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창모 목사의 성경 오역(誤譯), 오석(誤釋) 바로잡기(29)

 

글을 시작하며

“겨자씨 비유”<1>에 대한 필자의 글이 <바른믿음>에 게재된 뒤에 많은(?) 분들에게 고맙다는 격려를 받았다. 물론 여기서 많다는 말은 이전의 다른 글들에 비해서 그렇다는 말이다. 그러나 또 한 편, 비판과 야유도 이전 글들에 비해서 더 많이 받았다. 필자는 “겨자씨 비유”<1>에 대해 비판과 야유를 보낸 이들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왜냐하면 지금까지 오래 동안 아무런 의심 없이 진리라고 믿어왔던 것을 이름도 없는 필자의 주장으로 인해 포기하는 것은 그렇게 용이하지 않을 테니까 말이다.

그러나 한 가지 문제는 비판과 야유를 하더라도 객관적인 증거(필자가 원하는 것은 성경적인 증거이다)를 제시해야 설득력이 있을 텐데, 그렇지 못한 것이 안타까울 뿐이다. 예를 들면, 아래와 같은 것들이다(보라색 글씨는 필자의 글에 대한 비판이며, 그 아래는 필자의 설명이다. 이 글을 서두에 소개하는 것은 아래처럼 “겨자씨 비유”에 대한 필자의 글에 의구심을 품는 이들이 여럿 있기 때문에 설명이 필요하다고 판단해서 이다.

“하나님 나라가 무엇인지 알지 못하는 제자들에게 비정상적인 하나님 나라를 먼저 알려주셨을까가 의문입니다”

필자의 글에서 “겨자씨 비유는 비정상적인 하나님 나라를 고발하는 것이다”에서, 비정상적인 하나님 나라는 눈에 보이는 이스라엘을 말한다. 예수님의 제자들을 비롯해서 당시의 유대인들은 눈에 보이는 하나님 나라, 즉 이스라엘이 로마의 지배만 아니면 그런대로 괜찮은 하나님 나라라고 여겼으므로, 하나님이 화를 내실만큼 지독하게 타락한 이스라엘의 현실을 직시하지 못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들이 현재의 이스라엘의 타락상을 직시할 수 있도록 이들에게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의 비유”와 “겨자씨와 누룩 비유” 등을 말씀하신 것이다. 왜냐하면 제자들을 비롯한 유대인들이 당시의 눈에 보이는 하나님 나라인 이스라엘의 심각한 상태를 직시해야만, 예수님이 가지고 오시는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 나라를 조금이나마 바르게 이해할 수 있을 테니까 말이다.

그러나 그들은 당시의 이스라엘의 심각한 상태를 조금도 인지하지 못했다. 그래서 그들은 당시의 이스라엘을 로마로부터 해방시켜서 좀 더 나은 이스라엘, 즉 메시아 왕국을 건설할 정치적인 메시아를 대망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끝까지 예수님이 가지고 오시는,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 나라를 알 수 없었다. 물론 관심조차 없었지만 말이다. 이런 이유로 제자들은 참 하나님 나라가 본질적으로 시작되는 십자가 앞에서 불행하게도 다 도망가고 말았던 것이다. 이는 필자의 글을 비판한 어떤 비판자의 아래 글과도 일맥상통한다.

“제자나 바리새인이나 하나님 나라 언제 오냐고 예수님한테 물은 것을 볼 때. 또, 사람들이 하나님 나라가 뭔지 모르니까 예수님이 하나님 나라를 비유로 계속 설명하신 게 아니냐”

이들이 예수님께 하나님 나라가 언제 오느냐고 물은 그 하나님 나라(눅17:20/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의 나라가 어느 때에 임하나이까 묻거늘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는 예수님이 천국 비유로 말씀하신 참 하나님 나라가 아니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이들의 질문은 메시아가 와서 로마로부터 이스라엘을 해방시킴으로써 건설할 새로운 메시아 왕국이 언제 오느냐에 관한 것이다. 이렇게 정치적인 메시아를 기다리며, 눈에 보이는 하나님 나라, 즉 이스라엘을 붙들고 있는 그들에게 어찌 예수께서 이스라엘이 얼마나 타락한 비정상적인 하나님 나라인가를 말씀하지 않으실 수 있었겠는가?

“당시 사람들이 예수님의 비유를 듣고 쉽게 이해한 게 자명하다? 어려워서 못 알아들었기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따로 설명해 주지 않으셨나요?”

위의 질문은 대단히 성경적인 근거를 가지고 비판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성경에 대한 무지에서 나온 우문에 불과하다. 예수께서 눈에 보이지 않는 참 하나님 나라를 비유로 말씀하신 까닭은 하나님 나라의 밖에 있는 자들, 즉 외부인들에게는 참 하나님 나라를 감추시고, 하나님 나라 안에 있는 자들, 즉 내부인들에게는 그것을 들어내시기 위함이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바유를 따로 설명해 주셨다. 그러나 타락한 이스라엘을 고발하는 하나님 나라(이스라엘)의 비유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과 같은 자들, 즉 비유의 직접적인 당사자들이 더 잘 알아들을 수 있도록, 오히려 비유로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타락한 이스라엘을 고발하시는 예수님의 비유를 알아듣고, 예수님을 죽이려고 하지 않았는가? 막12;12를 보라.

“그들이 예수의 이 비유가 자기들을 가리켜 말씀하심인 줄 알고 잡고자 하되 무리를 두려워하여 예수를 두고 가니라”(막12:12)

이는 예수께서 말씀하신, 타락한 이스라엘, 즉 눈에 보이는 하나님 나라의 비유인 “악한 포도원 농부의 비유”(막12:1-11)에 대한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의 반응이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악한 포도원 농부의 비유”는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 뿐 아니라, 함께 비유를 들었던 평범한 무리도 알아들었다. 개역개정(한글개역)은 오역을 하였기 때문에,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이 비유를 알아듣고 화가 나서 예수를 잡고 싶었으나, 단순히 무리가 두려워서 예수 잡는 것을 포기하고 그냥 간 것처럼 읽히지만, 원문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이 예수님의 비유를 알아들은 무리가 두려워서 예수 잡는 것을 포기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개역개정(한글개역)에서는 막12:12를 한 문장인 것처럼 번역하면서 오역했으나, 원문에는 다음과 같이 접속사 “καί”(카이)로 연결된 세 문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1. “Καὶ ἐζήτουν αὐτὸν κρατῆσαι”(카이 에제툰 아우톤 크라테사이): (필자 직역) “그리고 그들은 그(예수)를 잡으려고 하고 있었다”

2. “καὶ ἐφοβήθησαν τὸν ὄχλον, ἔγνωσαν γὰρ ὅτι πρὸς αὐτοὺς τὴν παραβολὴν εἶπεν”(카이 에포베데산 톤 오클론 에그노산 가르 호티 프로스 아우투스 텐 파라볼렌 에이펜): (필자 직역) “그리고 그들은 무리를 두려워했다. 왜냐하면 그들(무리)은 그 비유가 자기들(αὐτοὺς/: 대제사장들, 서기관들, 장로들)에 대하여(πρὸς/프로스) 말씀하셨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3. “καὶ ἀφέντες αὐτὸν ἀπῆλθον”(카이 아펜테스 아우톤 아펠톤): (필자 직역) “그래서 그들은 그(예수)를 내버려 두고 갔다”

이렇게 타락한 이스라엘을 고발하시는 하나님 나라의 비유(악한 포도원 농부의 비유)에 대해서는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뿐만 아니라 평범한 유대인들의 무리도 무슨 의미인지 알아들을 수 있었다. 그래서 대제사장들, 서기관들, 장로들은 비유의 의미를 알아들은 무리가 두려워서 예수님을 그냥 버려두고 가버렸던 것이다.

만약 예수님이 말씀하신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의 비유”(눅13:6-9)나 “겨자씨와 누룩 비유” 등을 듣는 자들이 알아듣지 못했다면, 예수님은 괜히 허공에다 비유를 말씀하신 꼴이 되고 만다.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의 비유”와 “겨자씨와 누룩 비유”는 눈에 보이지 않는 참 하나님 나라의 비유가 아니라, 타락한 이스라엘을 책망하기 위한 하나님 나라(이스라엘)의 비유이다. 그러므로 이 비유를 듣는 자들은 굳이 예수님의 다른 설명이 없더라도 다 알아들었을 것이다. 특히 예수님은 그들의 삶의 정황을 소재로 비유를 말씀하셨으므로 듣는 자들은 더 쉽게 “겨자씨와 누룩 비유”의 의미를 이해했을 것이다.
 

이제 지난번에 하지 못한 “누룩 비유”를 보자. 이 비유야말로 “겨자씨 비유”가 타락한 이스라엘을 책망하는 비유임을 증명하는 움직일 수 없는 증거이다. 또 이 “누룩 비유”는 “누룩 비유”와 함께 나오는 마13장, 눅13장의 “겨자씨 비유”가 “누룩 비유”가 없는 막4:30-32의 “겨자씨 비유”와는 다른 의미의 비유임을 말하는 증거이다(막4:30-32의 “겨자씨 비유”는 다른 지면에서 설명할 기회가 있을 것이다).
 

마13:33의 “누룩 비유”에 대한 일반적인 견해

마13:31-33과 눅13:18-21에 기록된 “겨자씨와 누룩 비유”의 전통적인 해석은 대체로 다음과 같을 것이다. “겨자씨 비유”는 하나님 나라의 시작은 겨자씨처럼 작고 미미하나 나중에는 큰 겨자 나무에 새들이 깃들만큼 창대해진다는 것, 즉 하나님 나라의 외적 성장을 가르친다면, “누룩 비유”는 하나님 나라의 내적 변화를 가르친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이동원 목사와 찰스 스윈돌 목사는 아래와 같이 말했다(본 글 <2>에서는 <1>에서 다루지 않은 “누룩 비유”에 대해서만 언급할 것이다).

“기독교 교회 역사가 걸어온 발걸음이 그러합니다. 교회는 양적으로 성장해 왔습니다. 그리고 질적으로도 성장해 왔습니다. 이것이 한 교회의 역사이며, 그리고 지구상에 있었던 하나님 나라의 역사이기도 합니다.” (이동원, “비유로 말씀하시더라”, pp. 67-68)

“하나님 나라는 필연적이고 완전한 변화의 약속과 함께 믿는 자들을 속으로부터 변화시킨다. 마찬가지로 세상은 근본적으로 바뀔 것이다, 이는 시간문제일 뿐이다.” (Charles Swindoll, “New Testament Insights, LUCK”, p. 445)

만약 예수님이 비유를 사용하셔서 정말로 참 하나님 나라의 내적 변화를 가르치시려고 하셨다면, 굳이 유대인들에게 죄의 상징으로 인식되는 누룩을 소재로 비유를 구성하시지는 않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천재적인 이야기꾼이신데, 하나님 나라의 좋은 내적 변화를 가르치시기 위해, 오해의 소지가 다분한, 즉 유대인들에게 죄의 상징으로 인식되는 누룩을 소재로 “누룩 비유”를 말씀하셨다는 것은 이해할 수 없는 노릇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지만 “누룩 비유”는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참 하나님 나라의 내적 변화를 가르치는 비유가 결코 아니다. 왜냐하면 누룩을 죄의 상징으로 여기는 유대인들의 확고한 정서와 “누룩 비유” 자체가 그것을 증거하고 있기 때문이다.
 

마13:33의 “누룩 비유”에 대한 James M. Boice의 견해

James M. Boice는 마13장에 기록된 “겨자씨와 누룩 비유”가 정상적인 하나님 나라를 가르치는 비유가 아니라 비정상적으로 커져버린, 그러나 죄로 오염된 타락한 교회를 가르치는 비유로 본 까닭을, <겨자씨와 누룩 비유는 지상교회의 외적 성장과 내적 변화를 말하는가? 아니다. 결코 그렇지 않다(1)>에서 제외시킨 “누룩 비유”에 대해서만, 소개하면 아래와 같다.

“거의 모든 경우 구약에서(또한 오늘날 유대인의 생활에서도) 누룩은 악을 상징한다. 이스라엘 제사법에서도 불에 구워 만드는 모든 제물에는 누룩을 넣으면 안 되었다(레2:4 이하), 무교절이 오면 모든 경건한 유대인들은 그의 집에서 누룩을 샅샅이 찾아내 없애버렸다. 오늘날에도 정통 유대인들은 이러한 일을 행하는데, 그 일은 옛날에도 그랬듯이 죄의 제거를 상징한다. 예수님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 또한 헤롯의 누룩에 대해 말씀하셨는데, 그때마다 누룩은 그들의 악한 영향력을 의미했다(마16:12; 막8:15). 바울도 복음의 진리로부터 이탈하는 것을 사단의 부추김으로 묘사하면서 신자들에게 ”적은 누록이 온 덩이에 퍼지니“ 조심하라고 권면의 말을 덧붙인다(갈5:9; 고전5:6).

어떤 이들은 누룩이 항상 악의 상징으로 사용되지 않았고 주장하는데, 물론 그 말은 옳다. 때때로 누룩은 단순히 누룩 그 자체를 가리키기도 한다. 그러나 누룩이 상징적 의미를 갖게 될 때는 선한 것보다는 거의 항상 악한 것을 가리키는데 사용된다. 이렇게 유대인들에게 악의 상징으로 익숙한 누룩을 예수께서 정반대의 의미, 즉 복음이 세상에 끼치는 복된 영향을 의미하는데 사용했다는 것은 납득하기 어렵다.” (James M. Boice, “THE PARABLES OF JESUS”, pp. 39-40)
 

눅13:20-21의 “누룩 비유”에 대한 필자의 견해

“또 이르시되 내가 하나님의 나라를 무엇으로 비교할까 마치 여자가 가루 서 말 속에 갖다 넣어 전부 부풀게 한 누룩과 같으니라 하셨더라”(눅13:20-21)

본문에 등장하는 “여자”(γυνὴ/귀네)는 특별한 다른 설명이 없는 것으로 보아, 일반 가정의 평범한 주부로 보면 될 것이다. 그런데 이 “여자”가 반죽한 밀가루 서 말은 상식적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대단히 많은 분량이다. “가루 서 말”로 번역된 “σάτα τρία”(사타 트리아)는 약 150인분 정도의 빵을 만들 수 있는 분량이다. 인구가 적고 교통(도로와 이동 수단)이 불편했던 고대 사회에서 왕의 잔치가 아니고서는 아무리 대단한 부잣집 잔치라고 하더라도 150명의 사람이 모이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전문가들은 고대 사회에서는 왕의 잔치라도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면 150명의 사람이 모이기는 대단히 힘들 것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누룩 비유”에서 평범한 가정주부로 보이는 한 “여자”가 비상식적으로 많은 양의 밀가루를 반죽했다는 것은, <1>에서 언급된 “겨자씨 비유”에서 자기 채소밭에 겨자씨를 갖다 심은 남자만큼이나 제정신이 아닌 여자임에 틀림없다. 왜냐하면 당시에 자기 채소밭에 잡풀인 겨자씨를 심는 상황이 정상적이지 않듯이 한꺼번에 밀가루 서 말을 반죽하는 상황도 결코 정상적이지는 않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누룩 비유”를 하나님 나라의 내적 변화로 이해하는 사람들은 성경에서 누룩은 대부분 죄의 영향력과 같은 부정적인 것을 상징하지만, 마13:33과 눅13:21의 예수님의 비유에 등장하는 누룩은 예외적으로 성경에서 딱 두 번 좋은 의미로 사용되었다고 억지를 부린다. 물론 그것이 예외일 수 있다. 왜냐하면 어떤 상징이 99번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되었다 할지라도 얼마든지 한두 번 좋은 의미로 사용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경우, 예외를 주장하는 자들은 이것이 예외적인 경우임을 입증하는 타당한 근거를 제시해야 한다. 다시 말하면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객관적인 증거를 제시해야 마13:33과 눅13:21의 “누룩 비유”에서 예외적으로 누룩이 좋은 의미로 사용되었다는 주장에 타당성이 생긴다는 말이다. 그러나 누룩이 예수님의 “누룩 비유”에서 예외적으로 “좋은 의미”로 사용되었다고 주장을 하는 자들은 그것이 예외적이라는 합당한 근거를 제시하지 못한 채, 무작정 누룩이 여기에서만큼은 예외적으로 좋은 의미로 사용되었다고만 주장하고 있다.

성경에서는 여러 가지 상징들이 어떤 의미를 나타내기 위해 사용되었다. 또 이들 상징들 중에 어떤 것은 드물지만, 예외적으로 다른 의미를 나타내는 상징으로 쓰이기도 한다. 그러나 어떤 것들은 그것의 이미지가 너무 강해서 결코 예외적으로 사용될 수 없는 상징들이 있다. 이런 것들 중에 대표적인 하나가 바로 “누룩”이라는 상징이다. 이는 유대인들에게 누룩이란 예외 없이, 어디서든지, 누구에게라도 “죄”, 또는 “죄의 영향력”을 상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구약 성경과 유대인의 고대 문헌 어디에서도 누룩은 예외 없이 “죄”, 또는 “죄의 영향력” 등 악한 것의 상징으로 사용되었다.

이렇게 누룩이 유대인들의 뼛속까지 새겨져 있는 죄의 상징으로 굳어진 것은 유대인들의 오랜 역사적인 산물일 것이다. 누룩에 대한 유대인들의 부정적인 생각은 아마도 야곱의 가족들이 애굽의 고센 땅으로 이주한 이후부터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애굽으로 이주한 유대인들이 애굽에서 처음 접한 특이한 것들 중 하나가 바로 애굽 인들이 유독 누룩을 많이 사용하다는 것이었다. 유대인들은 포도와 같은 과일로 술을 담그기 때문에, 과일을 발효시키기 위해 누룩을 따로 사용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과일즙 속에 발효에 필요한 당분이 들어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애굽 인들은 곡물로 술을 담그기 때문에, 발효를 위해 누룩이 꼭 필요했다. 그러므로 거대한 애굽 제국의 술 소비는 실로 대단했으며, 특히 애굽 전역에 퍼져 있는 수많은 우상 신전들에서 소비되는 술의 양은 가히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였을 것이다. 그래서 고대 근동에서 누룩을 가장 많이 소비하는 나라는 바로 애굽이었다. 이런 이유로 유대인들은 술과 결부되어 있는 애굽의 우상 숭배와 그들의 타락한 쾌락적인 삶을 보면서, 애굽 인들이 술을 생산할 때 사용하는 누룩이 유대인들에게 애굽의 죄를 상징하는 것으로 인식된 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일일 것이다.

이런 배경을 염두에 두신 하나님은 출애굽 때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누룩 없는 빵을 먹도록 명령하셨다(출12:8/그 밤에 그 고기를 불에 구워 무교병과 쓴 나물과 아울러 먹되).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이 명령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애굽의 죄와 완전히 결별하라는 상징적인 의미가 담긴 명령이라는 말이다. 이스라엘은 출애굽 후에도 매년 유월절이 되면 쓴 나물과 함께 누룩 없는 빵을 먹었으며, 7일 간의 무교절 기간 동안에도 누룩 없는 빵을 먹으며(레23:6/이 달 열 닷샛날은 여호와의 무교절이니 이레 동안 너희는 무교병을 먹을 것이요), 집안 구석구석 죄를 상징하는 묵은 누룩을 미미한 가루까지라도 구석구석 샅샅이 찾아서 없애는 일을 집집마다 대대적으로 시행했다(출12:19/이레 동안은 누룩이 너희 집에서 발견되지 아니하도록 하라 무릇 유교물을 먹는 자는 타국인이든지 본국에서 난 자든지를 막론하고 이스라엘 회중에서 끊어지리니). 이는 일 년 동안 지은 죄를 깨끗하게 처리하는 회개의 상징적인 행위였다.

유대인들에게 누룩은 단연코 죄를 상징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에서도 누룩은 철저하게 배제되었다(레2:4, 5, 11; 6:16-17; 7:12; 8:2, 26; 10:12; 23:6 등을 참고하라). 또 하나님 앞에 두기 위해 성소의 떡 상 위에 항상 진설하는 떡도 당연히 누룩 없는 떡이었다(출25:30/상 위에 진설병을 두어 항상 내 앞에 있게 할지니라). 따라서 예수님이 거대한 밀가루 반죽에 누룩을 넣어서 반죽 전부를 부풀게 한 “누룩 비유”로 참 하나님 나라의 내적 변화를 가르쳤다고 하는 것은 당시의 유대인들에게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헛소리에 불과하다.

왜냐하면 유대인들에게 누룩은 뼛속까지 새겨진 죄의 상징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구약 성경이나 랍비 문헌에서는 두말할 것도 없고, 신약 성경에서조차도 누룩은 언제나 피해야 할 죄의 상징으로 사용되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굳이 밀가루 반죽을 소재로 하나님 나라를 비유하려고 하셨다면 오히려 “어떤 여자가 가루 서 말을 누룩을 넣지 않고 반죽했더니....”라고 하시면서 하나님 나라를 깨끗한 무교병에 비유하셨을 것이다.

결코 예외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정신 나간 사람들이 예외라고 주장하는 마13:33과 눅13:21을 우선 제외하고, 누룩을 죄의 상징으로 사용하신 유대인 예수님과 사도 바울의 예를 아래에서 살펴보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삼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을 주의하라 하시니 ”(마16:6)

“어찌 내 말한 것이 떡에 관함이 아닌 줄을 깨닫지 못하느냐 오직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을 주의하라 하시니 그제서야 제자들이 떡의 누룩이 아니요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교훈을 삼가라고 말씀하신 줄을 깨달으니라”(마16:11-12)

“예수께서 경고하여 이르시되 삼가 바리새인들의 누룩과 헤롯의 누룩을 주의하라 하시니”(막8:15)

“그 동안에 무리 수만 명이 모여 서로 밟힐 만큼 되었더니 예수께서 먼저 제자들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바리새인들의 누룩 곧 외식을 주의하라”(눅12:1)

“너희가 자랑하는 것이 옳지 아니하도다 적은 누룩이 온 덩어리에 퍼지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누룩 없는 자인데 새 덩어리가 되기 위하여 묵은 누룩을 내버리라 우리의 유월절 양 곧 그리스도께서 희생되셨느니라 이러므로 우리가 명절을 지키되 묵은 누룩으로도 말고 악하고 악의에 찬 누룩으로도 말고 누룩이 없이 오직 순전함과 진실함의 떡으로 하자”(고전5:6-8)

“적은 누룩이 온 덩이에 퍼지느니라”(갈5:9)

위에서 보듯이 누룩이 죄를 상징한다는 증거는 구약 성경에서 뿐만 아니라 신약 성경에도 여럿 발견할 수 있다. 또 예수님의 “누룩 비유” 안에서도 누룩이 죄를 상징한다는 것을 합리적으로 유추할 수 있는 결정적인 증거가 있다. 그것은 “가루 서 말 속에 갖다 넣어”에서 “넣어”로 번역된 동사 “έκρυψεν”(에크립센)이다. ‘단순 과거 동사’인 “έκρυψεν”(에크립센)의 원형 “ἐγκρύπτω”(에그크륍토)의 일차적인 의미는 “감추다, 숨기다”이다(수7:21/내가 노략한 물건 중에 시날 산의 아름다운 외투 한 벌과 은 이백 세겔과 그 무게가 오십 세겔 되는 금덩이 하나를 보고 탐내어 가졌나이다 보소서 이제 그 물건들을 내 장막 가운데 땅 속에 감추었는데/LXX: ἐγκέκρυπται/에그크륍타이/ 은은 그 밑에 있나이다 하더라; 암9:3/갈멜 산꼭대기에 숨을지라도/LXX: ἐγκρυβῶσιν/에그크뤼보신/ 내가 거기에서 찾아낼 것이요 내 눈을 피하여 바다 밑에 숨을지라도 내가 거기에서 뱀을 명령하여 물게 할 것이요). 또 “ἐγκρύπτω”(에그크륍토)와 동의어로 쓰이는 동사 “κρύπτω”(크립토)도 “감추다, 숨기다”의 의미이다(마25:25/두려워하여 나가서 당신의 달란트를 땅에 감추어 두었었나이다/ἔκρυψα/에크륍사/ 보소서 당신의 것을 가지셨나이다). 이는 비유를 듣는 사람들이 누룩이 죄를 상징한다는 것을 더욱 분명히 인지할 수 있도록, 예수님은 죄의 속성인 “은밀하게 숨김”을 염두에 두시고 여자가 누룩을 “가루 서 말 속에 갖다” “숨겼다”(έκρυψεν/에크립센)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예수님 당시의 이스라엘은 성전 제사를 비롯해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의 율법에 대한 열심 등 겉으로는 종교적으로나 도덕적으로 상당히 괜찮은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대제사장들을 비롯한 유대 지도자들과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뒤로 몰래 저지르고 있었던, 숨겨 놓은 죄들이 이제는 마치 밀가루 반죽 전부에 누룩이 퍼졌듯이 이스라엘 전역에 퍼져버렸다. 예수님은 이런 이스라엘을 “이르시되 이사야가 너희 외식하는 자에 대하여 잘 예언하였도다 기록하였으되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 하였느니라”(막7:6-7)라고 책망하셨고, 악한 세대로 규정하셨다(눅11:29/무리가 모였을 때에 예수께서 말씀하시되 이 세대는 악한 세대라 표적을 구하되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나니).

더 나아가 예수님은 타락한 하나님 나라, 즉 이스라엘을 향하여 심판을 선언하셨다(눅11:31-32/심판 때에 남방 여왕이 일어나 이 세대 사람을 정죄하리니 이는 그가 솔로몬의 지혜로운 말을 들으려고 땅 끝에서 왔음이거니와 솔로몬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으며 심판 때에 니느웨 사람들이 일어나 이 세대 사람을 정죄하리니 이는 그들이 요나의 전도를 듣고 회개하였음이거니와 요나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느니라).

그리고 예수님은 강도의 소굴이라고 규정(눅19:46/그들에게 이르시되 기록된 바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 되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들었도다 하시니라)하셨던 이스라엘의 심장이라고 할 수 있는 예루살렘 성전을 향해 끝내 멸망을 선언하시고 만다(눅21:6/너희 보는 이것들이 날이 이르면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려지리라). 이스라엘은 이렇게 되 돌이킬 수 없을 만큼 죄에 오염되어 타락하고 말았다. 마치 가루 서 말 속에 숨긴 누룩이 온 밀가루 반죽에 퍼진 것을 다시 되 돌이킬 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

눅 13장의 “누룩 비유”는 예수님이 심판을 선언하실 이스라엘의 내적 상태, 즉 눈에 보이지 않지만 죄로 만연된 이스라엘을 고발하시는 비유이다. 그럼에도 타락한 중세 교회들을 비롯해 이 시대의 세속적인 교회들은 누룩이 밀가루 반죽에 퍼진 것이 하나님 나라의 내적 변화를 의미한다고 엉터리로 해석하면서, 놀랍게도 그것을 자신들에게까지 적용한다.

이것이 놀라운 이유는 예수님이 의도하신 “누룩 비유”의 교훈이 아이러니하게도 죄로 오염된 거대한 교회들의 내적 상태를 그대로 반영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무튼 “누룩 비유”가 참 하나님 나라의 내적 변화를 가르친다는 해석은 참 하나님 나라가 어떤 나라인지 모르는 무지의 소산이며, 비극이다. 그럼에도 타락한 교회들의 이런 무지의 비극은 어쩌면 지극히 당연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왜냐하면 누룩 같은 죄가 만연된 교회들이 자신들이 속해있지 않은 참 하나님 나라를 안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가져 오시는 참 하나님 나라는 밀가루 반죽에 누룩이 온통 퍼진 것과 같은 내적 변화가 사실상 필요 없는 나라이다. 왜냐하면 참 하나님 나라는 처음부터 새 옷이며(눅5:36/또 비유하여 이르시되 새 옷에서 한 조각을 찢어 낡은 옷에 붙이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새 옷을 찢을 뿐이요 또 새 옷에서 찢은 조각이 낡은 것에 어울리지 아니하리라), 처음부터 새 포도주이기 때문이다(눅5:37/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새 포도주가 부대를 터뜨려 포도주가 쏟아지고 부대도 못쓰게 되리라).

다시 말하면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참 하나님 나라는 처음부터 성령으로 거듭난, 즉 새롭게 변화된 하나님의 자녀들의 공동체이기 때문이다(고후5:17/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그럼에도 참 하나님 나라의 변화에 대한 지적이 굳이 필요하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자녀들의 신앙 성장으로 인한 변화일 것이다. 그러나 이 변화는 개인에 따라 저마다 다른 변화들이다. 많이 변화된 자들이 있는 반면에 아직 간난 아이와 같이 신앙적으로 한참 미숙한 자들도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하면 참 하나님 나라에 내적 변화가 설령 있다고 하더라도, 그 변화는 결코 누룩이 밀가루 반죽 전체에 고르게 퍼지듯이 일률적일 수 없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합리적인 관점에서도 “누룩 비유”를 하나님 나라의 내적 변화로 이해하는 것은 전혀 타당하지 않는 무지의 소치이다.
 

글을 마치며

유대인들이 누룩을 죄의 상징으로 오래 동안 거부감 없이 받아들인 이유는 그것이 오랜 전통으로 인해 자신들의 몸에 벤 탓도 있겠지만, 또 ‘누룩’의 성질이 ‘죄’의 성질과 너무나도 유사하기 때문인 것도 크게 한 몫 했을 것이다. ‘누룩’은 아주 적은 양으로도 엄청난 양의 밀가루 반죽에 소리 없이, 빨리 전체에 다 퍼져버린다.

거기에다 누룩이 퍼진 밀가루 반죽은 부풀어 올라서 처음보다 대단히 더 커지며, 겉은 팽팽해져서 윤이 나며, 그러므로 보기에도 좋다. 뿐만 아니라 누룩으로 부풀린 반죽으로 만든 빵은 무교병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부드럽고 맛도 좋다. 그러나 누룩이 들어간 빵은 소리 없이, 또 빨리 부패하는 특징이 있다. 이 모든 것이 ‘죄’의 성질과 너무나도 유사하며, 죄로 오염된 이 시대의 타락한 교회들의 겉과 속의 모습과도 너무나도 유사하다.

따라서 이런 유대인들의 누룩에 대한 정서를 염두에 둔다면, 이야기의 천재이신 예수님은 유대인의 정서 속에 강력한 죄의 상징으로 굳어진 누룩을 소재로, 참 하나님 나라의 비유를 말씀하셨을 리는 결코 없다. 물론 그러실 리는 없겠지만, 만약 예수님이 하나님 나라의 내적 변화를 가르치려고 비유를 말씀하셨다면, 주제 넘는 일이지만 필자의 상상을 동원한다면, “한 여인이 큰 항아리에 물을 가득 담고 거기에 포도주 한 병을 갖다 부었느니라. 포도주는 곧 항아리의 물 전체에 아름답게 퍼졌느니라”라고 말씀하셨을 것 같다.

“너희는 누룩 없는 자인데 새 덩어리가 되기 위하여 묵은 누룩을 내버리라 우리의 유월절 양 곧 그리스도께서 희생되셨느니라”(고전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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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창모 목사는 죽음에 이르는 병에 걸린 한국 교회를 신물 나게 체험하며 갈등하다 하나님을 향해 살아 있는 교회를 꿈꾸며 1999년 김천에서 ‘제자들 경배와 찬양교회’를 개척하였다. 이창모 목사는 한국교회를 죽음에 이르게 한 병이 단지 성공주의, 황금만능주의, 도덕적 윤리적 타락 등이 아니고 이미 한국교회에 만연된 잘못된 신학에 있음을 확신하고서 무엇이 바른믿음인지 신학적으로 깊이 고민하는 목사이다. 이창모 목사는 자신이 중2때 수련회에서 방언을 받았고, 대부분의 목사들이 그것을 ‘영의 기도의 언어’라고 가르치므로 의심없이 수 십년 동안 옹알거리는 방언현상으로 기도(?)하였던 대표적인 방언기도자였다. 김우현, 김동수 등이 저술한 거짓 방언을 미화하는 한심한 서적들을 접한 후 방언에 관한 깊은 신학적인 성찰을 시작하게 되었고, 결국 오늘 날 방언이라고 알려진 소리현상과 성경의 참된 방언은 무관하다는 사실을 확신하게되었다. 이전의 자신처럼 방언으로 기도한다고 착각하고 있는 다른 목회자들과 신자들을 진정한 복음으로 돌이키기 위해 <방언, 그 불편한 진실>(밴드오부퓨리탄,2014)을 출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