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창모 목사의 성경 오역(誤譯), 오석(誤釋) 바로잡기(28)

 

글을 시작하며

마13:31-33과 눅13:18-21에 기록된 “겨자씨와 누룩 비유”의 전통적인 해석은 대체로 다음과 같을 것이다.

“겨자씨 비유”는 하나님 나라의 시작은 겨자씨처럼 작고 미미하나 나중에는 큰 겨자 나무에 새들이 깃들만큼 창대해진다는 것, 즉 하나님 나라의 외적 성장을 가르치며, “누룩 비유”는 하나님 나라의 내적 변화를 가르친다.

이에 대해 이동원 목사와 찰스 스윈돌 목사는 아래와 같은 예를 들었다(본 글 <1>에서는 “겨자씨 비유”에 대해서만 다루고, “누룩 비유”는 다음 <2>에서 다룰 것이다).

“12명의 제자들, 머지않아 그들은 70명의 제자 군단을 이루었습니다. 그들은 머지않아 500명이 되었습니다. 500명은 어느 날 3000명으로 늘어납니다. 그들은 곧 이어 5000명이 됩니다. -(중략)- 곧 이어 그들은 2만 명, 3만 명으로 불어나기 시작합니다. 마침내 거대한 로마제국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앞에 무릎을 꿇고 넘어지는 역사의 고동 소리를 지켜보시기 바랍니다.” -(이동원, “비유로 말씀하시더라”, p. 66)

“예수님이 부활하신 지 40년이 채 못 되어서 복음은 모든 로마제국의 대도시의 심장부까지 전파되었고, 이들 대도시들을 연결하는 통상로를 따라서 수많은 마을들과 작은 촌락들에까지도 전파되었으며, 2세기 말쯤에는 알려진 세계 전역으로 퍼졌다.” -(Charles Swindoll, “New Testament Insights, LUCK”, pp. 444-445)

위의 예들은 다 역사적인 사실임에는 틀림없다. 그러나 문제는 과연 예수님의 “겨자씨 비유”가 역사 속에서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하나님 나라의 외적 성장을 가르치고 있는가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는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가르치셨음에도 불구하고(눅17:20/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의 나라가 어느 때에 임하나이까 묻거늘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겨자씨 비유”로는 눈에 보이는 하나님 나라의 외적 성장을 가르치려고 하셨을까 하는 것이다.

그러나 참 하나님 나라의 성장이 설령 가시적이라 할지라도(그러나 결코 가시적일 수 없다. 왜냐하면 참 하나님 나라는 결코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적어도 마13:31-32과 눅13:18-19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겨자씨 비유”는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참 하나님 나라의 외적 성장을 가르치는 비유가 결코 아니라는 말이다(막4:30-32의 “겨자씨 비유”는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 나오는 “겨자씨 비유”와는 전후문맥 안에서만 보더라도 그 의미가 전혀 다르다. 그래서 마가복음에서 예수님은 “누룩 비유” 없이 “겨자씨 비유”만으로 하나님 나라를 가르치셨던 것이다. 막4:30-32의 “겨자씨 비유”는 나중에 기회가 되면 상세히 다루도록 하겠다).

“겨자씨와 누룩 비유”의 전통적인 해석이 잘못되었음을 처음 깨닫고 지적한 자는, 필자가 알기에는, Arno C. Gaebelein(1861-1945)이다. 그는 마13장에 기록된 “겨자씨와 누룩 비유”는 정상적인 하나님 나라의 비유가 아니라, 교회의 비정상적이며 유해한 관료주의적 팽창과 누룩으로 표현된 죄의 주입을 통해 교회를 붕괴시키려는 사탄의 역사를 가르치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이 모든 비유들은 악의 성장을 보여주며, 우리가 살고 있는 전 시대에 걸쳐 적용되는 예언이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그의 주장은 거의 100%에 가까운 지지를 받는 “겨자씨와 누룩 비유”의 전통적인 해석에 눌려 이내 묻혀 버렸고, 나중에 James M. Boice(1938-2000)에 의해 또 다시 주장되었지만, 아무도 그것을 주목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겨자씨와 누룩 비유”는 하나님 나라의 외적 성장과 내적 변화를 가르치는 비유라는 것을 아무도 의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물론 지금도 여전히 이 비유는 하나님 나라의 외적 성장과 내적 변화를 가르치는 비유임을 아무도 의심하지 않는다.

그러면 Arno C. Gaebelein은 무슨 근거로 이 비유에 나오는 거대한 겨자 나무와 누룩이 퍼진 반죽 덩이를 긍정적인 하나님 나라의 비유로 보지 않고 비정상적으로 커진, 그러나 내부는 전체가 죄로 오염된 타락한 교회로 보았는가? Arno C. Gaebelein의 주장을 받아들인 James M. Boice가 그의 책 “The Parables of Jesus”에서 말한 것들 중에 우선 “겨자씨의 비유”에 관한 것만 요약하면 아래와 같다.
 

마13:31-32의 “겨자씨 비유”에 대한 James M. Boice의 견해

James M. Boice가 마13장에 기록된 “겨자씨 비유”가 정상적인 하나님 나라를 가르치는 비유가 아니라 비정상적으로 커져버린 타락한 교회를 가르치는 비유로 본 까닭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겨자씨가 나무로까지 자라는 것은 비정상적인 현상이다. 만약 예수께서 성장하는 교회를 가르치려고 하셨으면, 도토리가 떡갈나무로 자라는 비유나 백향목 씨가 레바논의 크나큰 나무 중 하나로 자라는 비유를 사용했을 것이다.

둘째, 마13장의 전후문맥에서 보면, 겨자나무에 깃들이는 새(32절)는 이미 첫 번째의 씨 뿌리는 비유에서 길가에 떨어진 씨를 먹어버린 새를 악한 자(마귀)로 말하고 있다. 바로 앞에서 마귀로 비유된 새가 조금 뒤 겨자씨 비유에서 전혀 반대의 의미로 사용되었다는 것은 아무래도 이상하다. 또 곡식 가운데 가라지를 뿌리는 마귀의 역사에 관한 비유(24-30절)와 그 비유에 대한 예수님의 설명(36-43절) 사이에 겨자씨와 누룩 비유(31-33절)가, 이 비유에 대한 아무런 설명 없이 끼어있다는 것은 겨자씨와 누룩 비유(31-33절)가 곡식 가운데 가라지를 뿌리는 마귀의 역사에 관한 비유(24-30절)와 동일한 성격의 비유라는 것을 말해준다.

필자는 “겨자씨 비유”에 대한 Arno C. Gaebelein과 James M. Boice의 주장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이들의 주장처럼 예수님의 “겨자씨 비유”는 참 하나님 나라의 외적 성장을 가르치는 비유가 아니라, 예수님 당시에 눈에 보이는 이스라엘이라고 하는 하나님 나라가 비정상적인 화려함과 거대함에 매몰된 참담한 상태를 고발하는 예수님의 슬픈 비유임에 틀림없다.
 

눅13:18-19의 “겨자씨 비유”에 대한 필자의 견해

“마치 사람이 자기 채소밭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 같으니 자라 나무가 되어 공중의 새들이 그 가지에 깃들였느니라”(눅13:19)

누가복음의 “겨자씨 비유”도 예수님이 의도하신 대로 바르게 이해하려면, 마태복음의 “겨자씨 비유”처럼 먼저 전후문맥 속에서 이 비유의 의미를 파악해야 한다. 전후문맥 속에서의 본문의 “겨자씨 비유”는 이 비유 앞에 예수님이 말씀하신 잎은 무성하나 열매가 없는 “무화과나무 비유”(눅13:6-9)의 속편이라고 할 수 있다. 결론부터 미리 말하면, “겨자씨 비유”는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 비유”와 동일하게 이스라엘이라고 하는 겉만 그럴 듯한 타락한 하나님 나라를 책망하시는 비유라는 말이다. 이는 “전후문맥에서”와 “겨자씨 비유”의 이야기 속에서 분명하게 나타난다.
 

1. 전후문맥에서

예수님은 “겨자씨와 누룩 비유”를 말씀하시기 전에, 눅13:2-5에서 회개하지 않는 이스라엘을 책망하시면서, 그들을 향해 만약 회개하지 않으면 망하게 될 것이라고 경고하셨다(눅13:5/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하지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 그리고 이어서 “이에 비유로 말씀하시되”(눅13:6)를 시작으로, 예수님은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의 비유”로 회개하지 않는 이스라엘을 책망하셨다(눅13:6-9).

그 후에 예수님은 안식일에 한 회당에서 18년 동안 귀신들려 꼬부라져서 조금도 펴지 못하는 한 여자를 고쳐주셨다.(눅13:10-13). 이때 회당장은 분을 내어 무리를 향하여 예수님이 안식일 어겼다고 비난한다(눅13;14/회당장이 예수께서 안식일에 병 고치시는 것을 분 내어 무리에게 이르되 일할 날이 엿새가 있으니 그 동안에 와서 고침을 받을 것이요 안식일에는 하지 말 것이니라 하거늘).

이에 대해 예수님은 회당장을 비롯한 무리에게 “외식하는 자들아”라고 책망하시고 나서, 안식일에 18년 동안 귀신들려 꼬부라져서 조금도 펴지 못하는 한 여자를 고쳐주신 것이 안식일을 어긴 것이 아님을, 그들이 안식일에 자신들의 소나 나귀에 대한 행위와 비교하시면서 말씀하신다(눅13:15-16). 그러고 나서 예수님은 “그러므로 예수께서 이르시되 하나님의 나라가 무엇과 같을까 내가 무엇으로 비교할까”(눅13:18)라는 말씀을 시작으로, 율법을 잘 지키는 것처럼 위선을 떠는 회당장으로 대변되는 지금의 이스라엘의 참혹한 상태를 “겨자씨와 누룩 비유”로 말씀하신다. 예수님은 겉만 크고 화려한 겨자 나무 같은 이스라엘을, 그러나 그 속은 누룩이 온 덩이에 퍼진 반죽처럼 죄로 만연된 이스라엘을 “겨자씨와 누룩 비유”(눅13:18-22)로 폭로하신 것이다.

예수님은 계속해서 눅13:28(너희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모든 선지자는 하나님 나라에 있고 오직 너희는 밖에 쫓겨난 것을 볼 때에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리라)에서, 또 눅13:34-35(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제 새끼를 날개 아래에 모음 같이 내가 너희의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하지 아니하였도다 보라 너희 집이 황폐하여 버린바 되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를 찬송하리로다 할 때까지는 나를 보지 못하리라 하시니라)에서 이스라엘을 향해 심판의 경고를 계속 발하신다.

이렇게 눅13장 전체의 전후문맥에서 볼 때(그 이전과 그 이후를 포함해도 마찬가지이다), “겨자씨와 누룩 비유”는 이스라엘이라고 하는 하나님 나라의 부정적인 그 무엇을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비유가 명백하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이스라엘을 향해 엄중한 심판의 경고들을 쏟아내시면서, 그 사이에 전후문맥과 어울리지도 않는 하나님 나라의 외적 성장과 내적 변화를 생뚱맞게 긍정적으로 말씀하셨을 리가 없기 때문이다.
 

2. 비유 속에서

“겨자씨와 누룩 비유”가 타락한 하나님 나라, 즉 당시의 타락한 이스라엘에 대한 고발이라는 증거는 눅13장의 전후문맥에서 뿐만 아니라, “겨자씨 비유” 속에서도 차고 넘친다. 예수님은 “마치 사람이 자기 채소밭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 같으니”로 “겨자씨와 누룩 비유”를 시작하신다(지면 관계로 <1>부에서는 “겨자씨 비유”만 다루고, <2>부에서 “누룩 비유”를 다룰 것이다).

여기서 “채소밭”(κῆπος/케포스)은 거주지 가까이에 있는 정원을 의미한다. 유대인들은 보통 자신의 집 부근에 정원을 만들어 놓고 틈틈이 채소 등을 재배해서 자급자족하거나 시장에 내다 판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겨자씨를 자기 채소밭에 심었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있는 자들은 유대인이라면 누구나 예외 없이 ‘왜 저 사람은 자기 채소밭에 겨자씨를 심지 바보같이? 이 사람, 미친 거 아냐?’라고 하는 의문을 가질 수밖에 없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예수님 당시 겨자는 향신료(양념)와 약재로 쓰였다. 그러나 겨자는 유대인들에게는 매일 써야하는 필수 소비재가 아니어서 겨자를 굳이 재배할 필요가 없었다. 왜냐하면 들판에 널려 있는 것이 겨자 풀이었기 때문이다. 1년생 잡풀인 겨자는 번식력이 대단히 강해서 농부들은 오히려 자기 밭이나 채소밭에 겨자 풀이 침범해 들어오지 못하도록 신경을 쓴다. 만약 어쩌다가 겨자풀이 자기 채소밭을 침범해 자라기 시작하면, 그 채소밭은 못쓰게 되고 만다. 왜냐하면 겨자 풀의 왕성한 생장으로 인해, 그 채소밭에서는 채소가 제대로 자랄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당시의 유대인들 중에는 자기 채소밭에 겨자씨를 일부러 심는 바보는 절대로 없다. 만약 있다면 예수님의 “겨자씨 비유”에 등장하는 이 사람밖에 없을 것이다(누가복음과 의미가 다른 마가복음의 “겨자씨 비유”에서는 단순히 “땅에 심길 때에는”이라고만 되어 있다).

또 유대인이 대단히 무겁게 여기는 율법에 비추어 보아도 자기 채소밭에 겨자씨를 심은 유대인은 결코 없을 것이다(레19:19/너희는 내 규례를 지킬지어다 네 가축을 다른 종류와 교미시키지 말며 네 밭에 두 종자를 섞어 뿌리지 말며 두 재료로 직조한 옷을 입지 말지며). 율법에 의하면 채소밭에는 채소만 심어서 재배해야 한다. 채소가 자라는 채소밭에 겨자씨를 심어 겨자 풀을 키우는 것은 명백하게 율법을 어기는 일이다. 그러므로 “겨자씨 비유”에서 자기 채소밭에 겨자씨를 심은 사람은 유대인으로서 정상적인 사람이 아님에 틀림없다.

아무튼 이 사람은 자기 채소밭을 망치면서까지, 또 율법을 어기면서까지 겨자씨를 자기 채소밭에 심었다. 왜 그랬을까? 이 사람이 정신 이상자가 아니라면, 아마도 자신의 채소밭이 망쳐지는 한이 있더라도, 또 율법을 어기는 한이 있더라도 우선 빠른 시간 내에 자신의 채소밭을 대단히 웅장하고 화려하게 보이도록 만들고 싶어서였을 것이다.

겨자 풀은 번식력과 아울러 생장 속도도 대단히 빠르기 때문에 짧은 시간에 금방 크게 자란다. 보통은 3-5m, 대단히 크게 자라는 것은 8m까지도 자란다고 한다. 따라서 이 사람이 자기 채소밭을 망치면서까지, 또 율법을 어기면서까지 겨자씨를 자기 채소밭에 뿌린 까닭은, 빠른 시간 내에 자신의 채소밭을 웅장하고 화려하게 보이도록 만들기 위한 목적 때문이었다는 것 말고는 달리 설명할 길이 없다.

예수님 당시에 예루살렘 성전을 중심한 대제사장들과 유대 지도자들은 빠른 시간 내에 예루살렘의 겉모습과 이로 인한 자기 자신의 지위를 화려하고 웅장하게 꾸며내기 위해 부당하게 수많은 돈을 착복했다. 예루살렘 성전 당국은 절기 때 제사 제물에 쓸 짐승을 성전에서 팔면서 턱없는 폭리를 취했으며(예수님 당시에 가난한 사람들의 제물인 비둘기 한 마리를 염소 한 마리 값에 팔았다고 한다. 그래서 가난한 사람들이 집에서 비둘기를 준비해 오면, 제사장들이 고의적으로 흠 없는 제물로서의 부적격 판정을 내렸기 때문에, 가난한 자들은 어쩔 수 없이 성전 뜰에서 파는 값비싼 비둘기를 사야 했다고 한다. 이것 외에도 예루살렘 성전의 악행은 수두룩하다. 그래서 예수님이 예루살렘 성전을 가리켜 강도의 소굴이라고 책망하신 것은 결코 과장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구제 헌금을 내기도 하고, 또 제사를 잘 드리는 척, 율법을 잘 지키는 척, 의로운 척 했다.

이들은 겉으로는 겨자 나무처럼 대단히 웅장하고 화려한 위선으로 일관하면서도(겨자씨 비유), 밀가루 반죽 속에서 몰래 누룩이 퍼지듯 속으로는 율법을 밥 먹듯이 어기면서(누룩 비유), 이스라엘이라고 하는 하나님 나라의 채소밭을 쓸모없게 망치고 있었던 것이다. 예수께서 “겨자씨 비유”에 “누룩 비유”를 더하신 것도 이 때문이었다(따라서 마가복음에 나오는 “누룩 비유”가 없는“겨자씨 비유”는 누가복음과 마태복음의 “겨자씨 비유”와는 달리 해석해야 한다).

예수님은 당시의 겉만 화려하고 웅장한 위선적인 이스라엘의 모습을 “자라 나무가 되어 공중의 새들이 그 가지에 깃들였느니라”로 표현하신다. 예수님이 1년생 겨자 풀을 굳이 겨자 나무로 묘사하신 것은 단4:11-12(그 나무가 자라서 견고하여지고 그 높이는 하늘에 닿았으니 그 모양이 땅 끝에서도 보이겠고 그 잎사귀는 아름답고 그 열매는 많아서 만민의 먹을 것이 될 만하고 들짐승이 그 그늘에 있으며 공중에 나는 새는 그 가지에 깃들이고 육체를 가진 모든 것이 거기에서 먹을 것을 얻더라)에서 나무로 묘사된 바벨론 제국의 이미지를 사용하시려고 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바벨론은 거대한 나무이지만 이스라엘은 겉은 거대한 나무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1년생 잡풀에 불과하다. 예수께서 1년생 겨자 풀을 겨자 나무라고 묘사하신 것은 바벨론 제국의 나무처럼 겉모습만 그럴듯하게 흉내 내고 있는, 그러나 1년생 잡풀에 불과한 이스라엘의 위선적인 진실을 지적하시기 위함이었다.

단4:11-12에서 하늘에 닿은 엄청난 크기의 나무는 바벨론 제국을 가리키며, 그 가지에 깃들인 새들은 바벨론 제국에 빌붙어 살고 있는 주변국의 열왕들, 부자들, 권세자들을 가리킨다. 새들이 깃들이고 있는 거대한 나무의 평화스러운 모습은 거대한 바벨론 제국이 불의한 무력으로 만들어낸 거짓 평화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이 평화는 하나님의 심판으로 인해 곧 사라지고 말 것이다.

그럼에도 당시의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은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이스라엘이 아니라, 예루살렘 성전을 중심으로 자신들이 다스리는 바벨론 제국을 흉내 내며 엄청난 크기의 겨자 나무를 가꾸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이스라엘도 예루살렘 성전을 중심으로 그 가지들에 온갖 잡새들(빌라도, 헤롯 왕, 장로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 매국적인 부자들과 권력자들)이 깃들이며 평화스럽게 공존하고 있는 것이다. 만약 당시의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참 하나님 나라였다면 빌라도, 헤롯 왕, 장로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 매국적인 부자들과 권력자들이 예루살렘 성전을 중심한 유대 당국자들과 평화스럽게 공존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 당시의 이스라엘이라고 하는 하나님 나라는 참 하나님 나라가 아니라 거대한 겨자 나무처럼 화려하고 웅장하게 보이지만, 그럼에도 “누룩 비유”에서처럼 이스라엘이라고 하는 커다란 밀가루 반죽 덩이에 누룩 같은 죄가 구석구석 완전히 퍼져버린 타락한 하나님 나라에 불과했다. 이렇게 “겨자씨와 누룩 비유”로 설명되는 타락한 이스라엘은 당연히 잡새 같은 불법적인 권세자들과는 평화롭게 공존하면서도, 정작 하나님 나라의 주인이신 예수님과는 끊임없이 불협화음을 일으키며, 끊임없이 자신들을 비판하시는 예수님께 끊임없이 비수를 들이댔던 것이다.

오늘 이 시대의 타락한 교회들을 보라. 비정상적으로 커진 겨자 나무처럼 너무 크고 화려하지 않는가? 이런 교회에는 그 규모가 대단히 크기 때문에 거기서 어떤 이익을 얻으려고 반드시 온갖 잡새를 모여들고 깃들인다. 특히 선거철이 되면 겨자 나무가 크면 클수록 더욱 많은 잡새들이 날아온다. 그러나 타락한 교회들은 날아든 잡새들을 위해 둘러서서 정성껏 안수기도도 해주고, 이런 잡새들이 교회에 많이 깃들이고 있는 것을 오히려 자랑하기까지 한다. “우리 교회는 대통령이 출석해요. 우리 교회에 국회의원들이 몇 명이나 출석하시는 줄 아세요? 우리 교회에는 판검사, 변호사만 200명이 넘어요”라고 하면서 말이다(물론 교회에 출석하는 대통령들을 비롯한 상류층들이 다 그렇다는 것은 아니다. 단지 이런 자들 중에 세속적인 이익을 위해 커다란 겨자 나무 같은 교회를 골라서 그 가지에 깃들이고 있는 잡새들이 대단히 많다는 것뿐이다).

그러나 겨자 나무는 1년생이므로 아무리 크게 자란다 할지라도 1년 동안 자라다가 사라지는 잡풀에 불과하며, 결코 진짜 나무가 될 수는 없다. 그러므로 나무가 아닌 겨자 풀의 가지가 아무리 크고 굵게 자랐다할지라도 그 속이 비어있어 강도가 약하기 때문에 실제로는 새들이 겨자 풀 가지에는 깃들이지 않는다고 한다. 또 설령 정신 나간 새들이 겨자 풀 가지에 깃들였다할지라도 겨자 풀은 1년생 잡풀이므로 깃들인 둥지의 수명은 기껏해야 1년밖에 되지 않는다.

또 겨자 나무가 있는 채소밭은 사람이 사는 집 근처에 있고, 늘 사람들이 들락거리기 때문에, 설령 겨자 풀의 가지가 나무처럼 튼튼하더라도 사람 가까이에 있는 채소밭에는 새들이 결코 깃들이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대단히 위험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겨자씨 비유”에서 겨자 나무 가지에 깃들인 새들은 자기 채소밭에 겨자씨를 심은 사람만큼이나 정상적인 새들이 아님에 틀림없다. 물론 이스라엘을 상징하는 이 겨자 나무는 오래지 않아 로마 제국에 의해 AD 70년에 예루살렘 도성의 파괴로 완전히 무너지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1년이 지나면 사라지는 겨자 풀로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비유했을 리는 결코 없다(다시 말하지만, 마가복음에서 예수님이 하신 “겨자씨 비유”는 눈에 보이지 않지만, 그럼에도 끊임없이 전진과 성장을 계속하는 하나님 나라를 가르치기 위한 비유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죄의 만연을 상징하는 “누룩 비유”를 하지 않으신 것이다.

또 비유의 내용이나 전후문맥을 살펴보면 누가복음과 마태복음의 “겨자씨와 누룩 비유”와는 그 목적과 초점이 전혀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만약 예수님이 비유로 하나님 나라의 외적 성장을 가르치려고 하셨다면, 1년생 잡풀인 겨자 풀이 아니라 오래 동안 생존하며, 또 외관이 장엄하고 위엄이 있는 백향목으로 비유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백향목은 구약 성경에서 하나님 나라를 설명할 때 주로 사용되는 소재였기 때문이다(시92:12-13/의인은 종려나무 같이 번성하며 레바논의 백향목 같이 성장하리로다 이는 여호와의 집에 심겼음이여 우리 하나님의 뜰 안에서 번성하리로다; 시104:16/여호와의 나무에는 물이 흡족함이여 곧 그가 심으신 레바논 백향목들이로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하나님 나라의 외적 성장을 비유로 말씀하시려고 정말로 의도하셨다면, 아마도 “마치 사람이 자기 뒷산에 갖다 심은 작은 백향목 가지 같으니 자라서 거대한 백향목이 되어, 공중의 비둘기들이 그 가지에 깃들였느니라”라고 말씀하셨을 것이다. 그러나 다시 말하지만,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의 외적 성장에 관한 비유는 결코 하지 않으셨을 것이다. 왜냐하면 성경에서 하나님 나라의 궁극적인 웅장함과 거대함은 말하고 있지만, 눈에 보이는 하나님 나라의 외적 성장에 대해서는 어디에서도 말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겨자씨 비유가 참 하나님 나라의 외적 성장을 가르치는 비유가 아니라는 결정적인 증거는 “겨자씨 비유”에서 사용된 동사의 시제에서도 분명하게 나타난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자라 나무가 되어”에서 “자라”로 번역된 “ηὔξησεν”(에윅세센)은 “자라다, 늘어나다” 등의 의미를 가진 동사 “αὐξάνω”(아욱사노)의 ‘단순 과거’이며, “되어”로 번역된 “ἐγένετο”(에게네토)는 “존재하게 되다, 있게 되다, 생기다, ~이 되다” 등의 의미를 가진 동사 “γίνομαι”(기노마이)의 ‘단순 과거’이다. 이는 채소밭에 심은 겨자씨가 이미 다 자라서 이제는 나무가 되었다는 말이다.

또 “새들이 그 가지에 깃들였느니라”에서 “깃들였느니라”로 번역된 “κατεσκήνωσεν”(카테스케노센)도 “살다, 거주하다” 등의 의미를 가진 동사 “κατασκηνόω”(카타스케노오)의 ‘단순 과거’이다. 이는 나무가 된 겨자 풀의 가지에 새들이 이미 깃들였다는 말이다(참고로 “누룩 비유”가 없는 마가복음의 “겨자씨 비유”에서 “자라서”(ἀναβαίνει/아나바이네이), “커지며”(γίνεται μεῖζον/기네타이 메이존), “내니”(ποιεῖ/포이에이) 등의 모든 동사는 ‘현재형’ 동사로 되어있다. 이는 하나님 나라가 눈에 보이지는 않는다 할지라도 지속적으로 계속 전진하고 성장하고 있음을 나타내기 위함이다).

만약 “겨자씨 비유”가 처음에는 겨자씨 한 알 크기의 보잘 것 없는 하나님 나라가 나중에 자라서 엄청나게 커지는 겨자 나무처럼 부흥하는 지상 교회를 가르치는 비유였다면, 예수님은 ‘단순 과거’ 동사를 사용하지 않으시고, ‘미래형’(또는 현재형) 동사를 사용하셔서 “자라 나무가 될 것이며(되고 있으며)”, 또 “새들이 그 가지에 깃들일 것이다(깃들이고 있다)”라고 말씀하셨을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님 당시의 시점에서 볼 때, 미래에 있을 예루살렘 초대교회와 이후의 교회의 외적 성장과 또 화려하고 엄청나게 성장(?)할 중세 교회와 중세 교회보다 더 화려하고 더 커질 현대 교회가 외적으로 성장한 하나님 나라임이 정당화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겨자씨 비유”를 말씀하시면서 ‘현재형’이나 ‘미래형’은 고사하고, ‘미완료 과거’도 아닌 ‘단순 과거’ 동사를 사용하신 까닭은 당시에 타락한 이스라엘이라고 하는 하나님 나라의, 이미 화려하게 커져버린 고착화된 껍데기를 지적하시려고 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중세교회는 하나님의 법을 어기면서, 헌금을 면죄부 등으로 사기치면서, 크고 화려하게 키운 교회의 외적인 껍데기를 예수님의 “겨자씨 비유”로 합리화시키기를 좋아했다. 이는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성장만을 추구하는 이 시대의 교회들에서도 다르지 않다. 그러나 중세교회나 이 시대의 타락한 교회들이 화려하고 거대한 교회 건물들, 거대한 교회의 조직과 재물들, 수많은 사람들의 환호성 등을 “겨자씨 비유”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거대하게 자란 겨자 나무 같은 성장이며 부흥이라고 자랑하는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100% 맞는 말이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겨자씨 비유”에서 화려하고 웅장한 모습을 하고 있는 외식적인 이스라엘을 거대한 겨자 나무로 비유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중세교회와 이 시대의 타락한 교회들이 자신들의 성장(?)을 웅장한 겨자 나무에 적용시키며 기뻐하는 것은 겨자 나무 같은 이스라엘을 책망하시는 예수님의 비유에 “아멘” 하고 화답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글을 마치며

하나님 나라는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심으로써 겨자씨처럼 작고 초라하게 시작되었지만, 성령 하나님의 일하심으로 끊임없이 전진하고 성장한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의 전진과 성장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그러므로 눈에 보이는 지상 교회가, 중세 교회처럼 황제마저도 굴복시키는 대단한 교세와 위용을 자랑한다 할지라도 그 외적인 교회의 모습을 하나님 나라의 성장이라고 말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교회사적인 교훈은 교회가 외적으로 커질 때 필연적으로 교회는 타락했다. 아니 교회가 타락했기 때문에 외적으로 교회가 커졌다라고 하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왜냐하면 교회가 타락하면 반칙을 해서라도 외적으로 화려하고 커지는데 집착하게 되며, 그러므로 필연적인 외적 성장을 동반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님이 “겨자씨 비유”에 이어 “누룩 비유”에서 경고하셨듯이 외적 성장을 추구하는 교회들은 누룩 같은 죄의 만연을 필연적으로 동반하게 된다. 타락한 중세 교회가 그랬고, 이 시대의 타락한 교회들이 그렇지 않은가?

참 하나님 나라는 예수님의 재림 때까지 겨자씨 한 알처럼 외적으로는 오히려 작고 초라한 모습으로 서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참 하나님 나라는 다시 오실 주님을 맞을 준비를 하며 믿음을 지키며 예수님의 증인 노릇을 하다가 순교하게 될 것이다.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참 하나님 나라, 즉 주님의 몸 된 교회의 모습이다(계11:7-8/그들이 그 증언을 마칠 때에 무저갱으로부터 올라오는 짐승이 그들과 더불어 전쟁을 일으켜 그들을 이기고 그들을 죽일 터인즉 그들의 시체가 큰 성 길에 있으리니 그 성은 영적으로 하면 소돔이라고도 하고 애굽이라고도 하니 곧 그들의 주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이라).

그래서 주님의 몸 된 교회는 주님이 오시는 그 날까지 주님의 증인된 삶으로 인하여 세상의 핍박을 받으며 그 고통으로 눈물을 흘리게 될 것이다(계7:17/이는 보좌 가운데에 계신 어린 양이 그들의 목자가 되사 생명수 샘으로 인도하시고 하나님께서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실 것임이라).

그럼에도 주님의 몸 된 교회는 끝까지 인내하며 믿음을 지키므로(계13:10/사로잡힐 자는 사로잡혀 갈 것이요 칼에 죽을 자는 마땅히 칼에 죽을 것이니 성도들의 인내와 믿음이 여기 있느니라), 순교했으나 주의 재림 때 다시 살아날 것이며(계11:11/삼 일 반 후에 하나님께로부터 생기가 그들 속에 들어가매 그들이 발로 일어서니 구경하는 자들이 크게 두려워하더라), 끝내 주님이 예비하신 의의 면류관을 쓰게 될 것이다(딤후4:8/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

그러나 주님의 몸 된 교회가 “겨자씨 비유”에서의 겨자 나무처럼 거대해지고 온갖 새들이 깃들일 만큼 외적으로 웅장하게 성장하는 것이 사실이라면, 주님의 몸 된 교회는 믿음 없이 눈으로 판단하고 주판을 튕기거나 계산기를 두들기며, “교회가 이렇게 크고 화려하니까 불교보다는 낫겠지?”하면서, 겨자 나무 가지에 잡새들이 깃들이듯이, 누구나 들어와 깃들일 수 있는 다른 하나님 나라가 되고 말 것이다.

이런 크고 힘이 강한 하나님 나라는 마지막이 될수록 더욱 커지고 힘이 강해질 것이므로 세상 나라의 핍박을 받지 않을 것이며, 오히려 세상 나라가 친구가 되자고 거대한 겨자 나무 같은 교회에 손을 내밀 것이다. 그러므로 이런 교회들은 세상 나라의 핍박으로 인한 인내도 눈물도 필요 없을 것이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예수님이 “누룩 비유”에서 경고하신 것처럼, 크고 힘은 강하나 타락한 교회들은 누룩 같은 죄의 만연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시대의 모든 지상 교회들은 예수님이 하신 “겨자씨와 누룩 비유”에서 주님의 엄한 경고를 귀기우려 듣고, 피 눈물 나는 회개를 통해 “남은 자”의 교회로 다시 새롭게 서야 할 것이다. 물론 주님의 교회가 아닌 겨자 나무 같은 교회들은 오히려 필자의 피토하는 권면을 비웃을 테지만 말이다.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롬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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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창모 목사는 죽음에 이르는 병에 걸린 한국 교회를 신물 나게 체험하며 갈등하다 하나님을 향해 살아 있는 교회를 꿈꾸며 1999년 김천에서 ‘제자들 경배와 찬양교회’를 개척하였다. 이창모 목사는 한국교회를 죽음에 이르게 한 병이 단지 성공주의, 황금만능주의, 도덕적 윤리적 타락 등이 아니고 이미 한국교회에 만연된 잘못된 신학에 있음을 확신하고서 무엇이 바른믿음인지 신학적으로 깊이 고민하는 목사이다. 이창모 목사는 자신이 중2때 수련회에서 방언을 받았고, 대부분의 목사들이 그것을 ‘영의 기도의 언어’라고 가르치므로 의심없이 수 십년 동안 옹알거리는 방언현상으로 기도(?)하였던 대표적인 방언기도자였다. 김우현, 김동수 등이 저술한 거짓 방언을 미화하는 한심한 서적들을 접한 후 방언에 관한 깊은 신학적인 성찰을 시작하게 되었고, 결국 오늘 날 방언이라고 알려진 소리현상과 성경의 참된 방언은 무관하다는 사실을 확신하게되었다. 이전의 자신처럼 방언으로 기도한다고 착각하고 있는 다른 목회자들과 신자들을 진정한 복음으로 돌이키기 위해 <방언, 그 불편한 진실>(밴드오부퓨리탄,2014)을 출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