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의 능·수동 순종을 통한 칭의는 개혁파 정통 교리”인가? (1)

 

 

글을 시작하며

2021년 11월 16일 [기독교포털뉴스]에 “그리스도의 능·수동 순종을 통한 칭의는 개혁파 정통 교리”라는 제목에, “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 제 33회 정암신학강좌서 김병훈·박상봉·이승구 교수 재천명”이라는 소제목으로 ‘하나님의 칭의는 그리스도의 능동순종과 수동순종을 통해서 이루어졌다’는 김병훈, 박상봉, 이승구 교수의 강의를 정윤석 기자에 의해 요약 보도되었다.

물론 필자는 이 강의들을 듣지 못했다. 그러므로 [기독교포털뉴스]에 실린 요약 기사만 가지고 “그리스도의 능·수동 순종을 통한 칭의는 개혁파 정통 교리”라고 주장하는 세 명의 교수들의 문제점들을 차례로 비판하려고 한다.

강의를 듣지 않고 정윤석 기자의 요약 기사만 가지고 비판하는 일이 조심스럽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세 명의 교수들이 강의에서 인용한 것들은 분명히 “능동순종 교리”를 옹호하기 위하여 사용했음이 분명하다는 전제 아래서 비판하려고 한다(정윤석 기자의 기사 전문은 2021.11.16., 기독교포털뉴스의 기사를 참고하라).

김병훈 교수의 강의 요약 기사에서

“김병훈 교수는 “그리스도의 순종으로 인하여 죄인이 의롭다함을 받는 은혜가 주어진다는 교리는 종교개혁 신학의 핵심적인 토대”라며 개혁교회는 그리스도의 순종을 ‘그리스도의 생애의 전체적 순종’(능동순종)과 ‘십자가의 순종’(수동순종)으로 나눠왔다고 밝혔다.” (“그리스도의 능·수동 순종을 통한 칭의는 개혁파 정통 교리”, 2021년 11월 16일, 기독교포털뉴스)

김 교수는 “그리스도의 순종으로 인하여 죄인이 의롭다함을 받는 은혜가 주어진다는 교리는 종교개혁 신학의 핵심적인 토대”라는 말로 종교개혁자들의 신학에 “능동순종”을 포함시키려고 시도하고 있다.

그러나 이는 독자들을 미혹하려는 궤변에 불과하다. 왜냐하면 김 교수는 “그리스도의 순종”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명백하게 밝히지 않은 모호한 상태에서, 독자들에게 “순종”이라는 단어에 시선을 두게 만들어서 마치 “그리스도의 순종으로 인하여”에 “능동순종”이 포함되어 있는 것처럼 독자들을 미혹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순종으로 인하여 죄인이 의롭다함을 받는 은혜가 주어진다는 교리는 종교개혁 신학의 핵심적인 토대”라는 말이 독자들을 미혹하지 않는 정언이 되려면, “그리스도의 순종”이 구약의 희생 제사를 통해 수없이 계시했던 하나님의 구원 계획, 즉 죄인들을 죽여 심판하는 대신에 그의 아들을 대속 제물로 십자가에서 죽이시는 심판을 통해서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하시려는(마1:21/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구원 계획에 대한 전적인 “그리스도의 순종”임을 분명히 밝혀야 한다.

왜냐하면 이것이 하나님의 구원과 관련해서 성경이 말하는 “그리스도의 순종”이기 때문이며(빌2:8/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칼빈을 비롯한 종교개혁 신학자들의 신학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뒤에 보겠지만, 김 교수가 “능동순종 교리”를 옹호하기 위하여 칼빈의 기독교강요 2권 16장 5절을 제시했지만, 오히려 칼빈은 여기서 “그리스도의 순종, 즉 십자가에 죽으심의 순종으로 죄인이 의롭다함을 받는 은혜가 주어진다.”는 것을 분명히 하고 있다(기독교강요 2권 16장 5절에 대해서는 조금 뒤에 상세히 언급할 것이다).

또 김병훈 교수의 “개혁교회는 그리스도의 순종을 ‘그리스도의 생애의 전체적 순종’(능동순종)과 ‘십자가의 순종’(수동순종)으로 나눠왔다고 밝혔다.”는 언급은 역사적인 사실임에 틀림없지만, 이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순종의 독특성 때문에 그의 다른 순종들과 구별하기 위한 것이었지, 십자가의 순종 외에 다른 순종도 구원에 기여했다는 것을 말하기 위함이 아니었다.

처음부터 개혁교회(여기서 필자가 말하는 개혁교회는 무늬만 개혁교회가 아니라, 진짜 정통 개혁교회를 의미한다)는 “능동순종”과 “수동순종”이라는 용어조차 알지 못했다. 아마 그래서인지 김 교수도 괄호를 사용해서 ‘그리스도의 생애의 전체적 순종’을 “능동순종”으로, ‘십자가의 순종’을 “수동순종”으로 표기한 것 같다.

그러나 김 교수가 사용한 이런 용어들은 그리스도의 순종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무지에서 비롯된 웃픈(웃기지만 슬픈 일) 일이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까지의 자신의 순종에 대하여 “내가 너희들의 의를 위해서 스스로 율법을 능동적으로 순종하고 있다“는 말씀을 하신 적이 없기 때문이다. 아니 어디에서도 “능동순종 교리”를 암시하는 말씀조차도 하지 않으셨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신의 십자가의 죽음에 대해서는 스스로 자원하는 “능동순종”(적극적인 순종)임을 여러 차례 말씀하셨다.

예를 들면, 요10:11(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요10:15(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요10:17-18(내가 내 목숨을 버리는 것은 그것을 내가 다시 얻기 위함이니 이로 말미암아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느니라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 나는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으니 이 계명은 내 아버지에게서 받았노라 하시니라), 마26:53-54(너는 내가 내 아버지께 구하여 지금 열두 군단 더 되는 천사를 보내시게 할 수 없는 줄로 아느냐 내가 만일 그렇게 하면 이런 일이 있으리라 한 성경이 어떻게 이루어지겠느냐 하시더라) 등에서 예수님은 자신의 십자가의 죽음이 적극적인 능동순종이라는 점을 분명히 하셨다.

물론 성육신 이후의 예수님의 모든 순종이 다 예수님의 자의에 의한 능동적인 순종임에는 틀림없다. 그럼에도 십자가의 죽으심의 능동순종은 다른 모든 능동순종들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 절대적인 “능동순종”이다. 왜냐하면 십자가의 능동순종은 다른 모든 능동순종과는 전혀 다르게 그리스도께서 죄인들을 의롭게 하시기 위해 대속물이 되시는 유일한 능동순종이기 때문이다(마20:28/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그러므로 “능동순종 교리”를 옹호하는 자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수동순종”(소극적인 순종)이라고 묘사하는 것은 하나님의 구원 사역에 대하여 이들이 성경적으로 얼마나 무지한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필자는 “능동순종 교리”를 옹호하는 자들에게 정중히 제안한다. 먼저는 성경을 다시 잘 읽어보라고 말이다. 그러고 나서 “능동순종과 수동순종”이라는 용어를 “능동순종(율법에 순종하심)과 구원을 위한 ”절대적인 능동순종“(십자가에 죽으심)”으로 바꾸라고 말이다.

정윤석 기자에 의하면 김 교수는 “칼뱅의 기독교강요(2권 16장 5절)에서 그리스도의 복종이 전생애에 걸쳐서 이루어졌다고 봤으며,”라고 했다. 강의 내용은 잘 모르겠지만, 아마도 김 교수는 칼빈도 기독교강요(2권 16장 5절)에서 “능동순종”을 옹호하는 태도를 취했다는 취지로 강의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김 교수가 제시한 칼빈의 기독교강요 2권 16장 5절~7절의 제목으로 제시한 “The effects of the obedience and death of Christ, 5-7”(그리스도의 순종과 죽음의 효과, 5-7)을 보면, 칼빈도 그리스도의 순종과 죽음을 구별하여 나눈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김 교수는 이를 “능동순종”과 “수동순종”을 의미하는 것처럼 제시했겠지만, 그러나 칼빈의 “The effects of the obedience and death of Christ”에는 “능동순종과 수동순종”의 의미는 전혀 없다. 오히려 칼빈은 십자가의 죽으심의 순종과 다른 순종이 주는 효과가 다르다는 것을 말하기 위해 이 둘을 구별했을 뿐이다.

칼빈은 이를 분명히 하기 위해 기독교강요 2권 16장 5절을 시작할 때, “Christ has redeemed us through his obedience, which he practiced throughout his life”(그리스도는 그의 순종을 통하여 우리를 구원하셨는데, 그는 평생 동안 그의 순종을 실행하셨다)라고 말하고 난 뒤에, 곧 이어 본 설명에서 “he accomplished this by the whole course of his obedience.”(그는 그의 순종의 전 과정에 의해 이를 성취하셨다)라는 말로, “그의 순종”이 “십자가의 죽으심”임을 말하기 위해 한 걸음 더 나아간다.

칼빈은 뒤이어서 “그가 그의 순종의 전 과정에 의해 성취한 “이를(this)”이 무엇인지를 밝히기 위해, 롬5:19(한 사람의 순종치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같이 한 사람의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느니라)을 제시한다. 칼빈은 헬라어에 능했기 때문에 롬5:19에서 바울이 단수로 표기한 ”한 사람의 순종“이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의미한다는 것을 알았을 것이다.

따라서 칼빈이 “he accomplished this by the whole course of his obedience.”(그는 그의 순종의 전 과정에 의해 이를 성취했다)의 근거 본문으로 제시한 롬5:19을 염두에 두면, 예수님이 자신의 순종의 전 과정을 통해 성취하신 “이를(this)”이 “십자가의 죽으심의 순종”이었음이 너무나도 명백하다.

그럼에도 “능동순종 교리”를 주장하는 자들은 “한 사람이 순종하심으로”(롬5:19)에서의 예수님의 순종을, 율법을 철저하게 지키신 ‘능동순종’과 십자가에서 죽으신 ‘수동순종’ 모두를 의미한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그들은 하나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는 방법에 “십자가” 외에 “능동순종”이 있다는 것이 성경적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는 자신들의 생각으로 만들어낸 ‘능동순종’ 교리를 롬5:19에 억지로 끼워 맞춘 터무니없는 해석이며 주장이다.

롬5:19에서 바울은 “διὰ τῆς παρακοῆς”(디아 테스 파라코에스/한 사람이 순종하지 아니함으로)에서 “παρακοῆς”(파라코에스/순종하지 아니함)를 단수로 표기한다. 이는 많은 사람의 죄인 됨이 아담의 단 하나의 불순종, 즉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따먹은 행위임을 가리키기 위함이다. 동일하게 바울은 “διὰ τῆς ὑπακοῆς”(디아 테스 휘파코에스/한 사람이 순종하심으로)에서 “ὑπακοῆς”(휘파코에스/순종하심)도 단수로 표기한다.

이는 많은 사람의 의인됨이 그리스도의 단 하나의 순종, 즉 십자가의 죽으심의 순종을 가리키기 위함이다. 바울은 “한 사람이 순종하심으로”(롬5:19)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미 롬5:6-10에서 길게 진술하였다. 롬5:6-10(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의 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받을 것이니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은즉 화목하게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것이니라)을 보라. 바울이 롬5:19에서 말하는 “한 사람이 순종하심으로”가 그리스도의 죽으심의 순종이 너무나도 명백하지 않는가!!

바울은 빌2:8(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에서도 죄인들의 구원이 예수님의 단 하나의 순종, 즉 십자가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았음을 더욱 분명히, 아예 노골적으로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고 단언하고 있다. 칼빈도 이를 몰랐을 리 없었기 때문에, 조금 뒤에 가서, “however, the more certainly to define the mode of salvation, ascribes it peculiarly and specially to the death of Christ.”(그러나 구원의 방법을 더 정확하게 정의하기 위하여, 성경은 그것을 유일하게, 그리고 특별하게 그리스도의 죽음에 돌린다)는 진술로 롬5:19의 “한 사람의 순종하심으로”가 곧 “그리스도의 죽으심의 순종으로”임을 더욱 분명히 한다.

칼빈은 이를 성경적으로 뒷받침하기 위하여, 뒤이어 마20:28(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롬4:25(예수는 우리가 범죄한 것 때문에 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 요1:29(이튿날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이르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롬3:24-25(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롬5:9-16(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의 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받을 것이니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은즉 화목하게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것이니라.......), 고후5:21(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을 제시한다.

이렇게 칼빈은 하나님의 구원 방법이 구약의 희생 제사를 통해 수없이 계시되었던 것처럼, 바울이 성령의 감동하심으로 기록한 롬5:19의 메시지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의 자신을 드리는 희생 제사의 순종을 통해서만 구원이 있다”라는 움직일 수 없는 진리임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었다. 그런데 어째서 김 교수는 칼빈의 기독교강요 2권 16장의 5절을 “능동순종 교리”를 옹호하는 것처럼 변조시키려고 하는가?

앞으로는 “능동순종 교리”의 옹호자들은 적어도 위대한 개혁 신학자인 칼빈의 말을 이용해서 “능동순종 교리”를 옹호하려는 시도는 그만 했으면 좋겠다. 왜냐하면 칼빈의 개혁 신학에는 그 어디에도 비성경적인 “능동순종”의 개념은 없기 때문이다. 아마도 “능동순종” 개념은 16세기 말이나 17세기 초에 일부 신학자들에게서부터 시작된 것처럼 보이며, 이때 생겨난 “능동순종” 개념이 웨신서 8장 5절과 11장 3절에도 영향을 준 것처럼 보인다(물론 웨신서 8장 5절과 11장 3절의 원문을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따라서 그것이 아닐 개연성도 얼마든지 있다).

김 교수가 주장하는 “능동순종 교리”는 1세기 갈라디아 교회의 거짓교사들에 의해 조작된 “다른 복음”의 21세기 판 버전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능동순종 교리”는 1세기 갈라디아 교회의 거짓교사들이 율법 순종을 내세워 십자가를 공격한 “다른 복음”과 너무나도 유사하기 때문이다. 한 가지 다른 점이 있다면 갈라디아 교회의 거짓교사들의 “다른 복음”은 십자가에 인간의 율법 순종을 더함으로써 십자가를 무너뜨리려는 시도였다면, 지금의 “능동순종 교리”는 십자가에 그리스도의 율법 순종을 더함으로써 십자가를 무너뜨리려는 시도라는 점이다.

이런 이유로 십자가에 인간의 율법 순종을 더한 갈라디아 교회의 거짓교사들의 “다른 복음”보다는, 십자가에 그리스도의 율법 순종을 더한 지금의 “능동순종 교리”가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을 속일 수 있을 것 같다. 왜냐하면 인간의 율법 순종보다는 그리스도의 율법 순종이 훨씬 더 그럴듯하게 보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바울이 전한 그리스도의 복음은 “능동순종 교리”가 아무리 그럴듯하게 보인다할지라도, 거짓교사들의 다른 복음을 저주한 것처럼(갈1:8/그러나 우리나 혹은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능동순종 교리”도 동일하게 저주할 것이다. 왜냐하면 “능동순종 교리”는 그리스도의 율법 순종을 십자가에 더하는 방식으로 십자가를 약화시킴으로써, 궁극적으로 십자가에서 이루신 그리스도의 구원을 무효화시켜 버리는 무서운 교리이기 때문이다.

김 교수의 “김 교수는 결과적으로 1647년 채택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에 그리스도의 순종을 능·수동으로 구분하는 입장이 선명하게 나타난다는 것을 보여줬다고 분석했다. 신앙고백서에서 “주 예수님께서는 완전한 순종, 그리고 그분 자신을 드린 희생제사로 말미암아 성부 하나님의 공의를 완전히 만족시키셨다”(8장 5절).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순종, 그리고 죽음으로, 이렇게 의롭다하심을 받는 모든 사람의 빚을 완전히 청산하셨으며”(11장 3절)가 대표적이다.“(“그리스도의 능·수동 순종을 통한 칭의는 개혁파 정통 교리”, 2021년 11월 16일, 기독교포털뉴스)는 다음에 쓸 “그리스도의 능·수동 순종을 통한 칭의는 개혁파 정통 교리”인가?<2>에서 웨민서 8장 5절과 11장 3절을 중심으로 조심스럽게 다루려고 한다.
 

글을 마치며

아래에 소개하는 일련의 설교는 “능동순종”에 심취한 청교도주의자인 J 목사의 설교 중 일부이다. 그가 “능동순종”을 예수님의 적극적인 순종이라고 목소리를 높이면서, 십자가를 얼마나 약화시키고 있는지 살펴보라(J 목사의 기가 막힌 설교의 실체를 확인하려면, <바른믿음>의 2021.12.20. “청교도 신학-웨신서의 행위언약 붙들면 반드시 십자가를 비켜갑니다”를 보라). 이것이 “능동순종 교리”, 청교도주의가 빚어낸 대 참사의 현장이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 참사의 희생자가 되었을지는 상상만 해도 몸서리가 쳐진다.

“그리스도의 의를 전가받아야 하는데, 그리스도의 의에는 적극적인 의와 소극적인 의가 있어요. 소극적인 의는, 이건 정확하게 말하면 의미상 두 개를 나누는 것입니다. 소득적인 의는 예수님의 소극적으로 하나님의 벌을 받아들이는 것은 소극적인 의라고 그래요. 소극적인 의는 여러분들이 십자가에서 찢겨서 죽어야 하는데, 그 죄를 우리 주님이 감당하신 거예요. 우리 주님이 적극적으로 찾아가면서 십자가에 매달린 것이 아니라, 로마 병정이 붙들었고, 유대인들이 고소했고 ... 이것이 주님이 적극적으로 찾아가서 당하신 것이 아니므로 이것을 그리스도의 소극적인 의라고 그럽니다. 이 소극적인 의는 여러분들이 예수님처럼 죽을 수밖에 없는 자들이고 여러분들이 지옥에 갈 수밖에 없는 자들인데, 그것을 우리 주님이 십자가에서 감당하심으로 말미암아 그 의를 우리 주님이 획득하셨다! 그 의는 소극적인 의이다.

그러면 적극적인 의는 뭐냐? 우리 주님이 일평생을 살아가면서 적극적으로 율법을 지켜 나가시는 것을 적극적인 의라고 하는 거예요. 우리 주님께서는 소극적인 의와 적극적인 의, 두 개를 딱 가지고 있습니다. 이 두 개를 여러분들이 함께 받아야 합니다. 소극적인 의는 여러분들이 죄용서 받고 지옥에 가야 할 수밖에 없는 것을 대신 치러주신 것을 받은 거예요. 할렐루야! 그래서 여러분들이 지옥에 가지 않아요. 문제는 뭐냐 하면, 여러분들은 지옥에 가지 않아도 하나님 앞에서 의인으로 설 수가 없어요. 왜 우리는 율법을 지키지 않았지만, 단지 예수님께서 그것(십자가)을 대신 저주어서 지옥에 가지 않을 뿐이지, 우리가 하나님과 의의 관계를 가질 수가 없는 거예요. 하나님과 의의 관계를 가지려면, 우리 주님이 적극적으로 율법을 성취하심으로 말미암아 얻으신 의의 옷을 입혀 주어야 합니다. 우리 주님의 적극적인 의는 여러분들의 옷을 만들어 준 것이고, 할렐루야! 소극적인 의는 여러분들이 지옥에 가는 것을 막아주는 겁니다. 예를 들어볼게요. 탕자를 보겠습니다. 탕자의 마음속에 어느 순간에 먹을 것이 더 이상 없으니까 아버지 집에 가면 먹을 것이 풍성하고 ... 이런 마음이 드는 거예요.”(바른믿음, 정이철, “청교도 신학-웨신서의 행위언약 붙들면 반드시 십자가를 비켜갑니다”, 2021.12.20.)

너무나 기가 막혀서 위 설교에 대한 코멘트는 하고 싶지 않다. 그러나 이 설교를 듣는 신자들이 모르고 아멘하면 큰일 날 일이니까 “능동순종”이라고 하는 적극적인 순종의 강조가 얼마나 위험한 다른 복음인가를 성경 말씀으로 지적하는 일은 해야만 하겠다.

J 목사는 “우리는 율법을 지키지 않았지만, 단지 예수님께서 그것(십자가)을 대신 저주어서 지옥에 가지 않을 뿐이지, 우리가 하나님과 의의 관계를 가질 수가 없는 거예요.”라고 말함으로써, 십자가만으로는 지옥은 면제되어도, 하나님과 의의 관계는 가질 수 없다고 단언한다. 그런데 이런 말들이 성경 어디에 있는가? 성경 어디에도 없다.

그러나 오히려 성경은 오직 십자가만으로 이것을 가능하게 한다고 선언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과 우리를 화목케 하는 것은 예수님의 율법 순종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밖에 없다고 성경이 선언하고 있다는 말이다. 하나님과의 화목과 교제는 십자가로 충분하다는 성경 말씀은 성경 도처에 널리고 널려있다.

그것들 중 몇 개만을 소개하면, 롬5:10(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은즉 화목하게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것이니라), 엡2:12-13(그 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는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엡2:16(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골1:20(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이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하게 되기를 기뻐하심이라) 등이다.

필자는 J 목사에게 묻고 싶다. J 목사가 그렇게 자신 있게 외친 “우리는 율법을 지키지 않았지만, 단지 예수님께서 그것(십자가)을 대신 저주어서 지옥에 가지 않을 뿐이지, 우리가 하나님과 의의 관계를 가질 수가 없는 거예요.”라는 말이 성경 어디에 있는지 말이다.

또 J 목사는 “하나님과 의의 관계를 가지려면, 우리 주님이 적극적으로 율법을 성취하심으로 말미암아 얻으신 의의 옷을 입혀 주어야 합니다.”라고 말한다. 그런데 이런 말들이 성경 어디에 있는가? 성경 어디에도 없다. 그러나 계7:13-14(장로 중 하나가 응답하여 나에게 이르되 이 흰 옷 입은 자들이 누구며 또 어디서 왔느냐 내가 말하기를 내 주여 당신이 아시나이다 하니 그가 나에게 이르되 이는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인데 어린 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느니라)은 흰 옷, 즉 의의 옷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는다고 말하고 있다. 다시 말하지만, “능동순종 교리”는 성경에 없는 다른 복음이다.

그러므로 더 이상 다른 복음에 미혹되는 자들이 발생하지 않도록 반드시 청산되어야 한다. 이런 이유로 <바른믿음>은 천하보다 귀한 영혼들을 위해서, 그리고 너무나도 귀중한 주의 몸 된 교회들을 위해서, 다른 복음인 “능동순종 교리”를 향해 진리의 검을 빼든 것이다(엡6:17/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

끝으로, 만약 J 목사가 이 글을 읽는다면 반드시 “적극적인 순종으로 의의 옷을 우리에게 입혀주셨다”는 설교를 뒷받침하는 성경 구절을 제시하여 자기 설교에 책임을 지기 바란다. 만약 제시할 성경 구절이 없다면, 회개하고 능동주의 교리, 청교도주의를 버리는 것이 모두를 위해 복될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히4:12)

SNS 기사보내기
기사제보
저작권자 © 바른믿음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창모 목사는 죽음에 이르는 병에 걸린 한국 교회를 신물 나게 체험하며 갈등하다 하나님을 향해 살아 있는 교회를 꿈꾸며 1999년 김천에서 ‘제자들 경배와 찬양교회’를 개척하였다. 이창모 목사는 한국교회를 죽음에 이르게 한 병이 단지 성공주의, 황금만능주의, 도덕적 윤리적 타락 등이 아니고 이미 한국교회에 만연된 잘못된 신학에 있음을 확신하고서 무엇이 바른믿음인지 신학적으로 깊이 고민하는 목사이다. 이창모 목사는 자신이 중2때 수련회에서 방언을 받았고, 대부분의 목사들이 그것을 ‘영의 기도의 언어’라고 가르치므로 의심없이 수 십년 동안 옹알거리는 방언현상으로 기도(?)하였던 대표적인 방언기도자였다. 김우현, 김동수 등이 저술한 거짓 방언을 미화하는 한심한 서적들을 접한 후 방언에 관한 깊은 신학적인 성찰을 시작하게 되었고, 결국 오늘 날 방언이라고 알려진 소리현상과 성경의 참된 방언은 무관하다는 사실을 확신하게되었다. 이전의 자신처럼 방언으로 기도한다고 착각하고 있는 다른 목회자들과 신자들을 진정한 복음으로 돌이키기 위해 <방언, 그 불편한 진실>(밴드오부퓨리탄,2014)을 출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