 백성을 가지시고자 흙으로 사람을 만드셨고, 그 사람은 하나님을 배반하지 않는 한 죽지 않는 육체의 생명 안에서 만들어졌다. 영원히 그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 하나님과 아담이 서로의 인격에 기초하여 언약을 맺었다. 영원히 하나님을 섬기는 백성으로 살고 영원히 아담의 하나님으로 존재하기로 언약하였다. 하나님과 아담 사이의 그 언약의 유지 또는 파괴를 보여주는 상징물로서 생명나무와 선악과를 지정하셨다.

창조 자체가 하나님이 아담에게 영생을 위해 요구되는 행위의 공로(율법의 공로)를 획득하라고 명령하였다는 창조언약 개념은 이단사상이다. 왜냐하면 이 이론으로 인해 필연적으로 아담의 원죄의 내용이 성경과 달라지고, 아담의 원죄를 해결하여 다시 아담과 그의 후손들을 자기 백성으로 회복하는 하나님의 방식(구원론)이 성경에서 벗어나게 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가 아담 대신 행위의 공로를 획득하여 자신과 우리에게 천국 영생의 자격을 주었다는 능동순종 구원론은 그렇게 생겨났다.

칼빈의 창조와 아담에 대한 이해는 클라인이 주장하는 창조언약 개념과 전혀 맞지 않는다. 칼빈은 아담이 교만해 지지 않았다면 창조 때의 그 상태가 이후 계속 지속되었을 것이라고 가르쳤다.
 

“그러므로 아담이 어떤 방법으로 하나님의 진노를 유발하여 벌을 받았는가 하는 것을 생각하기란 그다지 어렵지 않다. 참으로 교만이 모든 악의 처음이었다는 어거스틴의 단정은 옳다. 사람이 자기의 처지에 만족하고 바른 한계를 넘으려고 하지 않았더라면, 태초의 상태에 머무를 수 있었을 것이다.” (기독교강요, 2.1.4)

“그러나 인간은 하나님의 은총을 풍성하게 받았을 때에 그 은혜를 감사하지 못했으며, 받은 축복을 인정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도 않았다. 그러므로 모든 영광을 잃어버린 지금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은, 그 하나님을 인정하며 적어도 자기의 부족함을 고백함으로써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없는 것이다.” (기독교강요, 2.2.1)

그러나 클라인은 아담이 오래 살지 못하는 사람, 즉 임시적 생명으로 창조되었다고 한다. 영생에 들어가기 위해 반드시 어떤 기간 동안 진행되는 행위의 시험에 직면하도록 창조되었다고 한다. 소설이다. 성경의 어디를 근거로 쓴 소설인가? 클라인의 말을 보자.
 

“언약의 주가 그 약 축복에 대한 약속을 이행하려면, 또한 인간이 약속된 안식일에 들어가는 것이 영원히 지연되지 않으려면, 인간 순종에 대한 시험을 한없이 미룰 수만은 없었다. 인간의 순종을 조건으로 한 언약 축복의 완성이 한 없이 지연될 수 없었다. 순종 시험은 분명한 시간적 범위를 가진 것이었다. 다시 말해 그것은 단회적 시험이었다. 그것의 합당한 목적은 인간의 축복을 빼앗기 위함이 아니라 인간을 축복의 완성으로 나아가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메리데스 클라인, 149)

아담이 조금 후에 다가오는 시험을 통과하지 못하면 오래 살 수 없는 사람으로 창조되었다는 것이다. 대체 성경 어디를 근거로 하는 말인가? 클라인은 성경 어디를 근거로 아담이 한시적 기간의 시험을 거쳐서 영생에 이르도록 창조되었다고 주장하는 것인가? 전혀 이해되지 않다. 이런 정도의 유치한 신학을 가진 사람이 왜 한국에서는 그리도 존경을 받았는지 알 수가 없다. 

하나님이 주신 완전한 인격을 가진 아담이 오히려 그 자유와 복을 (마귀의 유혹을 받아) 하나님을 배반하는데 사용했으므로 모든 불행이 야기된 것이 아니었나? 한국에서는 교회에 조금 다닌 초딩들도 이렇게 잘 설명한다. 하물려 영어하는 나라에서 태어나 영어로 가르치는 미국 신학교의 교수인 사람이 기독교를 왜 그렇게 이상하게 전개하였을까?

창조와 원죄에 대한 클라인의 이론이 이단수준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더 심각한 사실은 하나님이 원죄를 일으키신 분이라고 말하는 내용 때문이다. 클라인의 다음의 말을 보라!

“그러므로 여호와는 인류 번식이 이루어지기 전에 그 시험 문제가 마무리되도록 하셨다. 하나님은 아담의 순종을 시험하기 위해 아담을 위기의 순간으로 몰아가 아담이 그것에 신속하고 결정적인 반응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드셨다.” (메리데스 클라인, 149)

하나님이 의도적으로 아담에게 시험을 주셨다는 내용이다. 아담에게 자식이 태어난 후 시험을 받아 타락하면 참으로 곤란해지므로, 아담이 자식을 하나도 낳기 전에 하나님이 어서 빨리 아담을 시험하셨다는 뜻이다.

아담이 자식이 있는 상태에서 하나님의 시험으로 타락하면 왜 곤란해지는가? 이미 태어난 자식에게는 아담의 원죄의 전가가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러면 원죄 아래에 있는 사람들, 그리고 원죄와 무관한 사람들, 이렇게 두 종류의 인류가 창조세계에 존재하게 된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담에게 자식이 하나도 태어나기 전에 아담을 시험하셨다고 클라인은 설명하였다.

이런 자를 비판하지 않고 구약신학과 언약신학의 대가라고 존경하는 한국의 교수들과 목회자들이 참으로 우습지 않은가? 이런 웃기는 자의 창조언약(행위언약) 개념을 총족시키는 구원론으로서 그리스도의 능동순종 교리가 탄생되었다는 것을 이제라도 알아야 한다. 한국 교회 교수들과 목회자들은 일치 단결하여 호튼-클라인 류가 말하는 창조-행위언약 개념을 짓밟아 버려야 한다.

“창조 사역을 통해 만들어진 언약 질서는 처음부터 이미 축복의 길서였다. 그러나 앞서 지적한 것처럼 이 언약에는 언약의 종이자 아들인 인간이 그의 언약주에 충성(순종)하면 그에게 주어질 특별한 선물도 포함되어 있었다. 다시 말해 언약에는 인간의 순종을 조건으로 한 왕국 영광의 완성적 진행에 대한 약속이 포함되어 있었다.” (메리데스 클라인, 148)

클라인은 창조를 통해 맺어진 창조언약이 인간에게 축복의 길이었다고 한다. 아주 그럴싸한 말이다. 그러나 사실은 인간이 율법적 공로를 획득하여 하나님 백성이 되고 영생을 누리는 길로 갈 수 있었다는 면에서 축복이라는 것이다.

칼빈이 이해하고 가르친 대로 하나님은 아담이 하나님 섬김을 거부하고 언약을 배반하지 않으면 영구하게 살면서 그 은혜와 복을 영원히 누리도록 창조하셨다. 그것이 인류에게 복이지, 왜 만들어 지고 난 후 행위의 공로(율법의 의)를 획득하여 영생으로 갈 수 있는 길이 있었으니 창조언약이 인류에게 축복의 길이라고 하는 것인가? 클라인은 좋은 말로 악독한 것을 가르치는 이단끼 농후한 거짓 신학자였다.

“시험 규례는 하나님 자신이 인간의 권세 아래 두시고 인간에게 ‘음식’으로 정하신(창 1:29-30; 2:16) 모든 식물로부터 한 나무를 분리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나무에 정반대의 의미를 부여하였다.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창 2:17). 그 금지 조항을 통해 하나님은 그 나무의 열매 먹는 행위를 선한 것과 합법적인 범주에서 제하고, 주권적으로 그 행위를 불법적인 것으로 재분류하셨다.” (메리데스 클라인, 150)

선악과라는 명칭의 ‘선’은 아담이 하나님을 섬기는 상태이고 ‘악’은 아담이 하나님을 배반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아담이 하나님을 배반하고 스스로 하나님처럼 살고자 배반할 때, 그 결단의 표시가 선악과라고 명명한 열매가 되게 하셨다. 아담이 선악과를 범하려는 결단을 했을 때는 이미 하나님을 배반하고 스스로 하나님처럼 살고자 작심한 상태였다. 선악과는 아담이 하나님의 언약의 유지 또는 파괴를 가시화시키는 상징물이었다.

그러나 클라인은 선악과를 피조물의 창조주에 대한 권위 인정, 또는 창조주가 세운 질서 존중의 문제로 왜곡하였다. 하나님이 하지 말라고 한 것을 아담이 했으므로 영생을 얻는 길로 나갈 수 없는 범죄였다는 것이다. 선악과를 단순 불법 또는 하나님에 대한 권위와 질서 무시로 해석하면, 반드시 그 다음에는 구원의 방식이 왜곡되는 현상이 따라온다. 하나님이 하라고 하신 것, 하지 말라고 하신 것을 다 이행하는 것이 구원의 길이 된다.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능동순종이다.

“그 시험 나무를 통해 인간은 하나님의 절대 주권과 대면하게 되었다. 그 시험 명령은 인간의 완적 권위와 특권을 제한함으로써 그의 왕권이 종속적 왕권이고 그는 세계를 청지기로서 다스리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게 만들었다. 그 시험 명령은 명명-해석 사역에서 즉 인간 왕권에 부속하는 역할인 지혜자로의 인간 역할에서 반드시 로고스-창조주의 지시를 따라야 한다는것을 요구했다.” (메리데스 클라인, 150)

클라인은 아담의 선악과 범행을 하나님에 대한 반역으로 보지 않는다. 원죄를 하나님에 대한 반역으로 볼 때만 구원이 그리스도의 구속으로 연결되고, 그리스도가 피 흘리심으로 이루신 죄용서가 우리의 유일한 소망으로 다가오게 된다.

그러나 클라인처럼 선악과 문제를 ‘하나님의 절대 주권’, 즉 하나님의 권위를 무시하고 하나님이 하지 말라고 하신 것을 아담이 해 버린 것으로 원죄를 설명하면, 구원을 위해서는 아담 자신이나 그리스도가 대신 하나님의 모든 명령을 완전하게 지킴으로 구원이 온다고 가르치게 된다.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능동순종이다.

한국 교회가 존경하는 구약신학자이고 언약신학자 메리디스 G. 클라인의 수준이 이 정도라니 참으로 싱겁다. 이제라로 우리는 일치단결하여 마이클 호튼-메리디스 G. 클라인의 창조언약(행위언약) 이론을 짓밟아 버려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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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이철 목사는 2004년부터 현재까지 미국 미시간 주 ‘앤아버 반석장로교회’의 담임목사이고 거짓 신학의 ‘견고한 진’(고후10:4)을 무너뜨리기 위해 시작된 신학신문 <바른믿음>의 대표이다.
총신대학(B.A 졸업), 총신대학 신학대학원(M.Div Eqiuv.졸업), 아세아연합신학대학 대학원(Th.M 졸업), Liberty Theological Seminary(S.T.M 졸업), Fuller Theological Seminary(Th.M 수학), Puritan Reformed Theological Seminary(Th.M 수학), Liberty Theological Seminary(D.Min 수학), 남아공신학대학원(South African Theological Seminary, Ph.D)에서 연구하였고, 현재 University of Pretoria(Ph.D)에서 연구하고 있다.
저서로는 「신사도 운동에 빠진 교회」, 「제3의 물결에 빠진 교회」, 「가짜 성령세례에 빠진 교회」, 「피터 와그너의 신사도운동 Story」, 「한 눈에 들어오는 청교도 개혁운동」, 「능동적 순종에 빠진 교회」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