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송제일교회 정대운 목사의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7:1-2항 강해 설교를 들어 보았다. 먼저 웨신 7:1-2항의 내용이 무엇인지 직접 읽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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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언약의 기본 성격: 하나님과 피조물의 차이는 매우 크기 때문에, 비록 이성적 피조물들이 그들의 창조자로서 그에게 마땅히 순종할 의무가 있을지라도, 그들은 결코 그에게서 나오는 어떤 열매도 그들의 복과 상급으로 가질 수 없으며, 오직 그가 언약의 방식으로 표현하기를 기뻐하신 하나님 편에서의 어떤 자원적 낮추심에 의해서 뿐이다.

2. 행위 언약: 사람과 맺으신 첫 언약은 행위 언약이었는데, 거기에서 완전한 개인적 순종을 조건으로 아담과 그 안에서 그의 후손들에게 생명이 약속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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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서는 피조물에게 구원에 대한 언약을 주실 필요가 없었음에도 언약을 주신 것 자체가 피조물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라는 설명이다. 1항의 내용은 지극히 옳다. 그러나 2항이 문제이다. 하나님이 아담을 만드시고 그가 완전하게 (율법에) 순종하면 생명을 주시겠다는 조건적 언약을 주셨다는 내용이다. 2항의 내용은 기독교 신앙의 중심(구원론)을 하나님의 은혜의 사랑으로부터 벗어나게 하는 심각한 거짓부렁이다.

아담은 처음부터 하나님 백성으로, 처음부터 죽지 않을 영생을 누리도록 창조되었다고 해야 맞는 말이다. 아담이 생명을 얻기 위해 자신의 율법적 행위가 요구되었다는 것은 청교도들이 자기들의 개혁운동을 쏘아올리기 위해 만들어 낸 그들의 신학 패러다임이었다. 청교도들이 자기들의 운동을 성공시키기 위해 노력한 것은 뭐라 할 일이 아니나, 하나님의 선하시고 완전한 창조와 아담의 상태를 왜곡하는 것은 일종의 역적질이었다. 자기들의 목표를 위해 하나님의 은혜를 왜곡하여 이용하는 종교적 사기였다. 청교도주의자 정대운 목사가 이 부분을 어떻게 강해하였는지 살펴보자.
 

12:39초부터>
“이 언약 사상 중에서 오늘 우리가 보아야 할 언약이 무엇이냐 하면 바로 행위언약입니다. 이 행위언약은 17세기 청교도들에게 엄청난 논쟁거리였습니다. 17세기 이전에는 행위언약이라는 단어 자체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보니까 아담과 하나님이 맺은 언약은 아담 이후 사람들과 하나님이 맺은 언약들과는 조금 달라요. 그 다른 것은 논의하다가 보니까 17세기 근 100년 동안 박작지근하게 싸웠던 것이 아담의 행위언약에 관한 문제였고, 그 이후부터 아담의 행위언약이라는 단어가 선명하게 등장했고, 바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7장 2항은 정확하게 ‘사람과 맺은 첫 언약은 행위언약이다’라고 들어간 것이예요” (정대운 목사)

->17세기 이전에는 행위언약이라는 단어 자체가 없었다고 한다. 단어 자체가 없었으면 그 단어로 표현되는 개념 또한 없었다는 것이다. 정대운 목사가 스스로 정답을 말하였다. 신약의 사도들과 종교개혁자들과 종교개혁을 완성하고 개혁신학의 뼈대를 완성한 칼빈에게는 행위언약이라는 단어나 그런 개념 자체가 없었다. 하나님이 아담에게 스스로 율법적 행위로서 생명을 얻어라고 했다는 행위언약은 신약의 사도들이나 초대교회의 공의회와 교부들의 신앙에 없었던 것이다. 종교개혁자 칼빈에게도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웨신서에 들어가게 되었을까? 웨신서나 나오기 50년 전에 청교도들의 아버지윌리엄 퍼킨스에 의해 본격으로 주장되었고, 그것이 청교도운동의 신학적 모토가 되었기 때문이다. 사람이 노력하여 자기 구원을 이루어야 한다는 신학적 모토로 국교회 신자들의 의식을 깨우는 것이 청교도 운동의 본질이었다. 50년 후 청교도운동의 꽃, 웨신서가 만들어 질 때 행위언약 사상이 들어가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던 것이다.

이런 내막을 알지 못하면서 마치 행위언약 개념이 신약의 사도들과 교부들과 칼빈을 통해 면면히 이어져 온 장로교회의 긴본 신학인 것처럼 가르치는 것은 소경이 소경들을 만들어서 재미나게 인도하는 (목회하는) 속임수이다.

36:51초부터>
“아담의 언약을 행위언약이라 그러고요, 행위언약과 반대말을 은혜언약이라고 그럽니다. 행위언약은 아담이 타락전에 조건부로 주신 거예요. ‘너가 이걸하게 되면 이런 복을 받을 것이고, 이거하지 아니하면 너는 혼날 것이다. 이게 행위언약입니다. 조건부입니다. 그런데 아담의 타락 이후에는 은혜언약으로 바뀌었어요. 아담 이후의 범죄한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서 언약의 당사자의 순종의 여부를 떠나서, 이것이 중요합니다. 언약 당사자의 순종의 여부를 떠나서, 신실성의 여부를 떠나서, 여러분이 언약을 지키는지 여부를 떠나서 불가항력적으로 구원시키는 것이 은혜언약입니다,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하나님과 아담의) 행위언약은 무엇일까요? 조건부예요. ‘너가 이렇게 하면 이렇게 할 것이고 너가 저렇게 하면 저렇게 할 것이다’라는 조건부입니다. 근데 여기에 반해서 은혜언약은 조건부가 아니예요.” (정대운 목사)

->청교도들이 은혜언약이라고 부르는 것은 성경에 새언약으로 나온다. 성경대로 새언약이라고 해야 바르다. 새 언약은 첫 언약을 받은 아담이 교만해져서 하나님께 반역함으로 파괴된 ‘첫 언약’, 즉 청교도들이 행위언약이라고 왜곡하여 부르는 것을 그리스도를 통해 다시 복구하신 언약이다. 구약성경에서 이미 새언약이 예고되었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보라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새 언약을 세우리라” (렘 31:31)

그리스도께서는 구약 성경이 예고하신 대로 자신이 십자가에 달려 언약의 피,속죄의 피를 흘리심에 기초하여 자기를 믿는 백성들의 대표인 사도들과 새언약을 체결하였다.

“저녁 먹은 후에 잔도 이와 같이 하여 가라사대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니 곧 너희를 위하여 붓는 것이라” (눅 22:20)

“식후에 또한 이와 같이 잔을 가지시고 가라사대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니 이것을 행하여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 하셨으니” (고전 11:25)

아담과의 첫언약, 즉 청교도들이 말하는 행위언약은 생명이 없는 인간이 생명을 얻기 위한 조건적 행위에 기초하고, 새언약은 인간에게 아무런 조건을 요구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은혜에 기초한다는 설명은 성경을 왜곡하는 청교도들의 논리이다. 신,구약을 관통하는 하나님의 언약의 본질은 언제나 하나이다. 언제나 같은 특성을 가진다. 하나님이 자기를 찬송하는 자기 백성을 가지기 위해 전적으로 자기의 은혜와 주권에 기초하여 베푸신 언약이다. 이렇게 설명해야 신자들이 하나님 신앙을 바르게 배운다.

아담과의 첫 언약, 즉 청교도들의 행위언약 부분에서는 하나님을 인간의 자질과 행위를 보고 죽이고 살리는 악마로 만들어 버린 것이 청교도들의 차고 넘치는 첫 번째 악이었다. 하나님이 자기를 찬송하는 자기 백성을 가지기 위해 창조를 행하셨는데, 왜 사람을 만들고서 노력하여 스스로 생명을 얻고 자기 백성이 될 수 있는 조건을 제시했다고 하는가? 잉글랜드 백성들의 자세와 신앙의식을 깨워 국교회를 대적하게 만들기 위한 청교도 운동 소비자들을 만들기 위한 신학이었다. 청교도들의 신학은 성경이 가르치는 신학이 아니고 청교도 운동 소비자를 양산하기 위한 거짓된 신학이었다.
 

38:55초부터>
“타락하기 전에는 행위언약이었습니다. ’너가 이렇게 하면 이렇게 복을 주겠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이 행위언약도 크게 보면 은혜언약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를 주셔야 할 이유가 전혀 없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대접해 주었던 것이 행위언약이었어요. 그러면 (웨신서 7장) 제2항 좀 더 보겠습니다. ’사람과 맺은 첫 언약은 행위언약이었다. 이 안에서 아담과 그 안에서 그의 후손에게 생명이 약속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이걸 지켜서 그러면 생명을 주겠다’입니다. ‘이 생명은 완전하고 개별적인 순종의 조건’에 주어진 약속입니다. 중요한 것이 무엇이냐 하면, 완전하다는 것입니다. 완전하다는 것은 내가 하나님께 순종하는데, 몸으로만 순종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도 기쁘게 순종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7:2항에 보면 ‘이 생명은 완전하고’할 때 완전이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께 순종할 때 그냥 육체만 순종하는 것이 아니고 내 마음 자체가 완전히 순종해야 한다는 것이예요. 그러지 아니하면 불순종으로 되는 것입니다.” (정대운 목사)

->아담이 타락하기 전에 아담이 스스로 노력하여 생명을 얻으라는 행위언약도 넓게 보면 하나님이 은혜로 주신 은혜언약이라는 설명은 말장난이다. 타락하기 전의 아담은 그 존재 자체가 성전이었다. 즉, 하나님의 영을 모시고 사는 하나님 백성이었다. 루터와 칼빈은 그렇게 아담을 이해하였다. 죄가 들어오지 않은 순정 상태의 아담과 에덴동산은 하나님의 임재를 모시고 사는 성전 기능을 수행하였다는 것이 기독교 정통 신학의 가르침이다.

그때 아담에게 하나님이 주신 생명이 없었다는 것이 말이 되는가? 지금 우리가 죄용서 받고 거듭난 순간부터 하나님을 모시고 살고 있다. 우리 속에 내주하시는 성령이 비록 육신은 잠시 죽을지라도 이미 영원한 생명을 소유하고 있음을 영원히 증거한다. 죄 가운에서 구원받은 우리가 이러한 것처럼, 죄를 범하지 않았던 아담은 처음부터 생명을 소유한 하나님 백성이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그를 피조 세계의 선지자로, 제사장으로, 왕으로 삼고 다음과 같이 명령하셨던 것이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창 1:28)

하나님이 자기를 찬송하도록 지으신 백성 아담을 하나님 백성도 아니고 생명도 없는 자로 만들고서, 율법을 완전하게 지켜서 스스로 생명을 얻으라는 행위언약을 하나님이 그에게 주셨다는 청교도들의 신학은 성경적 신학이 아니었다. 단지 청교도 운동 불꽃놀이를 위한 신학이었다.
 

42분 01초부터>
”우리가 행위언약에 대해서 알아야 하는 이유가 무엇이냐 하면, 우리 예수님이 이루신 일들이 얼마나 위대한 것인지를 깨닫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우리 예수님은 행위언약에 대해 아담은 실패했는데, 우리 예수님이 행위언약을 100% 완성하신 거예요. 그 마음에 완전하게 순전하게 완벽하게 우리 예수님이 행위언약을 완성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 주님의 행위언약의 공로를 통해서 저와 여러분들은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더 이상 그 길을 가지 않으면서도 구원을 받는 것이예요.” (정대운 목사)

->그리스도께서 아담이 실패한 행위언약을 완성하심으로 우리의 구세주가 되었다는 사상, 즉 행위언약 - 능동순종 교리는 필연적인 이단사상이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로, 성경이 가르치는 십자가 신학을 파괴한다. 신약의 사도들과 교부들과 칼빈과 모든 성경의 사람들은 그리스도가 십자가의 피의 속죄로 우리를 구원했다고 한다. 그런데 이 악독하고 간교한 청교도 놈들의 행위언약은 그리스도를 율법준수자로 만들어 버렸다. 성경이 없는 율법주의 구원론을 만들어 냈다.

성경 어디에도 율법이 의와 영생을 준다는 가르침이 없다. 그러나 행위언약 – 능동순종 신학은 율법이 구원과 영생의 자격을 준다는 이단사상을 기정 사실로 한다. 아담이 율법준수를 못했으니 그리스도가 대신 완전하게 율법준수함으로 자신과 우리를 영생에 들어가게 했다고 한다. 영생의 자격이 율법에서 나온다는 이단사상이다. 그러면 그리스도의 피 묻은 십자가는 어디로 가야 하는가? 기독교 중심에서 벗어나 지옥에서만 일하도록 밀쳐졌다. 단지 우리를 지옥의 형벌에서는 구하였고, 우리를 천국에 가게 한 것은 그리스도의 율법준수라고 한다. 이것이 청교도들과 웨신서가 가르치는 행위언약 개념의 열매이다.

둘째로, 기독교의 핵심인 하나님의 성육신을 파괴한다. 기독교의 성육신은 하나님 자신이 자기의 의로움으로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일어난 일이다. 성육신이 기독교 신앙의 핵심이다. 하나님의 성육신이 무너지면 기독교가 무너진다. 하나님이 무죄하고 의로운 사람으로, 모든 율법의 지시와 요구가 이루어진 완전한 사람으로 오시어 우리의 죗값으로 자기를 희생하심으로 우리를 구원했다. 이것이 기독교의 성육신 신앙이다. 

그런데 청교들과 웨신서의 행위언약 사상에 의하면, 하나님은 율법준수자를 세우기 위해 성육신하셨다. 하나님이 사람이 되어 율법 조항들을 모두 만족시켜서 영생이 자격을 취하였다. 그것으로 자기를 살리고 또한 우리를 살렸다. 우리들이 못하는 것을 그리스도가 대신 했다는 점에서 지독한 율법주의이다. 유대교 신앙과 로마교회 신학에 맞는 이론이다.

그래도 이신칭의를 믿는다는 점에서는 우려할 일이 아닌 것 같으나, 이신칭의가 우리 대신 완전한 율법준수에 성공한 그리스도를 기반으로 이루어졌다고 하니 ‘율법주의 이신칭의’이다. 그렇다면 종교개혁을 할 필요가 없었다. 구원이 누군가의 율법준수에서 나온다면, 율법주의 행위구원론에서 벗어나기 위해 그렇게 피를 흘리면서 종교개혁해야 할 이유가 없었다.

청교도들과 웨신서의 행위언약을 진리로 믿으면 반드시 십지가를 대적하는 이단의 길로 나아간다. 이와 같이 행위언약을 강조하는 정대운 목사 자신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구원에 대히 그가 뭐라고 가르치는지 보자.

(이후의 내용은 “정대운 목사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무너뜨리고 율법을 숭배합니다”라는 제목의 기사의 일부입니다.)
 


<51:45~54:20 분>
“그리스도의 의를 전가받아야 하는데, 그리스도의 의에는 적극적인 의와 소극적인 의가 있어요. 소극적인 의는, 이건 정확하게 말하면 의미상 두 개를 나누는 것입니다. 소득적인 의는 예수님의 소극적으로 하나님의 벌을 받아들이는 것은 소극적인 의라고 그래요. 소극적인 의는 여러분들이 십자가에서 찢겨서 죽어야 하는데, 그 죄를 우리 주님이 감당하신 거예요. 우리 주님이 적극적으로 찾아가면서 십자가에 메달린 것이 아니라, 로마 병정이 붙들었고, 유대인들이 고소했고 ... 이것이 주님이 적극적으로 찾아가서 당하신 것이 아니므로 이것을 그리스도의 소극적인 의라고 그럽니다. 이 소극적인 의는 여러분들이 예수님처럼 죽을 수 밖에 없는 자들이고 여러분들이 지옥에 갈 수밖에 없는 자들인데, 그것을 우리 주님이 십자가에서 감당하심으로 말미암아 그 의를 우리 주님이 획득하셨다! 그 의는 소극적인 의이다!(정대운 목사)

-> 매우 심각한 내용의 설교입니다. 성경 전체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려 스스로 죽으시기 위해 오셨음을 증거합니다. 십자가는 기독교의 전부입니다. 우리 영생의 자격은 오직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려 우리를 대신하여 죽으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정대운 목사는 ‘그리스도의 소극적인 의’로 폄하하고 그것으로는 우리가 완전한 구원을 얻지 못한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단적인 주장입니다. 청교도 신학에 빠지면 이런 설교를 하게되는 것은 청교도들이 괴상한 사변에 빠져서 성경을 왜곡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적극적인 의는 뭐냐? 우리 주님이 일평생을 살아가면서 적극적으로 율법을 지켜 나가시는 것을 적극적인 의라고 하는 거예요. 우리 주님께서는 소극적인 의와 적극적인 의, 두 개를 딱 가지고 있습니다. 이 두 개를 여러분들이 함께 받아야 합니다. 소극적인 의는 여러분들이 죄용서 받고 지옥에 가야 할 수밖에 없는 것을 대신 치러주신 것을 받은 거예요. 할레루야! 그래서 여러분들이 지옥에 가지 않아요. 문제는 뭐냐하면, 여러분들은 지옥에 가지 않아도 하나님 앞에서 의인으로 설 수가 없어요. 왜 우리는 율법을 지키지 않았지만, 단지 예수님께서 그것(십자가)을 대신 저주어서 지옥에 가지 않을 뿐이지, 우리가 하나님과 의의 관계를 가질 수가 없는 거예요.” (정대운 목사)

-> 정대운 목사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대적하는 망나니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달리심을 그리스도가 얻으신 '소극적인 의'라고 폄하하는데, 그것은 청교도들에게는 정통 신학입니다. 그리스도의 소극적 의, 즉 십자가로는 우리가 완전한 구원을 얻지 못하고 단지 지옥에 가지 않을 뿐이라고 설교하는 것은 청교도들의 신학에서는 정통입니다.

그러나 성경 앞에서는 이단사상입니다. 2천년 교회의 역사에서 이런 내용의 설교를 공개적으로 했던 이단은 거의 없었습니다. 정대운 목사는 그리스도가 율법을 완전하게 지키신 것이 적극적인 의인데, 그것으로 인해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의인으로 살아갈 수 있다고 했습니다. 심각한 내용입니다.

정대운 목사는 그리스도의 율법준수가 우리를 하나님 앞에서 의인되게 한다고 설교하였는데, 성경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는 악마적인 사상입니다. 성경 어디에서 그리스도의 율법준수가 우리를 하나님 앞에서 의인으로 살게 한다는 가르침을 찾을 수있을까요? 

하나님과 의의 관계를 가지려면, 우리 주님이 적극적으로 율법을 성취하심으로 말미암아 얻으신 의의 옷을 입혀 주어야 합니다. 우리 주님의 적극적인 의는 여러분들의 옷을 만들어 준 것이고, 할렐루야! 소극적인 의는 여러분들이 지옥에 가는 것을 막아주는 겁니다. 예를 들어볼께요. 탕자를 보겠습니다. 탕자의 마음 속에 어느 순간에 먹을 것이 더 이상 없으니까 아버지 집에 가면 먹을 것이 풍성하고 ... 이런 마음이 드는 거예요.” (정대운 목사)

->신약의 사도들은 오직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을 의지했고 자랑했고 선포했습니다. 성경 어디에 십자가는 단지 지옥에서 건져주는 소극적인 것이고, 그리스도의 율법준수가 우리를 천국의 의인으로 살게 만드는 적극적인 의라는 가르침을 볼 수 있을까요?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우리의 의의 옷이라는 가르침을 들었어도 그리스도의 율법준수가 우리의 의의 옷이 되었다는 이야기를 처음 듣습니다. 율법을 지키면 의로워진다는 사상도 성경에서 근거를 찾을 수 없는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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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이철 목사는 2004년부터 현재까지 미국 미시간 주 ‘앤아버 반석장로교회’의 담임목사이고 거짓 신학의 ‘견고한 진’(고후10:4)을 무너뜨리기 위해 시작된 신학신문 <바른믿음>의 대표이다.
총신대학(B.A 졸업), 총신대학 신학대학원(M.Div Eqiuv.졸업), 아세아연합신학대학 대학원(Th.M 졸업), Liberty Theological Seminary(S.T.M 졸업), Fuller Theological Seminary(Th.M 수학), Puritan Reformed Theological Seminary(Th.M 수학), Liberty Theological Seminary(D.Min 수학), 남아공신학대학원(South African Theological Seminary, Ph.D)에서 연구하였고, 현재 University of Pretoria(Ph.D)에서 연구하고 있다.
저서로는 「신사도 운동에 빠진 교회」, 「제3의 물결에 빠진 교회」, 「가짜 성령세례에 빠진 교회」, 「피터 와그너의 신사도운동 Story」, 「한 눈에 들어오는 청교도 개혁운동」, 「능동적 순종에 빠진 교회」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