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대운 목사의 황금사슬 설교 9회에 대한 소감 4

답변>
정대운 목사의 설교 <황금사슬> 9회에 대한 세번째 소감문입니다. 
 

11:31~12:18분>
“강하게 너희가 얼마나 나쁜 사람인지를 계속 설교하는 거에요. 여러분! 설교할 때 다른 많은 교인들한테 힘을 주고, 비젼주고 하는 게 설교가 아니라고 수차 말씀드리잖아요. 설교를 할 때 율법적 설교를 해야 해요! 그 율법적 설교가 뭐냐면, 듣는 사람으로하여금 가슴이 콩당콩당 뛰도록 설교를 해야됩니다. 그럼 어떤 일이 일어나느냐? 그럼 사람이 더 이상 죄를 못짓는 거에요. 너희들 그렇게 계속 죄를 지을꺼야? 계속 지을꺼야? 그럼 너희는 마지막 날 하나님께서 모든 걸 다 까발려 버릴거야! 네가 그렇게 이중인격으로 살아왔지만, 하나님이 모든 걸 다 드러내실꺼야! 하나님이 드러내시기 전에 빨리 회개하고 돌아서지 않으면, 너희는 벌을 받을꺼야! 이게 율법적 설교입니다.

이게! 그러기 때문에 이 종교개혁자들은 이 율법적인 설교를 하지 아니하고, 복음적인 설교를 하게 되면 그것이야말로 '악'이라고 표현했다 이 말이죠!” (정대운)

정대운 목사(이후 정대운)의 율법적 설교에 대한 설명은 맞습니다. “회개하라! 만일 회개하지 않으면 하나님이 너희를 치시거나 죽이실 거야!” ... 이렇게 구약의 선지자들처럼 설교하는 것이 율법적 설교입니다.

구약의 선지자들은 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렇게 율법적으로 설교했을까요? 구약 선지자들의 청중은 이스라엘 백성들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미 장차 성육신하여 십자가에 피 흘리고 죽으실 계획을 가지고 계신 여호와 하나님을 믿음으로 구원 받았습니다. 구약의 하나님께서는 자기를 믿는 백성에게 훗날의 십자가의 효력을 앞당겨 적용하심으로 구원을 주셨습니다.

그러나 그냥 구원을 주시고 끝난 것은 아니었습니다. 또한 은혜로 구원받은 백성답게 살기를 요구하셨습니다. 구원받은 백성답게 살기 위한 원칙은 모세의 율법이었습니다. 율법은 구원을 일으시는 수단이 아니라 구원 후에 하나님 백성답게 살기 위해 지키는 것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리스도의 피를 상징하는 어린양의 피로 구원을 받은 후 홍해를 무사히 건넜고, 광야에서 구름기둥과 불기둥의 기적을 체험했습니다. 또한 생수와 만나를 먹고 광야에서 살았습니다.

고전 1:1-4절에서 사도 바울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홍해 도하와 구름기둥과 불기둥 체험을 신약의 세례에 비유했습니다. 그리고 광야에서 그들이 먹고 마신 만나와 반석의 생수를 성찬에 비유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 100% 모두 구원받았다고 할 수는 없겠으나 그들이 장차 오실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을 받은 것은 분명합니다.

그리고 시내산에 도착하여 율법이 선포되었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호와의 명하신 대로 우리가 행하리이다”(출 19:8)라며 모든 율법을 지키겠다고 하나님께 일제히 응답했습니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중요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모세가 피를 취하여 반은 양푼에 담고 반은 단에 뿌리고 언약서를 가져 백성에게 낭독하여 들리매 그들이 가로되 여호와의 모든 말씀을 우리가 준행하리이다. 모세가 그 피를 취하여 백성에게 뿌려 가로되 이는 여호와께서 이 모든 말씀에 대하여 너희와 세우신 언약의 피니라.” (출 24:6-8)

이스라엘 백성들과 하나님 사이에 피의 언약이 체결되었습니다. 만일 이후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하나님 되기를 싫어하거나, 율법을 지키고 살기로 언약한 하나님 백성 이스라엘이 율법을 지키기를 싫어하면 피 흘리고 죽은 짐슴처럼 영원히 죽고 저주받을 것임을 상호간에 맹세한 것입니다. 이로서 하나님의 언약 백성이 된 이스라엘을 영원히 율법을 지키고 살아야 할 의무를 지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이후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찌 하였습니까? 하나님이 명하신 율법을 짓밟았습니다. 하나님의 언약 백성의 의무를 밥먹듯이 저버렸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선지자들을 보내어 하나님과의 언약을 준수하라고 촉구했습니다. 첫 언약의 백성 아담이 하나님과의 언약을 파기해 버렸던 것처럼, 이스라엘 백성들도 언약을 파기했다고 지적했습니다.

“저희는 아담처럼 언약을 어기고 거기서 내게 패역을 행하였느니라.” (호 6:7)

시내산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백성으로 살면서 영원히 하나님의 뜻대로 살겠다고, 즉 율법을 지키며 살겠다고 (짐승의) 피로 언약한 백성들이 언약을 저버리자, 하나님께서는 선자자들을 보내어 그들이 언약 백성의 법을 버렸으니 심판을 받아야 한다고 경고했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선지자들로 저희를 치고 내 입의 말로 저희를 죽였노니 내 심판은 발하는 빛과 같으니라.” (호 6:5)

하나님께서 언약 백성의 율법을 버린 그 백성들을 선지자들을 통해 때리시고 선지자들의 죽이셨다고 합니다. 율법적 설교(메시지)를 했다는 뜻입니다. 율법을 지키지 않는 옛 언약 백성들에게 율법을 범한 죄에 대한 심판을 선포하는 것이 율법적 설교(예언)입니다.

정대운은 신약 교회의 설교자가 마땅히 율법적 설교를 하여 신자들을 두렵게 만들어야 한다고 합니다. 구약의 이런 배경에서 하는 말입니다. 그런데 성경의 하나님은 절대로 율법의 하나님이 아닙니다. 성경의 하나님은 은혜의 하나님입니다. 왜 그러한지 설명하겠습니다.

언약 백성으로서 율법을 지키지 않는 자들은 마땅이 그 법에 의해 죽어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율법에 의한 정당한 저주와 죽음을 그 백성들에게 집행하지 않았습니다. 율법에 의한 정당한 저주와 죽음을 자기 자신에게로 돌리셨습니다. 스스로 사람이 되시어 그 율법대로 살지 못한 자기 백성이 받아야 할 저주를 대신 받으시기로 작정하셨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죄인들을 그대로 구원하시는 것입니까? 하나님께서 더러운 자들을 그대로 받기로 작정하신 것인가요? 그것도 아닙니다. 하나님 자신이 사람이 되시어 하나님 백성이 지켜야 할 율법을 못지킨 것에 대한 저주를 다 받으셨습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사 53:5,6)

하나님 자신이 하나님의 법을 지키지 않은 죄인들을 대신하여 저주를 받으시고 자기를 믿는 백성들에게는 더 이상 죄를 묻지 않기고 정하셨습니다. 사실은 여전히 죄인이나 더 이상 죄인이 아닌 것으로 간주하신 것입니다.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롬 3:25)

하나님 자신 (그리스도)이 죄인과 하나님 사이의 속죄의 제물이 되시어 죄인과 하나님 사이의 화목을 만들어 내셨습니다. 죄인들의 죄를 모두 간과, 즉 없는 것처럼 여기시기로 하신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옛 언약을 지키지 못하여 저주받은 백성들을 영원히 구원하여 자기의 백성으로 만드시는 새 언약을 체결하였습니다. 옛 언약에 의해 저주 받은 백성들을 오직 자기의 희생과 은혜에 근거하여 다시 영원히 자기의 백성으로 회복시키는 새 언약을 만드셨습니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새 언약을 맺으리라.” (렘 31:31)

“저녁 먹은 후에 잔도 그와 같이 하여 이르시되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니 곧 너희를 위하여 붓는 것이라.” (눅 22:20)
 

 

구약의 하나님 백성 이스라엘과 하나님게서 짐승의 피를 증거 삼아 체결한 언약은 사람의 합당한 행실과 순종에 의해 유지되는 언약이었습니다. 그러나 신약의 그리스도의 새 언약은 사람은 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면 성립되는 언약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친히 사람의 모든 죄를 대신 지시고 이미 저주를 받고 죽으셨기 때문입니다. 구약의 언약을 대체하는 신약의 새언약은 대신 죽으신 그리스도의 피로써 맺어진 언약입니다. 사람의 행위와 반응과 순종이 언약 유지의 조건이 되지 못합니다.

그렇다면 신약의 새언약 백성은 율법이 금하는 죄들을 범해도 된다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의 능력이 하나님 백성들로 하여금 즐거이 하나님께 순종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의 피의 권세를 적용하시는 성령을 자기 백성들에게 보내셨습니다 (요 14:26).

성령 받은 사람은 심령의 변화가 일어나게 됩니다. 죄를 즐거워하는 옛 사람으로 살지 않고 죄와 싸우는 새 사람으로 살게 됩니다. 성령 받은 사람이 율법이 금하는 죄를 즐거이 반복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것은 귀신들린 사람이 점하기를 싫어한다는 것과 같은 말입니다.

“육신을 좇지 않고 그 영을 좇아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라.” (롬 8:4)

“너희가 만일 성령의 인도하시는 바가 되면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리라.” (갈 5:18)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롬 8:2)

구약의 옛언약을 대체하는 그리스도의 피로 맺어진 신약의 새언약의 백성은 성령의 능력에 의해 하나님께 순종하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의 열매를 만들게 됩니다. 신약 백성은 복음과 성령의 능력으로 살면서 그리스도를 닮아갑니다. 그래서  다 이상 율법을 지키지 않는 사람에게 하나님의 진노와 저주가 임한다는 율법적 설교가 필요하지 않습니다.

율법적 설교를 하는 교회는 그리스도의 피로 맺어진 신약의 새언약 백성의 삶의 원리를 모르는 목사입니다. 복음과 성령의 감화가 신약 성도의 신앙과 삶의 원동력입니다. 사도 바울은 성도에게 “깨끗함과 지식과 오래 참음과 자비함과 성령의 감화와 거짓이 없는 사랑” (고후 6:6)이 있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성령의 감화가 없으면 우리의 마음이 굳어지고 결국 정상적인 신앙생활이 불가능해집니다.

신약 교회의 목사는 신자들에게 복음의 능력과 성령의 감화가 나타나게 설교해야 합니다. 율법적 설교를 백날 천날 해 봐야 사람에게 속으로부터 일어나는 근본적인 변화를 볼 수 없습니다. 가장 심각한 사실은 율법적 설교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허물어 버리는 마귀의 전략이라는 것입니다.

“형제들아 내가 법 아는 자들에게 말하노니 너희는 그 법이 사람이 살 동안만 그를 주관하는 줄 알지 못하느냐.” (롬 7:1)

“내 형제들아 너희도 그리스도의 몸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하였으니 이는 다른 이 곧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이에게 가서 우리가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게 하려 함이라.” (롬 7:4)

하나님의 율법은 살아있는 사람에게 권세를 부립니다. 이미 죽은 사람에게는 아무 할 일이 없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이 율법의 요구대로 죽었을 때 함께 죽었던 사람입니다. 참되게 믿고 세례 받은 모든 성도를 그리스도의 몸이 율법의 요구를 따라 죽었을 때 함께 죽었습니다.

그러니 신약의 성도들에게 율법을 지키지 못하는 사람에게 따르는 하나님의 저주를 선포하는 구약 방식의 율법적 설교는 안되는 일입니다. 하나님의 저주를 받을 일입니다. 그런 목사는 이미 영적으로 죽은 자이고 그의 설교를 즐거이 듣는 사람들도 죽은 자들입니다.

정대운이 모든 종교개혁자들이 율법적 설교를 했고, 율법적 설교를 하지 않는 것은 악이라고 가르쳤다고 했습니다. 정대운이 알고 있는 종교개혁자들은 모두 하나같이 복음을 모르는 이상한 자들인 것 같습니다. 이런 사실을 볼 때, 청교도 목회는 이단적인 목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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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이철 목사는 2004년부터 현재까지 미국 미시간 주 ‘앤아버 반석장로교회’의 담임목사이고 거짓 신학의 ‘견고한 진’(고후10:4)을 무너뜨리기 위해 시작된 신학신문 <바른믿음>의 대표이다.
총신대학(B.A 졸업), 총신대학 신학대학원(M.Div Eqiuv.졸업), 아세아연합신학대학 대학원(Th.M 졸업), Liberty Theological Seminary(S.T.M 졸업), Fuller Theological Seminary(Th.M 수학), Puritan Reformed Theological Seminary(Th.M 수학), Liberty Theological Seminary(D.Min 수학), 남아공신학대학원(South African Theological Seminary, Ph.D)에서 연구하였고, 현재 University of Pretoria(Ph.D)에서 연구하고 있다.
저서로는 「신사도 운동에 빠진 교회」, 「제3의 물결에 빠진 교회」, 「가짜 성령세례에 빠진 교회」, 「피터 와그너의 신사도운동 Story」, 「한 눈에 들어오는 청교도 개혁운동」, 「능동적 순종에 빠진 교회」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