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창모 목사의 <방언, 그 불편한 진실>(2회)

이창모 목사의 책 표지 사진

방옹자(거짓방언을 옹호하는 자)들은 방언기도가 초대 교회를 부흥시킨 원동력이었다고 믿는다.1) 따라서 이들은 방언이 예루살렘 초대 교회 안에 풍성하게 있었으며, 그 후에도 부흥하는 교회 안에서 끊임없이 나타났다고 주장한다.2) 이들은 방언기도가 있는 곳에서는 교회가 부흥하고, 방언기도를 반대하거나 없는 곳에서는 교회가 쇠퇴한다고 주장하면서, 더 나아가 방언을 반대하는 것은 성령을 훼방하는 것이라고 위협까지 하고 있다.3)

방옹자들의 이런 주장은 사실일까? 방언 현상이 기록된 있었던 사도행전의 본문들을 직접 살펴보면서 이들의 주장이 사실인지 살펴보자.

 

1. 사도행전 2:4-7절

보혜사 성령이 임하셨던 오순절 날 예루살렘에서 주의 제자들은 본토 유대인들에게는 아람어로, 천하각국으로부터 온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이들 중에는 아람어를 하지 못하는 자들이 다수 있었을 것이다)과 외국인들에게는 그들의 언어(방언)로 ‘하나님의 큰 일’을 전했다. 그러나 이들은 방언으로 기도하지는 않았다. 만일 이때 방언으로 기도했었다면 누가가 방언으로 기도했다고 명백하게 기록하지 않았을 리가 없을 것이다.

언제나 거짓방언을 홍보하고 미화하는 방옹자 김동수는 오순절 날 이후 제자들이 방언을 했지만 방언으로 다른 사람들과 대화를 나눴다는 기록이 사도행전에 없다는 점을 주목한다.4) 이런 이유로 그는 방언은 사람과 대화할 수 있는 언어가 아니라 사람이 알아들을 수 없는 하늘의 언어(방언기도)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실상 그는 방언이 하늘의 언어라는 자신의 주장을 정당화하려고, 오순절 날 예루살렘에서 주의 제자들이 각 지역의 방언으로 말한 것과 각 지역에서 온 자들이 그 방언을 알아듣고 신자가 되었던 역사적 사실을 외면하고 있다. 오순절 날 이후 제자들이 다른 사람들과 방언으로 대화한 적이 없었다는 것은 그들이 그 후에는 아람어를 모르는 외국인을 만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또 설령 제자들이 외국인을 만났다 할지라도 방언은 외국인과 대화하는 은사가 아니라 외국인에게 하나님의 ‘큰일’을 일방적으로 전하는 은사였기 때문에 방언으로 대화할 수는 없었다. 오늘날 우스운 방옹자들이 외국인이 없는 현장에서 우스꽝스러운 방언을 말하고 그것을 통역하는 듯이 행동하는 것은 성령의 역사로 인한 것이 아니라 거짓으로 성령의 역사를 흉내내는 것이다.

대표적인 방언옹호자 김동수 교수(평택대학교)

방언은 성령 세례의 증거도, 사도의 표지도, 하늘의 언어도, 하나님께 기도하는 은사도 아니다. 성경의 방언은 말이 통하지 않는 외국인에게도 복음을 전할 수 있도록 성령이 주시는 초자연적인 외국어 능력이다.<각주: 방언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원활한 소통을 위해 주어진 기도하는 은사가 아니라 인간과 인간 사이의 원활한 소통을 위해 주어진 말하는 은사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는 하나님이 전지전능하시므로 원활한 소통을 위해 어떤 특별한 수단이 필요 없다. 그러나 연약한 인간들 사이에는 때로 원활한 소통을 위해서 어떤 특별한 수단이 필요하다. 방언은 이런 연약한 인간들의 원활한 소통을 위해 성령이 인간에게 주신 은사다. 따라서 말이 통하지 않는 외국인이 없는 곳에서는 결단코 방언 현상은 없다. 물론 외국인이 있다고 해서 꼭 방언 현상이 있는 것은 아니다. 방언 현상은 성령의 주권적인 역사이기 때문에 외국인이 있어도 성령이 원하시지 않는다면 방언 현상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말이 통하지 않는 외국인이 있다는 것은 방언 현상이 일어날 수 있는 필요조건임에는 틀림없다.>

 

2. 사도행전 10:44-46절

베드로가 고넬료의 집에서 복음을 전했을 때, 말씀을 듣는 모든 사람에게 성령이 내려오셨고 그들은 방언을 말하며 하나님을 높였다. 고넬료의 집에 방언 현상이 있었던 것은 방언으로 말해야 하나님의 ‘큰일’을 알아들을 수 있는 외국인이 그곳에 있었기 때문이다.

사도행전 2장의 오순절 날을 AD 30년경으로 본다면 고넬료의 집에 있었던 방언 사건은 AD 41년 또는 44년쯤이었다. 오순절 날 예루살렘에서 방언이 있은 후 적어도 10년 이상 지난 후 가이사랴 지방의 고넬료의 집에서 방언 현상이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사도행전의 초대 교회 시대의 방언은 결코 오순절주의자의 주장처럼 빈번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손가락으로 꼽을 수 있을 정도로 드물었다. 아마도 이것은 초대 교회 당시에는 교통의 불편 등 자유롭게 여행할 수 없는 여러 가지 여건들 때문에 교회들마다 말이 통하지 않는 외국인을 접할 기회가 드물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때 만약 고넬료가 베드로와 다른 유대인 신자들이 듣도록 아람어 방언을 했다면, 고넬료에게 베드로와 유대인 신자들은 말이 통하지 않는 외국인이었기 때문이다. 중요한 사실은 여기에도 방언으로 기도해다는 내용은 일체 없다는 것이다.

 

3. 사도행전 19:6절

에베소에서 바울이 요한의 제자들에게 안수했을 때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셨고, 그때 그들은 방언도 하고 예언도 했다. 바울이 에베소를 방문한 시기를 AD 54년경으로 본다면, 에베소에 있었던 방언은 고넬료의 집 방언 사건을 기점으로 무려 20년쯤 후였다. 오순절 날 예루살렘에서의 방언 현상 이후 20여 년 동안 성경에 기록된 방언 현상은 오순절 날과 고린도 교회까지 포함해도 단 네 번 뿐이다. 사정이 이런데도 방옹자들은 초대 교회에는 방언이 아주 풍성했다고 주장한다.

이들이 성령을 받았을 때 방언을 한 것은 방언이 성령 세례의 증거였기 때문이 아니라, 그때 그곳에 방언으로 하나님의 ‘큰 일’을 들어야 하는 외국인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요한의 제자들이 방언뿐 아니라 예언도 한 것으로 보아 그곳에는 요한의 제자들과 말이 통하는 자들도 있었을 것이다. 여기에서도 방언으로 기도하였다는 내용은 보이지 않는다.

 

4. 사동행전 2:43-47절

오순절 날 이후 초대 교회의 일상적인 삶과 교회 공동체의 모임 가운데서도 방언으로 말하거나 찬송하거나 기도하는 일은 없었다. 만약 오순절 날 이후 방언 현상이 초대 교회의 부흥을 주도한 것이 사실이라면 예루살렘 초대 교회의 일상은 방언으로 넘쳐나야 한다. 그러나 누가가 성령 충만한 예루살렘 초대 교회의 일상적인 모습을 기록한 사도행전 2장 43-47절에는 눈을 씻고 보아도 방언은 없다. 왜 일까? 그것은 예루살렘에서는 말이 통하지 않는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해야 할 상황이 없었기 때문이다. 또한 예루살렘 초대 교회가 방언으로 기도하거나 찬미하지 않은 것은, 방언은 기도하거나 찬미하는 은사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5. 사도행전 3:1-10절

초대 교회 최초로 신유의 역사가 일어났던 성전 미문 사건에서도 베드로와 요한은 예수의 이름은 불렀지만, 방언으로 말하거나 기도하지는 않았다. 그것은 나면서 못 걷게 된 이가 일어나는 신유의 능력은 방언기도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나사렛 예수의 이름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6. 사도행전 4:1-4절

사도들이 투옥되는 유대교의 핍박이 있었을 때에도, 믿는 남자들의 수가 약 오천이 되었을 때에도 예루살렘 초대 교회는 방언으로 기도하지 않았다. 고난이 있는 위기의 상황이나 믿는 남자들이 오천이나 되는 부흥의 상황에서 초대 교회가 방언으로 기도하지 않았던 것은 방언은 외국인에게 말하는 은사이지 고난을 이기게 하거나 부흥을 가져 오는 기도의 은사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7. 사도행전 4:31절

예루살렘 초대 교회는 모인 곳이 진동할 정도로 무리가 다 성령으로 충만했을 때에도 방언으로 말하거나 기도하지 않았다. 성령 충만한 기도의 장소에서 방언 현상이 없었던 것은 그곳에 방언으로 하나님의 ‘큰 일’을 들어야 하는 외국인이 없었기 때문이다.

 

8. 사도행전 5:12-16절

사도들이 민간에 표적과 기사를 많이 행함으로 주께 나아오는 자가 많아지고 병든 사람들이 고침을 받고, 귀신에게 괴로움을 받는 자들이 나음을 얻는 현장에서도 방언 현상은 없었다. 왜냐하면 사도들이 활동했던 예루살렘 지경에서는 방언으로 말해야 하는 외국인이 없었으며, 병 고치는 능력이나 축귀의 능력이 방언기도에 있지 않기 때문이다.

 

8. 사도행전 6:4절

초대 교회 사도들의 일상적인 사역에서도 방언 현상은 없었다. 방옹자들의 주장대로 초대 교회에 방언이 성행했다면 사도들은 자신들의 사역 현장에서 그토록 대단한 방언을 왜 사용하지 않았을까? 그것은 사도들 주변에 방언을 들어야하는 외국인이 없었기 때문이다.

 

9. 사도행전 6장의 스데반의 순교기사

성령 충만했던 스데반(행6:5)은 얼굴이 천사 같았을 때에도(행6:15), 하늘이 열리며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았을 때에도(행7:56), 돌에 맞아 순교하는 순간에 주님께 기도할 때에도(행7:59-60) 방언으로 말하거나 기도하지 않았다. 만약 그때 스데반이 성령 충만하여 방언으로 말하거나 기도했다면, 방언기도의 능력 때문에 돌로 스데반을 치려했던 유대인들이 놀라서 도망가거나 회개하지 않았을까?

그러나 스데반은 방언으로 말하거나 기도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곳에는 방언으로 하나님의 큰 일을 들어야 하는 외국인이 없었기 때문이다. 또 스데반은 돌에 맞는 절박한 위기의 순간에도 방옹자들이 능력이 있다고 선전하는 방언기도를 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방언은 기도하는 은사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아마도 스데반은 방언의 은사를 받지 못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예루살렘 지역에 있었던 스데반에게는 외국인에게 복음을 전할 기회가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10. 사도행전 8:14-17절

사마리아 지역에 성령이 임하셨을 때에도 방언이나 방언기도 현상은 없었다. 그것은 사마리아 지역은 아람어로 의사소통이 되는 곳이었으며 또 아람어가 통하지 않는 외국인이 그곳에 없었기 때문이다. 만약 방옹자들의 주장대로 방언이 성령세례의 증거였다면, 그곳에 성령이 임하셨을 때 당연히 방언 현상이 있었을 것이며, 누가는 성령 세례의 증거로 나타난 방언 현상을 당연히 기록했을 것이다.5)

 

11. 사도행전 9:3-9절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을 때, 아나니아에게 안수를 받고 눈에 비늘 같은 것이 벗어졌을 때에도 방언이나 방언기도를 하지 않았다. 그러나 방옹자들은 고린도전서 14장 18절을 근거로, 이때 바울이 방언을 했을 것이라고 우긴다.

거짓 방언기도 옹호자 빌 해몬은 이 부분에 대해서 “바울은 눈에서 비늘이 벗겨짐과 동시에 성령의 선물을 받았다. 바울은 영의 언어를 받은 것에 너무나 감사했다”6)라고 성경에도 없는 소설을 썼다. 그 외에도 빌 해몬은 다음과 같이 전혀 성경적 근거없는 말들을 하면서 거짓 방언기도를 홍보하였다.7)

“바울의 풍성한 방언기도는 기적을 행하도록 권능을 주며, 신약 27권 책 중 14권을 기록할 수 있도록 영감을 준 지혜와 계시의 영을 활성화하는데 도움을 주었다.”

“방언을 말하는 것은 바울이 전했던 복음에서 상당히 중요한 부분이었다.”

“방언으로 말하는 성령의 선물은 신약 교회의 전통과 교리의 일부였다.”

“성경은 영의 언어인 새 방언으로 기도할 것을 간절히 권고하고 있다.”

“예수께서는 아버지가 약속하신 영의 언어를 성령의 선물로 보내주실 것을 몇 번이고 약속하셨다. 예수님께서는 이 선물을 보내 주시기 위해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 아버지께 올라가셔야만 했다”

대부분의 방옹자들도 빌 해몬처럼 자신들의 거짓 방언을 능력 있는 성령의 은사로 위장하기 위해 마치 성경에 있는 것처럼 성경에 없는 거짓말들을 밥 먹듯이 하고 있다. 설령, 당시 바울 주변에 복음을 들어야 할 외국인들이 있었다 할지라도, 바울이 방언으로 말했을 확률은 다른 사람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낮다. 왜냐하면 바울은 구사할 수 있는 언어의 종류가 상대적으로 많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바울이 알고 있는 언어로 말이 통하는 외국인들이 거기에 있었다면 바울은 방언이 아니라 자신이 알고 있는 외국어로 하나님의 큰 일을 전했을 것이다.

바울은 다른 사람들보다 방언을 더 많이 했다(고전14:18). 그러나 바울이 다른 사람들보다 방언을 더 많이 했다는 말은 다른 사람들보다 방언기도를 더 많이 했다는 의미가 아니라 다른 사람들보다 외국인들을 만나 방언으로 복음을 전할 기회가 더 많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생각해 보라! 당시 선교하러 여러 지역을 바쁘게 돌아다녔던 바울보다 외국인들을 더 많이 만난 자가 또 누가 있겠는가? 성령은 누구보다도 외국인들을 많이 만났던 바울에게 누구보다도 더 많이 방언으로 외국인들에게 하나님의 큰 일을 말하게 하셨음은 두말할 것도 없다. 그러므로 당시 바울만큼 방언을 많이 말한 사람이 없었다는 것은 사실이지만,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회심했을 때 방언을 했을 것이라는 상상은 옳지 않다. 만약 그때 바울이 방언을 했다면, 누가는 그 중요한 사실을 반드시 기록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12. 사도행전 9장 36-40절

베드로는 욥바에서 죽은 다비다를 살리기 위해 기도했을 때에도 방언으로 기도하지는 않았다. 죽은 자를 살려야 하는 긴박한 상황에서 성령 충만한 베드로가 큰 능력이 나타난다는 방언기도를 하지 않았다는 것은 좀 이상하지 않는가? 왜 일까? 그것은 방언은 외국인에게 말하는 은사이지 기도를 더 능력 있게 해 주는 은사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아마 베드로에게도 스데반처럼 방언의 은사는 없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그때까지 고넬료의 집을 제외하고는 말이 통하지 않는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13. 사도행전 12:12절

초대 교회 성도들이 마리아의 집에 모여 감옥에 수감된 베드로의 석방을 위해 기도했을 때에도 방언으로 기도하지는 않았다. 교회의 수장인 베드로가 체포당해 목숨이 경각에 달린 상황은 예루살렘 교회로서는 절체절명의 위기의 순간이었다. 그럼에도 이때 초대 교회 성도들이 방언으로 기도하지 않았다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하다. 방옹자들에 의하면 방언기도는 대단한 능력이 나타나는 기도인데 말이다. 혹시 초대 교회 성도들은 오늘날의 방옹자들처럼 방언기도의 놀라운 능력을 잘 몰랐기 때문일까? 아니다. 이들이 위기의 순간에 방언으로 기도하지 않았던 것은 방언은 기도하는 은사가 아니라 외국인에게 말하는 은사였기 때문이다. 이들은 방언으로 기도하지 않았어도 하나님의 놀라운 기도 응답의 역사가 일어났다!

 

14. 사도행전 13:1-3절

안디옥 교회에서 교회 역사상 최초로 선교사를 파송할 때에 그들은 금식하고 기도했지만 방언으로 기도하지는 않았다. 안디옥 교회가 선교사를 파송하는 일은 다른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매우 중요한 일이었다. 그러나 이런 중요한 일을 앞두고 이들은 방언으로는 기도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방언은 기도하는 은사가 아니라 외국인에게 말하는 은사였기 때문이다.

 

15. 사도행전 14:8-10절

누구보다도 방언을 많이 말했던 바울도(고전14:18) 루스드라에서 발을 쓰지 못하는 한 사람을 일으킬 때, 방언으로 기도하지 않았다. 바울은 불치라고 할 수 있는, 나면서부터 걷지 못하게 된 자를 앞에 두고 큰 능력이 나타난다는 방언기도를 왜 하지 않았을까? 그것은 방언은 기도하는 은사가 아니라 외국인에게 말하는 은사였기 때문이다.

 

16. 사도행전 16장 14-15절

루디아 집의 회심 사건에서도 방언 현상은 없었다. 성경 본문을 보면 이때 루디아의 집에 성령이 임하셨음이 분명하다. 그러나 누가는 이 사건을 기록하면서 방언 현상은 기록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때 그곳에서는 방언 기도는 물론 방언으로 말하는 현상도 없었기 때문이다.

 

17. 사도행전 16:18절

바울은 빌립보에서 소녀에게 들린 귀신을 쫓아낼 때 방언으로 기도하거나 말하지 않았다. 그는 단지 예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냈을 뿐이다. 그런데 방옹자들은 이렇게 말한다.8)

“귀신을 쫓기 위해 한국말로 기도하다 보면 귀신이 잘 나가지 않아 한계를 느낄 때가 있다. 이때 방언으로 기도하면 영적 능력이 배가 된다. 방언은 귀신들을 대적하는 능력을 가진 영의 기도로, 귀신은 방언기도를 매우 두려워한다.”

“한번은 귀신들린 자를 위해 기도하고 있는데 별 진전이 없자 방언으로 기도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갑자기 귀신이 몸부림치면서 하는 말이 ‘방언으로 가도하지 마’였다”

아! 성경 어디에도 방언기도로 귀신을 쫓아낸 사례는 없는데, 요즈음 귀신은 옛날과 달리 예수의 이름보다 방언기도를 더 겁내나 보다. 그리고 귀신이 하는 말을 이처럼 착실하게 믿는 믿음은 어디서 온 믿음일까? 바울은 방언을 많이 말하는 자였음에도 불구하고 귀신들린 소녀를 위해서 방언으로 기도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축귀(逐鬼)의 능력이 방언기도에 있지 않고 예수의 이름에 있었기 때문이다.

 

18. 사도행전 16:25절

바울과 실라는 빌립보 감옥에 갇혀 있는 위기의 상황에서 기도하고 찬미는 했지만, 방언으로 기도하거나 찬미하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자신들의 언어로 죄수들과 의사소통이 되었으므로 방언으로 말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바울과 실라는 통상적인 언어로 기도하고 찬송했기 때문에 죄수들이 그 소리를 알아들을 수 있었다. 만약 바울과 실라가 방언으로 기도하고 찬미했더라면 죄수들은 바울과 실라를 미쳤다고 했을 것이다(고전14:23 참고). 물론 이 상황에서 바울이 아니라 헬라어를 모르는 베드로였다면, 성령이 베드로에게 헬라어로 방언을 말하게 하셔서 감옥에 있는 죄수들에게 복음을 전하도록 했을지도 모르겠다.

 

19. 고린도전서 이후의 성경들에는 방언 언급도 없어

바울은 고린도전서를 쓴 후, 적어도 10여 편의 서신을 더 기록했으나 고린도전서를 제외한 어디에서도 방언에 대한 기록은 찾아볼 수 없다(바울 서신이 아닌 히브리서, 야고보서, 요한 1,2,3서, 요한계시록 등에서도 방언에 대한 기록은 없다). 특히 장로(감독)와 집사의 자격을 언급한 디모데후서 3장 1-13절과 디도서 1장 5-9절에서 직분자의 자격 요건에 방언이 없다는 것은 눈여겨 보아야할 대목이다.9) 방옹자들의 주장대로 방언이 하나님께 비밀을 말하며 개인의 덕을 세우는 은사이며 모든 은사의 통로여서 영적으로 강한 사람을 만드는 은사가 사실이라면, 바울은 틀림없이 장로(감독)와 집사의 자격 요건에 방언을 언급했을 것이며, 다른 교회에 보낸 편지에서도 당연히 방언을 언급하며 강조했을 것이다.

특히 바울이 디모데에게 쓴 목회서신들에 방언 이야기가 전혀 없는 것은 이상하기 그지없는 일이다. 유약한 디모데야말로 방언의 은사가 절대적으로 필요한 목회자였을 텐데, 바울은 디모데에게 보낸 두 편의 서신서 어디에서도 방언을 언급하지 않았다. 만약 방옹자의 말이 사실이라면 바울이 디모데에게 방언을 말하지 않은 것은 돌이킬 수 없는 실수가 될 것이다. 그러나 바울이 디모데에게 방언에 대해 아무 언급도 하지 않은 것은, 방언이 연약한 사람을 능력자로 만들어 주는 도깨비 방망이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특히 디모데는 이방인이 아닌 아람어가 통하는 유대인들을 대상으로 목회했기 때문에 그에게 성령의 은사로서의 방언도 필요 없었을 것이다.

 

20. 오순절 방언을 경험한 베드로의 성경에도 방언에 대한 언급이 없어

다혈질의 베드로는 오순절 날에 방언 현상을 경험했음에도 불구하고, 어디에서도 방언에 대해 말한 적이 없으며 자신의 서신서 두 편에서도 방언을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방옹자들의 주장대로 방언이 대단한 능력을 유발시키는 은사였다면, 다혈질의 베드로는 틀림없이 열렬하게 방언기도를 했을 것이며, 다른 사람들에게도 적극적으로 방언을 권장했을 것이다. 그러나 사도행전에서나 그의 서신서 어디에도 방언에 대한 언급은커녕 암시조차 없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방언에 대한 베드로의 침묵은, 방옹자들이 말하는 그런 종류의 방언은 베드로에게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맺는 말

지금까지 살펴본 대로 사도행전에서의 방언 현상은 유대 지경에서 두 차례(오순절 날 때의 예루살렘과 가이사랴의 고넬료의 집), 그리고 유대 지경 밖의 에베소 지방에서 한 차례뿐이었다. 따라서 고린도 교회의 경우까지 합친다 할지라도 단 네 차례의 방언 기록이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방언 현상은 초대 교회에 빈번하게 있었던 현상이 아니며, 부흥의 원동력은 더 더욱 아니었다. 또 방언은 사도의 표지나 성령세례의 증거나 성령 충만의 증거도 아니었으며 기도를 능력 있게 해 주는 은사도 아니었다.

사도행전에 나오는 방언 기록들을 다시 한 번 자세히 살펴보라. 초대 교회에서는 방언으로 기도한 적이 없음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행2:4), “…제자들이 자기의 방언으로 말하는 것을 듣고…”(행2:6), “…우리의 각 언어로 하나님의 큰 일 말함을 듣는도다…”(행2:11), “이는 방언을 말하며 하나님 높임을 들음이러라”(행10:46),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시므로 방언도 (말)하고 예언도 하니”(행19:6). 막16:17에도 “새 방언을 말하며…”라고 기록되었다. 물론 막16:9-20은 헬라어 원문에는 없는 것으로 여겨지나 그렇다 할지라도 이 본문은 당시 초대 교회의 신앙을 반영하고 있는 것만은 틀림없다. 그런데 여기에 나오는 새 방언도 역시 사람에게 말하는 은사였다.

단지 방언 현상이 있었던 몇몇 곳에는 성령이 방언으로 하나님의 큰 일 들려주시기를 원하셨던 외국인들이 있었을 뿐이다. 따라서 사도행전과 서신서들을 통틀어 단 네 차례의 기록밖에 없는 방언 현상을 가지고, 방옹자들이 ‘사도행전의 초대 교회에는 방언기도가 풍성했다’라고 말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 각주 ---

1)김우현, <하늘의 언어>(서울: 규장, 2007), pp.110, 189; 김신호, <성령 세례 받으면 방언하나요?>(서울: 서로사랑, 2011), p.34.
2)김동찬, <위로와 회복의 방언>(서울: 돋을새김, 2007), p.15.
3)앞의 책, p.52.
4)김동수, <방언은 고귀한 하늘의 언어>(서울: 이레서원, 2008), p.191.
5)프레드릭 데일 브룬너, <성령 신학>, 김명용 옮김(서울: 도서출판 나눔사, 1989), p.195.
6)빌 해몬, 방언을 해야 하는 70가지 이유, CI KOREA 옮김, CI KOREA, 2011), p.44.
7)앞의 책, pp.41-49.
8)김신호, <성령 세례 받으면 방언하나요?>(서울: 서로사랑, 2001), pp.123-124.
9)안토니 훼케마, <방언 연구>, 정정숙 옮김(서울: 신망애출판사, 1972), p.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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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창모 목사는 죽음에 이르는 병에 걸린 한국 교회를 신물 나게 체험하며 갈등하다 하나님을 향해 살아 있는 교회를 꿈꾸며 1999년 김천에서 ‘제자들 경배와 찬양교회’를 개척하였다. 이창모 목사는 한국교회를 죽음에 이르게 한 병이 단지 성공주의, 황금만능주의, 도덕적 윤리적 타락 등이 아니고 이미 한국교회에 만연된 잘못된 신학에 있음을 확신하고서 무엇이 바른믿음인지 신학적으로 깊이 고민하는 목사이다. 이창모 목사는 자신이 중2때 수련회에서 방언을 받았고, 대부분의 목사들이 그것을 ‘영의 기도의 언어’라고 가르치므로 의심없이 수 십년 동안 옹알거리는 방언현상으로 기도(?)하였던 대표적인 방언기도자였다. 김우현, 김동수 등이 저술한 거짓 방언을 미화하는 한심한 서적들을 접한 후 방언에 관한 깊은 신학적인 성찰을 시작하게 되었고, 결국 오늘 날 방언이라고 알려진 소리현상과 성경의 참된 방언은 무관하다는 사실을 확신하게되었다. 이전의 자신처럼 방언으로 기도한다고 착각하고 있는 다른 목회자들과 신자들을 진정한 복음으로 돌이키기 위해 <방언, 그 불편한 진실>(밴드오부퓨리탄,2014)을 출간하였다.