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현재 합동 이대위의 조사를 받고 있는 정성우의 회심준비론 사상을 홍보하는 책 <청교도 준비교리란 무엇인가: 율법의 용도와 은혜의 준비교리>에 추천의 글을 실은 김효남 교수(이후 김효남)의 글을 살펴보도록 하자.

“오늘날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은 놀라운 역사인 회심은 몇 가지 핵심적인 기독교 진리에 대한 지적인 동의의 수준으로 전락해 버렸다. 그리고 피상적인 신앙주의(easy-believism)는 신자의 삶과 주님의 교회에 고스란히 반영되어 성화가 상실되어 기형적 모습의 기독교 신앙을 산출하는 한 원인이 되었다” (김효남, 25 페이지)

김효남은 현대 교회가 사람들에게 쉽게 예수 믿게 함으로 결국 성화가 없는 기형적인 기독교가 탄생되었다고 한다. 성령이 택자를 향하여 하나님이 예비하신 은혜를 따라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여 주시고, 동시에 그리스도를 믿도록 가르치고 설득하여 주시는 불가항력적 은혜(효과적인 부르심)을 따라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얻어지는 구원을 김효남은 Easy-Believism(피상적 신앙주의)라고 평가하였다.

김효남에 의하면 십자가에 달리시고 피 흘리신 예수 그리스도가 싸구려 복음, 즉 Easy-Believism(피상적 신앙주의)의 원흉이다. 왜냐하면 사전에 율법의 기능으로 죄를 깨닫고 겸비한 심령으로 구원을 사모하지 않았던 바로 옆의 다른 십자가에 달려 죽어가는 죄수에게 구원을 허락했기 때문이다. 심지어 성경을 보면 그 죄수는 조금전까지 또 다른 죄수와 같이 그리스도에게 비아냥했던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이 구원을 요청하자 다음과 같이 쉽게 구원을 약속했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 (눅 23:43)

그리스도께서 그 죄수에게 약속하신 구원은 성화가 없는 구원이었을까? 그 죄수가 이후 지상에서 더 오래 살았을지라도 성화를 찾아보기 어려운 이상한 구원을 주신 것일까?

“명절 끝날 곧 큰 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이르시되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요 7:37)

그리스도는 누구든지 자기를 믿으면 구원을 얻고 성령을 받게 된다고 이와 같이 말씀하셨다. 먼저 율법을 지키며 겸비해지지 않아도 그냥 자기를 믿으면 그리된다고 하셨다. 혹시 그때 듣는 사람들 모두가 김효남과 정성우가 주장하는 것처럼, 먼저 율법을 지키면서 죄를 깨닫고 겸비한 자세로 구원을 갈망하는 상태였기 때문에 굳이 율법의 기능으로 준기되어진 사람들만 자기에게 올 수 있다는 말을 하지 않으셨을까?

그렇지 않다. 그리스도께서는 유대인들이 율법준수에 몰입하고 집착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으셨다.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 (요 5:39)

이와 같이 그리스도께서는 구약 성경과 율법이 지시하는 자기 자신에게로 곧장 나오는 것이 복되고 귀하다고 여기셨다. 그리스도는 사람들이 더 이상 율법과 시간 보내지 말고 곧장 자기에게로 나오기를 간절하게 바라셨다.

김효남이 먼저 율법으로 사람이 구원을 위해 준비되게 해야 한다는 거짓 신학을 주장하고 억지부리다가 그만 하나님의 귀한 구원의 은혜를 받은 십자가상의 그 강도와 그에게 구원을 주신 그리스도까지도 싸구려들로 폄하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김효남은 어서 거짓에서 돌이켜야 할 것이다.
 

 

“그러나 종교개혁 이후 개혁파 교회 지도자들과 신학자들은 단호하게 이런 피상적 신앙주의를 물리치고, 성경이 가르치는 회심의 원리를 가르쳤다.” (김효남, 26 페이지)

“준비교리란 그 용어에서 오해의 소지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성경이 가르치고 개혁자들이 가르쳤으며, 역사적 개혁주의 교회에서 가르쳐 왔던 성경적인 교리이다 ... 이는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서에서 강조하고 있는 몽학선생으로서의 율법의 용도를 의미한다.” (김효남, 26 페이지)

종교개혁자 루터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은혜를 통해 얻는 완전하고 영원한 구원을 발견하기 전에 로마교회 신부였고, 율법의 행위로 자기의 구원을 획득하려고 노력하는 어리석은 과정을 거친 사람이다. 루터는 모든 사람들이 자신처럼 그 과정을 거쳐야만 복음으로 참된 이신칭의 은혜에 이르게 된다고 오해하였다. 그것은 종교개혁의 포문을 열었던 루터의 약점이었지 종교개혁의 핵심적 진리는 아니었다.

루터 외의 그 어떤 종교개혁자가, 또는 어떤 개혁파 지도자가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이신칭의 되기 전에 먼저 율법으로 자신을 준비시켜야 한다고 가르쳤는가? 만일 루터의 경험과 생각이 구원의 진리라면, 인간의 어떤 행위나 노력과는 무관하게 오직 은혜를 따라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얻는 '이신칭의'는 어디에 있을까?

사람이 율법으로 자기를 구원하려고 노력하는 과정을 거쳐야만 이신칭의에 이를 수 있다면, 자기를 구원하려고 노력하는 자들만 하나님도 구원하신다는 것이다. 만일 하나님이 그런 분이라면, 김효남이 앞장서 성경에서 다음의 구절을 파내어야 한다.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하지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 (롬 4:5)

사도 바울은 오직 은혜를 따라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에 이르는 기막힌 하나님의 은혜를 이와 같이 설명했다. 기독교는 구원을 위해 스스로 일하는 사람에게 이신칭의를 주는 종교가 아니다. 구원을 위해 전혀 일하지 않았으나 오직 은혜를 따라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이신칭의에 이르는 종교가 기독교이다.

이것이 종교개혁의 핵심이다. 루터는 종교개혁의 최초의 선구자였으므로 이신칭의를 발견하고 선언하는 큰 일을 했으나, 아쉽게도 그 원리를 바르게 정립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칼빈은 이신칭의의 원리도 바르게 정립했다. 칼빈의 신학이 우리의 신학, 개혁교회(장로교회)의 개혁신학이다.

그리고 갈라디아서의 몽학선생 이야기가 회심준비론의 성경적 근거라는 김효남의 주장도 엉터리이다. 갈리디아서의 '율법=몽학선생' 이야기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완성하는 역사적 과정에서 먼저 율법을 보내어 죄인들에게 자기의 행위로 구원에 이를 수 없음을 알게 하신 후 그리스도를 믿음으로만 구원을 얻는다는 원리를 알게 하셨다는 내용이다.

바울의 몽학선생 이야기는 개인의 구원서정적 차원이 아니고 구원사적 차원의 이야기이다. 서철원 박사의 말을 보라.
 

 

“바울은 복음과 율법의 관계를 구원사적으로 이해하였다. 복음의 도입을 위한 준비과정이 율법의 수여이다. 율법으로 구원이 불가능함을 말하고 은혜로만 구원이 가능함을 보이기 위해 율법이 도입되었다. 율법은 본래 지킬 수 없으므로 예수 그리스도가 구원을 이루시고 율법도 성취하셨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면 구원에 이른다. 구원은 율법을 행함에 있지 않고 율법의 목표인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 있음을 밝히기 위해서 율법이 주어졌다.” (신학서론, 201)

만일 개인의 구원을 위해 율법이 지금도 몽학선생 역할을 해야만 그리스도의 복음이 역사하여 구원이 발생된다는 이론이 바울의 신학이라면, 바울이 몸소 그 이론을 실천했던 흔적이 성경에 나와야 한다. 그러나 성경 어디에도 바울이 먼저 율법을 전파하여 사람들을 준비시켰다는 내용이 없다. 만일 그랬다면 율법을 생명으로 여겼던 유대인들이 바울을 죽이려고 그렇게 안달이었을까?

“율법의 선포는 사람의 역할이지만, 그 선포를 듣고 그 안에서 죄를 깨닫게 하는 것은 성령의 역할이며, 성령께서 말씀(율법)으로 죄인을 돌이킬 때 죄인은 수동적으로 당하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의지에 역사하여 그 사람의 본성에 합당하게 그의 의지를 이끌어 내신다. 이는 개혁교회가 주장하는 하나님의 은혜와 인간의 책임과 정확하게 일치한다.” (김효남, 26 페이지)

죄를 지적하는 말씀(율법)을 선포할 때 성령이 죄인이 그리스도를 믿도록 의지를 이끌어 내신다는 김효남의 말은 일면 맞는것 같다. 그러나 율법 조항들을 선포하면 성령이 역사하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을 선포할 때 성령의 그 역사가 택자들에게 일어난다고 해야 맞다. 그래고 그 순간이 바로 중생되는 순간이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인정해야 옳다.

구원은 복음과 함께 성령의 조명과 설득으로 죄인이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고백이 일어나는 순간 발생한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회개, 기도, 예배, 성화가 시작된다. 회개와 기도와 예배와 성화가 나타나는 것은 이미 그 사람 속에서 중생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김효남이 이런 뜻으로 한 말이면 좋겠으나, 그렇지 않으니 문제이다. 김효남은 율법과 성령의 역사로 영적각성(의지의 변화)이 일어난 사람이 자신을 구원되게 하려고 청교도들이 말하는 구원을 위한 공적수단(예배, 설교듣기, 회개, 율법준수 등)을 이용하면서 짧게는 몇 주, 길게는 수 십년 동안 구원을 추구한다는 회심준비론 관점에서 이 말을 했다. 그러니 천주교 구원론이고 알미니안 사상이고 웨슬리안 신학과 같다.
 

 

장로교회의 표준문서(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는 구원을 위해 율법을 선포해야 한다고 가르치지 않는다. 율법과 성령으로 의지의 변화가 일어난 죄인이 스스로 구원을 추구하는 긴 과정에 대해서도 말하지 않는다. 오직 성령의 역사를 따라 죄인이 그리스도를 믿게 됨으로 즉시 구원이 발생하는 생명얻는 회개 사상이 장로교회와 WCF의 가르침이다.

“선택된 자들이 그것으로 말미암아 믿어 그들의 영혼의 구원에 이를 수 있는 믿음의 은혜는 그리스도의 영께서 그들의 마음 속에 행하신 일이시며 일반적으로 말씀의 사역으로 이루어진다. 또한 그것으로 그리고 성례들의 집행과 기도로 그것은 증가되고 강화된다.” (WCF 14:1)

이와 같이 웨신서는 성령이 말씀을 통하여 구원을 일으키신다고 한다. 여기서 말하는 말씀은 그리스도의 복음이다. 율법 조항들이 아니다. 웨신서는 성령이 죄를 알게 하는 율법을 통하여 먼저 영적각성을 일으키신다고 가르지 않는다. 또한 웨신서 어디에도 구원이 연속적이고 장기적인 과정, 즉 회심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성경과 웨신서는 복음전파와 함께 성령이 믿게하심으로 단번에 구원이 일어남을 당연하게 가르친다.

그러나 김효남과 김효남이 옹호하는 정성우는 사람의 구원이 긴 과정의 프로세스라고 주장한다. 정성우의 말을 직접 보자.

“청교도들은 회심(conversion)을 순간적 또는 단번의 사건으로 보지 않았다.” (정성우, 청교도 준비교리란 문엇인가, 31 페이지)

구원이 순간적 사건이 아닌 장기간의 회심 개념이라면 연속적인 중생을 주장하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그래서인지 정성우의 마르투스 선교회에 연중론을 주장하는 손성은 목사가 연관되어 있음을 보았다. 그러나 우리의 신학은 개혁신학(장로교회)이고, 성령이 그리스도를 믿게 하심으로 단번에 이루어지는 구원을 믿는다. 성경은 다음과 같이 단번에 중생을 만들어 내는 회개를 가르친다.

“그들이 이 말을 듣고 잠잠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이르되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방인에게도 생명 얻는 회개를 주셨도다 하니라.” (행 11:18)

웨신서도 다음과 같이 중생을 연속적 과정의 회심이 아니라, 단번에 일어나는 생명에 이르는 회개라고 가르친다.

“생명에 이르는 회개는 복음적 은혜이며, 그 교리는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의 교리와 마찬가지로 모든 복음 사역자들에 의해 전파되어야 한다.” (WCF 15:1)

김효남에게 계속 그릇된 길로 나아가면, 외국에서 어렵게 얻은 학위를 합동 교단 안에서 영원히 써먹지 못하게 될 수 있다. 그러한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극히 주의해야 할 때임을 왜 모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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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이철 목사는 2004년부터 현재까지 미국 미시간 주 ‘앤아버 반석장로교회’의 담임목사이고 거짓 신학의 ‘견고한 진’(고후10:4)을 무너뜨리기 위해 시작된 신학신문 <바른믿음>의 대표이다.
총신대학(B.A 졸업), 총신대학 신학대학원(M.Div Eqiuv.졸업), 아세아연합신학대학 대학원(Th.M 졸업), Liberty Theological Seminary(S.T.M 졸업), Fuller Theological Seminary(Th.M 수학), Puritan Reformed Theological Seminary(Th.M 수학), Liberty Theological Seminary(D.Min 수학), 남아공신학대학원(South African Theological Seminary, Ph.D)에서 연구하였고, 현재 University of Pretoria(Ph.D)에서 연구하고 있다.
저서로는 「신사도 운동에 빠진 교회」, 「제3의 물결에 빠진 교회」, 「가짜 성령세례에 빠진 교회」, 「피터 와그너의 신사도운동 Story」, 「한 눈에 들어오는 청교도 개혁운동」, 「능동적 순종에 빠진 교회」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