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대운 목사의 황금사슬 설교 9회에 대한 소감 3

 

부탁>
정대운 목사의 황금사슬 설교 9회 계속 설명해 주시기 바랍니다. 

답변>
알았습니다. 최근 설교를 들어보시고 받아쓰기 바랍니다. 옛것은 이미 지나갔습니다. 

 


9:41~9:49분>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여전히 율법이 주어진 이유는 우리 죄를 깨닫게 하고 우리 죄를 억제시키는 겁니다.” (정대운)

많은 사람들이 (특히 청교도 목사들이) 지금도 율법이 우리에게 죄를 깨닫게 하고, 죄를 억제한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만일 지금 율법이 역사하면서 죄를 깨닫게 하는 능력을 부리지 못하고 우리가 죄짓는 것을 억제시키는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고 말하면, 그 사람이 성경을 부정하고 하나님을 믿지 않는 것 같은 생각이 들게 만들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을 보면, 죄를 깨닫고 이기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와 성령의 사역입니다. 그리스도를 처음 만나는 날 어부 베드로는 그리스도 앞에 엎드리려서 다음과 같이 스스로 고백했습니다.

“시몬 베드로가 이를 보고 예수의 무릎 아래에 엎드려 이르되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니.” (눅 5:8)

베드로가 사전에 충분하게 율법 교육을 받았으므로 이런 일이 일어났습니까? 아무리 보아도 베드로가 자신이 죄인임을 깨닫게 된 것은 어떤 율법 조항의 역사가 아닙니다. 죄로 죽은 죄인의 마음을 그 손으로 어루만져 소생시키시고 회개케하시는 보혜사의 역사입니다. 아직 성령이 지상에 강림하시기 이전에는 지상의 그리스도께서 원보혜사이셨습니다. 베드로를 창조하신 그리스도께서 베드로를 부르시고 먼저 그의 마음에 은혜와 진리의 빛을 비추어 주셨습니다. 그러자 베드로의 죽은 심령이 살아났고 그리스도 앞에서 자신이 소망없는 죄인임을 알게 된 것입니다.

율법이 각 개인에게 역사를 일으켜 죄를 깨닫고 구원에 이르게 한다기 보다는, 그리스도가 오시기까지의 지난 역사 속에서 율법이 그리스도의 오심을 준비했다는 뜻입니다. 신약 백성들에게 율법이 실제로 그렇게 작용하고 있다는 것이 아닙니다.  

율법이 강조되면 자연히 율법을 지키려는 노력이 나타납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서로 발악하듯이 율법을 높이고 강조하는 기이한 현상을 보입니다. 그런데 정작 율법으로 인해 사람들이 죄를 진심으로 깨닫거나 죄를 이기는 결과는 만들지 못합니다. 이상하게도 율법이 강조되면 율법을 지키는 자신을 자랑하는 사람들은 많이 나타납니다. 그러나 자기의 죄를 깨닫고 사람과 하나님 앞에 겸손하게 행하는 사람은 별로 나오지 않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증거입니다. 그들은 율법을 받았고 지킨다고 자신을 스스로 자랑하며 율법을 받지 못한 이방인들을 멸시천대했습니다. 그런데 그토록 율법을 강조했던 이스라엘 백성들 다수가 바리새인들이 되고 말았습니다. 바리새인들의 특징은 율법의 정신과는 상관없고 다만 율법의 겉모양을 지키는 것에 힘을 다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상하게도 율법을 강조하면 사람이 더 교만해지고, 자기의 의를 만들려고 애쓰고, 자기를 사랑하고 자랑하는 못된 특성을 보입니다. 율법의 나라 이스라엘 백성들의 역사가 그 증거입니다. 

율법을 자랑하였던 이스라엘 사람들 가운데, 율법 때문에 신실해지고 겸손해지고 하나님을 더 사랑하게 된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요? 율법 단독의 능력으로 그렇게 변화된 이스라엘 사람을 과연 몇이나 볼 수 있을까요? 구약 시대에 경건하게 살았던 참 유대인들은 과연 율법 때문에 그렇게 변화되었을까요?

“나는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 족속이요 베냐민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열심으로는 교회를 박해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라.” (빌 3:5,6)

그리스도를 알기 이전의 사울은 율법 앞에서 흠이 없었습니다. 베냐민 지파의 바리새인 사울에게 율법은 그의 살과 피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때 그에게 진정으로 자기의 죄를 아는 지식이 없었습니다. 자기의 죄를 억제하는 힘도 없었습니다. 만일 그가 율법에게 있는 죄를 깨닫고 이기는 힘을 누렸었다면, 결코 그리스도를 대적하려고 발악하는 일들을 행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역사하지 않으면 율법강조는 귀신을 부를 뿐입니다. 율법 귀신에 붙들리면 율법의 정신과는 무관해지면서 되려 율법을 자랑하고 자기의 의를 높이는 신기한 병증을 보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를 살리고 고치고 성장하게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없는 상황에서 율법을 강조하면 율법 타령만 늘어지게 하고 정작 율법이 요구하고 지시하는 삶을 살지는 않습니다. 

신약의 성도는 더 이상 율법의 지배나 통제를 받으며 신앙생활하는 자들이 아닙니다. 죄값을 갚으라는 율법의 요구대로 그리스도의 몸이 죽을 때,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과 율법은 직접적 연관이 없어졌습니다. 지금은 오직 성령과 말씀이 역사합니다. 구약의 율법도 말씀의 일부로 남아았지 여전히 율법으로 남아있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여전히 율법이 주어진 (율법을 주신) 이유는 우리 죄를 깨닫게 하고 우리 죄를 억제시키는 겁니다.” (정대운)

정대운은 예수님이 우리에게 율법을 주시면서 계속 지키라고 하셨고, 율법으로 인해 우리가 죄를 깨닫고 죄가 억제된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언제 그런 말을 하셨을까요? 저는 예수님에게 제자들에게 율법을 지키라고, 율법으로 죄를 깨닫고 싸우라고 강조하는 말하시는 것을 성경에서 본 적이 없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구원하시고자 먼저 율법을 보내시어 사람들에 대해 율법이 지적하고 요구하는대로 자신이 대신 죽어야 할 것을 알리셨습니다. 실제로 사람이 되어 오신 후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면서 다음과 같이 선언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에 이르시되 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니 영혼이 떠나가시니라.” (요 19:30)

무엇을 다 이루었다고 하신 것일까요? 우리의 구원을 위해 필요한 일, 죄인들에 대해 율법의 요구하는 일을 다 이루었다는 것입니다. 죄인들에 대한 율법의 요구대로 대신 죽으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의 몸이 십자가에서 율법의 요구대로 죽으시는 순간 율법은 그리스도인들에게 더 할 말이 없어졌습니다. 성도는 이미 율법으로부터 자유해진 사람들입니다.

“형제들아 내가 법 아는 자들에게 말하노니 너희는 그 법이 사람이 살 동안만 그를 주관하는 줄 알지 못하느냐.” (롬 7:1)

“내 형제들아 너희도 그리스도의 몸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하였으니 이는 다른 이 곧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이에게 가서 우리가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게 하려 함이라.” (롬 7:4)

“우리가 얽매였던 것에 대하여 죽었으므로 율법에서 벗어났으니 이러므로 우리가 ‘영의 새로운 것’ (in the new way of the Spiri)으로 섬길 것이요 율법 조문의 묵은 것으로 아니할지니라.” (롬 7:6)

그리스도께서 사도 바울이 말한 이 진리를 몰라서 여전히 율법을 자기 백성들에게 남겨 놓으시면서 율법을 지키고 율법으로 죄를 깨닫고 율법으로 죄를 억제하라고 하셨을까요? 우리에 대한 율법의 요구대로 처참하게 죽으셨던 그리스도께서는 이제 말씀과 성령으로 우리가 죄를 깨닫고 이기게 하십니다.

“육신을 좇지 않고 그 영을 좇아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라.” (롬 8:4)

“너희가 만일 성령의 인도하시는 바가 되면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리라.” (갈 5:18)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롬 8:2)

종교개혁자들이 말한 율법의 제3용도를 정대운과 청교도 목사들이 요용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지금도 우리가 죄를 깨닫고 억제시키는 용도로 율법을 사용하신다고 합니다. 그러나 율법의 제3용도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절대로 신약의 성도가 율법으로 돌아가서 율법을 지키고 율법으로 죄를 깨닫고 율법의 강제적인 힘으로 죄를 억압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에 그런 가르침이 없습니다.

율법의 제3용도는 그런 뜻이 아니고 우리가 성령의 열매를 맺고 살고 있는지 옛날 율법에 비추어 보면 확인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령의 열매를 맺으면 자연히 율법이 하지 말라는 더럽고 못 된 일들이 나타나지 않게 되어 있으므로 옛날의 율법과 비교함으로 우리의 신앙의 진실성을 체크해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신약시대의 성도가 율법으로 죄를 깨닫고 억제하게 된다는 주장은 성경을 모르는 사람의 말입니다.  

예를 들어보지요. 우리가 간음 죄에 대해 깨닫고 억제되어진다면, 그것이 어떻게 이루어지나요? 성령께서 마음에 음욕을 품는 것도 간음이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과 방탕하지 말라는 사도 바울의 가르침을 수단으로 삼고 역사하심으로 이루어집니다. 그러면 예수님과 사도 바울의 그 말씀이 율법입니까? 탐심, 우상숭배, 살인, 도적질, 속이는 말 ... 등이 죄임을 알게되는 것은 성령이 그리스와 사도들의 말씀들을 수단으로 삼고 역사하기기 때문입니다. 그 말씀들이 다 율법입니까? 저는 율법이 신약 백성에게 여전히 남아서 죄를 깨닫게 하고 죄를 억제시킨다는 주장을 이해하지 못하겠습니다.   


9:59~10:31분>

“율법주의는 조건절입니다. 조건절! 네가 만약에 율법을 지키면 구원을 얻을 것이다! 니가 만약에 율법을 지키면 복을 받을 것이다! 이게 조건절이잖아요. If 네가 만약에 율법을 지키면 복을 받을 것이다! ... 이렇게 조건절로 나오는 게 율법주의에요. 조건절로 나오는게 이건 철저히 폐기되었습니다. 이것은 복음이 아니라 가짜복음입니다.

그럼 율법은 뭐냐 그러면 네가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면, 그 사랑에 대한 마땅한 반응이 나와야 된다! 근데 네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땅한 반응이 나오지 않으면, 너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다! 이게 율법이에요.” (정대운)

구원받은 사람들의 하나님에 대한 마땅한 반응으로서 우리가 율법을 지킨다고 하였는데, 대체 어떤 율법을 지킨다는 것일까요? 안식일 율법, 음식 율법, 십계명? 대체 무슨 율법준수가 하나님 사랑의 증거라는 것일까요? 신약 성경 어디에 성도의 율법준수가 하나님 사랑의 증거라는 가르침이 있습니까? 제가 알기로는 전혀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구원받은 후 율법준수를 주장하는 자들을 되려 저주했습니다. 

신약의 성도는 그리스도의 몸이 죽는 순간 이미 율법과 무관해졌습니다. 성도는 그리스도의 말씀과 복음을 믿고 구원을 받은 후에 내주하시는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습니다.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인해 죄를 더 깨닫고 죄를 이길 수있습니다. 다시 율법으로 돌아가서 율법을 지키는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말씀과 성령의 열매를 맺는 것이 신약 성도의 삶입니다.

“너희가 만일 성령의 인도하시는 바가 되면 율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리라. 육체의 일은 분명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주술과 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열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 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 (갈 5:18-21)

이와 같이 성경은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는 것이 결국 구약의 율법의 요구와 지시를 이행하는 진정한 길이라고 가르칩니다. 그리스도의 몸이 십자가에서 죽었을 때 율법은 우리들에게서 떠나갔으나, 말씀과 성령의 사역으로 그 율법의 정신이 더 완전한 방식으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 비밀을 모르고 설교하는 목사들이 너무 많습니다. 정대운이 말한 것처럼, 그리스도는 여전히 우리에게 남겨 놓으시고 율법으로 죄를 깨닫고 율법으로 죄를 억제하라고 말하신 적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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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이철 목사는 2004년부터 현재까지 미국 미시간 주 ‘앤아버 반석장로교회’의 담임목사이고 거짓 신학의 ‘견고한 진’(고후10:4)을 무너뜨리기 위해 시작된 신학신문 <바른믿음>의 대표이다.
총신대학(B.A 졸업), 총신대학 신학대학원(M.Div Eqiuv.졸업), 아세아연합신학대학 대학원(Th.M 졸업), Liberty Theological Seminary(S.T.M 졸업), Fuller Theological Seminary(Th.M 수학), Puritan Reformed Theological Seminary(Th.M 수학), Liberty Theological Seminary(D.Min 수학), 남아공신학대학원(South African Theological Seminary, Ph.D)에서 연구하였고, 현재 University of Pretoria(Ph.D)에서 연구하고 있다.
저서로는 「신사도 운동에 빠진 교회」, 「제3의 물결에 빠진 교회」, 「가짜 성령세례에 빠진 교회」, 「피터 와그너의 신사도운동 Story」, 「한 눈에 들어오는 청교도 개혁운동」, 「능동적 순종에 빠진 교회」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