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정성우 목사(이후 정성우)의 책 ‘청교도 준비교리란 무엇인가’의 6장을 살펴보도록 하자. 정성우는 6장에서 종교개혁자 칼빈이 <기독교강요>에서 마치 율법이 죄인의 구원하는 과정에서 아주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주장한 것처럼 말하였다.

정성우의 준비교리(회심준비론)의 핵심은 구원을 위해 그리스도의 은혜의 복음보다 죄를 깨닫게 하는 구약의 율법을 먼저 선포해야 한다는 것이다. 죄인이 구원을 받으려면 먼저 죄에 대한 자각이 일어나야 하는데, 성령께서 구약의 율법을 이용하여 그 일을 하신다고 정성우는 주장한다. 

정성우가 칼빈의 <기독교강요>를 인용하는 이유는 칼빈도 자신과 같은 사상을 가지고 있었다고 주장하려는 것이다. 과연 칼빈이 <기독교강요>에서 그런 내용을 말하였을까? 칼빈도 죄인의 구원을 위해 율법이 먼저 선포되어 죄의 자각을 일으켜야 하나님이 복음으로 그 영혼을 구원하신다고 믿었을까?

정성우는 자신의 회심준비론이 칼빈과 종교개혁자들의 율법의 3용도 사상과 같은 내용이라고 자주 주장하였다. 정성우는 6장에서 칼빈의 말들을 악용하기 위해 '율법의 3용도'를 또 말하였다. 

“칼빈의 <기독교강요> 2권 7장 6-8, 10-13절에서 율법의 3용도를 다룬 것을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정성우, 74)

정성우는 <기독교강요> 2권 7장에서 율법의 기능에 대해 자신과 견해가 같은 칼빈의 말들이 많이 나온다고 이와 같이 말했다. 그리고 율법의 용도에 대한 칼빈의 말들을 장황하게 인용하였다. 얼른 보면 정말 칼빈과 정성우의 율법의 기능에 대한 견해가 같은 것 같다. 
 

 

그래서 필자가 <기독교강요> 2권 7장을 읽어 보았다. 2권 7장의 제목부터 정성우가 주장하는 회심준비론과 맞아 보이지 않는다. 7장의 제목을 그대로 여기에 옮겨 보겠다.

“제 7 장: 율법을 주신 목적은 구약 백성을 그것으로 구속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재림 때까지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의 희망을 주기 위해서이다.” (기독교강요, 2.7장의 제목)

우리가 읽고 있는 <기독교강요> 7장의 제목을 칼빈이 직접 만들었는지, 칼빈의 신학에 정통한 후대의 연구자가 만들었는지 필자는 모른다. 누구이건 간에, <기독교강요> 7장 전체의 내용과 어울리는 제목을 만들었을 것이다. 정성우가 자신의 주장을 강화시키기 위해 많이 인용하는 <기독교강요> 7장은 제목에서부터 율법이 구원받지 못한 불신자에게 작용하여 구원을 준비시킨다는 회심준비론과 거리가 멀다.

그리고 필자는 7장 1절의 첫 문단을 유심히 보았다. 첫 문단부터 율법에 대한 칼빈의 이해가 잘 드러나 있다. 

아브라함이 죽은 후 약 400년이 지난 후에 율법이 첨가되었다(갈 3:17 참조). 우리가 지금까지 살핀 증언들이 끊임없이 뒤를 이어온 것을 보면, 율법을 주신 것은 택하신 백성을 그리스도에게서 분리시키려는 뜻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오히려 그리스도의 출현시까지 그들의 마음을 준비하며, 또한 그리스도에 대한 갈망을 일으키며 그들의 기대를 강화해서, 오래 지체되더라도 지치지 않게 하시려는 것이었다.” (기독교강요, 2.7.1)

칼빈은 아브라함이 죽고 400년이 지났을 때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셨다고 가르쳤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출애굽 후 시내산 언약 때 중재자 모세를 통해 율법이 주어진 것으로 칼빈은 이해하였다. 

정성우의 회심준비론은 죄인이 그리스도의 죄용서 복음을 먼저 들으면 구원을 얻을 수 없다고 한다. 먼저 죄를 지적하는 구약의 율법을 선포하여 성령이 사람에게 죄에 대한 자각, 즉 영적각성을 일으켜야 한다고 한다. 하나님께서 그것을 보시고 그리스도의 복음을 이용하여 구원을 일으키신다고 정성우는 주장한다.

그러나 <기독교강요>에 의하면, 칼빈은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 죄를 자각하게 만드는 율법을 알지도 못한 상태에서 그냥 하나님을 바르게 믿어서 구원을 얻었다고 보았다. 정성우가 의지하는 칼빈의 <기독교강요>에 의하면 분명히 그렇다. 칼빈은 율법이 아브라함보다 400년 후에 역사 속으로 들어왔다고 가르쳤다.

정성우에 의하면 죄를 지적하는 율법을 몰랐던 아브라함이 얻은 구원은 후로꾸이다. 그의 아들이며 계승자인 이삭의 구원도 후로꾸이고, 이삭의 아들이며 계승자인 야곱의 구원도 후로꾸이고, 야곱의 아들이며 계승자인 요셉과 다른 형제들의 구원도 후로꾸이이다. 모두 죄를 지적하는 율법을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얻은 칭의를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칭의(구원)의 Sample로 제시하는 사도 바울의 로마서도 호로꾸 복음을 전하는 책이다.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냐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진 바 되었느니라.” (롬 4:3)

정성우의 주장대로 따라가면 이처럼 성경의 복음이 후로꾸 복음으로 변한다. 칼빈은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 죄를 지적하는 율법을 알지 못하였고, 오직 믿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 얻었다고 바르게 이해하였다. 그런데 정성우는 율법의 죄를 지적하는 기능을 거쳐야 구원에 이르게 된다는 자신의 거짓 주장을 위해 칼빈의 대표작 <기독교강요>를 이용하였다.   

그런데 정성우가 인용하는 <기독교강요> 2권 7장 절의 제목만 보아도 율법이 구원의 자격을 만들어 주는 것이 아니라는 칼빈의 이해가 선명하게 드러난다. 

“3. 율법은 우리에게 변명의 여지를 없게 만들며 절망 상태에 빠뜨린다.” (기독교강요 2권 7장 3절의 제목)

여기서 말하는 ‘우리’가 누구인가? 칼빈 자신과 그의 독자들, 즉 종교개혁 시대의 그리스도인들이다. 칼빈에게 율법은 불신자를 구원하는 하나님의 수단이 아니었다. 칼빈은 율법을 하나님이 은혜로 자기 백성으로 삼은 사람들을 더 온전하게 만드는 수단으로 이해하였다. 정성우는 더 이상 칼빈의 글을 악용하지 말아야 한다. 

구약시대에도 율법은 그런 용도가 아니었다. 하나님께서 구원 받지 못한 사람들에게 율법을 주시고, “이것을 지켜서 구원의 자격을 만들어 봐라!”라고 하신 적이 한번이라도 있었는가? 구약 시대에도 구원은 율법과 눈꼽만큼도 직접 상관이 없었다.

그러면 구약시대에 율법은 무슨 기능을 했었는가? 하나님이 은혜로 구원하여 낸 백성들이 진정 하나님 백성답게 사는 것이 무엇인지를 가르쳤다. 이미 은혜로 구원받은 백성들이 땅에서 더 복을 누리며 살게 만들었다. 반대로 율법을 지키지 않으면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고 범죄하는 것이니, 하나님의 징계를 초래하기도 했다.

우리 모두 정성우에게 물어보자! 구약 시대에도 율법이 구원과 직접 상관이 없었는데, 왜 지금 구원을 받기 위해 먼저 율법을 듣고 배우고 실천해야 하는가? 마치 칼빈도 자신과 같은 이단성을 가졌던 것처럼 <기독교강요>를 장황하게 이용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필자가 정성우에게 중요한 질문을 보내니 답해보기 바란다. 칼빈은 율법이 하나님 백성에게 더 온전한 신앙과 삶을 살도록 주어진 것으로 보았는가? 하나님을 모르는 불신자들에게 구원의 자격을 주는 것으로 보았는가? 율법이 하나님 백성을 온전케 하는 기능을 수행한다고 칼빈이 가르쳤다면, 더 이상 자신의 <회심준비론>을 위해 칼빈의 말을 악용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정성우에게 좋은 숙제를 내 주고 싶다. <기독교강요> 2권 7장 3절에 나오는 다음의 내용에 대해 연구하면 신학박사 학위 정도는 거져먹기일 것으로 생각된다.

주께서 약속하신대로, 율법을 완전히 준수하면 그 보상으로서 영원한 구원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우리는 마땅히 다음의 문제 곧 우리가 완전히 복종할 수 있는지와 그 공로로 확실히 보상을 받을 수 있는지를 검토해 보아야 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율법을 준수하는 자에게 영생이라는 보상이 제시되어 있다는 것을 알더라도, 만일 우리가 이 길을 취함으로써 영생을 얻는다는 것이 분명하지 않다면 아무런 의미가 없겠기 때문이다.” (기독교강요, 2.7.3)

칼빈은 <기독교강요>에서 이처럼 율법을 완벽하게 준수하면 영원한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말했다. 필자는 칼빈의 이 말이 옳지 않다고 생각한다. 또는 칼빈의 말의 진의를 모르고 있다고 생각한다. 단지 이론상으로도 안되는 말이라고 생각한다.

모든 사람은 아담 안에서 하나님께 반역했고, 하나님께 반역한 자는 죽음으로 죗값을 갚아야 하기 때문이다. 아무리 율법을 잘 지켜도 반드시 반역죗에 대한 책임으로 죽음에 처해져야 하니, 제 아무리 율법준수를 잘해도 그것으로 영생을 얻지 못한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그런데 왜 칼빈은 그렇게 말했을까? 번역의 문제인지, 칼빈의 표현의 특성의 문제인지 ... 정성우가 부질없는 회심준비론 주장하지 말고, 칼빈의 이런 표현의 내막을 밝히면 기독교 신앙에 대한 인류의 이해를 넓히는데 크게 공헌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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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이철 목사는 2004년부터 현재까지 미국 미시간 주 ‘앤아버 반석장로교회’의 담임목사이고 거짓 신학의 ‘견고한 진’(고후10:4)을 무너뜨리기 위해 시작된 신학신문 <바른믿음>의 대표이다.
총신대학(B.A 졸업), 총신대학 신학대학원(M.Div Eqiuv.졸업), 아세아연합신학대학 대학원(Th.M 졸업), Liberty Theological Seminary(S.T.M 졸업), Fuller Theological Seminary(Th.M 수학), Puritan Reformed Theological Seminary(Th.M 수학), Liberty Theological Seminary(D.Min 수학), 남아공신학대학원(South African Theological Seminary, Ph.D)에서 연구하였고, 현재 University of Pretoria(Ph.D)에서 연구하고 있다.
저서로는 「신사도 운동에 빠진 교회」, 「제3의 물결에 빠진 교회」, 「가짜 성령세례에 빠진 교회」, 「피터 와그너의 신사도운동 Story」, 「한 눈에 들어오는 청교도 개혁운동」, 「능동적 순종에 빠진 교회」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