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암신학회 - 김병훈 교수의 논문 소감 2

 

김병훈 교수 (이후 김병훈)가 합신의 ‘정암신학회’(21년 11월 16일)를 통해 여전히 능동순종 교리를 주장하는 논문을 발표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의 순종과 의의 전가: 역사적 개관과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라는 제목이었습니다. 어떤 내용인지 중요한 부분들을 살펴보는 두 번째 시간입니다.

김병훈은 베자의 성경 해석에 이의를 제기함으로 교회사 속에서 능동순종 논쟁이 시발되게 만든 피스카토르의 주장, 그리고 피스카토르의 주장에 대한 프랑스 개혁교회의 대응, 그리고 도르트 총회와 능동순종의 관련성을 논의했습니다.

이어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과 능동순종 교리의 관련성을 매우 길게 논의했습니다. 그런데 제가 여러번 강조했듯이, 웨신서 속에는 능동순종 교리를 지지하는 표현이 나오지 않습니다. 능동순종 지지파들은 순종이라는 단어 그 자체를 능동순종으로 연결시키려는 성향을 보입니다. 그들은 웨신서 속의 '그리스도의 순종'이라는 표현이 능동순종을 의미한다고 주장합니다.

잉글랜드 국왕과 국교회를 상대로 청교도들이 매우 힘겨운 전쟁을 수행하고 있는 상황 속에서 웨신서가 작성되었습니다. 웨신총회에 참석한 사람들 대부분이 청교도들이었는데, 그들 속에는 신학적 노선이 매우 다른 부분들이 분명히 있었습니다. 그것 때문에 그들이 분열하는 것은 공멸의 길이었습니다. 웨신총회는 청교도 세력의 분열을 막기 위해 나름 서로가 만족할 수 있는 표현을 채택하였다고 생각됩니다. 그리고 각각 자기의 방식으로 그 표현을 해석할 수 있는 여지를 만들었습니다. 

“그의 순종과 만족(satisfaction, 속상[贖償])을 그들에게 전가시킴으로써인데” (WCF, 11:1)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순종과 죽음으로 이렇게 의롭다 하심을 얻는 모든 자들의 빚을 완전히 갚으셨고 그들을 대신하여 그의 아버지의 의를 정당하게, 실제적으로, 그리고 완전히 만족시키셨다.” (WCF, 11:3)

웨신서의 이 내용은 성경의 가르침에 전혀 위배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죄인들이 받아야 할 죗값을 자기의 목숨으로 대속하라는 아버지의 뜻에 대해 완전히 순종하시는 삶을 사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완전한 만족을 드리셨습니다. 이와 같이 가르치는 웨신서의 내용은 성경의 핵심과 정확하게 일치합니다.

그리스도의 그림자인 율법이 먼저 와서 죄인들에게 하나님께 반드시 죗값을 완전하게 갚아야 한다고 명시하였습니다. 먼저 율법을 보내어 자기의 길을 예비하신 그리스도께서 나중에 오시어 그 율법 조항들에 대해 순종하시어 우리의 칭의를 위한 의를 얻으신 것이 아닙니다. 율법이 죄인들에게 요구하는 죽음을 대신 이행하라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셨습니다. 자기의 목숨으로 죄인들이 치러야 할 죗값을 완전하게 갚으셨습니다. 웨신서는 이 사실을 정확하게 가르칩니다.

그러나 능동순종 파들은 웨신서가 말하는 그리스도의 순종이 모든 율법에 대한 능동적 순종이고, 죽음이라는 단어와 속상이라는 단어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수동적 순종이라고 극구 우깁니다. 성경이 가르치는 내용이 아니므로 웨신서가 그 개념을 채택하지 못했다고 절대로 말하지 않습니다.

분명한 것은 웨신서를 이용하여 능동순종 교리의 정당성을 우기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만일 웨신서 속에 비성경적인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 개념이 분명히 기술되어 있다면, 그것에 집착하는 회중교회파 청교도들이 후에 따로 뭉쳐서 ‘사보이 선언’(1658년)을 작성하면서 능동적 순종, 수동적 순종 개념을 정확하게 명시할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김병훈도 웨신서 속에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 개념이 나타나 있다고 주장하지 못하고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웨스트민스터 총회는 39개조 개정안을 토론하는 가운데 11항에서 의의 전가와 그리스도의 순종에 대한 토의를 마친 후에 투표한 결과 그리스도의 순종의 능동적 측면과 수동적 측면을 모두 의미하는 표현으로 ‘모든 순종’(whole obedience)이라는 용어를 포함하기로 “압도적으로”(overwhelmingly)하였다 ... 그런데 흥미롭게도 ‘모든 순종’의 용어를 채택하기로 결의했던 투표의 시기로부터 대략 2년 간의 시간의 간격이 있은 후에 작성된 신앙고백서의 최종안에는 ‘모든 순종’이라는 용어는 나타나지 않는다.” (김병훈)

김병훈은 웨신총회와 웨신서와 능동순종 교리의 연관성을 말하기 위해 자그마치 60페이지 정도를 할애하였습니다(9-68페이지). 이어서 “교회의 해석을 이끌어 가는 신학”이라는 제목으로 조금 다른 내용을 전개했습니다. 칼빈을 비롯한 저명한 학자들이 그리스도의 능동순종 개념을 그 이전부터 이미 가지고 있었거나 가르쳤다고 주장했습니다.
 

 

1) 존 칼빈(1509-1564)

김병훈은 칼빈이 그리스도의 순종을 설명하거나 강조하였다고 볼 수 있는 다양한 내용을 소개하였습니다. 그러나 필자가 보니, 칼빈이 그리스도께서 순종하셨다고 말하는 내용들을 단순하게 인용하였을 뿐입니다. 그리스도가 율법에 대해 순종하심으로 우리의 영생의 자격인 의로움, 즉 자기 자신에게 없는 특별한 의를 획득하여 우리를 의인으로 만들었다는 능동순종 교리의 핵심을 가르치는 말을 칼빈이 했다는 증거는 제시되지 못했습니다. 김병훈은 단지 칼빈에게서 ‘순종’이라는 단어가 얼마나 자주 나왔는지 연구했던 것 같습니다.

김병훈은 칼빈이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속하는 향기로운 제물이 되기 위해 자기를 부인하고 하나님의 모든 뜻에 순종하심으로 하나님에게 만족을 드리신 하나님의 어린양이 되셨다고 가르친 칼빈의 말을 왜곡하여 사용했습니다.

“붙들어야 할 것은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감정을 부인하고 자신을 아버지의 뜻에 복종하고 모든 것을 드리지 아니하였더라면 달리 하나님께 올바르게 희생제물을 드릴 수가 없었을 것이라는 사실이다.” (김병훈이 인용한 칼빈의 말)

칼빈의 이 말이 칼빈에게 그리스도의 능동순종 개념이 있었다고 볼 수 있는 근거가 되지 못합니다.
 

2) 프랜시스 튜레틴(1623-1687)

김병훈은 튜레틴의 말 “만족케 함과 공로를 얻는 일은 구분되지 않는다”를 인용하고서 “이것은 17세기에 이르는 동안 개혁신학이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에 따른 의의 전가를 정당한 교리로 인정 해왔음을 인정하게 한다”라고 주장하였습니다.

김병훈은 또 튜레틴의 다음의 말도 인용하였습니다.

“일반적이며 우리 교회가 받아들인 판단은 이러하다. 하나님 앞에서 의를 위하여 우리에게 전가되는 그리스도의 속상(satisfactio)은 죽음 또는 삶 안에서 짊어지셨던 그리스도의 고난뿐만 아니라, 그의 전 생애의 순종, 또는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율법의 요구를 완전하게 성취하신 의롭고 거룩한 행위를 또한 포함한다. 이로써 두 편으로부터 우리의 구속을 위한 전체적이며 완전한 값이 나온다.” (김병훈이 인용한 튜레틴의 말)

능동순종 파들이 늘 하는 말이고 똑같은 이야기 패턴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순종하지 않았다고 보는 사람은 없습니다. 성경이 가르치는 그리스도의 순종의 본질은 죄인들의 죗값을 대신 갚으라는 하나님의 뜻에 대한 순종입니다. 결코 모세의 율법 조항들에 대한 순종이 아닙니다.

튜레틴은 그리스도의 ‘율법의 요구를 완전하게 성취하신 의롭고 거룩한 행위’(능동순종)와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으심’(수동순종), 이 두 가지에서 우리의 구속을 위한 “완전한 값이 나온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리스도가 십자가로는 죄용서를 만들었고 율법순종으로는 천국 영생의 자격을 만드셨다는 비성경적인 주장입니다. 성경은 그리스도가 아름답고 거룩하고 순종하는 삶으로 하나님께 완전한 만족을 드린 속죄의 제물이 되신 ‘하나님의 어린양’(요 1:29), ‘향기로운 제물과 생축’(엡 5:2)이셨으므로 우리에게 칭의와 구원이 발생했다고 가르칩니다.
 

3) 찰스 핫지(1797-1878)

김병훈은 찰스 핫지의 말들을 인용하면서 자신의 능동순종 개념을 더 주장하였습니다. 그러나 필자가 보기에 핫지의 말은 그런 뜻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순종은 율법의 요구를 만족시키 기 위하여 그가 행한 모든 것을 포함한다.” (김병훈이 인용한 찰스 핫지의 말)

“그러나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과 수동적 순종은 동일한 실상의 다른 측면 또는 모습일 뿐이다. 그리스도는 고난으로 순종하셨다. 그리스도의 순종의 절정은 겟세마네 동산에 그리고 십자가 위에서 이루어졌다.” (김병훈이 인용한 찰스 핫지의 말)

찰스 핫지의 말 어디에 그리스도가 모세의 율법에 완전하게 순종하여 우리를 의인으로 만드는 수단으로서의 의를 얻으셨다는 능동순종의 핵심적인 내용이 있습니까? 제가 보기에는 없습니다.
 

4) 정암 박윤선 (1905-1988)

김병훈이 박윤선 박사의 말을 인용하여 자신의 능동순종 주장을 강화하려고 시도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억지이고 자세히 보고 말 것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박윤선 박사는 율법이 인간에게 의를 주기 위한 목적으로 온 적이 없고, 단지 인간을 정죄하여 그리스도를 믿게 만들기 위해 왔을 뿐이라고 가르쳤기 때문입니다. 박윤선 박사가 능동순종이라는 말을 쓰기는 했을지라도 그 내용을 가르쳤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율법이 가입한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 이 말씀은 율법이 인류의 범죄의 원인이 된다는 의미가 아니다. 이것은 율법이 구원을 줄 수 있다고 오해하는 유대인들의 사상을 반대하는 말씀이요, 율법은 인간의 죄를 없이 하지도 못하며, 인간에게 영생을 주시도 못한다는 것을 역설함이다. 즉, 이 말씀은 사람이 율법을 받고 그것을 알고 보니, 자기의 부패와 자기의 연약과 자기의 많은 죄들을 발견하게 될 뿐이라는 뜻이다.” (박윤선, 계시의존사색, 178.)

“후대에 들어온 율법은 성질상 은혜 언약과 고체하려는 것이 아니었고 다만 ‘범법함을 인하여 더한 것’이다. 여기서 ‘범법함을 인하여 더한 것’이라 함은 인생들로 하여금 그 범죄한 것이 많음을 알도록 하기 위하여 율법을 주셨다는 뜻이다(롬 4:15, 5:20). 그러면 율법의 목적은 새로운 구원 방법을 제시함이 아니고 인간으로 하여금 죄를 깨닫게 함에만 있다.” (박윤선, 계시의존사색, 126)
 

맺는 말

저는 김병훈이 과거 신학자들의 말들을 줄기차게 인용하고 복습하려는 자세를 이해할 수 없습니다. 마치 옛날에 우리 조상들이 “공자 왈 맹자 왈” ... 했던 것과 같습니다. 지금도 살아서 역사하고 우리의 영혼과 관절과 골수를 찔어 쪼개기까지 하는 하나님의 말씀, 우리의 신앙과 신학의 절대적 기준과 근거인 성경을 보지 않으려는 자세를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마치 순종이라는 말을 찾아서 그리스도를 대적하라는 사명을 받으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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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이철 목사는 2004년부터 현재까지 미국 미시간 주 ‘앤아버 반석장로교회’의 담임목사이고 거짓 신학의 ‘견고한 진’(고후10:4)을 무너뜨리기 위해 시작된 신학신문 <바른믿음>의 대표이다.
총신대학(B.A 졸업), 총신대학 신학대학원(M.Div Eqiuv.졸업), 아세아연합신학대학 대학원(Th.M 졸업), Liberty Theological Seminary(S.T.M 졸업), Fuller Theological Seminary(Th.M 수학), Puritan Reformed Theological Seminary(Th.M 수학), Liberty Theological Seminary(D.Min 수학), 남아공신학대학원(South African Theological Seminary, Ph.D)에서 연구하였고, 현재 University of Pretoria(Ph.D)에서 연구하고 있다.
저서로는 「신사도 운동에 빠진 교회」, 「제3의 물결에 빠진 교회」, 「가짜 성령세례에 빠진 교회」, 「피터 와그너의 신사도운동 Story」, 「한 눈에 들어오는 청교도 개혁운동」, 「능동적 순종에 빠진 교회」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