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창모 목사의 '김동수 교수의 거짓 방언'(2회)

김동수 목사

김동수 목사는 다음과 같은 말로 옹앙거리는 소리현상을 방언이라고 옹호하였다. 

“바울과 누가가 방언에 대해서 말할 때 공통점은 이것은 인간의 능력이나 노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성령에 의해서(행 2:4; 고전 12:7) 된 것이라는 것이다. 또 이것을 말하는 사람은 자신이 그 말을 배우지 않은 것이었기에 이것이 외국어이든, 실제 언어가 아니든 자신은 그 말의 뜻을 모르고 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바울이 다른 사람보다 더 방언을 많이 했다는 것을(고전 14:18) 바울이 외국어 구사 능력이 있어서 외국어를 더 많이 했다고 이해하는 것은 말도 안 된다. 또 바울은 우리가 성령의 은사로 부르는 것을 ‘성령의 나타남’(고전 12:7)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피아노를 잘 치거나, 운동을 잘 하거나 하는 은사와 같은 것들이 아니다. 여기에 예시로 나와 있는 9가지는 모두 성령의 능력이 일시적으로 어떤 사람에게 현시되는 것이다(고전 12:8-10). 바울이 고린도교인들에게 말하려고 했던 것은 자신에게 나타나는 성령의 은사만 인정하지 말고, 이 모든 것들이 성령의 현시에 의한 것이라는 것을 인정하라는 것이다.“(김동수)

오늘 날의 옹알거리는 거짓 방언(또는 영음 방언)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 중에 바울이 하나님께 감사한 방언을(고전14:18) 바울의 단순한 외국어 실력이라고 여기는 이들이 있다. 이에 대해 김동수 교수는 “바울이 다른 사람보다 더 방언을 많이 했다는 것을(고전 14:18) 바울이 외국어 구사 능력이 있어서 외국어를 더 많이 했다고 이해하는 것은 말도 안 된다”라고 하였는데, 김동수 교수의 이 부분에 대한 비판은 옳다. 왜냐하면 바울이 지금까지 성령의 은사로서의 방언을 말하다가, 18절에서 뜬금없이 자신의 외국어 실력을 하나님께 감사했다는 말은 어색하기 짝이 없기 때문이다. 여기서 바울은 지금 인간이 인위적으로 습득할 수 있는 외국어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은사로서의 방언을 말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바울이 하나님께 감사한 방언은 고린도전서 14장 2절과 4절에서 설명되는 거짓 방언과는 전혀 다른 방언이라는 점이다. 바울은 지금 고린도전서 14장 18절에서 다른 모든 사람들보다 자신에게 방언을 더 많이 말할 수 있도록 기회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고 있다. 여기서 바울이 하나님께 감사하는 이유는, 김동수 교수가 주장1)하듯이 바울이 방언기도를 많이 했기 때문이 아니라, 선교 현장에서 말이 통하지 않는 외국인들과 수없이 만나야하는 바울에게 성령 하나님께서 그때마다 방언의 은사를 주셔서, 누구보다도 더 많이 방언으로 외국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셨기 때문이다. 따라서 바울이 지금 하나님께 감사하고 있는 방언은, 외국인들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게 하는 외국어 방언이다.

본문에서 “방언을 더 말하므로”는 바울이 선교 현장에서 말이 통하지 않는 외국인들과 부딪히면서, 이들에게 성령이 주시는 외국어 방언으로 복음을 전한 풍성한 경험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바로 앞에서 자신이 경험한 적이 없는 방언기도를 말할 때 가정법을 쓴 것(고전14:14)과는 달리 여기서는 직설법을 쓰고 있다.

아무튼 바울에게 다른 모든 사람들보다 방언으로 말할 기회가 더 많았던 것은, 바울이 다른 모든 사람들보다 더 많은 지역을 순회하며, 더 많은 외국인들을 만나며 선교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지만 여기서 바울은, 바울 자신이 다른 모든 사람들보다 더 많이, 외국인들에게 외국어 방언으로 복음을 전할 수 있도록 은혜를 베푸신 하나님께 감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거짓 방언 전도사 김우현 PD는 18절을 근거로, ‘바울이 더 많이 방언으로 기도한 것을 하나님께 감사하면서 방언기도를 자랑스럽게 여겼다’고 주장한다 또 김우현 PD는 18절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역으로 말하면 바울에게는 그만큼 방언이 중요했던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는 바울이다. 그런 그가 방언을 가장 많이 하는 것을 슬쩍 자랑하는 이유와 태도는 무엇인가? 나는 말씀을 나누면서 바울 사도의 심정을 이해했다. 그는 누구보다 방언의 가치와 유익을 깊이 체험한 사람으로서 그 말로 방언하기를 더욱 권고했던 것이다.”2)

그런데 여기서 김우현 PD는 바울이 방언을 슬쩍 자랑했다고 말함으로 십자가 외에 자랑할 것이 없다고 말한 바울을 거짓말쟁이로 만들었다. 또한 김동수 교수도 바울이 “방언을 더 말하므로”를 ‘방언기도를 더 많이 한 것’으로 말함으로써 ‘방언 말하기’를 ‘방언기도’로 슬쩍 바꾸어 버리는 속임수를 쓰고 있다.3) 김신호 목사도 “바울은 누구보다도 방언기도의 깊이를 경험한 사람으로, 찬양 중에나 혹은 개인기도 중에 누구보다도 방언으로 기도를 많이 했고, 우리에게 방언으로 기도할 것을 권하고 있다.”4)라고 말함으로써 똑같은 속임수를 쓰고 있다. (거짓 방언자들의 이런 속임수는 고린도전서 14장 39절을 설명할 때에도 어김없이 나타난다. 이들은 바울이 ‘방언기도’를 금하지 말라고 했다면서, 18절에서처럼 39절에서도 ‘방언 말하기’를 ‘방언기도’로 바꾸어 버리고는 방언기도를 반대하는 자들에게 바울 가르침을 반대하는 자들이라고 엄포를 놓는다).

이들의 주장대로라면, 바울은 지금까지 고린도 교회의 거짓 방언을 비판하다가, 18절에 와서 갑자기 자신이 그런 거짓 방언을 많이 한 것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하고 있는 꼴이 된다. 과연 그런가? 아니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바울이 지금 감사하고 있는 방언은 ‘하나님께 비밀을 말하는 방언기도’가 아니라, 성령의 은사로서의 방언, 즉 ‘외국인에게 말하는 방언’이다.

바울은 18절에서 은사주의자들이 고린도 교회에 있었다고 주장하는 ‘영음 방언’에 대해 자신의 긍정적인 의견을 개진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를 말하고 있다. 바울은 지금 외국어 방언에 대한 자신의 풍부한 경험을 말함으로써, 먼저는 자신이 이들의 거짓 방언을 비판할 만한 충분한 자격이 있음을 시위하고 있다. 바울의 이런 시위는 고린도전서 14장 36-38절을 보면 짐작할 수 있겠지만, 거짓 방언에 대한 바울의 책망이 거짓 방언자들에 의해 강하게 저항 받을 것을 예상했기 때문일 것이다.

방언을 많이 말하는 것에 대해, 바울이 굳이 하나님께 감사하고 있는 또 다른 이유는 하나님께 감사함으로 자신의 방언이 하나님께로부터 왔음을 분명히 함으로써, 인간에게서 온 고린도 교회의 거짓 방언을 지적하기 위함이다. 어쨌든 바울이 고린도 교회의 거짓 방언을 지적하는 현장에서 갑자기 자신의 방언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한 이유는, 바울 자신의 외국어 방언이 ‘(그) 영으로 기도하는’(고전14:2) 고린도 교회의 방언기도와는 전혀 다른 것임을 분명히 하기 위함이다.

또한 거짓 방언 옹호자 김동수 목사는 다음과 같은 그릇된 성경해석을 늘어놓았다.

“또 바울은 고린도전서 12-14장에서 처음에는 방언이 어떤 것인지 설명하지 않고 그 은사를 다른 은사와 함께 열거하다가(12:8-10), 14:2절에서야 비로소 이것을 정의하고 설명한다. 첫째, 이것은 이성이 아니라 영으로 하는 것이라는 것이다(14:15 참조). 둘째, 이것은 사람에게가 아니라 하나님께 하는 것이라는 것이다. 셋째, 그 내용은 “신비”라는 것이다. 바울서신에서 신비란 남들을 알지 못하게 하는 비밀이라기보다는 하나님의 구원의 도리에 관한 어떤 것들을 말한다. 그렇다면, 이것은 신자가 성령의 인도함을 받아 하나님의 뜻대로 기도, 찬양, 감사, 축복하는 것이다(14:15-17). 이것을 다 포괄하는 용어가 바로 기도다.“(김동수)

김동수 목사의 언급에서 볼 수 있는 “영으로”, “신비”, “비밀” 등은 바울 당시 고린도 교회에 영향을 미쳤던 영지주의 이단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용어들이다. 그러나 김동수는 이런 사실을 눈치 채지 못하고 안이하게 본문에 접근하고 있다. 따라서 김동수 목사가 바울이 거짓 방언을 설명하는 내용들을 참 방언에 관한 말씀으로 오해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며, 그 결과 고린도 교회의 거짓 방언을 성령의 은사로 믿는 것도 지극히 자연스러운 현상이라고 보여진다.

“영지주의”에 깊은 영향을 받은 고린도 교회를 염두에 두지 않으면, 고린도전서 14장에 나타난 바울의 용어들을 결코 바르게 이해할 수 없다. 어쩌면 김동수 목사가 고린도 교회가 영지주의 영향을 받았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느냐고 억지를 부릴지도 모르겠다. 따라서 이 본문들을 바울의 의도대로 설명하기란 그리 용이하지 않다. 불행하게도 필자에게는 김동수처럼 이 본문들을 단 몇 줄로 명쾌하게 설명할 능력이 없다.

그래서 필자는「방언, 그 불편한 진실」에서 ‘내가 만일 방언으로 기도하면 나의 영이 기도하거니와~’가 무슨 의미인지에 대해 여러 페이지(261-281)를 할애하여 길게 설명할 수밖에 없었다. 이 글을 읽는 독자들이 부족한 책을 참고하든지, 바른믿은에 연재되는 “방언, 그 불편한 진실” 시리즈를 계속 읽어주시기를 바란다.

이제 김동수 교수가 옹알거리는 소리현상을 “하나님께 비밀을 말하는 것”(고전14:2)이라고 바울이 정의했다고 주장하는 내용에 대해 검토해 보자. 비밀이 ‘하나님의 구원의 도리에 관한 어떤 것들’이라고 정의한 김동수 교수의 설명은 옳다. 그런데 문제는 옹알거리는 거짓 방언에서는 이 비밀의 방향이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이라는 점이다. 과연 김동수 목사가 주장하듯 이들이 영음 방언으로 하나님께 비밀을 말한다는 것이 사실일까? 연약한 피조물에 불과한 인간이 전능하신 창조주 하나님께 비밀을 말한다는 것이 과연 가능한 일인가 말이다.

고린도전서 14장 2절에서 방언으로 말하는 비밀의 방향을 보면 이 방언이 성령의 은사로서의 방언인지, 아니면 거짓 방언인지 구별할 수 있다. 왜냐하면 방언의 방향이 하나님에게서 인간에게로 인가? 아니면 인간에게서 하나님에게로 인가? 에 따라서 방언의 진위 여부가 판가름 나기 때문이다.

그런데 애석하게도 고린도전서 14장 2절에서 방언으로 말하는 ‘비밀’은 인간에게서 하나님에게로 향한다. 이런 점에서 이들이 옹알거림의 영음 방언을 하나님께 하는 방언기도라고 부르는 것은 옳다. 그러나 바로 이 점이 문제다. 왜냐하면 창조주 하나님께 감히 비밀을 말해줄 수 있는 피조물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바울뿐 아니라 성경이 말하는 비밀의 방향은 언제나 하나님에게서 인간에게로 향한다. 따라서 2절에 언급된 비밀이 하나님에게로 향하는 방언은 결코 성령의 은사로서의 방언일 수 없다.

 

성경의 '비밀'은 하나님에게서 나오는 계시

그러면 사람의 방언이든 천사의 말이든 간에 인간이 하나님께 비밀을 말한다는 것이 신학적으로나 현실적으로 왜 불가능한 일인지 성경 예문을 통해 살펴보자. 성경에서 ‘비밀’(musth,rion, 뮈스테리온, secret)이라는 단어는 어느 곳에서나 거의 같은 뜻으로 쓰인다. 먼저 구약의 예를 보자.

“이에 이 은밀한 것이 밤에 이상으로 다니엘에게 나타나 보이매 다니엘이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찬송하니라”(단2:19).

“오직 은밀한 것을 나타내실 이는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시라 그가 느부갓네살 왕에게 후일에 될 일을 알게 하셨나이다 왕의 꿈 곧 왕이 침상에서 머리 속으로 받은 환상은 이러하니이다”(단2:28).

위의 본문을 보면 “은밀한 것”, 즉 ‘비밀’은 하나님의 계시이며, 그 비밀을 말씀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그리고 그 비밀을 보고 듣는 자는 인간인 다니엘과 느부갓네살 왕이다. 여기서 비밀의 방향은 하나님에게서 인간에게로 향한다.

신약성경에서의 비밀은 항상 ‘계시의 구속사적 내용’ 즉, ‘하나님의 계시로서의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나타낸다.5) 따라서 당연히 그 방향도 언제나 하나님에게서 인간에게로 향할 수밖에 없다. 이것은 바울 서신에서도 마찬가지다.

“그 뜻의 비밀을 우리에게 알리신 것이요 그의 기뻐하심을 따라 그리스도 안에서 때가 찬 경륜을 위하여 예정하신 것이니”(엡1:9).

“곧 계시로 내게 비밀을 알게 하신 것은 내가 먼저 간단히 기록함과 같으니 그것을 읽으면 내가 그리스도의 비밀을 깨달은 것을 너희가 알 수 있으리라”(엡3:3-4).

“이 비밀은 만세와 만대로부터 감추어졌던 것인데 이제는 그의 성도들에게 나타났고 하나님이 그들로 하여금 이 비밀의 영광이 이방인 가운데 얼마나 풍성한 지를 알게 하려 하심이라비밀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시니 곧 영광의 소망이니라”(골1:26-27).

성경에 언급된 비밀은 예외 없이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시는 계시를 의미한다. 이 계시의 비밀이 인간에게서 하나님에게로 향하는 일은 인간이 하나님이 되는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 한 절대로 일어날 수 없는 일이다. 특히 바울에게 비밀이라는 말은 어떤 신비하고 진기한 비법이 아니라 사도들의 전파를 통해 열방에 계시된 비밀이며(롬16:25; 엡3:9; 골1:25,26), 복음의 비밀(엡6:19), 그리스도의 비밀(골4:3)로서 모든 신자들이 소유하고 있는 것이다.

이 비밀은 계시의 핵심에 속하는 것으로서 하나님께서 주권적 능력으로 일방적으로 펴 보이시지 않으면 사람에게 숨겨져 있어서 사람이 감히 접근할 수 없는 특징이 있다.6) 그러므로 이 비밀은 하나님이 인간에게 계시하지 않으면 인간은 절대로 알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방언을 말하는 자는…… 하나님께…… (그) 영으로 비밀을 말함이니라”(고전14:2)가 바울이 말한 성령의 은사로서의 방언의 정의라면, 바울은 지금 제정신이 아니거나 전능하신 하나님을 능멸하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것은 정상적인 인간과 하나님 사이에서는 일어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연약한 인간이 전능하신 하나님께 비밀을 말한다는 것은 하나님과 비정상적인 관계에 있는 인간들의 거짓말일 뿐이다.

옹알거리는 거짓 방언자들은 고린도전서 14장 2절을 근거로, 자신들은 방언으로 하나님께 비밀을 말한다고 주장한다. 이들은 인간의 언어로는 표현할 수 없는 비밀을, 하늘의 언어로 하나님께 말하는 것이 방언이라고 하면서, 자신들의 거짓 방언이 대단한 은사인 것처럼 그럴듯하게 포장한다.

또 이들은 방언으로 하나님께 비밀을 말하는 이유가 사탄이 기도의 내용을 알아들을 수 없게 하기 위함이라고까지 말한다.7) 그래서 방언기도는 “원수 마귀가 도청할 수도, 이해할 수도, 왜곡할 수도 없는 특별한 언어와 암호를 이용하여 하나님과 안전하게 의사를 소통할 수 있는 천상의 언어”8)라고 자랑한다.

그러나 고린도전서 13장 1-7절을 보면,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의 대상은 하나님이 아니라 교회(사람)임에 분명하다.9) 그럼에도 육신적인 고린도 교회처럼 교회에 대한 사랑이 없으면, 방언의 대상은 교회(사람)가 아니라 하나님이 되고 만다. 방언의 대상을 하나님으로 삼는 자들은 교회를 사랑하는 대신에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자들이다. 그러므로 이들은 자신이 하는 방언이 하나님께 비밀을 말하는 것이라고 거짓말함으로써 자신의 뛰어난 영성을 과시하며 교회 위에 군림한다. 그러나 자신을 과시하는 데 사용되는 방언은 성령이 교회의 덕을 위해 주신 성령의 은사일 수는 없다(고전12:7 참고). 왜냐하면 성령이 교회의 덕을 위해 주신 방언으로는, 결코 개인의 덕을 위해 사용할 수 없기 때문이다.

여기에 대해서도 제법 긴 설명이 필요하다. 어쩔 수 없이 간단하게 핵심만 말한다면, 고전12:7에서 바울이 분명히 하고 있는 것처럼, 성령이 교회에 은사를 주신 목적은 교회의 덕을 위해서이다. 그렇다면 성령의 은사인 방언으로 개인의 덕을 위해 기도하는 데 쓴다는 것은, 방언을 주신 성령의 의도에 어긋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런 방언으로 개인을 위해 기도하는 데 쓸 수 있는 사람은 성령보다 더 우위에 있어야 한다. 이것이 가능한가? 그런데 놀랍게도 거짓 방언자들은 이것이 가능하다고 우기고 있다.

따라서 하나님께 비밀을 말한다는 이들의 영음 방언은 성령의 은사가 아니라 인위적인 것으로서,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처럼 사람들의 귀만 따갑게 하는 무의미한 소음에 불과하다(고전13:1). 그런데 이들의 주장대로, 연약한 인간이 전능자 하나님께 비밀을 말한다고 하면서 정작 비밀을 말하는 자신은 그 비밀이 무엇인지 모른다는 것은 기막힌 코미디가 아닐 수 없다. 물론 어떤 측면에서는 이들의 말이 옳기는 하다. 왜냐하면 사실상 거짓 방언자들은 알고 있는 비밀이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바울은 “(그) 영으로” 하나님께 비밀을 말한다고 거짓말을 하는 고린도 교회에 다음과 같이 말한다.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까지도 통달하시느니라 사람의 일을 사람의 속에 있는 영 외에 누가 알리요 이와 같이 하나님의 일도 하나님의 영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느니라”(고전2:10-11).

여기서 바울은 “성령으로”만 하나님의 깊은 것(비밀)을 알 수 있고, “하나님의 영” 외에는 아무도 하나님의 일을 알 수 없다고 분명히 말하고 있다. 본문에 따르면, “하나님의 영”이 아닌 “(그) 영으로” 방언을 말하는 자는 “하나님의 깊은 것”에 대해 아무 것도 알 수 없는 자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비밀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르는 자가 “(그) 영으로” 하나님께 비밀을 말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므로 당시 고린도 교회가 하고 있는 방언, 즉 “(그) 영으로” 하나님께 비밀을 말하는 영음 방언은 성령의 은사와는 무관한 거짓 방언일 수밖에 없다.

 

현재의 거짓 방언은 인간의 교만의 산물

그렇다면 어째서 이런 코미디가 현대 교회에서도 방언이라는 이름으로 연출되고 있는 것일까? 그것은 성령이 교회에 주신 은사의 수혜자가 연약한 인간임에도 불구하고, 방자한 인간이 자신을 하나님의 자리에 올려놓기 위해, 오히려 하나님을 은사의 수혜자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거짓 방언자들의 주장에 따르면, 하나님은 어떻게 해서든지 자신이 모르는 비밀을 알기 위해, 그리고 그 비밀을 사탄에게 들키지 않기 위해 인간에게 방언의 은사를 주신 꼴이 된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영음 방언이야말로 놀라운 은사가 아닐 수 없다. 왜냐하면 연약한 인간이라 할지라도 영음 방언으로 전능하신 하나님을 마귀로부터 보호해 줄 수 있으며, 어리석은 인간이라 할지라도 영음 방언으로 전지하신 하나님의 무지를 깨우쳐 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쩌면 거짓 방언자들의 이런 주장이 사실일지도 모르겠다(?). 그 옛날 예수님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 방언기도를 못하셔서 그만 마귀에게 비밀을 들켜 버려서 가룟 유다의 무리에게 잡히셨으며, 그때 하나님은 그 상황을 잘 몰라서 아들이 잡히는 것을 그냥 방치했을지도 모른다. 하나님은 이것이 천추의 한이 되어서, 이제라도 마귀로부터 보안을 철통같이 하고, 자신의 무지를 방지하기 위하여 현대 교회에 방언의 은사를 마구 부어 주고 계시는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거짓 방언자들의 하나님은 영음 방언으로 인간에게 비밀을 듣지 않으면 안 될 만큼 무지하고, 또 그것을 마귀에게 들키지 않아야 할 만큼 연약하기 짝이 없는 하나님임에는 틀림이 없는 듯하다.

 

--- 각주 ---

1)김동수, <방언은 하늘의 고귀한 언어>(서울: 이레서원, 2008), p.175.
2)김우현, <하늘의 언어>(서울: 규장, 2007), p.88.
3)김동수, <방언은 고귀한 하늘의 언어>(서울: 이레서원, 2008), p.175; 로비츠 리어든, <방언기도는 즐겁다> 이용복 옮김(서울: 규장, 2009), pp.136-137; 빌 해몬, <방언을 해야 하는 70가지 이유>, CI KOREA 옮김(서울: CI KOREA, 2022), p.49.
4)김신호, <성령세례 받으면 방언하나요?>(서울: 서로사랑, 2011), p.110.
5)윤석준, <101가지 성경 이야기 2>(서울: 부흥과개혁사, 2011), p.356.
6)리차드 개핀, <성령 은사론>, 권성수 옮김(서울: 기독교문서선교회, 1983), p.70.
7)김우현, <하늘의 언어>(서울: 규장, 2007), p.88.
8)마헤쉬 차브다, <방언 체험>, 배응준 옮김(서울: 규장, 2004), p.21.
9)믿을만한 사본에는 없지만, 거짓 방언자들이 자주 인용하는 막16:17에 나오는 ‘새 방언’도 그 대상은 역시 사람이다.

SNS 기사보내기
기사제보
저작권자 © 바른믿음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창모 목사는 죽음에 이르는 병에 걸린 한국 교회를 신물 나게 체험하며 갈등하다 하나님을 향해 살아 있는 교회를 꿈꾸며 1999년 김천에서 ‘제자들 경배와 찬양교회’를 개척하였다. 이창모 목사는 한국교회를 죽음에 이르게 한 병이 단지 성공주의, 황금만능주의, 도덕적 윤리적 타락 등이 아니고 이미 한국교회에 만연된 잘못된 신학에 있음을 확신하고서 무엇이 바른믿음인지 신학적으로 깊이 고민하는 목사이다. 이창모 목사는 자신이 중2때 수련회에서 방언을 받았고, 대부분의 목사들이 그것을 ‘영의 기도의 언어’라고 가르치므로 의심없이 수 십년 동안 옹알거리는 방언현상으로 기도(?)하였던 대표적인 방언기도자였다. 김우현, 김동수 등이 저술한 거짓 방언을 미화하는 한심한 서적들을 접한 후 방언에 관한 깊은 신학적인 성찰을 시작하게 되었고, 결국 오늘 날 방언이라고 알려진 소리현상과 성경의 참된 방언은 무관하다는 사실을 확신하게되었다. 이전의 자신처럼 방언으로 기도한다고 착각하고 있는 다른 목회자들과 신자들을 진정한 복음으로 돌이키기 위해 <방언, 그 불편한 진실>(밴드오부퓨리탄,2014)을 출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